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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속에 비친 세상의 공포를 마주하는 연약한 나르시스 #
한 방울의 그리움이 순식간에 암처럼 온몸으로 퍼져버렸습니다. 시간의 전설이 고작 한 개인에게 머물러있다는 섬뜩한 이해가 가슴을 저려오네요. 다자이 오사무 때문에. 죽음으로써 폭로한 그의 삶을 보는 내내 비밀처럼 숨겨 두고 차마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못했던 자화상을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 해서 자유란 또 다른 속박의 덧칠에 불과하단 생각. 공허한 삶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속임수에 내던져진 무력한 존재라는 생각. 아, 오사무여! 이제 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전에도 말씀드렸죠? 할 말과 쓸 글을 잃었다고. 정말 그랬어요. 해서 전 이 책을,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어야만 했어요. 전 도깨비처럼, 도통 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다자이 오사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요. 그 동질감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는지, 암튼 이 책을 다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리뷰 쓰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산 딸아이의 (귀차니즘으로 차일피일 미뤘던)바지를 교환하기 위해 머릴 감던 중이었어요. 이것도 며칠 만에 하는, 참 외출이라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하여튼 외출 준비였던 것이죠. 헌데 돌연 염탐꾼 같은 녀석이 아주 빠른 속도로 제 머릿속을 휘휘 돌아다니더군요. 드라이하는 것까진 간신히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어떡하든 그 머릿속 생각을 빨리 묶어두고 정리해야만 했어요. 그리하여 바닥 곳곳을 뒹구는 머리칼 군상들을 뿌리치고(머리칼 수거는 제 일상 중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요), 전 노트북 앞에 드디어 엉덩일 붙이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딸애의 배 울음소리(저녁을 챙겨줘야 한다는, 일종의 신호겠습니다만)에 응답해야 해서 언제까지고 이 자셀 유지한 채 긴긴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먹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말은 내 귀에는 그저 불쾌한 위협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미신은(지금도 나는 그게 미신으로 느껴집니다) 항상 내게 불안과 공포를 몰고 왔습니다. 나에게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일을 해서 벌어먹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말만큼 난해하고 애매모호하고 그러면서도 협박의 여운을 강하게 풍기는 말은 없습니다(p15).
이곳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광대들로 넘쳐나는 세상이죠. 애초부터 짜 맞출 수 없는 세상이란 퍼즐 판을 들이대며 ‘어디 한번 잘 맞춰봐!’라고 끊임없이 재촉한다는 말입니다. 것도 살기 위해. 그러므로 죽지 않기 위한 ‘섭취’는 누군가의 붕괴나 죽음을 전제로 한 악마가 아닐까. 그 강력한 악마의 기운이 일찌감치 우리의 영혼을 파고들었던 건 아닐까. 이 비슷한 뉘앙스가 바로 어린 요조의 두 번째 철학적 사유라 할 수 있어요. 우리도 매 끼니때가 되면 뱃속에서 알람이 울리잖아요. ‘배고파! 밥, 밥을 줘야할 거 아냐?’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유에 문학적 사조를 들먹이며 분석하고 평가를 하고 감상이라고 하는 걸 남긴다는 자체가, 실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요? 그러고 보면 빌어먹을 놈, 이라는 욕은 저(요조<다자이 오사무인 거죠>와 함께) 같은 종자에게 참 어울린다 싶네요. 하지만 전 요조처럼 낯짝 두껍게 혹은 갖은 위장을 무기로 빌어먹을 배짱도 딱히 없는 사람입니다- 유년시절의 요조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관찰자는 그 웃음이 ‘웃음’이라는 보편적 이미지완 딴판으로, 어딘가 어둡고 음산하며 벌레라도 본 것처럼 불쾌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웃음이란 게 다 그렇지 않나요? 오죽하면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울지 못해 혹은 죽지 못해 사는 삶, 이라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란 욕까지 있으니, 참 벌레가 들으면 대성통곡할 일입니다. 아무튼 오사무의 말마따나 참으로 애매하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란...
-나 혼자만 완전히 괴상한 사람인 듯한 불안감과 공포감이 덮쳐들 뿐입니다. 나는 주위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광대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나의 마지막 구애求愛였습니다(P17).
타인의 눈으로 볼 때 요조는 세상에 적응 못하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타협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요조 입장에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가족조차도)이 자신의 힘으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살.아.내.야, 한다는 표현이 얼마나 절박함을 암시하는지 알겠지요? 요조는 그 막막하고 답답한 삶을 감내할 수단으로 ‘광대 짓’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순조롭지 못해서, 세상엔 항상 곳곳에 복병을 숨겨두고 걸려들기만을 예의주시합니다. 늘 해왔던 것처럼 요조는 자신의 바보짓에 열광하는 무리들을 웃기기 위해 멀리뛰기 쇼를 하거든요. 헌데 보기에도 참으로 어리숙하고 시답잖게 생긴 다케이치란 녀석이 그의 광대 짓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요조가 누굽니까. 포섭의 귀재인 그는 모든 기량을 발휘해 다케이치를 서서히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뿐 아니라, 이후 다케이치는 요조의 다재다능함(당시 요조는 교사와 전교생을 웃길 만한 유머러스한 우등생에다 작문실력도 뛰어났고, 그림도 잘 그렸음) 명석함에 반해 그의 추종자가 되기에 이르죠. 유유상종이라고 요조와 같은 부류에 섞이면 자연스레 자신의 이미지 또한 동반상승 되기 마련이니까요. 아! 저의 유년시절도 딱 이랬습니다. 그 시절, 저의 그 어설픈 광대 짓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댔던 친구들의 모습을 위안삼아, 정말 조마조마하게 살았더랬습니다. 다케이치 같은 녀석이 나타날까봐 무지 오돌오돌 떨면서요. 제 경우, 중학교 때 딱 걸려들고 말았습니다만. 이후로 그나마 간당간당했던 제 삶도, 행복 끝 불행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일편으로, 조숙早熟이란 말입니다. 인간을 미리 얼어 뒈지게 만드는 불치병입니다.
돈 떨어지는 때가 인연 끊기는 때, 라는 말이 있지? 그건 해석이 정반대야. 돈이 떨어지면 여자가 남자를 차고 떠난다는 뜻이 아니야. 남자는 돈이 떨어지면 자기 스스로 의기소침해져서 사람이 점점 나빠지고 웃는 소리에도 힘이 없고 그리고 묘하게 삐뚤어져서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남자 쪽에서 여자를 찬다. 미친놈처럼 뿌리치고 뿌리치고 또 뿌리친다는 뜻이야(P62).
두 번째 사진, 청소년기(청년기)의 요조는 이제 나날이 위장술이 좋아집니다. 거기엔 여자들을 녹이는 언변과 처세술도 포함돼 있어, 여자들은 어리고 약한 자식을 품에 안듯 요조에게 열렬하다 못해 지고지순한 사랑(죽음도 불사하는, 실제로 그와 동반자살을 시도해 죽은 쓰네코<오사무가 처음으로 연민과 사랑을 느낀 여자임>가 있음)을 보냅니다. 그건 동성인 남성 친구들에겐 엄청난 질투와 시기를 유발하기에 충분하지요. 화방에서 알게 된 친구 호리키는 처음엔 요조의 이용가치를 높게 사지만, 갈수록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물론 효용가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단히 이용해먹으면서요. 남성의 생존본능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여성을 쟁취하려는 욕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하는 여인을 쟁취한다는 논리는 제법 오류가 있어요. 여성들이 거친 마초남만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 보이다가도 어떨 땐 또 엄청난 마력으로 예술적 기량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남자, 그런가 하면 나만이 그를 구제할 수 있다든지 혹은 그러고 싶게 만드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남자. 딱 그랬던 요조를 오매불망 따랐던 여자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여성편력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세상의 이치가 결국 그렇고 그렇다는 것이죠. 죽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 그 놈의 돈 때문에 차근차근 삐뚤어지다가 종단엔 완전히 미치광이들이 되고 맙니다. 교묘한, 백지장처럼 표정 없는 인상으로 역시 불가피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요조의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지 않나요? 저입니다. 뭘 그래요? 당신들이기도 하잖아요?
-신의 사랑은 믿을 수가 없고 신의 처벌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그저 신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 같았습니다. 지옥은 믿어져도 천국의 존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P90-1).
그가 말하는 ‘세상’이란 게 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형일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나는 이른바 ‘세상’이라는 건 어느 한 개인이다, 라는 철학 같은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P93-4).
말도 잃고 웃음도 잃고 이것저것 다 잃은 요조는 동거녀 시즈코의 딸, 시게코를 돌봐주면서 꽤 오랜 세월 소위 ‘여자에게 빌붙어’ 살아갑니다. 동반자살 사건으로 쓰네코가 죽은 후, 두 번째로 만난, 잡지사에 다니던 시즈코의 연계로 요조는 여기저기 잡다한 만화를 연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그녀와 동거하게 됩니다. 이후로 술과 담배, 여자로 요조의 남은 생은 그야말로 환락의 늪에 빠지고 말죠. 이제 그는 가족에게조차 완벽하게 버림받은 채, 경찰서와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묵묵히 죽음을 준비합니다. 죽음은 그가 훨씬 이전부터 계획하고 시도(하다 실패를 보던 중 다섯번째 자살시도의 성공으로 죽게 됩니다)해왔던 것으로, 한편으로 꽤 연기되었다 볼 수 있겠네요. 그래도 한때는 천진무구한 신뢰심(10살이 넘는 나이차로 결혼한 젊은 신부, 요시코의 순결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이후 그녀가 가졌던 자책감을 지켜보면서 요조는 <그녀에게 혐오스러운 지옥의 애무를 퍼붓고 진흙처럼 곯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p120>>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이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것마저도 요조는 드러난 죄의 원천(죄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묘안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의 본색에 불과하니, 새삼 놀랄 것 없다는 듯 자조自嘲하고 맙니다. 바로 그 순간이 인생을 마감하도록 등 떠민 세상에게 응답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죠.
죄와 악 그리고 벌을 대개는 비슷하거나 동일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것도 다 길게 생각하기 싫어해 대충 얼버무려 단순하게 결론짓고 마는, 참으로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다수의 생각입니다만, 요조는 좀 다릅니다. 도스도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그 둘을 동의어가 아닌 혹 반대말로 생각하고선 단지 배열 상 나란히 세워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의문에 착안하다가, 그는 처음부터 그 둘은 절대 섞일 수도 통할 수도 없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외관상 뭉뚱그려진 동의어로 보이는 건 틀림없지만, 기실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개념이 따로따로 존재한다는 것. 그래요. 완벽한 양립兩立적 세계. 헌데 따로따로의 거대 집합체인 세상이 곧 ‘개인’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내가 속한다는 포함관계가 아닌, 동시에 별개로 존재하는 관계. 그러므로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라진다는, 다소 우습지만 삼단논법이 성립되어버리네요. 참 궤변이죠? 별개로 존재한다면서... 어렵지 않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란 말이 있지요. 그렇더라도, 그 어느 한 개인이 포롱 사라져도 수많은 개인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다자이 오사무는 딱 오사무 만큼의 세계를 데리고 간 셈이군요. 그렇게 마지막, 세 번째 사진 속 그는 어떠한 표정(여기선 웃지도 않았어요)이나 인상조차 없는 괴기한 모습이었답니다. 전 그 모습이야말로 아주 처연한 아름다움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참 한입으로 같은 말 여러 번 쓰게 됩니다만, 그게 제 모습이라니까요.
관념적 회의주의고 뭣이고 간에 전 저 나름대로 고백수기다운 리뷰를 써봤습니다. 혹시 ‘상처의 꽃’이라고 들어봤습니까? 헤헤. 제가 급조한 단업니다. 오사무의 다음 문장들을 읽으면 좀 이해가 쉬울까요? -(이건 대단히 기묘한 말입니다만) 그러면서도 그 상처는 점점 내 피와 살보다 더 친해져서, 상처가 주는 고통이 아예 상처의 살아 있는 감정, 또는 애정의 속삭임으로까지 느껴졌습니다(p51). 어떻습니까? 아직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르겠다고요? 잘 생각해보세요. 따지고 보면 존재자체가 ‘비극’입니다. 웬만한 악다구니 없이는 살아내기 힘들단 말이죠. 태어나면서 화통을 구워삶아 먹은 듯 울어 젖히던 당신의 빈 수레를 못 보았나요? 태생이 빈空 것으로 출발했으니 얼마나 채우고 싶을까마는. 전 그렇습니다. 인생사, 공 수레 공 수거라는 게 딱 적절하다 싶어요. 도장 파듯 아무리 파고 파고 또 파헤쳐보았댔자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게 삶이라는 거죠. 기를 쓰고 바닥을 보고자 애쓰는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궁금하지 않겠지만, 그래서 전 아파할 많은 날들이 저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요. 또, 옥에 티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것들에게 부끄러워할 짓일랑은 하면 안 된다? 설령 망신살 뻗쳐도 넉넉하게 웃어넘기면 그만이란 생각입니다. 속으로 변장하고 위장해서 망신살 뻗치나 밖으로 뻗치나 피장파장이니까요. 가끔은 말짱한 정신으로는 그것들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 지나친 광대가 돼야 하는 것도 고역스럽긴 마찬가지거든요. 요지는 나쁜 사람도 없고 악인도 없고 죄도 없다. 그런 환경만 있을 뿐. 죽음도 얼마든지 익살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 뭐 그렇다는.
P. S 오늘의 고통은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나를 폭로하고 당신들을 폭로했는데도 할 말을 미처 다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건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해야 될 일이고... 제기랄! 난 인간실격이야! '친구야! 반갑다'면서 다자이 오사무 씨가 엄청 반기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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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인상적인 글귀들이 보통 열에서 스무 구절 정도 나오기 마련인데, 이 책은 고작 백여페이지 남짓인데 포스트잍이 서른 개는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라 그렇겠지요. 곧 죽을, 평범하지 않은 스스로를 담담히 술회하고 있으니까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광대짓으로 승화시키고,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두꺼비 같은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괴리시키고, 우연히 나타난 신뢰의 화신에 희망을 걸었다가 신뢰가 낳은 결과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고백하는 요조... 그러나 스스로 미친 척 했을 뿐, 미치지 않았던 그의 연기는 동료와 형제의 배신에 의해 정신병원행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르다는 것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끊임없이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나와 다른 인간의 존재는 매우 두려운 것이겠지요. 하지만 상대방도 두려워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하는만큼 상대방도 피해주는 것을 두려워할지도 모르지요..
요조는 스스로를 인간실격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자칭 인간실격인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적어도 내 두려움을 극적인 폭력으로 표출하지는 말자고 되뇌어 봅니다. 적어도 맘대로 맨정신인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말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책감을 덜 가져도 될테니...
누구나 다 인간실격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잘나봐야 얼마나 더할까요? 그의 고백에 감사합니다. 죽기 전에 진솔한 고백을 통해 재미를 느끼게 해줘서,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게 해줘서, 당신을 정신병원에 쳐넣고 싶지 않고 싶어져서... 근데, 멍청한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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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이라는 제목부터 우울하고 무섭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나 다름없다는 이 책은 요조라는 남자의 수기형식으로 쓰여졌다. 우리가 '인간답다'라고 말하는 인간은 인간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꾸며진 인간인 것 같다는 아이러니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 외에 단편들도 작가의 시니컬한 문체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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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읽을 때에,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 항상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경우는 그의 주요 작품들이 대부분 그의 자전적인 부분을 반영하고 있기에 작가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는 필요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것은 읽어야 할 글이 <인간실격>일 경우 더더욱 그렇다. 세계 문학의 숲의 네 번째 작품으로 읽게 된 <인간실격>은 이미 한 번 읽었던 경험이 있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접하는 소설을 읽기 전과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기대가 컸는데, 그건 내가 예전과 다르게 좀 더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내 기대는 들어맞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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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기를 치면서도 다들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ㅡ p. 26 불행. 이 세상에는 온갖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아니, 불행한 사람들만 있다,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불행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항의할 수 있고 또한 '세상'에서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불행은 모조리 내 죄악에서 나온 것인지라 어느 누구에게 항의할 도리도 없고, 또한 우물우물 한마디라도 비슷한 소리를 한다면 딱히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모두 어떻게 그런 뻔뻔한 소리를 하느냐고 어이없어할 게 틀림없습니다. ㅡ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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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족 출신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미처 읽지 못했으면서도 하도 많이 들어서, 왠지 친근한 제목의 책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을 수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시공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 <인간실격>은 <인간실격>과 다섯 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실격>, 제목부터 범상치가 않다. 참된 인간이 되려면 어떤 기준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기준에 모자라는, 다시 말해 실격되는 사람은 인간의 자격이 없단 말인가? 소설은 어느 소설가가 다자이 오사무의 페르소나로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요조가 남긴 노트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요조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병치레를 많이 한 유약한 소년이었다. 애늙은이 같은 요조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월등한 조건의 삶을 불신한다. 도대체 무엇이 행복이고 불행이란 말인가? 문득,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바로 이럴 때, 조숙이란 말을 사용하는 게 아닐까.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철저하게 고독하고 음울한 자신의 본질을 숨긴다. 그래서 요조는 광대 짓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을 기만하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왜 요조는 가족에게까지 광대 짓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인간관계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이 문제였을까? 게다가 학교에 들어가서 백치 같은 급우에게 자신의 광대 짓이 노출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서 수려한 외모에 고독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요조는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불안”한 존재로 거듭난다.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심리묘사를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 요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들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요조의 매력은 광휘를 발할 뿐이다. 유부녀와의 정사(情死) 사건으로 집에서 쫓겨난 요조의 일탈은 가속화된다. 그나마 믿었던 불한당 같은 친구 호리키 마사오에게 환멸을 느낀 요조는 먹고 살기 위해 무명의 만화가로 변신한다.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패전국가 일본의 니힐리즘이 느껴졌다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다시 여기에서 왜 아무도, 요조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요조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우연의 개입으로 정상적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데 실패한다. 담뱃가게 아가씨 요시코의 때 묻지 않은 순결함에 반해 급작스럽게 결혼에 골인하지만, 스스로 묘사한 대로 ‘살아 있는 시체’는 완전한 타락과 파멸로 치닫는다. 요시코와 관련된 결정적 사건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객혈-알코올 중독 그리고 최후에는 모르핀 중독에 빠져 그만 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의 종착역은 요양원이 아닌 정신병원이었다. <인간실격> 외에 나머지 다섯 편의 단편에서는 대표작에 버금가는 아우라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개 이야기>에서는 개에 대한 원한으로 개의 심리를 연구하는 “요조”스러운 인물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에서 개를 ‘인간’으로 바꾸면, <인간실격>의 그것과 주제 면에서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개를 피에 굶주린 맹수로 묘사해서, 동물애호가들이 보면 진저리를 칠지도 모르겠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요조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파멸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의 캐릭터는 상당 부분 그의 삶에서 추출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가의 삶과 유사성을 담보한다. 명문 화족 출신으로,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벌인 치열한 투쟁도 사실은 모두가 인간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모두가 타자의 주목을 받게 되는 발화점이 되긴 했지만. 시대를 앞서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작가가 그린 ‘우울의 가람’을 거닐며, 인간에 대해 곱씹어본 독서였다. ...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투는 이처럼 까다롭게 어딘지 애매하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숨어 있고, 거의 무익할 만큼 엄중한 그 경계심과 수도 없이 뒤엉킨 쩨쩨한 계산속에 나는 매번 당황해버립니다. (7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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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괴로웠다. 앓아 누웠다. 거의 모든 모습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요조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무서움과 공포를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당스라는 익숙치 않은 용어가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요조가 가지던 공포와 우울을 몇 년 동안 계속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 한동안 다시 이 책을 볼 수가 없었다.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로 극히 예민하고 공포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공감이 커서 나 역시 이러한 삶을 지속하는 게 가끔은 옳을까 자문했다. 요조와는 다르게 그동안 나는 뻔뻔함과 무시를 익혔다. 그래서 다시 다른 번역본이지만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마지막에 요조를 회상하는 술집의 마담처럼 요조를 착하기만 했던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공감이 가는 쪽은 술집 마담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요조와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요조가 흥미로운 점은 엄청난 예민함과 공포를 가지고서도 그 삶을 이어가려고 사람들을 웃기며 그 안에서 살아나가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가끔 그가 가진 내면을 꿰뚫어보는 이가 있었지만, 그런 가면극을 하면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특히 여성)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요조는 이에 대해서도 편하게 느끼지 않았겠지만 그가 가진 감성은 그만이 가진 특별한 것이라서 사람들은 이유를 몰라도 그에게 끌렸던 듯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만한 감성과 예민함을 느껴보지도 못했을 것인데 왜 가혹한 삶이 그에게 떨어졌던 것일까? 누군가는 그가 의지 없이 삶에 휩쓸렸다고 평가하겠지만, 내 눈에는 꽤 삶을 붙잡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민음사 판본과는 다르게 뒤에 포함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이 눈에 띄었는데 개를 무지하게 싫어하지만 결국 다른 어떤 이보다도 개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단편의 주인공이 요조와 비슷한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이는 그 누구보다도 요조가 아닐까? 요조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기가 힘들 것이다. 쉽게 져버리는 꽃과 같은 삶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요조와 같은 인생을 산 듯하다. 신문에 연재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 다자이 오사무에게 나약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으리라고 으레 짐작해본다. 엄청난 플롯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탓에 세대가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그리고 요조의 삶을 응시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그와 같은 삶을, 또는 무시하고 보통 사람들의 품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아가겠지만 확실히 이 책을 읽은 전과 후는 나에게는 너무나 다른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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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인연이 있어야 만난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사람을 골라 스스로 찾아오기도 하고, 또는 억지로 오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무슨 인연이 있어서 나에게 왔을까. 이 책은 나의 어떤 점을 꽤뚫어 보고 이렇게 스스로 찾아 온 것일까. 왜 나에게 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인간실격>이라는 책을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고, 다자이 오사무라는 인물에 대해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이끌려서 이 책에 관심을 보였고, 또 이 책은 신기하게도 나의 손으로 들어왔으며, 그대로 방치해두어 될 책을 왜 나는 집어 들고 읽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무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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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우울한 시대의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자신의 내면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 것도 같다'라는 그 가벼운 말과 태도-―물론 스스로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는 직접 내면의 밑바닥,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내려가 본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픔과 상처가 될 잔인한 가벼움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느낀 감정들에 무척 가까웠다고 여기지만 대놓고 그랬다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동정을 원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필요없으니 제발, 알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알량한 공감따위는 집어치우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을 주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수기형식의 소설을 남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타인을 위한 글을 썼던 다자이 오사무가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썼던 다른 글들은 어찌보면 가면을 쓴 다른 얼굴을 한 다자이 오사무가 쓴 글일지도 모릅니다. 언뜻 <인간실격>에서 내비친 숨겨진 본 모습이 다른 글들에서도 순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깊어지려하면 재빨리 숨기며 무서워하고 바들바들 떨며 순진무구한 가면의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번뜩이는 눈을 하고,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매끄럽게 물흐르듯 줄줄 이어지는데 그것이 제가 본 <인간실격>의 모습입니다. 물론 소설 속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새로 번뜩이는 눈마저 숨겨놓고 내리깔며 바들바들 떨고있었지만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결국 세상에 남겨지는 것은 음악과 그림, 글과 이름 뿐인 세상에서 자신이 살다갔다는 존재의 이유가 될 무엇인가를 남기려했던 작은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났고, 이 소설을 쓰고 있던 당시에 마음은 이미 끝나있던 상황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 시간동안 끝을 준비하고 마무리 지으며 장식하는 마음으로 수기를 완성했을 것입니다. 결국에 그런 작은 몸부림이 세상에 남겨져 바다건너 타국에 있는 한 사람에게도 전해졌으니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아무튼 뚜렷하게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는 모르겠다만 성공이긴 성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의 성공은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성공이라 그의 '실격'은 수많은 실격 당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하고 있고 마음먹고 있다고 그들이 다 같은 통찰은 보이질 못할 것이고, 같은 것을 보고 자신은 알고 있다고 인지할 지라도 표현하는 능력에서 격차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의 실격은 외적인 모습과 재능에 의해 한층 더 돋보이고 화려하며 꽤 멋있어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꽃피우지 못한 수많은 실격자들 보다도 반발의 차이만큼은 양지에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참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세상의 인간실격자들과 다자이 오사무와의 단 하나 크고 중요한 차이점은 우린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그런 살아있음 조차도 타의에 의해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마저 결정하지 못한다면 실격이라는 그 '격'도 없는, 그러니까 명함도 내밀어 보지 못한 잉여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이 책이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은 알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 또렷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실격>은 알았는데 그럼 나는 어떡해야하는가. 이 책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이 소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에게 전혀 폐가 되지 않을 만큼 전적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공감하는데, 그럼 나는 이 글을 본 다음에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그걸 모르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이 묘하게 가슴 속에서 불안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슬프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온 몸에서 힘인지 영혼인지 모를 무언가가 빠져나가 한없이 나약해고, 없던 병까지 생겨서 결국에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아직까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내가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맞물리지 않는다는 불안감, 나는 그 불안감 때문에 밤마다 뒤척이고 신음하고 자칫 미쳐버릴 뻔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어렸을 때부터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항상 지옥 같은 마음뿐이고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도리어 나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5쪽)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자신의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그리고 나만의 깊은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춰두고서, 그 우울과 긴장을 꼭꼭 감추고 또 감추며 오로지 천진한 낙천성만 있는 척 나는 장난꾸러기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건 얼마나 만만하고 어리석은 짓인가.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신의 주관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한 것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표현의 기쁨에 젖는다. 즉, 타인의 생각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화법의 원초적인 비전을 다케이치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40쪽) 나와는 또 다른 형태로 역시 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 완전히 유리되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만은 분명 똑같은 부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광대 짓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게다가 그 광대 짓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45쪽) 아침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자 나는 원래의 경박하고 가식적인 광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분명 있습니다. 더 이상 상처를 입기 전에 어서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 예의 광대 짓이라는 연막을 쳤습니다. (62쪽) 세상. 어쩌면 나도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게다가 그 자리에서만의 투쟁이며 게다가 그 자리에서만 이기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앙갚음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때 그 자리의 단판 승부에 의지하는 것 밖에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부르짖지만 모든 노력의 목표는 반드시 개인, 개인을 뛰어넘어 다시 개인. 이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큰 바다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개인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의 환영에 겁을 먹는 데서 약간은 해방되어 예전처럼 한없이 온갖 고민을 하는 일 없이, 이른바 우선 당장 급한 필요에 따라 얼마간 번뻔스럽게 처신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9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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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참 안타까웠다. 일본의 천재적인 작가라 불리는 인간들은 왜 죄다 자살하려 안달했단 말인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등등 자신 스스로 목숨줄을 끊어버렸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도 사랑하는 연인과 강물에 뛰어들어 물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무라이 정신이 유전으로 남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니 자신 또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존경의 수단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오죽했으면 현재 일본에서 100년만에 나올까 말까한 천재로 불리는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찍 요절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살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그래서 왠만하면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분명 자살하기까지 어떤 명분이나 자신만 아는 이유들이 있겠지만 독자된 입장으로써 상당히 아쉬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더이상 그 작가의 작품들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일찍 요절을 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팩트라 하기보다는 그렇게 믿는 것이 더 아름답기 때문은 아닐까? 왠지 그 작가의 삶이 짧고 굵게 한 방 크게 치고 퇴장한 것 같이 가슴속에 공허한 빈터만이 남아있다. 그 빈터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펼쳐 그 작가의 생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분명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가 정신병원에 갖혀 있을 때 상당한 충격으로 <인간실격>을 쓰고자 결심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짧은 단편소설인 <인간실격>에 다 담은 것일까? <인간실격>은 인간 다자이는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말투의 전개로 어렸을 적 집안의 배경과 느낌, 자신이 어떤 인격을 가졌으며 어떻게 삶을 버텨나갔는지 세세히 기록해나가고 있다. 물론 1인칭으로 써내려가지만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편지형식인 것이 색다르다. 일본의 가정의 정통적 문화를 이해하려고 받아들이려 하지않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꾸역꾸역 맡은 역활을 해나간다.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심신이 약했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디서든 눈치를 보며 일정한 환경속에 끼어 무색무취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껍데기를 최대한 가리기 위해 광대 짓도 곧잘하는데 혹시 누군가 눈치를 챌까봐 계속해서 전전긍긍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어떤식으로 펼쳐지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인간실격>을 읽는다면 다자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단편소설인 <로마네스크>와 <개 이야기>는 다자이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실격>은 다자이의 자전적인 성격이 짙기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데 순수한 창작인 이 두 작품은 그의 뛰어난 이야기꾼의 재치와 유머를 엿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는 제각기 개성이 다른 세 명의 달인이 결국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완성되는 구라의 미학을 보여준다. 먼저 선술의 달인과 싸움의 달인, 그리고 거짓말의 달인. 이 세 명의 달인은 자신들의 특기인 선술, 싸움, 거짓말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인 이들의 만남으로 달인이란 칭호는 예술가로 남는다. <개 이야기>는 일본인의 성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개를 무서워 하는 주인공은 필시 개가 분명 자신을 물거라는 허무맹랑한 상상 때문에 개만 보면 웃음띤 표정으로 적대감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핑계는 이렇다. '개가 자신을 물면 한 달 정도는 병원에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얼마 전 내 친구도 개에게 물려 일도 못하고 돈을 축냈다. 그러니 개에게 물려서는 안 된다.' 이런 핑계로 개에게 사근사근한 미소를 흘리며 지나가는 어느 날, 어이러니하게도 개들은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다. 닥스훈트는 그를 집까지 쫓아 오며 끊질길 애정공세가 먹혀들어 주인공 집에 정착한다. 그때의 핑계도 이렇다. "이 개를 쫓거나 해를 끼치면 분명 이 개의 친구들까지 불러 복수를 하게 될거야.' 결국 계속된 핑계거리를 만들며 아주 극진하게 대접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개를 싫어하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그는 닥스훈트를 자신이 데려와 키우는 데까지 이르렀지 않나? 분명 자신은 개를 극히 혐오한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인간실격>에도 나오지만 다자이는 일본인들은 속을 알 수 없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인들의 알 수 없는 마음, 예상치 못한 행동을 <개 이야기>를 통해 비꼬려는 시도는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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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책은 몇 년전에 두 권을 읽었었다. 그중 하나가『달려라 메로스』였고, 또다른 하나가 바로『인간실격 · 사양』이었다. 이미 읽은 작품을 왜 또 읽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인간실격을 제외하고는 내가 처음 읽는 단편들이라 그 내용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실격>을 몇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그때와는 또다른 느낌을 받기도 했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느껴지는 감정은 여전히 이런 사소설을 읽는 건 조금 불편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단 것이다. 사소설은 일본 문학의 한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작가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기자신을 내세운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실격>은 사소설의 두가지 경향 중 '고백소설'에 속하는 작품으로 '인간실격'이란 단어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자기 비하적인 경향이 강한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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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서 여호와고 뭐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p.25)
나는 요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라온 환경을 통해서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지저분하고 어두운 면, 치졸하고 역겨운 면에 적잖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게 삶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연히 심취하게 된 종교의 영역에서 잠시나마 빛을 본 것 같기는 했지만 그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종교 안에서의 인간의 이기심과 구별짓기, 탐욕의 형태는 더 고도화되어 있는 시스템으로써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미치게 했다. 결국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절대 진리는 없으며 다만 거대한 어떤 흐름의 일부분으로서 지금의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의미나 가치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도 배부른 사람들이 지껄이는 유희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계시와도 같은 힘은 느끼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좀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욕구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하고, 허영심이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한, 색과 욕이라고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봐도 좀 부족한,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은 아닌 이상한 괴담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p.50)
인간 같잖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짐승의 탈을 쓰고 있는? 아니다. 짐승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며 왜 사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조건에 맞춰 흥청거리며 살거나 거지처럼 살거나 절망하며 사는 게 다인 것 같다. 예전에는 뭔가 꼭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이나 진리? 혹은 윤리 같은 것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그런 것은 헛소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생을 양심을 지키며 고귀하게 살던 훌륭한 분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가 하면, 당장 벼락에 맞아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인간 말종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현실에 포장질을 해대는 역겨운 성인군자들은 아마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거나 머리가 이상해져서일 것이다.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 위선을 떨다 못해 마비 상태에 이르렀으니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옳고 그름 등을 바꿔서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사실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순응해야 하나? 저항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관망해야 하나.
비합법(非合法) 나는 그것이 적잖이 즐거웠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쪽이 마음 편했습니다. 세상에 통하는 합법이라는 것이 무섭고(거기에서는 수렁처럼 강력한 것이 느껴집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하고, 그 창문도 없이 뼛속까지 냉랭한 방에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비합법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는 게 나에게는 더 마음 편한 일 같았습니다. (p.50,51)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백지 상태에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살아가야 했기에 이해하는 척 연기를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기본적인 욕구나 이기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원리가 지독한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라리 짐승들처럼 본능에 충실했으면 덜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뒤로는 온갖 더러운 행태를 일삼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뻔히 보이는 이중성을 서로 묵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주인공 자신도 그렇게 변해가는 과정을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죽는 순간까지 끌고 간다.
나에게 ‘세상’은 역시 끝없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결코 그런 단판 승부 따위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p.106)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공은 절대적 신뢰와 순수한 아름다움, 순결의 상징인 한 소녀와의 동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도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이내 확인하고 만다. 한 사람의 목숨을 건 도전도 그저 곧 가라앉고 말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하고 센스 있고,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던 그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오늘날 자기들만의 정의를 가지고 입씨름하고 크게는 미사일을 쏘아 대며 피를 보고야 마는, 문화를 운운하고 문명, 인권을 지껄이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삶에 옳고 그래야만 하는 정답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 필요가 없었다. 주어진 그대로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 의미 없는 죽음이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고뇌에 찬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실격’ 외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들 - ‘물고기비늘 옷’, ‘로마네스크’,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개 이야기’, ‘화폐’ 가 기다리고 있다.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공허함, 외로움, 허영심을 짧지만 깊이 있게 다룬 수작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조금 슬프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독히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진짜 인간으로서 실격되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