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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정찬의 소설 『골짜기의 잠든 자』를 읽다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왜냐하면 존 레넌, 체 게바라와 함께 이 소설을 구축하는 중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엘리아스 카네티로, 『골짜기에 잠든 자』에는 엘리아스 카네티와 그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저서인 『군중과 권력』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나치 치하에서도 독일어를 버리지 않고 독일어로 사유한 이 인물이 궁금할수록 『군중과 권력』을 읽고 싶은 마음도 더 커졌다.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별개로 이 저작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거대한 저서이기도 하다.
히틀러가 빈에 입성한 이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생명의 위험을 느낀 카네티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20여년 간 '군중'과 '권력'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연구에 전념한다. 그 결실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군중과 권력』이라는 이 책이다.
보편적인 지식의 소유자인 카네티는 이 책에서 신화와 전설을 중심으로 원시문화, 세계종교의 원전, 동서고금의 수많은 권력자에 대한 전기와 기록 등 광범위한 자료를 폭넓게 이용하고 있다.
카네티는 규범과 범주에 얽매인 경직되고 도식적인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았다. 일체의 개념적 체계와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일상적 삶의 구체적 사실을 직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는, 인식과 감성이 결합된 조화로운 사유를 선호하였다.
II. 카네티는 군중 행동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 무리(Meute)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무리는 부족이나 씨족 등 통상적인 사회학적 개념들과는 다른 개념의 단위다. 부족이나 씨족은 정태적인 반면 무리는 동태적인 행동의 단위이며, 그 실체가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군중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카네티는 기능에 따라 무리를 네 가지로 나눈다.
(1) 자연발생적이고 가장 순주한 무리 형태는 사냥 무리(Jagdmeute)이다. 이 무리는 한 사람만으로는 포획하기 어려운 맹수를 포획 목표물로 하는 인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형성된다. (2) 무리의 두 번째 형태는 전투 무리이다. 이 무리는 사냥 무리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이 다른 형태의 무리로 전이하는 경과 상태에서는 더욱 사냥 무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전투 무리에는 적대적인 제2의 무리를 전제한다. (3) 세번째로 애도 무리가 있다. 이 무리는 구성원 중의 하나가 죽음으로 인해 한 집단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형성된다. 이 집단은 소규모이므로 단 한 명의 손실도 만회 불능의 중대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4) 마지막으로 증식 무리가 있다. 증식 무리에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성, 즉 증식되려는 욕망을 가진 일련의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무리는 그 자체 또는 의도하는 각종 생물들이 더 늘어나게 하기 위해서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카네티는 현대 군중의 기본적 속성 중의 하나인 성장 욕구가 대단히 일찍, 그 자체로서는 성장 능력이 없는 무리의 상태에서부터 나타났다고 파악한다.
III. 군중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방전'(Entladung)이다. 방전은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에너지의 폭발과 방출" 현상을 포괄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방전이 있어야만 비로소 군중이 생성된다. 방전의 순간에 군중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 간의 차이를 제거하고 평등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차이란 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 즉 계급, 신분, 재산 따위의 차이를 의미한다.)
군중은 네 개의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한다. 군중의 분출 현상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으며 또 가끔은 실제로 일어난다. 둘째,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군중이 형성되는 것은 사실은 바로 이 평등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 평등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것에도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 군중은 밀집 상태를 사랑한다. 그 어느 것도 군중의 내부 틈새로 끼어들거나 군중을 갈라놓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군중 그자체이어야 한다. 밀집감은 방전의 순간에 가장 강하다. 넷째, 군중은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한 항상 동적이다. 군중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인 이 방향은 군중의 평등감을 강화시키다. 군중은 늘 와해를 두려워하므로 어떤 목표라도 받아들이려 한다.
군중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군중이든 모두 이 네 가지 속성을 지닌다. 네 가지 중 어느 속성이 더 강하냐에 따라서 군중의 분류가 이루어진다.
IV. 한편, 카네티는 군중이 품고 다니는 마음과 감정 상태에 따라 다섯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가장 오래된 형태는 추적 군중과 도주 군중이다. 이 두 형태는 인간 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발견된다. 이에 비해 금지 군중, 역전 군중, 축제 군중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군중 형태이다.
(1) 추적 군중은 재빨리 얻어질 수 있는 목표를 고려함으로써 형성된다. 살생을 위해 출현한 군중으로,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간다. 추적 군중의 형성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죽음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려는 필요성에 부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처형함으로써 군중 전원은 일거에 각자의 죽음에서 영원히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2) 도주 군중은 위험을 느끼는 데서 생겨난다. 동일한 위험에 직면한 모든 사람은 함께 도망간다. 함께 달아나면서 그들은 위험이 분산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주변의 타인들을 순전히 장애물로 여긴다면 군중 도주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안전을 확보한 도구 군중은 와해된다. 즉,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도주는 자연적으로 종료되는 것이다.
(3) 금지 군중은 특수한 종류의 군중이다.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해왔던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금지가 선언됨과 동시에 군중이 형성된다. 동맹 파업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 군중은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사태가 악화되거나 궁핍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특히 습격을 당하거나 포위당하게 되면, 이 부정적 군중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군중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4) 역전 군중은 계급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그런 계급 구분이 한동안 계속되고,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감지되다가 상황을 역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될 때 역전 군중이 나타난다. 개인저그로는 무력하지만 군중을 형성하면 개인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혁명적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역전의 상황이다.
(5) 제한된 어떤 공간에 먹을 것이 풍부할 때 근처에 있는 자는 누구든 참여하 수 있는데 이때 축제 군중이 형성된다. 이때 개개인은 방전이 아닌 이완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공동의 목표 같은 것 없고 밀도는 매우 높지만, 평등은 대체로 방종과 향락의 형태로 존재한다.
V. 카네티는 권력 현상을 주로 살아남음의문제와 연관시켜 다룬다. 모든 권력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살아남는 순간이야말로 권력의 순간이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의 적이며, 어떤 비통함도 이같은 본질적인 승리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 세계 역사상 권력자는 가능한 많은 수의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다.
권력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도 근본적으로 권력의 본질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종교의 권력은 영원불멸의 유일자인 신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종교는 죽음과 내세르 담보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벌이는 장사이며, 종교인은 그런 종교의 권력을 확고히 증대시키는 죽음의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카네티의 주장이다.
즉, 이 책에서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의 기원과 본성을 천착함으로써 폭로하고자 한것은 권력의 종교인 셈이다.
모든 권력의 이면에는 죽음의 위협이 있다. 살아남은 그 자체가 권력의 핵이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
| 『군중과 권력』은 엘리아스 카네티가 20년 이상의 오랜 침묵 속에서 '군중과 권력의 본질'에 대해 연구하여 1960년 발표한 책으로 출간과 동시에 '군중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의 토대를 마련한 책'(아놀드 토인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재조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주는 책'(아이리스 머독) 등의 격찬을 받았다. 그 이후 유럽 사상계의 고전으로 자리잡으며 카네티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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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왜 무리를 지어 군중 속으로 들어가길 갈망하는지, 그리고 권력자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통제하는지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인 메커니즘으로 분해한 책이다. 카네티는 권력의 본질을 애매한 정치철학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우월감'으로 정의한다. 뜬구름 잡는 이론을 배제하고, 지배와 복종이라는 인간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역학 관계를 기계 부품을 해부하듯 낱낱이 파헤친다. 인간의 폭력성이나 집단 심리, 혹은 권력자의 광기를 텍스트 안에서 구조적으로 설계해야 할 때 가장 탄탄한 논리적 뼈대를 제공해 주는 실용적인 분석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