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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반전주의자 이기에 앞서 수학자이던 버트런드 러셀의 정치철학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러셀이 정치철학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이 이 책을 쓴 것 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1차대전의 참화와 젊은이들의 희생, 인류 문명의 파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러셀은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이러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1916년 11월 영국에서 그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였으니, 그 책이 바로 [사회재건의 원칙]이란다. 미국에서는 그 이듬해인 1917년 출판사가 러셀의 허락도 없이 제목을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로 바꾸어 출간했다고 한다. 러셀은 자신이 처음 이 강연을 계획한 의도는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데 더 큰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동은 남과 공유할수 없는것을 손에 넣거나 계속 보유하고자하는 소유의 충동과, 사적소유의 개념이없는 지식, 예술, 선의같이 가치있는것을 이 세계에 내놓으려는 창조의 충동으로 나눌수 있다고 러셀은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훌륭한삶은 창조의 충동이 주된 동인이되는 삶이고, 나쁜삶은 소유의 충동이 주된 동인이되는 삶이라고 한다. 국가, 전쟁, 사유재산은 소유의 충동을 그리고 교육, 결혼, 종교는 창조의 충동을 표현하는 제도이지만 이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는 현실에서 정치와 경제분야의 개혁원칙은 창조성을 자유롭게 하는것이어야 함을 알리기위해 러셀은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이 출간되자 진보적인 독자와 좌파적인 독자로부터는 열광적인 반응을, 수많은 철학 평론가들로부터는 비판적이지만 진지한 분석을, 전쟁을 지지하는 보수언론으로부터는 한결같이 적대적이고 멸시적인 반응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는 러셀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대상들을 분석하는데 그 대상에는 교육, 결혼, 종교뿐만이 아니라 국가, 전쟁, 사유재산 등도 당연히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충동과 욕구라는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고 러셀은 보았다. 지금까지의 정치철학은 예외 없이 욕구를 인간행동의 원천으로 보았지만, 욕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행동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마저도 인간행동 가운데 비교적 의식적이고 직접적이고 분명화된 부분일 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욕구대신, 특정한 행동을 지향하는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고 러셀은 보았기 때문이다. 즉 충동은 인간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욕구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직접적인 충동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욕구는 다른 옷을 입은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충동은 변덕스럽고 무질서한 것이어서 통제된 체계로 통합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현실에서나 상상 속에서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볼 때 충동은 무모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맹목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맹목적인 충동은 파멸과 죽음을 낳기도 하지만, 세계 최고의 것을 낳기도 한다. 충동은 전쟁의 원천이지만 과학, 예술,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죽음과 퇴보를 향하지 않고 생명과 성장을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 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에서 러셀은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말한다. 국가의 강점은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폭력을 법률로 금지하여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며, 국가의 결점은 대외적인 무력의 사용을 촉진하고 민주적인 제도 내에서 개인이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한다. 국가의 본질은 국민의 집단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는 저장고이며, 이것은 법률과 경찰로 표현되는 내적인 힘과, 군대에 체현되어 전쟁수행 능력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힘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국가가 전쟁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국민은 어쩔수 없이,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수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순종하는 이유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에서 유래한 동족의식, 내부의 범죄와 무질서에 대한 공포, 외부의 공격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종교적인 양상을 띠는 애국심 때문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국가는 권력을 불필요하고 해로운 방향으로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러셀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며, 그것은 연방정부 혹은 중재재판소의 역할 즉, 이익의 경합을 해결하는 역할로 국한시키고, 나머지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에 정치적 창의성을 이양시키는 것이 민주국가가 당연히 지향해야 할 바라고 말한다. 전쟁에 대한 러셀의 관점 또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전쟁은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이다. 인간의 모든 자연스러운 활동을 야기하는 것은 그 활동이 겨냥하는 목적이 아니고, 그 활동 자체에 이끌리는 충동인 것과 같이 전쟁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 자신의 힘이 강할 때 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싶은 활동을 하듯이, 전쟁도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따지는 신중한 계획이 아니라, 바로 이런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예방하기 어렵다고 러셀은 말한다. 경제체제에 대한 관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셀이 말하는 경제체제의 효율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사람들을 얼마나 부유하게 만드느냐, 혹은 분배의 정의를 보장하느냐가 아니고 사람들의 본능적인 성장을 가로막느냐 아니냐 이다. 러셀은 이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정치제도는 세계연방을, 경제제도는 협동조합 제도를 이야기한다. 세계에 단 하나의 군사국가만이 존재하고, 국가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 군사국가는 중앙당국의 결정에 따라야 할 때 전쟁은 사라지고, 소비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한 협동조합과 생산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한 생디칼리슴의 조합은 오늘날 존재하는 산업주의의 폐해 대부분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러셀이 창조의 충동을 표현하는 제도라고 말하는 교육, 결혼, 종교에 대한 그의 주장 역시 충동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기존질서를 지지하고, 근본적인 변화에 저항하는 강력한 힘으로서 기능해 왔다고 한다. 이것은 교육을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아닌, 학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써 여겼기 때문이다. 교육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창조될 세계를 지향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삼을 때, 우리는 위대한 희망을 품고, 그에 따라 교육은 위대한 결과를 낳을수 있으며, 인간사에서 창의성을 야기할수 있다고 말한다. 그밖에 결혼과 종교에 대한 러셀의 주장은 당시와 지금과의 시대차이에 따라 다소 맞지는 않지만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그의 주장을 엿볼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장 우리는 세계를 위해서 무엇을 할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쟁을 종식시키거나, 국가 혹은 사유재산 제도를 무너뜨리거나, 교육제도를 바꾸거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셀은 우리가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다면 희망을 마음속에 품을수 있으며, 따라서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세계가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는 것 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이론은 크롬웰 군대의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사회주의는 소수의 고립된 이론가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여성운동 역시 소수의 집요한 이상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은 머잖아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러셀은 말한다. 처음 책 제목을 보고서 이 책이 전쟁론에 관한 것, 아니면 인간들의 심리에 관한 것인줄 알았다. 사실 저자인 러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용들이 우리인간들의 보편적인 행복을 위한 것 임을 알게 된다. 1차대전의 참혹한 폐허 위에 새로운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한 분석과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볼 때, 다소 과격하고 또 사회주의 성향에 치우쳐 있지만서도, 현대사회에서도 일정부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은 역자 말처럼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행복 처방전이라고 할만하다는 생각이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란 책이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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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개요를 짜다 말고 내가 전에 읽은 러셀 책이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이 엉켜서 책꽂이를 뒤지고 왔다. 집에 <행복론>과 <서양 철학사 상, 하>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쩐 일인지 <행복론>이 없다. 그래서 미흡한 리뷰를 쓴다.)
난 버트란트 러셀의 글을 읽으면, 딱 이런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의 그런 이론들, 다 개나 줘 버리십시오"라고 정색하고 나에게 강연하고 있는 느낌. 고등학생시절, <행복론>을 읽을 때 가졌던 첫 느낌 때문일까? 지금 책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행복론>에서 러셀은 '인간은 동물임을 잊지 말라,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종교나 이념, 사상, 세계관의 전환이 아니라 당장 맛있는 음식 한 번 먹는 거다'는 식의, 쿨하고 지나치게 '철학자의 가오'잡지 않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사춘기의 긴 터널을 지나가던 나에게는 참으로 터널 끝의 햇빛과도 같은 생존의 문구들이 그 책에 가득 차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쿨한 러셀의 태도,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인간이 전쟁을 하는 이유를 거창하게 보지 않는다. 딱 '충동'의 측면에서 본다. 정말 그 동안의 복잡한 이론, 다 개나 줘 버리면 된다. 그러면서도 <행복론> 못지 않게 인간 본성과 여러 제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이 책은 러셀이 1차대전을 겪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영국 순회강연한 내용을 엮은 책이라 한다. 원제는 <사회 재건의 원칙>인데 미국에서 재출간되면서 제목을 현재와 같이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로 바꾸었다고 한다. 책 내용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장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 이 장에서는 충동을 인간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욕구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충동을 창조적으로 발휘하게끔 제도를 만드는 것. 2장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국가의 역할) - 이 장에서 러셀은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킬 것을 제안한다. 국가는 대외적인 무력 사용을 촉진하고 개인이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3장 전쟁은 제도다(전쟁의 본질) - 전쟁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사실은 충동이기에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킬 유일한 방안은 세계연방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4장 행복의 조건을 찾다(소유와 분배) - 러셀은 사람의 본능적인 성장을 가로막지 않을 경제 체제를 제안한다. 즉, 협동조합제도와 생디칼리즘의 조합으로 산업주의의 폐혜를 치유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5장 희망과 두려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교육의 원칙) -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 교육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 6장 여성, 권위에 맞서다(결혼과 인구문제) - 출생률 하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낡은 결혼과 법률제도를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일부분 우생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 7장 천년왕국의 붕괴, 그 이후의 세계는?(교회와 종교) - 러셀은 계속 충동과 욕구를 말하지만, 인간의 사고와 본능이 영적 생활에 의해 인도되어야함도 밝힌다. 8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새로운 희망으로 전후 세계를 재건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우선 놀란 것은 러셀의 혜안이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의 움직임과 국제 기구의 결성, 자본주의의 페혜 등 다음 시대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한 듯한 점.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러셀이 당시 수행한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본문을 읽어 나가면, 100년전인 당시에 벌써 러셀은 민족주의의 한계와 정부기구의 축소, 세계 정부의 역할과 여성을 억압하는 종신 일부일처제도의 법률적 억압을 논하고 있다. 특히나 모국 영국의 가치와 이익, 그 사회의 바탕인 기독교와 가정의 가치에 반한 발언도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지식인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의 틀을 넘어선 지식인은 어느 사회에나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부분 :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억압과 정복 전쟁을 야기한다. - 본문 42쪽
민족국가의 강력한 단합은 대개 두 개의 터무니없는 공포심을 토대로 형성된다. 하나는 내부의 범죄와 무질서에 대한 공포심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의 공격에 대한 공포심이다 - 63쪽
우리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전쟁을 벌이던 여러 인종들과 종교들에 강요해온 팍스 브리타니카를 자랑스럽게 여진다. 우리가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온당하다면, 우리가 강요된 평화로 인도에 이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독일이 유럽에 팍스 게르마니카를 강요하고 그것을 자랑한다 해도 그것 역시 온당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 본문 104쪽
국가에 대한 헌신은 구래의 종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해와 학살과 끔찍한 영웅적 잔혹성을 요구한다. - 본문 114쪽(이의 앞 쪽에서 러셀은 전쟁이 구약성서로 미화된다는 발언까지 했다)
왕의 권위, 봉건 귀족의 권위, 사제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권위 등등 모든 전통적인 결합 관계의 토대는 권위였다. - 본문 186쪽
여성들은 자유를 요구하고 있고, 낡은 형태의 결혼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 193쪽
이런 인용 부분을 보면, 김규항씨나 박노자씨가 생각나기도 한다. 특히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 말이다.(그런데, 이분들은 2002년 월드컵 때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옳게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는데, 거의 100년전에 이런 주장을 편 러셀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책 내용보다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아마도, 다음에는 촘스키를 이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
![]() 사람들은 왜 싸울까? 그러고 보니 전쟁중이 아니어도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의 머릿속 한켠에 싸움이란 호전적이며 거친 생각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듯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우고 싶은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든 외적인 것이든) 욕구를 잠재울 수 있으며 어떨때 이런 잠재의식이 밖으로 분출될까? 불구경과 싸음 구경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다지만 싸움은 우리이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제1차세계대전 당시 평화주의자로 활동했고 반전 운동을 펼쳤던 러셀의 사회와 정치철학이 담겨있는 이 책은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와 그것을 예방하는 방법을 지성인 답게 제시하고 있다. '사회 재건의 원칙'이란 러셀의 강연내용을 묶어 출판한 것을 미국에서 <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란 제목으로 출간 하었다.
인간의 충동과 욕구는 창조적인 것과 소유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뉘며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던 것을 창조하려는 활동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보하거나 계속 보유하려는 활동이 있다. 러셀은 인간의 행동은 욕구보다는 충동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국가, 전쟁, 빈곤 등 소유욕이 강한 충동을 억제하고 창조적인 충동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왜 우리는 국가에 순종하는가? 왜 교육은 희망 찾기를 못하고 두려움을 벗어나기에 바쁜 것인가? 돈은 인간 본성을 어떻게 왜곡하였으며 돈의 숭배가 어떻게 해서 생명력 감소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 되는지 등 자유와 평화, 종교와 정의, 교육과 분배, 결혼 등의 기본 주제를 하나 하나 짚어가며 분석한다. 이를 통해 충동이 발생하는 원인과 그것을 변화 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교육과 사회제도는 사람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충동은 강화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충동은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사유재산은 소유욕의 구체적인 표현물로 생명에 반하는 것이며 전쟁을 초래한다고 러셀은 말한다. 정치나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창조가 소유보다 가치가 있음은 자명한 일이며 결혼과 교육, 종교 역시 본질적으로 창조적이지만 소유욕이 개입함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러셀이 추구하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가 활력을 유지하며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사회다. 그는 전쟁을 이야기하기보단 인간의 행복에 관심을 지니고 삶의 기쁭을 맛보고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할 젊은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파괴와 죽음을 맞이하게 됨에 가슴아파하는 노 지식인의 모습에서 이시대의 지식인들의 지향해야 할 바를 발견하게 된다.
문명인들 대다수가 현대 전쟁이 야기하는 야만 행위와 무익한 파괴 행위에 반대하고 나서기까지 세계는 더 많은 전쟁과 파괴에 시달리려야 할지도 오른다. 그러나 러셀은 문명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건설적인 사고능력이 영원히 낮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성은 그리멀지 않은 미래에 국가들을 전쟁으로 몰고가는 맹목적인 충동을 제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00년이 지난 그의 주장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끊임없는 전쟁과 권력의 남용, 정치적 부정부패가 만연한 오늘날에 그의 메시지가 한 가닥 희망을 주고 살아갈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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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버트런드 러셀이 1차 대전의 비극을 겪으며 보고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영국 전역을 돌며 강연을 한 내용을 엮은 책으로, 원제는 <사회 재건의 원칙>이다.
1916년 11월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 1917년에 미국에서 출간되면서 출판사가 제목을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로 바꾸어 출판한 것이다.
출간 당시 저명한 철학가, 평론가들로부터 찬사와 멸시를 동시에 받았다는 점은 이 책이 당시의 주류 철학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제목인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란 화두만 보면 인간의 파괴적, 공격적 속성에 대해 파헤치는 책으로 보이지만 이 책은 사실 그 반대쪽을 지향하고 있는 내용의 책이다.
1차 대전 이후 영국 국민들의 호전적 태도를 냉철한 이성으로 분석하여 인간의 사회적, 지적, 정서적 행동의 근원을 분석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학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한 러셀은, 인간의 사회적 지적, 정서적 행동의 근원에 파괴 혹은 소유의 충동과 건설 혹은 창조의 충동이라는 두 가지 힘이 있다고 파악했다.
러셀이 추구한 사회는 개인과 공동체가 활력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이런 사회를 위해 러셀은, 인간은 소유의 충동보다는 창조의 충동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쉽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문장을 읽어야 하는...독서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책이다.
하지만 이런 책에는 그저 그런 에세이 수십 편을 읽어도 얻을 수 없는 강한 깨달음과 확신이 보석처럼 숨어 있다.
책 속의 이 보석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더욱 빛나게 다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난 어려운 내용의 책들은 읽기가 피곤하더라..."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는 아예 그 보석을 찾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기도 하다.
거의 100년이 다 되도록 러셀의 주장이 아직도 설득력이 있고, 우리에게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이유는, 그의 통찰력이 바로 우리의 본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공동체의 개혁과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추구했고 사람들에게 역설했던 사회는 어쩌면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이상 사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회에 정치제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이 정치제도는 우리 사회의 방향을 결정한다.
서문에서 러셀은 이 정치제도가 인간의 기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소유욕을 희생해서라도 창조성을 주장해야 마땅하다고 한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의 정치제도는 안타깝게도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아직도 이 책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책이다.
비록 일독(一讀)만 했어도 곁에 두고 오랫동안 음미해서 읽으면서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책이라는 점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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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발발하여 1918년에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제1차세계대전을 겪어면서 반전운동을 하던 버터런드 러셀이 1916년 1월에서 3월사이에 영국의 객스턴 홀에서 8회에 걸쳐서 "사회재건의 원칙"이란 이름으로 강연을 해서 전쟁으로 불안해 하는 지식인들과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강연내용이 영국에서는 1916년 11월에 강연명 그대로, 미국에서는 1917년 1월에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행되었다. 전쟁을 유발시키는 인간행동의 동기를 고찰하고 사람들이 전쟁에 거부감을 갖도록 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국가, 전쟁, 소유와 분배, 교육, 결혼과 인구, 교회와 종교에서 파괴적인 충동의 발생요인들을 분석하고 창조적인 충돌들로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의 행동은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욕구와 특정한 행동을 지향하는 충동에 의하여 행하여 진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구를 행동의 원천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충동이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충동은 싸움, 전쟁등과 같은 파괴적인 것과 과학과 예술과 같은 창조적인 것이 있는데 파괴적인 것을 지양하고 창조적인 것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은 아이들 마음속에 평범한 사람이 되어 성공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심어 놓는다. 시험제도가 존재하고 대부분의 교수활동이 생계를 위한 훈련과정이 되는 한 젊은이들은 지식을 지혜에 이를 수 있 수단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실용적인 수단으로만 여긴다. 교육의 목표는 건설적인 의문과 지적 탐구심, 진취적인 태도가 승리를 거둔다는 세계관, 사고의 대담성을 조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아동들이 교사들과 똑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해야 한다. 순종과 규율로 특정한 신조를 진리로 여기는 확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을 조장해야 한다.
인구가 줄고 있는 부문내에서도 가장 빠르게 줄어드는 것은 가장 뛰어난 부류들이다. 이렇게 되면 유전적으로 생각해볼 때 종래에는 바보천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법률과, 여론, 경제체제는 자녀출산을 가로막는 장애물로서 국민의 자질을 퇴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국가가 양육비 부담, 종신일부일처가 최선이 아니므로 이혼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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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차대전의 참화 속에서 버트란드 러셀이 보고 느낀 사실을 토대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무엇이고, 그 행동의 동기에 제약을 가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들, 국가, 전쟁, 소유와 분배, 교육, 결혼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총 8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이성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을 계속 이끌어 갈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욕구 대신에 특정한 행동을 지향하는 '충동'의 지배를 받는데, 진정한 사고란, 호기심이라는 지적인 '충동'을,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구'로 이어가는 활동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충동'을 죽음이 아닌 생명과 성장을 향하도록 유도할수 있다면 개인과 사회는 계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뜻.
읽다보면 1차 대전 시기의 러셀이 보고 분석한 이런 내용들이 지금의 상황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다는 점에 놀라게 되고 또 실망하게도 된다. 인류는 1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 진보의 과정 없이 제자리만 맴돌았다는 얘기일까. 사실 러셀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위에서 나열한 요인들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충동과 욕구를 발생 유도하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미디어에 있을 터. 어제도 모 가수의 학력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내용의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음.. 순간 중국의 묻지마 살인이 생각나서 쓴 웃음이 나왔다. 객관적인 증거라고, 논리적인 근거라고 내미는 모든 것들의 뒷면에 보이는 본능에 입각한 '충동'.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자들의 손엔 이미 보이지 않는 칼이 들려 있을 것이다. 러셀.. 어렵게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이 한번에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자, 결론은. 인간의 충동과 욕구를 제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의 충동과 욕구는 창조적인 것과 소유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뉘므로, 특히 소유욕의 개입으로 오염되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충분히 경계가 필요하다. 음. 이쯤으로 정리 할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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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보다 문학책을 주로 읽다보니 이 주제가 나에게는 다소 무거운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지만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선뜻 신청하게 만들었다. 우선 저자 버트런드 러셀은 나에게는 정말로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그가 10여년전에 한 강연이 기초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가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고 그의 강의내용이 현재까지도 타당성을 유지한다는 뜻이니 도대체 무언가 굉장한 것이 있을 거 같아 큰 기대감으로 이 책의 첫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은 인간의 행동은 충동과 욕구라는 두 가지 측면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충동이 인간의 행동에 보다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에 대한 고찰을 많이 하고 있는데 저자 자신이 전쟁을 겪으면서 무엇이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이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근저는 그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제 1장의 내용중 결혼에 관한 내용에서는 결혼관계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려준다. -결혼 관계는 본능적인 호감을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관계이다. 자식이 생기거나 자식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결혼에는 공통의 목적이라는 힘이 추가된다. 결혼과 불륜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불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식을 가질 마음이 없다- 우리가 흔히 결혼이나 불륜이나 전부 사랑에 빠져서 하는 것이 똑같다고 이야기하는것과는 달리 러셀은 결혼과 불륜이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는 뭔가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만 그 차이를 말로 꼭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관찰과 생각을 통해 그 차이를 발견하고 표현해 놓았는지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를 더 예로 들자면 -흔히들 인간으 본능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 그저 받아들이고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서로 다르며, 이 기질이 외부환경과 어우러지면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인간 성격의 본능적인 부분 역시 변화하기 쉽다. 인간의 본능은 신념이나 물리적환경, 사회적 환경, 그리고 제도의 영향을 받아 바뀔 수 있다-라는 부분을 읽고 생각해보면 고대부터 성선설이다 성악설이다 혹은 기호설이다 해가면서 싸운 것이 무의미해질 지경이다. 이처럼 러셀의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사색의 길로 이끌어 준다. 이 책의 마지막을 읽는다면 더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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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 강연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해진 버트런드 러셀의 메시지가 21세기를 이미 10년이나 경과한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의 메시지가 시대를 앞서 나간 선지적인 것인 점도 있겠지만, 세계는 아직도 저자가 우려하고 있는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는 그만큼 느리게 진보하고 있는 것인가.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역시 나와 같은 의아함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격인 제1장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으로 여는 저자의 글은, 국가, 전쟁, 소유와 분배, 교육, 결혼, 종교의 주제를 차례로 논파하고, 결문 격인 제 8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닫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충동과 욕구라는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한다고 전제한 후, 욕구는 목적 지향적인 반면에 충동은 행동 지향적인 것으로, 충동이야말로 인간 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욕구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충동은 죽음과 퇴보를 향할 수도 생명과 성장을 향할 수도 있는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된 환경에서 이러한 충동은 생명과 성장을 향해 적절히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도그마적인 국가, 소유, 교육, 결혼, 종교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결과 인간의 충동을 끝임 없이 목적 지향적이 되도록 강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여성과 결혼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제도는 자녀 출산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토대로 부모들을 과중한 금전적 부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법률이나 여론은 자녀와 관련된 경우가 아니면 남성과 여성의 사적인 관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립되어야 한다. 우리의 필요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짐에 따라 종신 일부일처 제도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실패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내와 남편 중 어느 한쪽의 간통이 입증될 때만, 게다가 남편이 ‘유책 배우자’인 경우에는 학대 혹은 유기의 과실까지 있어야 했던 당시 영국에서 이런 주장을 한 저자의 용기에도 놀라게 되지만, 그의 주장이 자녀 출산의 경제적 부담, 간통죄 폐지 등의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유효하게 통한다는 점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다.
거의 100년 이전의 강의 내용을 모은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문장은 생생하고 시의적이다.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적어도 제1장은 한번 천천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