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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따라 나선 철학하기의 '정오의 사색' 선상에서 만난 알랭 바디우 철학이 생활화될 수 없는 이유를 개인적인 그동안의 책읽기에서 떠오르는 잡설들로 먼저 정리해 본다. 그 첫 번째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의 실종에서 벌어지는 '나와 글자들'과의 난투극이기도 한 점이라 하겠다. 두 번째는 철학을 대하는 우리들의 선입견 중의 하나인 비현실감이다. 세 번째는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합리주의로 모아지는 실효성의 전무함이라 하겠다. 이 세 가지를 벗어던질 수 있다면 내 삶은 부분에서 전체로 시선을 넓혀가게 될 것이다.
내가 알랭 바디우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2011년 봄, 진력이 날만큼 난 이명박정부의 레임덕 시절에 던진 질문의 끝에 만나기 시작한 '정치인'을 향한 가느란 희망을 모색하면서이다. 여러 현실 정치인들을 탐구하면서(그들의 책들에 의한 작업일 뿐이다.) 던진 질문, "왜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철학이 없는가?" 였다.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을 위한 선언을 나는 정치인들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기회로 가질 수 있었다. 정치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철학에 접근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행동들에는 한 개인의 정치인으로서 보여지는 신념 따위를 발견할 수가 없다.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철학 자체를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인 것이라 보여진다. 정치인들에게 "당신의 정치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활동들은 이해관계에 매몰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거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은 '묻고 답하기'이다. 너에게 또 나에게 묻고 그 물음에 대해 답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라 하면 얼마나 쉬운 일이던가. 내 삶이 곧 철학인 것이고 철학자만이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쉬운 일들을 우리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 답을 다 알려준다. 물음조차도 나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마련되어 있다. 그런 획일적이고 주입되는 교육을 별 거부감없이 받아 왔고,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편리한가. 굳이 철학을 하지 않아도 나는 그 답을 다 아는 것만 같은 거다.
[출처]http://search.daum.net/
일상에서 주고 받는 수많은 말들이 유난히 철학 장르의 책에서는 그 힘을 사용할 수가 없지 않은가.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어려운 말들이 주절주절 진행되는데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주석이 달려 있고 해제가 있어도 그 문맥을 읽어가는 일이 베스트셀러를 읽는 것과는 다르게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 인내심을 지켜내기 위한 다양한 장르의 꾸준한 책읽기가 교육 과정상 급수를 따는데 사용해야만 하는 현실감을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 사회에서 철학하기는 '사서 고생하는 격'일 뿐이다.
그런데 그 사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에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철학하기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기에 그 출발점에 있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현실로 보여진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별 어려움없이 살아가면서 철학을 하게 될 것이다.
바디우는 철학이 자신을 조건 짓는 절차들의 상태를 공통의 장소에 놓음으로써 그 시대에 대한 사유를 시도하기에 수학, 시, 정치적 창안, 그리고 사랑의 시대적 배치를 전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은 철학이 필요한 장소임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삶의 전체를 느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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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은 바로 이분. ![]()
진리의 가능성
오늘날 프랑스에는 살아 있는 철학자가 많지
않다.
철학이 다룰 것은
철학의
조건들에 대한 것이다.
철학에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시인들의
시대
헤겔
이후
시는 철학이 해야 할 몇몇
기능들을
떠맡았다.
시인들의 시대는
완결되었다.
플라톤적
몸짓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20세기는 반플라톤적이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통로는
다수의
플라톤주의다.
진리의 다수성.
우리는 대부분
'근대'를 비판
하는 철학자들을 많이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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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종교적 인간이다. 신이나 절대를 섬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정 사상가를 신봉한다는 의미에서 종교적 인간이다. 그의 지적인 연대기를 돌이켜본다면, 바디우는 마르크스-레닌, 알튀세르, 사르트르, 마오쩌둥, 라캉의 신도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라캉과 헤겔의 충직한 사도이다. 바디우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선언의 철학적 몸짓은 한마디로 말해서 '플라톤적 몸짓'이다. 20세기를 반플라톤주의의 시대로 규정한 바디우는 다시금 플라톤의 화려한 귀환을 요구한다. 이른바 라캉 좌파의 시각으로 해석한 플라톤으로의 전환이다.
바디우의 1989년 저작인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은 존재, 진리, 주체에 대한 그의 옹골찬 옹호다. 90년대 탈근대주의자들이 선동했던 '철학의 종말' 론에 대항하여 내세운 철학자로서의 양심 선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내세운 철학의 종말은 사실상 좀더 풀어보자면 역사와 주체와 진리의 죽음을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바디우가 보기에 존재, 진리, 주체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고전적인 철학적 범주다.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 사랑, 과학, 예술이라는 네 가지 진리 생산 절차에서 생산된 진리를 수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디우는 철학의 임무가 철학의 종말, 형이상학의 종말, 이성의 위기, 주체의 해체라는 반복되는 공언과 단절하여 근대적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고 데카르트적 성찰의 혈통 속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디우의 '철학의 귀환' 작업의 시작은 존재의 다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존재는 일자가 아니라 다수인데, 존재가 일자로 환원되는 것은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적 작용 때문이라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바디우가 설정한 이런 수학적 존재론에 공감할 수 없다. 바디우에게 수학은 존재론과 동의어다. 19세기 이후 게오르크 칸토어의 집합론의 창안과 20세기 미국의 수학자 코헨의 작업에서 수학적 존재론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철학이란 시대의 진리들을 규정하는 사건적 형식 속에서 네 가지 유적 조건들(시, 수학, 정치, 사랑)이 공가능하다는 것을 사유 속에서 엮어내는 것이라면, 철학의 중단은 자신을 조건짓는 진리 절차들 사이의 경로 또는 지적 순환의 체제를 정의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제한되거나 봉쇄되어 있다는 것에서 야기될 수 있다. 그러한 봉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시대에 대한 사유가 행해지는 공가능성의 공간을 수립하는 대신에, 철학이 자신의 조건들 중 몇몇에 자신의 기능을 위임하는 것, [다시 말해] 철학이 사유 전체를 하나의 유적 절차에 내맡기는 것이다. 그때 철학은 그 절차를 위한 자기 자신의 폐지라는 요소 속에서 실행된다."(93쪽) 바디우가 보기에 철학의 위험은 '봉합'이라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철학이 시, 수학, 정치, 사랑 가운데 어느 하나에 봉합된 것으로 나타날 때 철학은 중단되고 만다. 철학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모든 봉합은 과장이다. 19세기 철학은 이미 실증주의적 봉합 혹은 과학주의적 봉합을 당한 바 있다. 과학적 조건(실증주의)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단지 분석적 추론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정치적 조건(마르크스주의)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혁명의 나팔수로 전락했다. 예술적 조건 혹은 시적 조건(니체부터 오늘날까지)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시학의 물신숭배자가 된다. 그럼, 사랑의 조건에 철학이 봉합될 때, 철학은 어찌되는가? 아직 시기상조인 듯, 바디우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철학이 사랑의 조건에 봉합될 때, 철학은 정신분석학으로 변신한다. 실제로 바디우의 눈에 비친 프로이트와 라캉은 위대한 철학자였다. 특히 라캉을 욕망이나 주체의 이론가가 아닌 사랑의 이론가로 변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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