|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대략 난감하다면 난감한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처럼 뚜렷한 레퍼토리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러티브의 흐름이 매끄럽거나 메타포적인 요소가 상존하고 있지 않는 정말 유니크한 작품이라고 해야 하겠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라는 무성영화를 보듯이 등장인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그 상황에 맞게 열정적인 연사의 나레이션을 듣는듯한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세계1차대전의 패전과 대공황 직전의 독일사회의 분위기를 풍자한 작품은 시대적 배경의 영향탓인지 작품 전체적으로 흐르는 풀룻 자체가 암울하다. 주인공인 전과자 프란츠 비버코프와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특색은 색깔로 표현하자면 짙은 회색빛 그 자체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각 개성들의 뚜렷한 색깔이 비쳐지는듯 하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색깔로 귀결되는 무성영화 같은 색깔들이다.
마치 미술의 자연주의나 인상주의 작품에 익숙해진 시각을 가지고 있다가 초현실주의 작품을 대했을때의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작가는 소설전반에 걸쳐 이러한 표현주의적 요소를 군데 군데 아니 거의 모든 페이지에 걸쳐 담아내고 있다. 성경의 차용에서부터 당시 유행했던 유행가의 가사, 군가, 그리고 신문지상의 각종 광고와 기사들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장치들이 마치 무성영화에서 연사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듯이 작가는 독자들의 시선과 감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시니컬하면서도 독특한 필치를 선보이고 있는 작품이라 해야 겠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살았던 1920년대 독일의 실상과 그리고 패전뒤의 독일인들의 전반적인 의식구조등이 한데 녹아드는 작품으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선이해가 없이 작품을 읽어나가면 상당한 곤역을 치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연상시킬정도의 다양한 목록들과 이러한 목록에 대한 지루할 정도의 설명 그리고 이들 설명속에 담겨진 작가의 의도는 고스란히 등장인물 각각의 개성을 반영하면서도 왠지 석연치 않는 잔상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더 읽어온 페이지를 거슬러 가게 하는 번거로움도 선사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독서 행위 자체에서 이 작품의 진가가 발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모더니즘 계열의 실험적인 뉘양스를 풍기지만 인간내면을 성찰한 뛰어난 직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해야 겠다. 주인공의 무엇보다 범죄자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세계1차대전의 가해자로서의 한 지식인의 고뇌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나 그야말로 섬같은 도시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일생이 마치 다가올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오버랩 하는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
|
2010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올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본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건 뭐 제대로 해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책과 관련된 목표에 대해서는 특히 더하다. 2010년에는 소위 말하는 고전부터 시작해 세계 문학 작품들 좀 제대로 읽자는 소소한 목표를 세웠다. 그 목표는 결코 소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결과가 소소했고, 내가 소소한 것이었다. 다양한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는 단순히 재미만을 찾는 독서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2010년이지만, 다시 ‘내년에 재도전!!’이라는 생각보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 본다.
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 P14
이제 우리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테겔 감옥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보통이라면 새롭게 자유를 부여받는 그 순간을 즐겨야 함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두려움부터 느낀다. 그 순간을 형벌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의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
|
책 중에는 단숨에 읽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마라톤 처럼 숨고르기의 시간을 별도로 필요로 하는 책들이 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선자도 후자도 아니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머리를 쥐어뜯어 내듯 내 자신을 괴롭혔는지 모른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자면 난 독일과 아일랜드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두개국 전부 워킹홀리데이 협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만 서른이내에 2개국을 전부 다녀올 수 있을지 불필요한 고민으로 밤을 샐 정도로 어리석은 짝사랑을 하고 있다. 때문에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비견될 만한 작품이라고 할 때 반가움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솔직히 율리시스는 영문학 수업을 받으면서 처음 접하게 된 이후 아직도 제대로 소화시켜가며 읽어낸 적이 없는 '무섭고 괴롭고 힘든'책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읽는 내내 머릿속 한켠에는 율리시스가 떠나지 않았다. 방대한 내용이나 난해하다는 일률적인 평이 아니라 지나치게 똑같았다. 노래부터 성경등의 자잘하게 본문 수준의 각주가 달리는 것도 그러했고 의식의 흐름을 쫓아 글이 이어가는 방식이 그랬다. 너무나 잘 아는 상대를 만났기에 이번만큼은 단 숨에 읽어내겠다는 비장함으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으로의 진입을 결정, 나의 리뷰는 프란츠 비버코프를 따라 흘러갔다.
프란츠 비버코프. 그는 4년간 죄수로 살았다. 이미 내용은 알려졌듯 프란츠가 다시금 힘을 얻어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 또다시 절망적인 세상에 남겨진다는 내용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심리상태다. 처음 베를린으로 나왔을 때 그의 심리는 암흑이었다.
1권 p.54 이제 나는 온종일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안 할 거다. 내 인생은 끝난 거니까. 끝이다. 끝
물론 랍비를 통해 찬노비치의 무용담과 비극적 결말을 전해 들어 일어설 용기는 얻었지만 여전히 그는 '여름양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자를 무작정 따라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취하지 못한 체 거리에 남겨진 상태였다. 이다의 언니, 안나를 만나면서 그의 여름양복이 푸른색 가을 양복으로 변하면서 그는 베를린에 정착하게 된다. 베를린 입성, 그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동시에 독자인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술술 읽히진 않지만 느릿한 호흡으로 프란츠의 이야기와 주변인들의 생각을 쫓아가는 데 들이는 노고가 덜해짐을 느낀다.
2권 p. 45
상승세를 타고 달라져 가는 프란츠는 여름양복에서 푸른색 가을양복에 이어 이젠 바비 재킷을 입고 에바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으로 달라진다. 그는 달라졌다. 천천히 이어져 오던 나의 호흡도 함께 상승세를 타지만 옷이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머리가 달라지는 '달라짐'의 말끝이 쓰고 텁텁해져 옴을 감지한다. 미체의 죽음은 살인을 한 행위가 누구였는지가 중요하지는 않다. 때문에 라인홀트가 밉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이 커지자 프란츠 바짝 붙어 있던 나의 마음도 한발자욱 떨어져 다시금 베를린 광장에 처음 진입했던 때의 프란츠를 보게 된다. 그는 이전과는 달랐다. 처음 테겔 감옥에서 출소했을 때는 그에게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저자는 그의 삶에 대해 더는 할말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할말이 남아있다. 깨어있으라고, 그리고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여타의 소설들과는 방식도 다르거니와 각주를 되짚어 가며 읽기에 몰입도가 다소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한번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은 결코 아닌것이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단 한번의 독서로 적은 리뷰가 옳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말에 적극 동감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솔직히 얼떨떨한 상태다. 프란츠란 사람이 내게 왔다가 그렇듯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1920년대에 베를린을 '역사'로만 아는 나는 그의 심리상태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상황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란거였다. 되블린이 말했던 모든것에 '때가 있다'라는 말처럼 지금은 아직 프란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그처럼 제대로 절망해 본적이, 엎어져 누워있어본 적이 없는 거다. 하지만 분명 나도 광장으로 걸어나가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거라 믿는다. 그때 이 책을 꼭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
|
아직도 고전을 읽기 전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부터 생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무언가 마음속 깊이 성숙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단어와 표현들, 그리고 그 시대를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어 읽는 동안은 그 색다름에 푹 빠지기도 한다.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의 삶을 읽어나가는 동안 시점이 바뀌면 낯설기도 했고, 다시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두질 않고 매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순수한 그 마음과 그 시대적 배경들이 다양하게 담겨 있어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베를린에서 작가가 이 책을 쓴 시점으로 돌아가 그곳을 둘러보고 그 시절에 다양한 사건들을 접해본 기분이 든다.
처음엔 프란츠를 따라 이야기가 전개 되고 중간쯤이면 누구의 시점인지 흐릿해지다 1권 마지막에 닿을수록 긴장감과 재미가 더해진다. 그렇다고 그 시대를 묘사한 부분들이 너무 많고 글이 화려해서 읽는데 지장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하지 않은 공간과 시간적 묘사가 부드럽게 이어지고 목소리와 독백이 어우러져 프란츠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 바로 그 시대의 노동자들의 삶이 어땠는지, 정말 순수한 사내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데도 매번 당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그 인식 때문에 일자리를 얻는 것도 힘들고 다시 시작하는 것 역시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부분이 좀 마음이 아팠다.
뒷부분에 번역자의 해설이 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량과 설명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나 우리나라 작품들은 행동이나 감정들을 자세히 서술해주는 편인데 서양 소설에서는 서술의 생략이 흔하다고 한다. 텍스트가 침묵해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아마도 읽어나가면서 느꼈던 아이러니 했던 부분에 대한 답일 것이다. 알프레토 되블린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이 책으로 그를 기억하라고 한다면 예리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작가라고 생각한다. 텍스트 자체의 섬세함과 그것을 리듬을 타듯 부드럽게 이어가면서 독자들에게 달콤한 글을 선물한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왠지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그의 매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다보면 읽기 전 앞부분에 간략한 글이 있는데 이 글들이 정말 좋다. 내용을 적당히 암시해주고 압축해준다. 거기에 제목들 역시 예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단락별로 제목이 이리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그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를 비유하는 단어를 더 많이 표현해 내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가 아마도 이 책을 대변해 주고 있지 않을까? “언어의 정신이 이런 식으로 독자를 뼛속까지 흠뻑 적신 적은 없었다.”
제 3 권 착실하고 선량한 프란츠 비비코프는, 여기서 첫 한 방을 얻어맞는다. 그는 기만당하고 그 한 방이 오래간다. 비버코프는 착실하게 살겠노라 맹세했거니와, 여러분은 그가 여러 주 동안 착실하게 사는 것을 이미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은총의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게 오래 지속되기엔 너무 좋은 일이라 삶이 그만 간교하게도 그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렸다. 프란츠 비버코프는 이런 일을 특별히 세련된 것이라 여기지 않았고, 그래서 비열하고 파렴치하고 온갖 선량한 의도와 모순되는 이런 삶을 한참 동안 싫어했다. 어째서 삶은 그토록 못된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알기까지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기에. -p169 |
|
원제 Berlin Alexanderplatz | 세계문학의 숲 1
시공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서 선보인
난해한... 이런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다.
사실 저자의 영화같은 스토리 전개방식이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는
지나가는 거리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움직임, 벽보 등에 나오는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문화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상태가
하지만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 중심의 삶에서 바라보면 그리 어렵지는
뤼더스에서 받은 인간적인 배신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왠지 나의 삶과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고 했던가..
라인홀트 때문에 발생한 외팔이가 된 사연이나 매춘부 미체가 살해되는 등
삶의 진행이 도축장의 소 돼지처럼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은 비버코프. 책을 읽으면서 연민을 느끼게 되지만, 왠지 나자신도 우울에 감염되어버린다
전지적 작가시점, 1인칭, 3인칭 등 작가는 여러형태로 그의 삶과 독일의 상황을
세계문학의 숲에서 헤어나온 지금은 또 숲으로 가라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프란츠 비버코프가 살고자 했던 <착한 삶>이란... 어떤것일까???
|
|
어린이문학이나 도서만 읽다보면, 그 책들이 얼마나 '친절한 책'인가하는 것을 잊게 된다. 나는 이 두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나 자신을 먼저 발견했다. 고전이라 칭할만한 책들에 대해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반면, 요즘은 앞 몇 장만 읽어보고 흠칫 놀라 멈추곤 한다. 이 책들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지 제법 되었는데, 이제서야 겨우 읽기를 마쳤다. 그저 나는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1929년에 나온 이 책은 20년대의 독일, 베를린의 모습을 담고 있다. 노래, 시, 광고(전단지), 신문 등 그 시대를 드러내는 다양한 자료들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어서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20년대의 독일, 베를린의 모습을 절로 상상하게 만든다. 나는 독일도, 베를린도, 더군다나 20년대의 그 도시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것은 8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란츠는 감옥에서 4년간을 복역한 후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프란츠에게 지난 4년은 정지한 듯 변함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세상은 많이 변해있다. 정지된 시간을 살아온 프란츠에게 변화된 베를린은 낯설기만하다.
그래도, 프란츠는 착실하게 살고자 마음을 먹는다. 이 역시 그에게 정지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다짐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비슷해진다. 그래서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대세'에 따름으로써 혼자가 아닌 군중 속에 포함되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츠는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살기로, 착실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터이다. 과연 세상은 그러한 프란츠의 바램대로 살게 그냥 놔둘까?
이 책의 소제목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제1권에서 프란츠는 시내로 들어와서 이렇게 생각한다. 프란츠는 이제 돈이야 있건 없건 베를린에서 착실하게 살기로 온 세상과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그러나 제2권에서 프란츠 비버코프는 탐색 중, 돈을 벌어야 한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한다. 가장 먼저 프란츠에게 닥쳐온 위기는 돈이다. 그는 돈이야 있건 없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베를린은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제4권으로 넘어가면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가 사람이 짐승보다 더 나을 게 없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니 프란츠의 삶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80년이나 더 된 프란츠의 삶이 왜 자꾸 지금 우리의 삶과 겹쳐지는걸까? 세상이 아무리 넓고 알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 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착실하게 삶을 꾸려간다면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듯한 지금의 한국의 모습 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는 늘 당하고만 사는 것도 프란츠 비버코프와 닮아있다. 내 의지는 사라지고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다닌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정신병원이다. 정지된 시간(감옥 안의 똑같은 일상) 속에서 4년을 살다 온 프란츠가 갈 곳은 결국 그곳뿐이었다. 그저 착실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그였는데 말이다.
이 책의 해설에서 말하는 어려운 이야기들은 그냥 흘려버리기로 했다. |
|
알프레트 되블린 님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입니다..
시공사에서 선보인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그 첫번째 작품입니다..
시공사에서 출간되는 장르소설을 좋아라하는지라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계문학...언제나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읽기 시작하면 재미면이나 다소 무거운 주제면이나..
개인적인 취향상 어느정도는 각오(?!)를 하면서 읽곤합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작품은 제가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익숙한 제목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02년 노벨연구소 선정 "54개국 작가가 뽑은 최고의 세계문학 100선"이라니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는 생가깅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문학은 일본이나 영미권 작품에 비해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무슨 내용일지 상당히 궁금했던 작품입니다..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4년 만에 베를린으로 돌아온 프란츠 비버코프는 옛 친구의 동업 제안을 거절했다가 차에서 떨어져 한쪽 팔을 잃는다. 비정한 대도시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던 그는 매춘부 미체를 만나 그녀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게 된다. 미체의 사랑에 힘을 얻어 바르게 살려고 마음먹은 것도 잠시, 프란츠는 또 다시 도시의 검은 그림자에 휩쓸리고 마는데…. - 네이버 책에서
역시나 각오했던대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쉽게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러한 점이 다소 이야기의 진행이 깔끔하게 진행되는 점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의 독일 시대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이런 문학작품을 평소에 잘 읽지 않았다면 분명히 쉽지 않는 독서가 될테지만..
장르소설을 위주로 읽는 저에게 있어서 그래도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가 얘기하고자 하는 정말 평범한 진리입니다..
자신의 자부심과 다른 사람의 형편을 살필 줄 아는 배려와 눈길을 가져라~!! 항상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문제네요..
아직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몇 번 더 읽어 봐야겠습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시작으로 다시금 세계고전문학에 빠져보도록 해야될거 같습니다.. |
|
세상의 황폐함, 혼란과 불안에 유동하는 인간들, 전환기의 이념적 갈등이란 배경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인물을 통해 당대의 일상성에 대한 비루함을 시시콜콜 조망하는 작품이다. 베를린 중심부와 동부에서 그렇고 그런 인물들의 흔적을 뒤쫓고, 공적, 사적 사건들이 무질서하게 망라되어 탐색된다. 자기이익과 물질주의, 산업화와 상업화로 갈수록 비대해지고 혼탁해지는 도시의 혼돈과 메마름, 그리고 전후(戰後) 사회주의의 실패와 나치 파시즘의 대두가 교차하는 시대의 클로즈업은 보다 거시적인 역사의 당위성을 생각게도 한다.
이러한 시대의 거칠고 조악한 조명에 못지않게 이 작품을 흥미롭게 대하게 되는 것은 내면, 즉 인물의 심적인 흐름을 통해 피폐한 세상의 단면들과 그로인해 더욱 경외감을 갖게 하는 인간성의 명징한 은근한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연인 ‘이다’를 살해하고 4년의 수감생활 끝에 대도시 베를린의 사람과 건물 숲에 묻히는 보잘것없는 ‘비버코프 프란츠’ 란 인물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직관적 공감을 상실하고 있지 않다는데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작품 초반의 출옥 후 낯설어진 도시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당황하는 인물,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에 연민을 보이는 유대인의 호의와 삶의 의지를 일깨우는 일화는 사실 잃어버려 알지 못하는 오늘의 감성 탓으로 그 인간적 관심과 동정이 조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차 프란츠란 인물에 내 자신의 대입이 자연스러워지고,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시대를 건너뛰는 보편적 공감으로 몰입하게 된다.
시민에게 의식주의 안정적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사회주의, 이것은 이념의 이론적이고 진실성과는 무관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강요도, 지지도 취약하게 한다. 교할하고도 민활하게 이러한 인식의 공백을 침투하는 것은 그럴듯한 물질적 자기만족의 체험이고, 이는 나치의 파시즘이 당시 독일인들에게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나치당 기관지를 가판(街販)하면서 살아가는 프란츠에게는 사회주의자들의 공허한 구호보다 이것이 실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 이념정당과 지배권력 자체에는 어떤 믿음도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린 전쟁터(1차 대전)에서 피를 흘렸어요. 사람들은 우리더러 기다리라고 하지요. 무엇이든 지들 하고 싶은 대로요.”
한편, 소, 돼지 등 가축들의 도축장면의 여과 없는 사실적 묘사에서부터, 상인조합과 부패한 지방권력의 힘겨루기, 당대 여성들에 대한 성적착취, 사기와 도둑질이 만연하는 물질에 대한 비루하고 집요한 집착들, 신발 끈, 신문, 과일판매 등 도시 서민들의 생업수단들, 광고문구와 신문기사에 이르는 망라된 도시의 일상과 면모들이 그대로 열거되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나타내는 표현주의 기법은 당대를 상징하는 기계화, 산업화, 도시화, 이기적 물질주의화, 생명, 타자에 대한 무관심등의 폐해에 대한 말없는 저항을 보여준다. 이미 타락한 사회, - “로마도, 바빌론도, 니니베도 이렇게 망가졌고, ~ 中略 ~ 이들 도시들이 그 목적을 다했다는 걸 ~ 中略 ~ 이젠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 ~ 中略 ~ 새것을 사야지, 그래야 세계가 살지.” - 구태여 어떠한 자기주장 없이도 붕괴되는 정신과 사회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뚜렷한 주제를 포획하거나 병행하면서 흐르는 프란츠란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것은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이다. 활력도 없고 탈탈 말라버린 두뇌가 되어버렸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로틱한 흥분을 제어하는 의학적 유비를 대입한 원시적 두려움의 묘사라든가, 떠나지 않는 죄의식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악몽, 불안한 잠, 통증” 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은유, 추악하게 오염된 현실을 대치하는 구약의 절묘한 배치는 독서의 풍미를 더해준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프란츠의 치졸한 쾌락의 여지조차 인물의 됨됨이를 강화 한다. 죽인 연인의 언니를 찾아가 범하고, 자기의 생존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이고 본능적이기만 한 인간이지만, 사기와 도둑질 같은 물질적 이기심에 대한 도덕적 혐오를 보이는 모순된 인간상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보게 된다. 비록 불규칙하고 작은 수입이지만 성실한 대가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는 인물로서, 또한 여성을 단지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인간에 대한 교화를 뿌듯해하고, 자신을 기만하여 범죄에 개입케 한 인물들과 집단에 대한 반감까지 악의 유혹에 저항하지만 죽음으로 내모는 극단적 폭력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파괴하려한 인물들에 대한 복수를 관용으로 승화하여 자기 존재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즉 평화로운 삶의 희구를 하지만 자기의 범죄행동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은폐와 두려움의 해소를 위해 악을 멈추지 못한다. 아마 악의 관성(慣性)때문일 것인데, 이처럼 인간사회를 표현주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망라적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해주는 것은 이 소설의 특성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그리 친절한 작품은 아닌데, 감정이나 심리적 공감의 연결이 뚝뚝 끊어지고,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기쁨을 굳이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고생하는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로 이러한 기법덕택에 작품이 더욱 흥미롭고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걸작을 접한 지적 보상이 분명 있는 작품이다. |
|
오랫만에 읽은 문학작품이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실용적 책읽기로 전환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꽤 진도가 나가기가 어려웠다. 순간 순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다 잡으며 책에 몰두하려 했지만 문학 작품이 지니는 세밀한 묘사나 표현력은 왠지 모르게 생경함을 넘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문학작품도 가끔 읽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이 책은 독일 표현주의 문학의 거장 알프레트 되블린의 대표작이다. 표현주의 문학이라 함은 미술에도 표현주의가 있듯이 모든 대상을 글로 형상화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한다. 알프레트 되블린은 이 책에서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를 통하여 개인의 비극적 일생과 당대 베를린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이른 봄까지의 독일 내의 여러 사회적인 이슈와 사건들, 신문기사, 유행가 가사, 각종 광고문 등이 직접 소설에 등장하고 있으며, 바로 이 기간 동안에 벌어진 주인공의 행적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1920년대 말의 베를린은 1차 대전이 끔찍한 상흔을 남기고 바야흐로 히틀러의 나치 정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격동의 시대를 말한다. 이 책《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독일 내에서 2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영화광이기도 했던 저자 되블린이 1933년 이 작품이 처음 영화화될 때 직접 각색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파스빈더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1980년도의 작품은 영화 자체로도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최인훈의 <광장>이 개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1960년대의 복잡한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다루었듯이 이 책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도 1920년대의 베를린 관점으로 생각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좀더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 찬바람이 쌩쌩 부는 베란다 책장에는 오래된 가계부와 성경과 낡은 수첩 모음 사이 1983년 발행판 중앙일보사 오늘의세계문학전집이 두서없이 꽂혀 있다. 30권 중에 20권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보르헤스, 오에 겐자부로 등 그 당시만 해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선집이다. 작가지망생이었던 먼 친척 누군가가 이민을 가면서 두고 간 책이 돌고 돌아 우리 집까지 온 것이다. 난 이 중에서 알프레드 되블린의 작품을 봤을까. 알프레드 안더쉬였다. 비슷한 이름의 독일 작가의 작품, 그러니까 착각이었다. 사실 서너 페이지 읽다 말기도 했다. 올해 출간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오래 묵은 책냄새가 났다고 할 밖에 없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신장판세계문학전집으로 1979년에 발간된 적이 있었다. 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난 이 소설을 80년쯤 지난 지금 처음 손에 잡아본 것이다. 그렇다면 읽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책의 흔적을 난 뒤졌을까. 익숙한 무언가, 내가 분명히 전에 알고 있는 뭔가와 혼동할 만한 익숙한 무엇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두 권 분량 소설이 읽기 쉽다거나 흔한 소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흥미진진한 범죄이야기’라고 말하는 비평가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펭권문고 서스펜스 소설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독일 베를린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은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이른 봄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패전국으로 승전국에게 부담해야 했던 무거운 짐으로 사회 전체가 위축되었던 시절이다. 1929년 세계공황 이후 나치 정당이 발현하기 직전까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중심으로 음울한 독일 사회가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생동감이 있다는 표현이 맞나 싶기는 한데, 끓는점 직전의 독일사회의 불안을 법전, 신문기사, 광고, 백과사전, 연설문, 공고문, 편지, 일기, 유행가 가사를 그대로 따와서 삽입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베를린을 그대로 박제한 듯 옮겨온 방식은 독일인들에게 각별한 향수 혹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시대 정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지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심하게 일일이 각주를 달았다고 해도 소설 한권쯤으로 내가 이해했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날것 그대로의 차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기보다는 전과자, 부랑자, 장애인의 낙인이 찍힌 임노동자 프란츠 비버코프의 부정확한 진술과 상상과 회상을 보충하기 위한 가공하지 않은 실마리로 왜 당시 베를린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과 반증으로 차용했다는 혐의가 더 짙은 편이다. 베를린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집착은, 이 작품 출간 이후 히틀러 광기를 피해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시민권을 얻고, 다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떠돌면서도 독일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유대계 독일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망명자로 떠돌던 그이의 인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람. 요사이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지만 10대 후반과 20대를 돌아보면 어느 시점에서 강하게 나를 뒤흔든 소설의 전조는 늘 세상과 갈들을 빚는 작가들 혹은 주인공들의 이야기였다.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들은 가볍고 또 거칠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이상의 <날개>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부터 이인성의 80년대 소설들과 여전히 읽을 때마다 짜릿한 95년 작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대학을 갈까말까 고민할 때 우연히 발견한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그렇다. 길거리를 헤매고 있든, 골방에 처박혀 있든 소설 주인공들은 항상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들인 동시에 휴화산이지만 구덩이 깊은 중심에 꺼지지 않은 용암의 흐름처럼 뜨겁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과 세기말을 단순히 ‘불안’이라는 코드로 한 묶음으로 둘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들 역시 적어도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부침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멀어질수록 뜨겁지도 않고 흐름이 멈춘듯 보이는 속살 같은 이야기는 더 이상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찾은 작가들 역시 어느 순간 소설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거나 형편없게 보였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그렇게 내 지난 시절의 가난과 목마름을 헤집는다. 사춘기 시절이, 재수생 시절이, 대학을 휴학하고 떠돌던 시절이 행복하지는 않았으나 절절하게 고민하면서 굵고 넓은 나이테를 만든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 작품의 동일하지 않은 화자와 철학적 진술들은 프란츠 비버코프의 것이 아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것이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투사되고 있지만 ‘소리나 그림이나 문자 텍스트를 인용하는’ 영화 기법을 가지고 풀어쓴 방식은 번역자의 말처럼 ‘20년대 말의 베를린 자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진술과 맞닿아 있다. 동시에 그 광장을 중심에 둔 시대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진술은 나 역시 작가의 시선으로 프란츠의 행보를 따라 그대로 그 광장으로 데려가서 나의 고백으로 탈바꿈한다. 파스빈더 감독의 1980년작 영화로 이 소설 다시 읽는 일만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