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원쉬안은 하루 하루 생활하기도 벅찰만큼 가난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런 생활은 벌써 몇 년쨰 이어져 오고 있고, 전쟁은 도시에 잦은 경계 경보를 울려대며 피난해야 할 날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급박하게 알리는 듯 하다. 왕원쉬안에게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있다. 아들의 등록금은 무척이나 비싸지만 그 돈을 아내가 은행을 다니며 충당하고 있다.
아내와 어머니는 사이가 무척이나 좋지 않다. 아내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십 여년을 살아온 그들 부부지만 왕원쉬안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아들의 정부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늘 행실이 바르지 못한 며느리며, 가장에 충실하지 않은 며느리라고 흉을 보는 것이다. 수성 역시 그런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늘 티격태격 싸우는 고부갈등은 깊어져만 가고 있고, 활기차게 살고 싶은 수성은 이 집이 이제 숨 막혀 올 뿐이다.
전쟁은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고 희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제 살 궁리가 다 마련되어 있고, 전쟁 속에 무너져 내리는 것은 힘 없는 시민들이었다. 왕원쉬안은 몸 속으로 병이 들어와 시름시름 앓게 되지만 하루라도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생활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왕원쉬안의 회사는 그에게 따뜻한 곳은 아니다. 죽으라고 일만 시키지만 봉급은 쥐꼬리만하고 직장 동료들과도 쫑라오만을 제외하면 서먹한 사이인 것이다.
수성은 적막한 집이 싫다. 그래서 늘 밖에서 오래도록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고는 하는데 남편이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다른 안전한 곳으로 그녀를 발령내어 주엇고, 수성은 발령지로 가고싶다. 아니, 혼란스러운 그녀이다.
그들의 도시에서도 이제는 피난을 준비해야 한다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피난을 떠날 형편이 되지 않는 왕원쉬안의 가족들은 결국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 집을 지키고 전쟁은 드디어 일본의 항복으로 승리의 축포가 터졌다. 전쟁만 끝나면 희망이 찾아오고 생활이 나아질 것을 기대했던 그들, 하지만 승리는 힘없는 시민들의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을 둘러싼 여전한 궁핍은 희망을 더욱 짚은 안개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달픈 일이지만 특히나 힘없는 시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더욱 많은 듯 하다. 전쟁은 가난을 안겨주고 희망을 앗아가지만 그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시민들은 변화의 몸짓을 느낄 수가 없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이 책 속에서 우리들은 전쟁을 겪고 있는 왕원쉬안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적막함이 감도는 차가운 밤을 이 책은 그려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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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읽어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책 <차가운 밤>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인간 감정 표현이 시쳇말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문장이 예술이냐고 덤비면 콕 집어내기도 만만찮다. 소설의 시대적, 장소적 배경은 1940년대 중반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 충칭이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왕원쉬안과 청수성이라는 부부가 그곳에 살고 있다. 물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10대 아들까지 둔 사실상 부부이다. 그런데 왕원쉬안의 어머니와 며느리인 청수성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그 고부갈등이 이 소설의 큰 흐름이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왕원쉬안은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영화 ‘마지막 황제’가 생각났다. 대세의 변화에 어쩔 도리가 없는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막막한 현실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왕원쉬안은 폐병인지 콜레라인지에 걸려 직장마저 잃는다. 아내 청수성은 계속된 고부갈등과 빈곤에 지쳐 남편을 떠난다. 자신이 다니던 은행에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난 것이지만 사실상 남편과의 이별이다. 남편을 떠난 아내는 몇 달 후 남편에게 장문을 편지를 보내 이별을 정식으로 고한다. 1년 후인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다. 지긋한 전쟁의 끝과 함께 왕원쉬안도 결국 생을 마감한다. 그의 어머니와 아들은 어디론가 떠난다. 그 후에 아내 청수성이 남편을 찾아 충칭으로 돌아오지만 가족은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 책의 표지를 보고 ‘차가운 밤’이 아니라 ‘뜨거운 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입고 있는 한 여인의 하반신이 책 표지에 걸려 있다. 게다가 꽃무늬 옷자락 사이로 종아리와 발목이 살짝 보인다. 그렇지만, 정작 이 책의 내용은 ‘뜨거운 밤’과 거리가 멀다. 제목대로 ‘차가운 밤’이 어울리는 내용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은 ”그녀는 온기가 필요했다“이다. 남편도 죽고 가족도 사라진 그곳의 밤은 추웠다. 사람이 그리워서 더욱 추웠을 것이다. 추운 밤이 아니라 ‘차가운 밤(寒夜)’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도 물리적인 추위에 마음의 추위를 더한, 그런 추위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소설 줄거리는 단순하고 비극적이다.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는 소설일지 모른다. 그러나 300여 페이지에 담긴 인간 감정의 표현은 일품이다. 전쟁에 대한 불안감, 고부갈등, 빈곤의 피곤함, 이혼의 아픔, 질병의 고통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 표현이 강하면 독자가 힘들어져 오히려 소설에 구토증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약하면 그 소설은 밍밍하다. 이 소설은 적당하게 익었다. 저자 바진은 루쉰, 라오서와 함께 중국 3대 문호로 꼽힌단다. 대가들의 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쉬운 글을 쓴다. 이념, 사상과 같이 어려운 문제도 낯설지 않은 단어를 나열해서 쉽게 풀어낸다. 작가는 머리를 쥐어뜯어야 하지만, 독자는 읽기가 편하다. 이 책을 문학적으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듯하다. 또 그렇게까지 분석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전쟁이라는 혼돈의 상황을 한 가족의 분열을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이 책의 역자는 이 책의 저자가 살아있을 때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더욱 그 느낌을 잘 살렸을 것 같다. 중국 문학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을 시험 삼아 읽어보아도 좋을 듯싶다. 이 소설은 20세기 중국 문학을 대표할만하다. |
지독하게 짙은 안개속을 헤메다 지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첫 장부터 우울함이 밀려드는 느낌이라 넘기는 속도마저 느려져버린다. 왜 그렇게 속으로만 아파하고 무능력해져야만 하는지...
차가운밤은 1944년에 쓰기 시작하여 1946년 말에 완성된 작품으로 바진의 최후의 장편소설이다. 당시 국민당 정부가 피난와 있던 충징에 머물면서 항일전 막바지에 이르렀던 당시 많은 문인들이 충칭에 집결 항일 대열에 참가하였고, 일반대중과 문인들은 하루하루 극심한 고통의 나날 속에서 무력감과 패배감 그리고 허무주의적 사조가 부리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알고나면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한지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차가운 밤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주인공 왕원쉬안과 그의 부인 청수성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 그들의 갈등 구조가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진다.
주인공 왕원쉬안은 왜 그렇게 우유부단하여 혼자 갈등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채 결국엔 홀로 죽음으로 마무리지어지는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 수록 주인공들의 대사하나 하나에 집중하게되고 그 갈등의 축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공감되어져버리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 다시 왕원쉬안을 찾아온 수성에게 들린 이야기 "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린가" 다시금 차가워진 그 곳에서 온기를 필요로 하는 수성. 어떤 것도 시원하게 다가오지 않고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이는 기분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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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바진이 1944년애 쓰기 시작하여 1946년 말에 완성한 작품으로, 바진 최후의 장편소설이다. 이 시기는 항일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로 충칭으로 국민당 정부가 피난와있던 시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왕원쉬안과 청수성은 대학 시절에는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희망을 달성하려는 이상이 전쟁을 피해 충칭으로 온 지금은 하루하루를 영위하기에도 힘겹게 살고 있다. 작가는 이 곳을 배경으로 전쟁과 이로 인해 먹는것과 입을것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피폐한 삶 속에 번민하는 지식인 가정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당시는 중국사회에 전통적인 구습과 새로운 신문화가 겹쳐있던 시기였다. 절박한 현실은 항상 문화의 다양한 수용과 안정된 성장을 가로막았으며, 작가들은 깨어있는 한 한눈을 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문화전사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그런데 작가들의 현실 사회에 대한 사명감은 비단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중국의 전통 문인정신에 내재되어 있던 '글에는 도가 담겨야 하며, 나라를 책임지고 백성을 구한다'는 인문정신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근현대 100년을 온몸으로 겪어낸 중국의 대문호 바진은 제국주의의 야만적 침략을 변호하는 약육강식의 사회 다윈주의에 대해 불만을 느꼈던 당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바진은 인류발전의 기본 원리는 상호부조(相互扶助)라는 아나키즘의 이상에 매력을 느꼈다. 그의 나이 15세에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이란 글을 읽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립하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삼게 된 바진은 혁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자 했으나 그는 혁명가라기보다는 문인이었다. 자신의 필명을 존경하는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첫음절에서 따올만큼 아나키즘과 인도주의로 집약되는 그의 사상적 성향은 작품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20세기는 인간 본연의 권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부단한 추구가 있었던 시기인 동시에, 열강의 광적인 식민지 경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드러났듯이 과거 어느 때보다 잔혹하게 인간성이 파괴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서구문화에 대한 초기의 관심은 비교적 다양했다. 서구에 대한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열강의 경제적 수탈지로 급속하게 전락하며 세기의 서막을 맞은 중국 역시 지난 100년은 희망을 갈구한 동시에 그만큼 시련과 좌절로 점철된 세기였다. 이 작품 '차거운 밤'은 격변의 시대를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의식을 표현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의 이런 의도로 왕원시안과 그의 직장동료들간의 갈등과 그의 어머니와 며느리인 청수성과의 갈등구조를 통해 이런 시대적인 대립을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1940년대 중반전쟁이라는 소용돌이속에서 이념의 대립을 목격한 작가의 사명은 고난의 연대 속에서 문학의 역할을 꿋꿋하게 펼쳐나간 작품이란 느낌을 들게하는 작품이다. 현실에서의 좌절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신념과 고뇌를 보여주는 바진의 삶과 문학은 개인의 자유로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시사점을던져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바진은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로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
책 뒷편 유명인사의 짧막한 리뷰를 접하고 이 책을 손에 접어든 독자라면 다소의 허망한 감정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그 만큼의 기대했던 매혹적인 플롯이나 내러티브의 향연은 고사하고라도 소설류가 가지고 있는 픽션에 대한 흥미유발이라는 최소한의 서비스조차 체득하지 못하고 책장을 덮게 되는 불상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진의 <차가운 밤>은 소설의 제목만큼이나 차갑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또다른 중국작가인 장윈의 <길위의 시대>가 중국 현대사를 시대적 배경으로 중국인들의 삶의 가치관이 변해과정을 담고 있다면 바진의 <차가운 밤>은 일본제국주의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 중국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삶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거대한 담론의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내막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하나의 틀에 속박하는 형태를 띄게 마련이다. 청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서양제국에 의해 개화라는 명분으로 침탈된 중국의 근대사 역시 이러한 일련의 발자취를 답습하였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산물이 전쟁이라는 결과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혼돈스러운 이데올로기의 향연시대에 그 어떠한 곳에도 속하지 않는 아니 속할 수 없는 자유의 정신을 추구했던 아나키즘의 신봉자였고 자신의 사고가 고스란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아나키즘에 한발 더 나아간 허무주의를 추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인공 원시안과 그의 아내 수성 그리고 시어머니로 대변되는 삼자간의 갈등구조를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강요가 아니라 어쩌면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다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표현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세칭 권선징악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좋고 싫음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마저도 앗아 가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허망하면서도 왠지 애잔한 잔상들이 오래토록 남게 한다. 이는 어쩌면 일개 개인으로서의 거대한 시대적 변화의 틈속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솔직한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패러다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담론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또 그러한 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솔직담백한 답은 그 누구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포화소리와 민족해방이나 자유의 쟁취등의 시대적 요구들 이러한 혼돈스러운 시점에서 어느 누구는 온몸으로 받아들여 자신속에 녹여나게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저 두렵고 무서울 뿐이며 처해진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진은 바로 이러한 대부분의 개인들이 살았고 처해졌던 상황을 작품을 통해서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고 이러한 삶에는 어떤 누구도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겐 밤은 그저 차갑게만 다가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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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측한 악마에게 들씌워져 어딘가에서 지시를 받듯 그런 상태가 된 시대.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지, 신은 정말 죽은 것인지(이전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면), 왜 항상 왕원쉬안은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 과연 왕원쉬안과 수성과 어머니는 과연 선善한지, 악惡한지, 해는 어째서 밤이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지(곤두박질치는지), 그리고 왕원쉬안은 왜 수성과 헤어졌으며 왜 회사에서 해고되었는지, 또한 끝에 수성(왕원쉬안)은 이미 없는데 왕원쉬안(수성)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낯선 인간들, 낯선 거리, 낯선 감각, 낯선 승전보 ㅡ 심지어 냄새까지도 낯설다. 그러나 결국 인물들은 시시각각 첨벙대는 속물이다. 그들은 그런 속물인 채로, 지금,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ㅡ 아니, 이상한 방에 갇혀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차가운 밤』의 이미지는 서늘하다, 지독하다, 허물어지다…… 와 같은 단어들과 꼭 맞다. 인물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서로를 구원하지 못 한다(그런 의미에서 해방 전후 한국문학의 그것과 닮아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리가 아니며(p.316)> 그 속에서 왕원쉬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로 갈까?> 하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다. 왕원쉬안, 수성, 어머니,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끌어가는 이야기는, 그들을 세상의 오염과 자신들의 오염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이들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외양상으로는 일단 허무함의 길을 걷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갖가지 변주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들의 방>은 봉건적이며 존재감도 희미하다. 그곳은 빈곤하며 끝없는 위협이 들이닥치는 곳이다. 수성을 제외한 어머니와 왕원쉬안은 끝내 거처인 방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구시대의 산물이며 주체성이 결여된 인물들이란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왕원쉬안의 차가운 생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고, 그는 이 소설이 지속되는 동안 그곳을 떠날 것인지를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수성만이 세속적 서사를 지닌 인물로 부각된다. 방은 왕원쉬안과 수성의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거리를 고착시키며, 그래서 <방 안>과 <방 바깥>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결코 만날 수 없다. 결국 그 방에서 왕원쉬안은 죽음을 맞이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죽어서야 방을 떠나며, 수성은 다시 그 곳으로 돌아온다. 세 인물이 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차가운 밤』의 서사 안에서 그런 운명을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여기엔 다른 공간이 더 등장하는데 술집, 카페, 회사, 은행이다. 어쩌면 방을 제외한 다른 공간들은 시대가 조작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방이 주관적 세계라면 그 외의 공간은 더욱 주관적으로 보인다. 왕원쉬안은 방을 벗어나서야 인간의 동작을 회복하지만 그의 생과 죽음은 방에서만 이루어진다. 만약 왕원쉬안이 죽지 않았다면 『차가운 밤』은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쓸모없는 것이지만 나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아 뭐 이런 정말 개한테 줘도 안 집어갈 개뼈다귀보다도 더 못한 인생이 있단 말이더냐, 눈을 감고 잔인한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살짝 실눈을 뜨면서 볼 거 다 보며 든 생각은 그랬다. 헌데 바진의 [차가운 밤]에 등장하는 왕원쉬안의 인생 역시 복남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을 하는 두 남녀, 복남과 원쉬안은 성별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다는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쌍둥이와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내 수성의 사랑을 받았던 적 있는 왕원쉬안, 그리고 그녀가 떠날 때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아내를 사랑했을 왕원쉬안의 인생이 조금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제일 옆에서 깊이 사랑을 해줘야 할 배우자란 녀석들이 제일 상처를 주는데 마음 같아서는 한대씩 꿀밤을 주고싶을 정도. 여기는 공적인 공간이니까 나이브하게 꿀밤으로 표현을 한다. 영화를 볼 때 역시 가슴 속에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을 어찌 하지 못했는데 소설은 가장 강한 세기로 에어컨 바람을 틀어준다. 따지고들자면 아니 따지고들 것도 없이 가족이라는 존재가 제일 깊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건 어디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저 피부로 느껴 아는 것이다. 살아보니 그건 절대 틀릴 수 없는 당연한 진리, 즉 물리 법칙과 같은데 칼을 깊이 쑤셔박는 인물들 또한 여지없이 그 사랑을 주고받는 가장 절친한 관계, 즉 가족이다.
어머니와 아내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이런 상황에서라면 나 같아도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햄릿의 대사를 저절로 읊을 것만 같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불쌍한 왕원쉬안은 아내에게서 버림받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데 그 장면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포스터와 비슷하리라. 뻔한 이야기는 하고싶지 않다. 하지만 이게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넓게 나아가서 제도의 문제로 본다면 좀 쓸만한 제도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면 복남과 원쉬안의 불쌍한 인생길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왕원쉬안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복남이의 공간적 배경을 싸악 무시하고 보자면 이 이야기는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 가족에게서 항상 일어나는 실제 사건이다. 그저 넋 놓고 딴나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볼 수만은 없는데 그 이상의 이야기는 여기에서는 무리일 거 같다.
시련은 인생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서 그 고난을 겪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비관주의로는 그 인생은 지옥에 닿아서도 끝끝내 울부짖을 것만 같다. 한 많은 인생들이란 으레 그러기 마련이기에. 끔찍한 장면이라 해도 실눈 뜨지 말고 당당하게 두눈 부릅 뜨고 지켜봐야 하리라.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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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선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차가운 밤이구나.. 였다. 책의 저자인 바진에 대해서는 차가운 밤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차가운 밤 이라는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했다. 서정적이면서 서민적이고 주인공인 원쉬안의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 섬세하게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한 여인만을 사랑하고 그리워 하고 또 생각하는 마음과 괴로워 자기 자신을 다그치는 마음이 가슴이 참 아렸다. 아내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격에되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불안감과 아픔 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된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디테일 하게 표현된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쩌면 중국의 그 시대의 상황과 주인공인 원쉬안의 상황이 비슷하게 이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남자의 가정사 내지는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어머니와 아내와 또는 직장 동료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의 그시대 상황을 다룬 내용이었지만.. 어쩌면 그 내용들이 다 하나로 이어지고 통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침략으로 인해 전쟁의 상황이었던 당시 중국의 배경과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으로 인해 가정의 불안함 이라든가..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인해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는 상황등.. 어쩌면 다르지만 비슷한 그런 상황들.. 직장에서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준 쫑라오의 죽음으로 인해 이젠 직장에서 자신의 친구도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다는 생각에 절망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아마 주인공은 이제 완젼히 혼자라는 생각이 그리고 곧 자신도 그 친구의 뒤를 따라갈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눈물을 흘리고 아파했던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 그 고통과 괴로움을 표현하지 못해 절규하는 마음, 그리고 남겨져 고생할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했던 원쉬안의 마음이 어쩌면 이시대의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젊은이들의 마음과 너무나 달라 어쩌면 저렇게 까지 그녀를 사랑할수 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읽는 내내 조용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가슴속에 뭔가 응어리가 생긴것 마냥 답답함에 창문을 열어 차가운 겨울 밤의 바람을 쐬어보았다. ![]() |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왕원슈안과 청수성은 교육사업을 통해 미래에 대한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에다가 전쟁의 피바람까지 몰아친 1940년대 중국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꿈은 힘없이 허물어졌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운 생활조차 힘겨울 만큼 피폐한 삶을 살아간다. 낡은 가치관에 얽매인 어머니와 신교육을 받은 여성인 아내와의 고부갈등은 희망이 꺾인 채 몸까지 쇠약해진 왕원슈안을 더욱 괴로운 상태로 몰고 간다.
이미 소설을 접해본 독자들이나 앞으로 이 소설을 읽을 분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올 탄식은 ‘아, 저 할매가...!’일 것이고 가장 많이 느낄 감정은 답답함일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상황이 아무리 최악의 상태일지라도 가족은 서로를 지키고 힘을 북돋워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삶을 위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끝까지 구시대의 관습과 노인 특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 가장 큰 책임은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며느리이자 아내인 청수성은 마지막까지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남편을 생각했고 비록 깊은 애정은 주지 못했을지라도 아들에 대해서도 염려의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해 무리해서라도 학비가 많이 드는 학교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 간간이 시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 애쓰는 흔적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시어머니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이 와중에 마음 약하고 우유뷰단한 모습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하는 왕원쉬안의 몸과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결국 아내는 현실의 암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짐을 진 채로 가족을 떠나게 된다. 마침내 전쟁은 일본의 항복으로 일단락되어가는 상황으로 갔으나 피폐하고 궁핍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아들이 가끔 집으로 돌아와 조금이나마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어머니와 둘이서 황량한 삶을 살아가던 왕원쉬안은 청수성의 아내로서의 결별 편지와 유일한 자기편이라 할 수 있었던 지인의 죽음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병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죽음을 맞는다.
표면적으로는 고부간의 갈등이나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실질적인 힘을 전혀 내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다양한 인간사의 비극을 이끌어내는 것은 더욱 거대한 어떠한 힘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전쟁과 같이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모는 세상의 법칙 내지는 지도자들의 탐욕이며, 작가는 이를 한 가족의 파국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말미에 나오는 길가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 중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린가.”(p.316)란 말이 이 소설을 가장 잘 압축해주는 표현 같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은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희로애락이라는 것의 알맹이가, 이 시대에는 겉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더욱 비인간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갈수록 황량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그 누군가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를 가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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