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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 이어 원숭이 시리즈 2탄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 나왔다. 지난 번 <원숭이 자본론>을 읽으며 느꼈던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 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남에게 알기 쉽게 핵심을 잘 설명하려면 본인 스스로는 얼마나 더 깊이있고 명확하게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할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발간된 <원숭이 맑스철학>을 읽으면서도 역시 동일한 생각이 들어 혼자 미소지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의 주된 내용은 맑스의 핵심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史)적 유물론' 이다. 역시 원숭이 자본론때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선생님 원숭이에게 강의를 받고 있는 학생들과의 문답 형식이다. 쉬운 표현과 풀어 쓴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식의 서술이니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발간 소식은 다름아닌 저자의 예쓰24 블로그를 통해 접할 수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주문해서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으로 좀 더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의 추억, 그러니까 그 옛날 접했던 '변유'와 '사유'에 대한 기초 서적들의 독서기억과 이를 토대로 소위 '세미나'라 칭하며 정기적으로 토론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기억에 변유에 대한 기초지식 습득은 동녘출판사의 <철학에세이>와 <껍데기를 벗고서>, 백산서당의 <철학의 기초이론> 등을 읽었던 것 같고, 사유에 대한 지식 습득은 역시 백산서당의 <경제학의 기초이론>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 같다. 그 당시 혼자서 꽤나 심각하게 이것 저것을 생각해 보고 고민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지금의 학생들은 이런 책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처음 입학부터 바로 스펙쌓기 등 취업준비를 시작한다는 말이 들리니 말이다.
아무튼, 맑스의 핵심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내용은 내게 꽤나 재미있었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아주 좋은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깊이있게 공부를 했건 안했건 말이다. 저자의 이번 책이 또 다시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커다란 부담없이 편안하고 쉽게 이해를 시킨다는 점이며, 2010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모습을 스스로 비춰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 말미에는 저자가 이 책과 더불어 우리가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 9권(절판된 만화책 1권 포함)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5권(만화1권 포함)이 내가 읽어 본 책이라서 더더욱 반가웠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시작으로 촉발된 금융위기와 세계적인 공황을 야기시킨 탐욕스런 월가의 금융권력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관심밖에 있던 맑스와 케인즈를 부각시켰고, 각종 관련도서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비판적 글 읽기를 할 지언정,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바람을 증폭시켜 본다면, 딱딱해진 머리 속 고정관념을 100% 벗어날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유연함을 발휘하여 이러한 서적의 내용에 대해 정말로 맞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고 또, 스스로 판단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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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인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바로 이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았다. 저자는 현재 민주노동당에서 사람 중심의 참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다. 무언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를 이끌어갈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 저자의 경우는 그것이 맑스철학이다. 그런데 어떤 한 철학자나 철학사상은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저자의 맑스 해석을 비평하고자 한다. 먼저 철학을 크게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나누는 저자의 분류이다. 철학자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작업은 철학사의 흐름을 이해하느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작업은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한다. 칼로 두부 베듯 간단히 나눠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신을 실존주의자라 분류하는 것에 대해 카프카는 분명 반대하였다. 저자는 떡갈나무를 예로 들며 나무라는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관념론으로, 떡갈나무 한 그루라는 개별자만이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을 유물론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중세 말기에 쟁점이 되었던 이 '보편자 논쟁'을 통해서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분류하기 보다는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의 잘못된 분류는 책의 곳곳에서 잘못된 내용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외피를 쓰게 되죠."(p.33) 관념론자인 데카르트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높이 보고 이에 걸맞는 철학적 뒷받침이 그의 목표였다. XY축을 누가 고안했는가? 더 지독한 관념론자인 라이프니츠는 탁월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다. 미분학에 있어 그의 공헌은 상당하고, 심지어 계산기까지 직접 만들었다. "종교가 관념론인 것과는 달리 과학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입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보면, 연구하는 방법론 자체가 인간의 외부에 물질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성립되니까요."(p.35-36) 여기서 '실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 단어야말로 보편적 개념이며 거의 모든 관념철학의 핵심 주제이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물질이 존재하고,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정보는 그 물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p.41) 결정적으로 틀린 내용이다.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와 그에 따른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인식능력 확보에 있다. 관념론자인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또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를 인정하고, 주체의 이성이 이 두 실체(대상)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 다른 관념론자인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두 실체로 보지 않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두 양태(mode)로 봄으로써 대상에 대한 인식 능력에 회의적이지 않았다. 대상에 대한 인식능력에 회의적인가 아닌가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닌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다. 경험론은 근대화된 유명론이다. 이 과정을 훌륭하게 수행한 이가 로크이다. 로크 역시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실체를 구분하는 데카르트를 받아들이고, 주체와 대상의 일치, 즉 진리가 가능한 것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제1성질 - 예를 들어 사물의 무게, 형태, 운동, 수 -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저자가 말한 물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바로 이 제1성질일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생각을 '유물론적 경험론' 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문제설정은 이 '유물론적 경험론'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저자는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인식능력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이지요."(p.123)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유물론적 경험론'은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다. "유물론적 경험론은 관념의 기원이 감각이라고 말하면서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실체를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곧 자기모순에 빠진다. 우리의 모든 인식의 기원이 경험, 곧 감각인식부터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밖에 없다. 감각이 실체를 자동으로 전제하지는 않는다.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의 다발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 p20) 저자는 아무 의심없이 인간 외부에 물질이라는 실체(또는 물질 내부에 존재하는 제1성질)를 가정한다. 바로 이 의심이 저자가 그토록 폄하하는 버클리의 몫이었다. 뭐 플라톤도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저자 - 철학관련 서적에서 이렇게 간단히 플라톤을 반박하는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 에게 버클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리라. 버클리는 물질이라는 실체(대상)를 감각의 다발로 해체시킨다. 여기에 '유물론적 회의주의'의 초석이 마련되고, 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 이가 바로 흄이다. 버클리가 데카르트가 마련한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대상을 해체시켰다면 흄은 주체를 해체시킨다. 주체 역시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 과학혁명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적 시도는 대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후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이 위기 극복이 당면 과제가 될 것이다. 칸트철학이 갖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맑스 역시 이 문제를 건너뛸 수 없었다. 이 문제란 바로 '유물론적 회의주의'이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한계가 있다. 이 책은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맑스의 의도는 간과한채 '유물론적 경험론'에 멈춰있다. 물론 저자는 불가지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극복 방안으로 '실천'을 언급한다. '실천'은 맑스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 '실천'을 어떻게 이해하는야에 따라 맑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방금 학생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려면 직접 해보면 알지 않겠느냐고 했죠? 직접해본다는 것이 말하자면 '실천'인 셈이죠."(p.116) 저자는 '실천'을 '직접 해보다'로 이해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맛보면 알 수 있다는 식이죠. 이런 식으로 '실천'을 이해하면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이 '실천'은 결국 '감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맑스는 인간이 대상적 진리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오해가 많이 되는 구절입니다. 흔히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참인가 아닌가는 실천해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유물론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중략) 따라서 맑스는 이제 진리의 문제를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입증하는 문제로 바꿔 버립니다. 그 물건에 대해 '영원한 진리'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p203-207) 예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발견한 부시맨이 사용해보면서 그것이 콜라병이라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입을 대고 불었을 경우 그것을 악기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은 현실성을 갖고 '옳은'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천'을 이해하게 되면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여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와 헤겔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켜 나간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의 요체는 바로 대상을 고정적인 객체로만 파악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실천'을 대상을 향해 직접 맛보고, 느끼는 수준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다시금 포이어바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맛보고 느낄려면 대상이 고정적인 객체여야하기 때문이다. "버클리 주교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물론을 쓰러뜨리고 신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는데요. 그런 생각이 강렬해질수록 그의 주장은 괴상해졌습니다."(p.39) 저자가 생각하는 버클리의 모습은 저자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저자는 유물론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관념론과 종교를 쓰러뜨리고 과학과 유물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는데요. 그런 생각이 강렬해질수록 그의 주장은 괴상해졌습니다."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 스피노자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 -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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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의 전작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원숭이보다 더 자본론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 이하의 생물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자본론이라든가 노예 관계라던가 생산 수단이라던가 착취라던가 그런 ‘무시무시’한 말들을 다룬 책들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게 해 준 거였다. 그 전에는 아예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서가를 보면 달달 떨면서 좀 말랑말랑해 보이는 쪽 서가로 얼른 옮겨갔는데, 임승수의 전작은 대강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충분히 세상에 이로운 책이었다. 이런 책 필요없이 첫 발자국부터 두꺼운 자본론을 이해하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야 코웃음을 치겠지만 사실 글씨 한 줌이 누구에게 그토록 의미가 있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 말하고 있듯이 요즘은 돈이 신이 된 세상이라서, 돈 안 되는 글씨는 아무도 안 읽고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밥 먹는 것보다 책 좋아하는 인문학도들은 코웃음 칠지 모르겠지만 대학 때 제대로 배운 것 없고 해서 마음 속으로 쭉 주눅들어 있는 바로 나 같은 사람, 이라면 주저없이 얼른 읽어야 할 책이다. 전작을 통해 자본론이라는 말이 갖는 무시무시함이 구약에서 신약 수준으로 내려왔다면 이번 책에서는 누구나 들어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자세히는 모르는 세계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그렇게 바라 본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다. <승자독식사회>와 오락가락 같이 읽어서 묘한 충돌과 하모니를 보았다. 어쨌거나 스스로 원숭이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라면 자본론이니 마르크스니 뭐니 머리아파, 하는 무서워 보이는 것들을 알기 전에 옆구리에 전과처럼 한 권 끼고 갈 만하다. 일단 임승수 본인이 공학도답게 인문학도들처럼 말이 많지 않다. 엔지니어의 글쓰기다. 이거 더하기 이거, 그러니까 이거, 멋있어 보이는 현학적이 말들 없이 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서술에는 감성이 있어서 이 책 전과처럼 끼고 가야겠다 싶은, 마음을 움직이는 그것이 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에서 공황이라는 국면은 마치 아이가 너무 자라서 옷이 맞지 않게 되었는데 새 옷으로 바꿔 입지 않고 계속 자신의 웃자란 살을 칼로 베어내서 피를 쏟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180p).
잡말 없이 군더더기 빼고 칼같이 글쓰는 바람에 공학도 출신을 숨기지는 못하지만, 태생은 못 속인다고 정말이지 임승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다. 그가 사랑하는 우고 차베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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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선생의 전작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정말이지 원숭이도 이해할 만큼 쉽게 쓰여져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처음 접하는 초보자(?)들이 <자본>을 접하기 전에 한 번 읽어보면 <자본>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해 질 게다.
그리고 이번엔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 나왔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의 성격은 '리뷰'가 아니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해서 한 마디쯤은 하고 싶다.
마르크스 사상의 주요한 세 가지 요소라면 '이성', '역사적 방법', '물질적 활동 중심'이라고들 하고, 위의 세 요소를 한 마디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 될텐데, 이를 얼마나 쉽고 재밌게 풀어 썼는지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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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교양인의 액세서리 정도가 된 것 같다. 라캉, 데리다,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의 이름을 언급하며 쇤베르크의 무조음악만큼이나 생경한 용어들을 내뱉어줘야 짐짓 '철학'하는 느낌이 난다고들 한다. 이렇게 철학은 교양인의 지식자랑 수단이 되는 바로 그만큼씩 대중과 멀어져 간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을 평하기를, '철학'이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미술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1년 전 유럽 여행을 다녀온 그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박물관에서 깜짝 놀란 경험을 한다. 14세기, 15세기 무렵의 작품들을 전시한 방에 들어갔더니 거기 전시돼 있는 모든 작품의 소재가 똑같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 순교성인 등등 기독교 소재 일색. 사람 사는 세상에는 그릴 것도 많을 텐데 그 시대 서양에서는 거의 모든 예술가가 기독교 그림만 그리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저자는 뜬금없이(?) '철학'을 느낀다.
철학은 세계관(世界觀), 곧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나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결국 14~15세기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다는 셈이 된다. 그것이 당시의 세계관, 곧 철학이었다.
기독교가 아래로부터 위로, 옆에서 옆으로 퍼져나갈 때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였지만, 14~15세기 유럽의 기독교는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권위였다. 그 권위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십자군 전쟁도 저지르고, 지혜로운 여성을 마녀로 낙인찍어 고문하고 죽이는 일이 가능했다. 이것이 세계관, 곧 철학의 위력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흔히 '철학'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철학이 없을까?
저자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는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 많은 사람에게, 판단을 좌우하는 기준은 이윤과 효율이다. 한마디로 남는 장사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돈이 되는 것이면 괜찮고, 그렇지 않은 것은 쓸모없는 짓이 된다. 돈 버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멀쩡히 일하던 수많은 사람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당장 효율적으로 돈 버는 데 쓸모 있지 않다는 이유로 수많은 청년 학생이 실업자로 지낸다.
예전에는 하느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선악이 갈렸다면, 지금은 돈을 버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선악이 갈린다. 감히 단언컨대, 하느님의 자리를 돈이 대신한 것이다.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맹목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관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 책에서 말하는 카를 마르크스는 무려 100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이다. 한때 이 사람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사람들조차 구닥다리 취급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마르크스가 최근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분위기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엄청나게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임승수의 전작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내서 큰 인기를 얻지 않았나.
마르크스의 철학에는 돈 중심 철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어떻게 세상을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하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 내용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원숭이도 이해할 만큼' 쉽게 풀어 낸 이 책이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이유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돈 중심 세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더 이상 교양인의 액세서리 정도로 남아서는 안 된다. 철학의 빈곤시대라는 요즈음, 마르크스가 한 다음의 말이 더욱 절실하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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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하여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사회주의란 독재자를 위한 사회체제로만 알고있었던 나의 관점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꿰뚫었던 마르크스가 내놓은 대안책으로써 자본에 쏠리지않고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배분하게하여 모두가 잘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초점이 있었다 또한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역사가 달리 평가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관념론적 관점으로 보는지, 유물론적 관점으로 볼지에 따라 정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공황, 생산관계, 국가, 국유화,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 이야기까지 너무너무 인상 깊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과 이후 읽을예정인 자본론을 읽게 된 계기로써, 지나가다가 본 PC방 알바를 하고 있던 학생이 자신에게 도를 아냐면서 물어보던 아저씨를 항하여 자본론에 대해 아냐고 되물어봤던 글에 크게 인상을 받아 이 책을 접하게 됐음을 남겨두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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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선배들 무서워서 보는 척 했던 빨간책류. 그때도 참 이해안갔는데 지금도 어렵다. 원숭이도 이해한다고?ㅡㅡ^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사실 마르크스 하면 투쟁, 혁명, 적화, 종북 이런 단어가 막 떠오르지만 그건 독재를 위해 마르크스를 팔아먹은 애들이나 진영논리에 희생된 측면이 크고, 서구 사회에서는 아직도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다. 물론 많이 까이는 것도 사실. 특히 발전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발전한 상태에서 생산관계 등의 내부 모순이 심화되었을 때 그 사회는 다음 단계의 사회로 넘어가며,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자본주의에서 결국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한다는 역사유물론은 이제 막 중세 봉건제를 빠져나온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해보기도 전에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까이는 중.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닌이 왕정을 무너트리고 강제로 공산주의를 실행한거라 마르크스 철학을 갖다 쓰긴 했지만 마르크스 철학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의 철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중세 봉건제가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자본주의도 한 500년 지나면 답 나오겠지.ㅡㅡ; 중요한 것은 그의 철학이 맞니 틀리니, 엥겔스에게 빈대나 붙던 게으름뱅이니 아니니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공산주의에 심취하고, 왜 '자본론'을 썼는지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목격한 후, '가난한 자는 왜 열심히 일해도 계속 가난한가?'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쓴 책이 바로 '자본론'. 흥미로운 점은 '자본론'을 쓸 당시 가장 많이 참고했던 책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다고. '가난한 자는 왜 계속 가난한가?'란 의문으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와 '국가는 부자인데 국민은 왜 가난한가?'란 의문으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그들의 인간 존중 사상과 약자에 대한 한없는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500년(?) 후 자본주의는 과연 공산주의에 자리를 내줄 것인가? 아니면 승자 독식이 아닌 약자를 보듬어주는 자본주의로 변할 것인가? 기억에 남는 문구를 남긴다. '자본주의 게임에서 생존하려면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195페이지) 인간이란 동물이 원래 이기적이었던 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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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다.
제목만큼 내용이 쉽게 쓰여 있다. 예시들도 많다.
우선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원숭이가 교수이고 인간 세 사람에게 마르크스 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유물론, 관념론, 변증법, 형이상학 등등.
철학적 용어들은 어렵기만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용어들의 정의를 알려주는 동시에
예시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다.
다만 내가 철학과 너무 안 친해서 금방 잊어버려서 다시 읽어봐야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논하면 주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건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소수가 독점하는 구조라면 사회주의는 대다수가 나누어 가지면서 더욱 민주적이었다.
아직은 책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지라 자세한 설명은 각설하고..
끝부분에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던 인물이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완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책은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로 정했다.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중산층의 붕괴와 서민층의 빈곤함을 생각해본다면 차베스 식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차베스 대통령의 말을 적어본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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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에는 이런 마르크스 철학이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 책들은 일부러 피했다. 선입관 때문이기도 하고 공대생이 뭐 이런 것 까지 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대에 들어선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 20대에 철학에 대해서 좀 더 고민을 했으면 현재의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줬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씩 책을 읽고 지식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예전부터 마르크스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는데 쉽게 설명되어 있는 책이 없어 보여 접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마르크스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었다.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달라 흥미가 있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보호받는 권리인 사적 소유권이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부터 생긴 것이지 예전부터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였다는 점, 생산의 사회적인 성격과 소유의 사적인 성격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만들어 내고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공황이 일어난다는 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는 그저 부정적이고 안 좋은 것이라는 추상적인 느낌만있었는데 책을 통해서 그가 이루고 싶어했던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계층간의 불평등이 커지고 사람다운 삶을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