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 세계 문학의 숲 :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 1권에 이어진 2권에서도 우리의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의 험난한 인생이 펼쳐진다. 앞권에서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생이었는데, 이번에도 이어지는 여러 비극적인 상황들.... 모처럼 마음 먹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보고자 맘 먹고, 주변 친구들의 도움도 받고 여인의 도움으로 인해 재기를 꿈꿔 보지만... 어떻게 보면 악인이라 생각되어지는 라인홀트랑 또 엮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잃는 것도 모자라 프란츠의 전과 때문에, 연인을 살해한 살해범으로 몰리고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비버코프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데, 진실은 드러나도 또 다시 반복하여 베를린으로 돌아오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한 사람, 프란츠 비버코프의 일생 중 단편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 |
프란츠는 왜 라인홀트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애인 미체가 라인홀트의 손에 살해되고,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형사에게 잡히고 부흐 정신병원데 당도, 다시 정신병원에서 나와 거리의 자유를 맛보기까지 궁금했던 점은 그것 하나다. 죄는 항상 네 안에 살아숨쉬고 있으니- 이런 예언적인 조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걸까. 우리의 프란츠는. 살아있는 생생한 기쁨을 손에 쥐고서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데 아직 행복이라는 걸 맛보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까닭을 알 수 없는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선 주먹이 운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굳이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빼앗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게 진정으로 살아가는 거야, 이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한가득하다면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 어떻게 될까. 라인홀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 모든 것들이 소급될 수 있다면, 그런 소급 과정을 바란다면 그야말로 정말 철부지 같은 짓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비단 남자만의 사랑인 걸까.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자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항상 진실을 듣고자 하는데 남자는 그렇지 않다. 진실만을 듣는다면 여자의 거짓말 속에 뒤섞인 진실만을 잘 헤아려서 듣는다면 오해 같은 건 생기지 않을 텐데,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하지는 않을 텐데, 마치 눈뜬 장님처럼 여자를 바로 코 앞에 두고도 엉뚱한 곳만을 향해 팔을 내미는 꼴이잖아. 문학 작품 속의 남자들은 그래도 현실의 남자들보다는 좀 더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라인홀트, 그마저 사랑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서정 시인이 마음 속에 태양을 품으라고 했을 때 라인홀트 역시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것도 진심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하지만 나는 변할 수 없는 인간, 그러니 대신 욕설을 내뱉으면서 그 태양을, 사랑의 광휘를 얻고자 했던 게 모든 불행의 사소한 어긋남의 출발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까. 이런 치졸한 변명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여자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미체가 아무리 라인홀트에게 욕설을 하며 프란츠에게 손을 내밀어봤자 프란츠는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 손을 대신 라인홀트가 잡아 여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사랑과 모든 시간을 빼앗기고만다. 누구에게 화살을 날려야 할까. 이럴 때, 이런 경우, 아무도 책임을 대신하려하지 않고 프란츠는 라인홀트를, 라인홀트는 프란츠에게 화살을 겨누려 할 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겠노라 할 때 죽은 미체의 시신은, 이미 생명을 빼앗긴 미체의 두 눈은 누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까.
경쾌하게 이어진다. 프란츠 비버코프는 실수로 애인을 죽였다. 죽지 않을 정도까지 때렸는데 그만 죽고말았다. 그리고 감옥으로 갔다. 4년이 흘렀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으로 간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사람들과 잘못 어울린다. 팔을 잃는다. 외팔이가 되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죽음의 신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프란츠는 일을 하며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런 사랑은 내 평생 처음이야, 이런 여자는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이 여인을 놓치지 않겠노라 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식으로 영원이란 말과 뒤섞이려 하지 않는다. 팔을 가져간 라인홀트는 그의 애인 미체마저 가지려하고 미체는 모든 진실을 아는 순간 거세게 라인홀트에게서 나오려고 하지만 라인홀트는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 있다. 미체는 사랑도 목숨도 잃는다. 진실한 사랑이 사라지고난 후에야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된 프란츠는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쉬이쉬이 모든 것들을 품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태양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 돌아온 프란츠. 경비 보조가 되어 다시 삶의 광장 안으로 돌아왔다. 여기 한 인간이 있다. 자신의 두 다리로 굳건히. 가슴 안에는 여전히 태양을 안고.
|
프란츠 비버코프를 쫓아가는 여정은 숨가쁘기만 하다. 프란츠가 생각한 것들과 주변의 상황들과 인물들은 어찌도 그리 다르기만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는 힘들기만 하다. 2권에서야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사랑과 그를 다시 모함하는 대적자, 그의 친우들은 범죄의 삶 속에서야 드러내는 프란츠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성경의 욥기와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를 교묘히 이야기한 내용들은 어찌 그리도 절묘한 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사랑하는 미체와 에바와의 만남과 사랑의 과정은 그 시대 뒷골목 풍경을 어김없이 보여주면서 전후의 복잡미묘하고 처절한 삶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들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것은 지극히 한시적이며 스스로를 구속하는 그런 것들로만 보인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라 생각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여졌으며, 그들이 집착하고 있는 가치와 경제적인 성공이라는 것이 어찌 그리도 어둡기만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답답했으나, 그 또한 작가의 의도라면 하면 타당할 것이다.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 의해 창조되어진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은 프란츠라는 인물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 그는 하물며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그 우연에 의해서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정신까지도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니 말이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그런 것들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윤리의 상충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프란츠가 진정으로 원한 삶은 무엇이었을까. 미체가 그리도 추구했던 사랑이라는 가치와 에바의 우정과 사랑을 넘나드는 진실은 무엇인가 말이다. 거기에도 여기에도 어떤 곳에도 도시적 삶은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게도 하며 사라지게도 한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프란츠가 있는 것일까?” 수많은 군중들 속에 묻혀 일상을 살아가는 나란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는 내용은 직접 들이대고 보여주지 않으며 은유와 냉소로 포장된 스토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의 가치는 과연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하니 무엇이 옳고 그렇지 않은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라인홀츠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선이라 인정할 수가 없는 이 다면적이며 철없는 주인공에게 진하게 느껴지는 연민에 순간 멈칫하게 된다. 그가 느끼고 바라보았을 그 시대는 과연 지금 달라졌는가? |
|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자를 때려 숨지게 한 프란츠 비버코프는 4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그는 착실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신문팔이, 신발끈 장사 등 돈 되는 일이면 뭐든 하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바꿔 먹고 장물아비들의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프란츠는 장물아비 일당인 라인홀트때문에 팔 하나를 잃고 거의 죽다가 살아 나게 된다. 그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듯 살던 프란츠는 다시 희망을 얻게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란츠는 그 사고 이후 잠시 퇴보하는 듯한 면을 보인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라인홀트에 대해서도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우울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는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 - 정치같은 것- 에도 관심을 조금 보이기도 한다. 그런 프란츠는 착실한 삶으로서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젠 그런 착실한 삶을 버리고자 한다. 나도 그런 일을 해야 해, 엠미. 저기 저 사람들같이. 그게 유일한 진실이야. 절대로 노동을 해선 안 되지. 노동이란 걸 머리에서 지워버려. 노동을 했다간 손에 못이나 박이지, 돈은 못 얻어. 고작해야 머리에 구멍이나 뚫리는 거지. 노동으로는 그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어. 오직 속임수를 써야 해. 알았지. (26p) 1차 세계대전 이후 무너진 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공황 상태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삶은 힘겹다. 공산주의자, 나치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내놓으면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프란츠 역시 자신이 이제껏 해오던 일로는 겨우 입에 풀칠 할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아예 장물아비 일당과 함께 일하고자 - 범죄전선에 뛰어들기로 - 하는 것이다. 이런 프란츠에게 에바는 좋은 여자인 소냐를 소개시켜준다. 소냐는 여리고 작은 몸집의 창녀이지만 프란츠에게 온 정성을 다한다. 결국 프란츠는 기둥서방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소냐의 사랑은 분명 프란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행복은 늘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프란츠에겐 행복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불운을 몰고 다니는 사나이기 때문이다. 프란츠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라인홀트에게 소냐의 이야기를 꺼낸다. 비록 외팔이에 기둥서방으로 살고 있어도 자신은 건재하단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남자의 심리였달까. 하지만 그것이 또다른 비극을 불러오게 될 줄이야. 라인홀트는 소냐가 갖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고, 결국 라인홀트는 소냐를 죽여버리게 된다. 소냐가 행방불명된 이후, 프란츠는 급속도로 무너지게 된다. 게다가 라인홀트가 자신의 꼬리가 밟히게 되자 소냐 사건에 프란츠 역시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을 흘린다. 프란츠는 여자를 때려서 죽인 전과가 있다. 당연히 경찰 입장에서는 프란츠를 용의자로 올리게 된다. 결국 프란츠는 경찰에 잡혀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소냐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또한 소냐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삶의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던 프란츠. 그에게 더이상 희망은 없는 것일까. 2권은 프란츠의 또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권은 프란츠가 감옥에서 나와 착실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2권은 기둥서방으로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프란츠의 모습을 보여 준다. 프란츠는 소냐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결국 자신의 과오로 소냐를 죽게 만들고 삶의 모든 의욕마저 잃어버린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할 때, 프란츠의 영혼은 묘지로 가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이 죽인 이다와 재회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확실히 1권과는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다소 현실적인 것과 동떨어진 느낌을 들어도 이야기 자체는 굳건히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던 1권과 비교해 본다면 2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 성향도 약간은 보여준다고 한달까. 이러한 것은 프란츠가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 도망칠 때 참새들이 나누는 이야기나 프란츠 곁에 있는 두 천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다소 의외의 설정이지만, 이러한 것도 이 소설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 신문 기사, 당시의 유행가 가사, 책이나 희곡 인용문을 사용하여 등장 인물들의 심리와 현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든지 마치 영화의 장면 전개같은 서술 형식 등은 다분히 실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화자가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아 가끔은 난해하게도 느껴지지만, 순간순간 정확하게 독자를 소설의 한가운데로 몰아 넣는 능력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작가적 역량이 아닌가 싶다. 소설의 문장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1928년의 베를린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한국소설을 읽다 보면 이 소설이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감은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문장의 형태 자체에만 신경쓰지 말고, 차분히 내용을 중심으로 따라가다 보면 또다른 독일 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1권에서 프란츠는 한쪽 팔을 잃게되는 큰 사고를 당했다. 범죄의 길에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 저항하다가 팔까지 잃었는데 그는 다시 범죄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그의 불행은 여전히 계속된다. 미체를 만나 그녀의 기둥서방으로 지내다가 라인홀트와 다시 도둑질을 하게 되면서 또다시 그와 엮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크나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프란츠는 감옥 출소 후 주위 사람들에 얽혀 불행을 여러한 일들을 겪는다. 프란츠가 겪는 불행들은 친구를 골라 사겨야한다는 본보기를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이렇게 온갖 불행을 겪게 되는 그를 저자는 성서에 나오는 욥이 겪은 불행과 비교하며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욥은 자녀들과 재산인 수천마리의 가축들을 잃고 몸에는 부스럼이 생기는 시험을 당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모든 불행이 한 순간에 그를 찾아온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프란츠에겐 모든 불행이 하나씩 천천히 다가오고 그를 죽음을 선택하도록 몰아넣지는 않는다. 자신의 애인을 때려서 죽게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로 모든 죄값을 받았다고 여기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아무 죄 없이 불행을 당한 욥과 죄값에 응당한 불행을 겪는 프란츠. 그는 언제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것인가. 마지막까지 그의 뉘우침의 순간을 바라며 읽어나갔다. 오로지 착실하게 살기만을 바랐던 프란츠. 그의 삶을 통해 저자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내가 느낀 것이 과연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얘기하고자 했던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이 책은 인용구가 참으로 많이 나온다. 성서에서부터 신문기사, 노래 가사 등 여러 인용구들이 나오는데 갑자기 툭하니 튀어나오는 인용구는 주석을 보고나서야 내용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서술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줄바꿈도 없이 튀어나온다. 책을 다 읽고 뒷부분의 해설을 읽고나서야 책에 사용된 여러한 기법들에 대해 알게되었고, 그때의 상황들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서양의 해외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독특한 구성의 영화와 같은 작품이었다. 조금 더 고전들에 익숙해지고 나서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난 후 이 작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지금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이 생겨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