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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었으나, 나에게 주는 느낌이 적어서 외로움과 나이듦에 대해서 생각을 써본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얼마간 경제 활동을 더 이어간 후에는 사회생활에서 정말 은퇴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물론, 봉사활동이나 종교 모임에 참석해서 사회적 교류를 지속할 수는 있지만,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의 기력이 떨어지면 누구를 도와주는 일도 쉽지 않게 된다. 종교는 이미 이십 대 이후로는 나에게 어떤 유익이나 위안을 준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교회에 다시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족과 친구도 연락을 끊지야 않겠지만 가끔 소식을 전하고 특별한 일이나 있고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혼자가 편하다. 누군가와 만나고, 말하고, 일하고 나서는 한동안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혼자 있다고 특별히 에너지를 보충하는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책 읽고 다큐나 시사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직장에 다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에너지가 꽤 소모된다. 내가 혼자라면 굳이 하지 않을 노력을 들이고 신경을 써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사회적 경험이지만, 그 덕에 나는 성장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배우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어쩌면 그 속에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에서는 행복의 필수조건이 사회성이라고 말한다. 연구에서도 행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불행한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불편하고,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지만, 그들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즐거움을 느낀다. 결국 지금 혼자가 좋은 것은 타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적당히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게 힘이 좀 들지만, 그게 아예 없다면 인생은 황무지가 될 거라는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일이 주는 장점 중의 하나가 휴일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고 했다. 혼자 있는 여유와 행복감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사회적 경험이 동반되어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혼자가 편하고 좋다고 해서 계속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혼자 잠시 머무는 것은 타인과 함께 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고, 사회적 관계에서 에너지가 소모되면 다시 혼자로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물러나고 사회적 교류가 급격히 줄어드는 노년의 시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 관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책과 반려동물도 좋지만, 그게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젊을 때처럼 새로운 만남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노년에도 사회적 교류를 활발히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성이 외향적인 사람은 관계가 일상화되었으므로 빈도가 좀 줄기는 하겠지만 유지가 될 것이다. 돈이 많거나 전문 분야를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도 사정이 낫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지금부터라도 관계망을 정비해야 한다. 기존에 교류하는 친구들과 조금 더 정기적인 연락을 하고, 가족들과 더 자주 시간을 보내자. 지금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나와 잘 맞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잘 가꾸어 나가 지속시키는 것도 필요하겠다. |
다 읽고나서 느낀 것은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담은 책'이란 것이다. 주인공은 35에 부자인 먼 친척이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업무에 지친 K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백만장자가 되었다?!'의 당사자가 바로 주인공인 '나'이다. ![]() 이보다 더 현 시대의 직장인의 맘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싶다. 권태로운 , 일상을 벗어나는 이벤트가 생겼다. 새 보금자리를 얻고, 직장을 시원하게 그만둔다. 밥벌이로 고통받지 않는 삶...이것은 누구나 부러워할 행운이겠지만, 과연 이것은 행운이었을까? 철학은 있는자들의 특권이라는 말처럼 밥벌이같은 일차원적인 고민에서 해방된 나는 당분간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아늑한 보금자리, 단골 식당,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다음날 숙취를 부여잡고 출근을 해야하는 걱정을 하지 않는 삶. 이윽고 나는 근원적인 물음,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하는지 말이다. 권태와 불안은 그를 좀먹어간다.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여전히 이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화를 설치하고, 철학자와 이야기하며 해답을 얻으려하지만, 결국 술로 모든 것을 잊자 생각한다. 남들과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된다. 아파트 수위가 바뀌고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죽고, 세월이 흘러도 나는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석가모니나 다른 성자(聖者)들 처럼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깊은 고독의 무저갱에 빠진 외로운 남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이 권태로움 마저도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뜻밖의 행운은 과연 삶의 필요충분조건일까,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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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루한 직장 생활을 하던 남자는 갑자기 먼 친척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누추한 호텔을 떠나 안락한 아파트로 이사 간 남자는 제2의 인생의 꿈에 부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는 시간과 무기력함, 나태의 나락에 빠져간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남자는 근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고민에 빠진다. 그는 점점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아파트 수위가 바뀌고 그 딸이 수위가 될 시간 동안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뿐이었으나 그런 고립된 생활이 죽음보다 얼마나 나은 지는 모르겠다. 기다림과 절망의 끝은 죽음뿐일까? 그에게 공감하고 그에게서 내 모습을 찾게 되는 순간엔 두려워졌다. 책을 읽으면서 고독과 외로움에 질려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