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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권익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착취의 만행이 그 잘난 이성으로 무장된 인간사회에서 근절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는 내내 무참함과 분노가 짐승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돈이라는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거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은 존재치 않는 세상이다. 인간에게서‘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수식적인 그럴듯한 의미만으로 사용되고, 정신의 숭고함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인 효율지상의 물신주의의 단면을 어린 소녀의 고귀한영혼의 외침 속에서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아홉 살 어린 소녀가 애비의 손에 붙들려 천진난만한 불안과 호기심속에 대도시 뭄바이로 이끌려가는 여정부터 그 심산(心酸)함이 가슴을 억누른다. 자신을 포주에게 넘기고 돈뭉치를 건네받으며“기뻐하면서도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의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바툭’의 망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포주의 손에 끌려가면서,“아빠, 날 데려가줘요, 제발.”하는 그 간절한 절규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듯하다.
더러움이 켜켜이 쌓여만 가는 쇠창살이 쳐진 화장실만한 작은 방을“황금으로 만들어진 자궁”이라고, 그 속성을 버리지 않은 채 화려한 공간으로 상상하는 소녀의 삶을 견뎌내려는 안간힘에서 참았던 내 인내도 무참히 무너져 내린다. 아동의 노동과 성을 착취하는 공공연한 장소가 되어버린 고아원의 수심(獸心)만 무성한 인간사회의 더러운 거래가 적나라하다. 창녀가 된 어린 아이들이 출산한 유아는 또 다른 생산물이 되어 거래되고 착취의 도구로 이용된다. 어디에도 이성으로서의 인간의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소설은 사창가에 팔려간 아홉 살,‘바툭’이 열다섯 소녀가 되기까지 6년간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의지이자 결연한 자존의 출구로서 쓰인 비밀 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바툭은“뭄바이 커먼가(街)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다.”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 소위‘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주기(성적 향응)’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자신의 휴식시간을 조금 더 얻어 내는 지혜임을 깨달을 정도로 적응하고, 그래서“넌 그중 제일 맞잇는 케이크야”라고 포주에게 환대를 받는 창녀로 성장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삶의 가닥이 완전히 끊어진 듯한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손님을 받고 난후 잠간의 휴식시간이면 숨겨둔 파란공책(Blue Notebook)에 이야기를 쓰며, 자신을 투영하는 유일한 즐거움이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는 중간 중간에 손님을 받는 것이라고 내면의 질서를 승화시켜 나간다. 또한 고향 마을 강가에 나가 강물의 소리와 물위의 아른거리는 햇빛에 매혹 되곤 했던 시절의 기억은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위로가 되 주었듯이, 험한 커먼가 역시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강물이라 위안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린 소녀를 포위하고 있는 온통 사악하고 잔인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선 반복되는 엄청난 감정들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대부호의 자식을 위한 노리개로 팔려가‘히타’라는 하녀에게 안겨 봇물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강물 내음이”, “내 고향 내음이” 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열다섯 소녀에게서 그 북받치는 감정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부도덕과 정의를 논의할 공간이 없는 가진 자들의 파탄된 정신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물론 고통에 대한 공감이란 인식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착취, 학대, 폭력, 그리고 살해에 이르기까지 보호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삶이 다시금 인간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깃덩어리를 달라고 애원하는 늙은 개 같은 표정”을 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소설을 외면치 않고 마지막 까지 읽어내는 것은 정말 힘겨운 작업이 된다. 비록 사랑에 대한 이해로 맺는 어린 소녀 바툭의“은빛 눈동자를 지닌 표범”이야기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마지막의 간절함이 되어 울리지만, 세계의 어디에선가 신음하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환영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까지 잠재우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자행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의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세상에 경쟁적으로 몰입하는 바로 우리들 말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제발 이러한 세계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세계, 그 아이들이 바로‘나’자신으로서 이해 될 수 있는 가치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세계 말이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써내려간 어린 창녀의 처연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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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가을 바람이 분다. 오후 내내 낮은 비행을 하던 새들이 기어코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피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싱크대 앞에 선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컵에 우유를 붓고는 데우려다 바깥 공기와는 다르게 열이 오르려는 몸을 식히려, 커피 두 봉을 탈탈 털어 얼음 가득 냉커피를 탄다. 저녁 식사 후, 배가 부르지않음에 맥주 한 캔을 들이킨 탓이리라. 무릎 위에 베개를 얹고 그 위에 책을 올려 읽던 부분을 체크해 둔 책갈피를 걷어낸다. 어린 창녀, 바툭이 오롯이 그곳에 서 있다. 그녀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뭄바이라는 곳의 사창가에 버려진, 달리 운명을 어쩌지 못해 살아가고 견뎌내는 바툭의 이야기.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름을 문질렀다. 그러면 좀, 그녀의 삶이 나아질까. 그러면 좀, 그녀가 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그러면 좀, 안타까운 마음들을 추스릴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음에도 여러차례 문질러댄다.
바툭, 그 어린 창녀는 자신이 치뤄내야하는 성행위를 달콤한 케이크를 굽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결단코, 그 달콤한 케이크로 비유한 바툭의 일은 개개인이 갖는 투철한 직업 정신도 아니요, 이상적인 꿈도 아니다. 세상 어느 누가 평생을 욕정의 그늘 아래 굴복되어지는 삶을, 꿈꾸겠는가. 뭄바이의 커먼가, 초록색 커튼이 쳐진 쇠창살의 방에 바툭, 어린 소녀가 산다. 그리고 푸른 노트에 글을 쓴다. 지나온 과거와 살아가는 생, 그리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적어내린다. 글을 쓰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빼앗기고 산산히 무너져내린 자신의 삶을 겹겹이 두르고 둘러 온전히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사살하 듯, 필사적으로, 그렇게.
나는 분명하고 명확한 존재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똑같은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달콤한 케이크를 만드는 존재일 뿐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고, 호흡을 하고, 달콤한 케이크를 굽기 위해 몸을 움직일 뿐이다. p. 231.
아버지의 손을 잡고 뭄바이로 건너오던 바툭의 삶은 어두운 계단을 오르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을 보는 순간 깨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케이크를 굽고는 (아동 성폭력, 즉 강간이지만 그녀의 비유를 따른다.) 제 스스로 소멸해버리듯 증발해버린다. 정체성의 증발, 존재의 증발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증발한다. 생에 대한 체념, 포기하여 받아들이는 의지력 잃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고아원을 거쳐 커먼가로 돌아오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년, 소녀들을 만나 비열한 평화로움속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권력. 휘황찬란한 호텔에서 바툭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져내린다. 순간, 바툭이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은 두 팔을 옥죄던 손도 아니요, 가슴위를 누르던 몰상식한 힘도 아니요,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미던, 그, 그, 치욕스러움도 아니요, 단 하나, 오로지, 이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 하나. 다만, 그 작은 바램 하나 뿐이었을텐데.
스스로의 위선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위선을 넘어서려는 사람은 과연 타인에게 어떠한 상처를 아로새기는 것일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새하얀 시트위에 상체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어린 여자, 검푸른 멍자욱이 눈 밑을 드리우고 짙은 달 밝은 어둠이 걷히어 해가 떠오르기를, 바라는, 어린 소녀가 표지에 스러지듯 누워있다. 바툭, 뿐만이 아니리라. 타자기에 올려진 손가락이 단어를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아픈 그 모든 영혼들이 구원되어지기를. 그 맑은 영혼들, 부디 머리카락 한 올 다치는 일 없기를. 감히, 염원해 본다.
내가 가는 길이 비참하다고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판단은 편견이 드리우는 그늘이다. p.284.
체념이었다고, 말해두어도 괜찮을까. 아무리 손을 뻗어보아도, 아무리 발길질을 해 보아도, 잡아주는 이가 없어, 닿는 곳이 하나 없어 그저 무너져내리는 자신과 마주하는 일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없어 진작에 미래 없는 삶을 택해 타락했노라고, 그것만이 그동안과, 현재를 견디게 해 주는 원초적인 체념에서 온 것이라고 .. . 조그마한 목소리로 기침을 해대며 못내 뱉어내지 못한 가래 끓은 바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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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노트북'
이야기의 맨 처음으로 가보겠습니다.
'이 책은 도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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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처럼,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판타지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 괴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의 소리가 들리는 <블루 노트북>. 무대는 인도이다. 인도는 철학과 종교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나의 사고를 완전히 깼다고 해야할까.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인도 붐바이의 사창가로 아홉 살 때 팔려가 모진 세월을 살아가는 열다섯 살의 소녀 '바툭'이다. 인도의 약 50만 아동 성노예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정말 이렇게 어리고 어린 아이들이 성인 남자들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인간으로써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이런 스토리를 어른의 시각으로 말하지 않고, 딱 열 다섯, 그러니까 바툭이 직접 화자가 되어 끔찍한 실상에 블루색을 잎힌다. 친구 푸닌 역시도 남자 아이의 성노예. 바툭과는 서로 어려운 점을 나누고 따뜻하게 감싸며 위로하는 금쪽같은 친구이다. 천 루피를 모으면 영국이나 미국으로 도망 가고 싶어하는 이 왕자님은 도망갈 수 있음에도 바툭을 위해 옆에 있어 준다. 하지만 푸닌의 끔찍한 사건은 읽는 나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그 행위 자체를 '달콤한 케이크'라고 부르는 바툭. 그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자신의 몸을 오븐으로 표현하면서 오븐에 진흙을 굽고, 단단하고 유용한 그릇이 될 때까지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불쌍한 이 아이들을 난 뭐라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그냥 읽는 내내 마음이 몹쓸 고통으로 찌들어졌다. 이런 내용인지 알고 읽은 책이지만, 이토록 적나라할 지 몰랐다. 그것도 끔찍한 행위들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묘사해서 동화처럼 꾸밀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책의 아름다운 표지는 책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냥 바툭은 모자 장수가 나오는 꿈을 꾸는 선한 아이로 평생 살고 싶었을 것이다. 바툭이 써내려가는 이 블루 노트북을 기억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우리 세계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 현실 자체를 직시하라고 일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툭은 많은 삼촌들 사이에서 '7만 5천 루피, 10만 루피'등의 돈으로 불려진 후에 니르에게로 간다. 춤과 노래를 부른 후였다. 니르가 바툭에게 한 짓들이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될 때에는 바툭의 블루 노트북에 적힌 많은 단어들이 더 안쓰럽게 느끼게 했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 자체를 동화시키려고 한 이 아이는 어떤 파도, 어떤 심장이라 말하였다. 이 책을 '도끼'라고 칭한 어느 독자의 말처럼, 또는 프란츠 카프카가 말한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라 말한 것 처럼... 이 책은 온톤 읽는 독자로 하여금 절망과 고통을 채워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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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할려는게 뭔지 잘 모르겠다. 처음엔 바툭이 처한 상황과 푸닛이라는 소년의 상황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상상도 하기 힘든 처절한 상황 때문인지 괴리감마저 들었다. 몸을 파는 15살 소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글쓰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얘기를 만들고 주위에 모든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대화를 하고... 그 모습이 9살때 아버지 손에 사창가로 팔려 온 소녀의 유일한 위안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기가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굉장하다. 하지만 결국 그 글쓰기로 인해 소녀가 죽음을 맞이 하는 장면은 이 소녀에게 이 글쓰기 득이였을까? 실이였을까? 하는 허탈감도 안겨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한쪽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리고자 쓴 글 치고는 현실감도 내용도 부족한 느낌이다. 또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의 모습을 묘사했다기 보다..결국 작가도 소녀를 창녀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소녀를 사창가로 파는데 일조한 가힐이라는 인물을 소녀가 썼다는 짧은 글에서 가힐이라는 인물을 공주가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11살 된 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주인공 바툭의 짧은 일생에 맘은 아프지만.. 내 딸이 이 책을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는 소설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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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 공책에 글을 쓰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그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언젠가 이 공책을 펼쳐 읽으며 옛날을 돌이켜 볼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구부러진 철을 온전히 똑바로 펼 수는 없다. 단지 덜 구부러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p.81
인도 뭄바이 커먼 가,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바툭. 어떨 땐 하루에 여러번이나 남자들과 함께 '달콤한 케이크를 굽는'다. 마음을 서로 의지하는 푸닛이라는 친구도 있다. 그들은 뭄바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매춘부이다. 오지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고 있던 소녀였던 바툭은, 아홉 살의 어느 날 아버지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커먼 가에 오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자기 앞에 닥칠 상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홉 살 소녀는 그렇게 창녀가 된다. 혹독한 삶이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하나의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우연히 포주가 떨어뜨린 연필을 주워든 그녀는, 남몰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런 글쓰기는, 그녀에게 절박한 생명줄이다. 그런 그녀에겐 어떤 일이 닥쳤을지.. 그 가혹한 삶의 기록인 <블루 노트북>.
실제로 저명한 의사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은 이 소설을 결정적으로 탄생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 연구를 위해 인도를 다니던 중, 참담한 삶의 한가운데에 놓여 푸른 공책에 무언가 글을 써내려가는 한 아동 성노예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를 모델로 했을 열 다섯 살 소녀 바툭을 만들어냈다. 아니, 실제로 열심히 글을 끄적이던 소녀를 재구성했을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만든 이야기ㅡ치고는 상당히 섬세하다. 열 다섯 살 소녀의 마음을, 창녀촌에서의 생활, 그 이전의 또다른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한 소녀의 목소리로 듣고 있노라면, 그녀의 생활이 참담함에도 훨씬 인간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든 것에 흠칫 놀란 것 역시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푸른 공책의 기록에 이어, 바툭은 시내의 호화로운 호텔로 향한 바툭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녀를 데려온 이들의 눈을 피해 기록한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훨씬 더 강해진다. 호화롭게 살며 서로를 속이고 조롱하는 삶, 그리고 비록 신체는 참담하게 유린당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결코 잃지 않았던 소녀. 누가 더 존엄성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든 생각이다.
책을 왜 읽느냐ㅡ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양각색일 거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재미'다. 마음의 양식, 뭐 좋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문학이란 그저 입시를 위한 수단이었고,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 수많은 작품들을 공부하며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기보다는 선생님과 함께 그 작품을 샅샅이 분해하기에 바빴다(아니, 선생님이 분해하고 해석하신 내용을 받아적기에 바빴다). 그래서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여유 따윈 없었고, 그 사이사이에 가끔 읽곤 했던 장르소설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그 영향을 받아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탐독했었고, 그것은 지금도 내가 책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장르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이런 이야기가 있다ㅡ하고 굵직한 줄거리를 잡아낼 수 있다. 하지만 <블루 노트북>을 읽으며 이 이야기를 소개하라 한다면 뭐라고 소개할까, 생각해보니 참 난감했다. 명확한 줄거리보다는 한 소녀의 삶을 온전히 그려낸, 이런 형태의 이야기는 상당히 오랜만에 읽어 그 낯섬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느냐, 아니다. 상당히 재미있었다. 별 감흥이 없느냐, 아니다. 어쩜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탄했다. '글쓰기'의 힘을 내가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소녀의 삶을, 글의 힘을 빌려 온전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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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주인공 ’바툭’이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예감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우 아홉 살 난 딸 아이가 타인도 아닌 친부모인 아빠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생명의 고귀해야 할 인생이 비인간적인 어른들로 인해 말로는 차마 형용하기 힘든 아픔을 겪는 모습이 [블루 노트북]을 통해 들춰지게 된다. 바툭의 어린 창녀로의 경험과 바툭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그 세계의 암흑의 공간에는 지독한 잔인함과 인권유린을 서슴치 않는 비인간적인 어른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녹아져 있다. 인간의 잔인함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블루 노트북]을 읽는 내내 섬뜩한 마음을 진정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지독하고 섬뜩한 이 이야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는 나를 발견한다. 나에게도 네 살난 딸아이가 있다. 요즘에도 끊이질 않는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 사고의 소식들은 딸을 가진 부모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양심과 도덕성을 뒤로한 채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불사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음에 다시 한 번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블루 노트북]은 인도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 열 다섯 살 창녀 ’바툭’의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 시작부터 편치않은 마음으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블루 노트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단 ’바툭’만이 이야기가 아니라 사창가의 어린 소녀, 소년들의 숨은 이야기, 특히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바툭이 말하는 고아원의 충격적인 생활상을 목격하게 된다. 푸닛에게는 새장 같은 방과 이 길거리 외에는 다른 현실이 없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이곳이 전부다. p.114 아홉 살 부터 열 다섯 살.. 부모의 사랑 속에 마음껏 행복해야 할 나이에 가히 상상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바툭의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할까? 이제는 탈출구를 찾은 듯한 바툭의 마지막은 병원이었다. 앞으로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과연 병원을 퇴원한 후 바툭의 삶이 궁금해진다. 과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부모가 바툭에게 인륜으로는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너무나 큰 죄와 상처를 입혔다. 바툭이 푸닛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어 다시 한 번 좌절하지 않기를... 그렇게 끝까지 바툭은 나의 마음에서 아픔으로 남은 어리기만 한 소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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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이고 묘한 느낌을 주는 표지를 보고 끌리고
어린 바툭은 부모에 의해 사창가에 팔려가고
바툭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린 바툭은 너무나 잔인한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하면서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바툭은 잘 견딘다.
바툭의 환경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서
마지막 부분에 바툭이 당한 가혹한 행위는
모든 삶은,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데
인도 최대의 사창가인 뭄바이. 물론 그 상황을 스스로 선택한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강하게 빠져들 것 같은 느낌과
어린 소녀 바툭을 위로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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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분노와 한탄이 이어졌다. 극빈지역들의 실태조사를 하다가 뭄바이 사창가에서 글을 쓰는 아동 성노예의 모습에 열다섯 살짜리 어린 매춘부에 대한 이야기... 책을 읽기 얼마전 '친족성폭행'에 대한 주제를 다룬 TV프로그램을 본 후였다. '블루노트북'에서처럼 아버지가 자식의 성을 판 경우도 있었다. 정말 인간으로서 말도 안되는 짓이다. 성을 경매에서 물건 고르듯이 사는 사람들.. 바툭을 물건경매하듯 평가하는 짐승같은 아저씨들 눈초리들이 내 앞에 보이는 듯하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 욕이 절로 나온다. 자신이 사창가로 팔려가는 길에도, 팔린 순간에도 이유를 모르던 바툭.. 그런 인간답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원망도 없이 꿈꾸며 살아가는 바툭이다. 글배운적이 있어 글을 쓰기도, 시를 짓기도했다. (이것이 나중에 바툭을 더 힘들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별것도 아닌 일에 불평불만하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도 함께 찾아온다. 보통의 부모라면 그런일이 생긴다해도 목숨바쳐 지켜내지 못할망정 죄책감도 들텐데, 바툭을 사창가로 팔아넘긴다. 바툭의 아버지는 딸을 그렇게 넘긴 후에 정말 마음편히 살 수 있었을까. 어쨌든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 왜 낳은거야 대체! 자식팔아 돈 벌려고? 다시 분노가 인다. 고아원에서 이루어졌던 야자크들의 만행은 두주먹을 불끈쥐게했다. 무겁게 다루지 않으려 어린 바툭의 눈으로 묘사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호화로운 호텔로 옮겨갔을때 만난 히타가 바툭을 구해 줄 수있지 않을까. 바툭도 나도 기대하기도 하면서.. 가족과의 추억을 그리는 장면에선 울컥하기도 했다. 이프티카의 마지막 만행에선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뻔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모진일들을 견디기에 바툭은 너무 어렸다. 지금도 분명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거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곳에도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이런인간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하는걸까. 바툭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하루빨리 존엄한 인간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덮었다.
- 운명은 잘못된 피신처다.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운명이라고 합리화한다. ... 운명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