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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공동경비구역 JSA>(2015)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측 초소에서 북한 초소병이 총상을 입고 살해되는 사건에 대한 수사를 다룬 영화다. 양국은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이 사건의 수사 의뢰를 하고,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E. 장(이영애 扮) 소령을 책임수사관으로 파견한다. 그녀는 사건 당사자인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 扮)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 扮)를 만나 사건 정황을 듣게 되지만, 그들은 서로 상반된 진술만 반복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두 사람 모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짜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피 E. 장은 진실을 밝혀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진실은 어떤 경우라도 밝혀야 하는 것일까
<순교자>(1964)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한국전쟁 직전, 열네 명의 평양지역 목사들이 체포되어 그 중 열두 명이 처형되었다. 육군본부 정치정보국 평양파견대 장 대령[국장]과 이 대위[과장]는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수사 책임자인 장 대령의 입장은 간단했다. 굳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필요 없이 열두 목사들이 북괴(北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결과만 알면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위한 선전도구로 이용할 수 있으니 기꺼이 그들을 ‘순교자(殉敎者)’로 규정할 수 밖에. “옳았어! 군의 선전도 빼놓을 수 없지. 그래서 안 될 게 뭔가? 우리의 대의명분을 모독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네. 누구든 빨갱이들을 유리하게 하는 짓은 내버려두지는 않겠어. 그 점 명심하게. 누가 누굴 배반하지 않고는 상관없어. 내가 관심을 갖는 건 그 배반자들과 배반당한 자들이 다 같이 빨갱이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거야.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도 바로 그거야. 또 그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에게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야.” [p. 148]
반면 이 대위의 입장은 다르다. 어떻게 보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 E. 장 소령과 비슷한데, 그는 진실은 그것이 추악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고 장 대령에 맞선다. “우리의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습니다. 뿐 아니라, 그 진실은 순교의 종교적 성격과 관계된 것이므로 그 방면의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령님,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p. 152]
진실, 사람들이 원하는 혹은 있는 그대로의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순교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신 목사다. 또 한 명의 생존자인 한 목사가 존재하지만, 그는 그들의 리더 박 목사가 신을 부정하는 것을 보고 미처 버렸으니까. 신 목사는 진실이 밝혀지면 신도들이 희망을 잃고 어둠과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왜냐하면 그가 평양 교인들의 리더이자 독실한 믿음을 지닌 박 목사가 죽은 후 다른 목사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없는 상황을 만들기 보다는 스스로 ‘배교자(背敎者)’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진실보다도 거짓일망정 희망을 갖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미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싶고, 그들에게 필요한 ‘진실’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상관없이. 이런 상황에서 신 목사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혹은 자기 만족을 위해 진짜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줄 뿐이었다. “나는 절망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삶의 어둔 감옥에 던져 넣고 있는지를 보았소. ~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 [p. 271]
그런 의미에서 신 목사는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끝까지 평양에 남아 신도들과 함께 하면서 신이야말로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 맞서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인간의 고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 목사를 처음 만난 날, 이 대위는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 [p. 37] 어쩌면 이 질문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홀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에 기대어 서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절대자 혹은 신(神)에게 기대고, 이를 체계화한 종교를 믿는 것이리라.
이런 버팀목이 있기에 신앙을 가진 이는 어느 정도의 고난을 영웅설화에서처럼 절대자 혹은 신(神)이 배려한 시련으로 여기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이 한 개인과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고난을 예정한 신(神)을 원망하지 않을까? 어쩌면 신(神)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자.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되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니 받아들이시오’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이 허울뿐인 자유의지를 가진 신(神)의 도구에 불구 하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신(神)이 정한 계획서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도구가 아니라면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후의 순간, 기도를 요청하는 다른 목사들의 부탁을 거절하고,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의 존재에 대해 분노했던 박 목사는 인상적이었다. “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어. 나를 위해서조차도 기도할 수 없으니까.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나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 [p. 214]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갔던 그의 모습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여주었으니까.
잠깐,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과연 신(神)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왜 신(神)을 믿는 피조물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인가?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명확하게 답할 능력이 없다. 단지 의문을 가질 뿐이다.
아마 그래서 이 대위도 신 목사에게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살육,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 목사님이 한 일을,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일을 경멸합니다. 거짓말에 거짓말의 연속 아닙니까? 무엇 때문이죠?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열두 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 없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판국에 당신께선 신을 찬미하다니!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는 판에 신을 찬미하다니요? 왜 백성들을 배반하시는 겁니까 ” [pp. 253~254]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신 목사의 대답은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p. 255]였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배교자를 자칭한 순교자가 정작 신(神)을 믿지 않는 자였다니.
신(神)은 인간의 고난을 알고 있는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보면 대답하지 않는 신(神) ‘위대한 지혜’에 지친 민요섭이 끝내 자신이 섬기던 신(神)을 떠난다. 이처럼 신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침묵하는 신(神)을 섬기다 보면 신(神)의 존재와 믿음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쉬울 것이다. 아마 이 소설에서 박 목사가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나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 [p. 214]라고 절규했던 것도 신앙에 대한 그런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신 목사는 다른 선택을 한다. ‘신(神)은 그를 믿는 신도들의 고난을 알고 있는가? 만약 알고 있다면 왜 침묵하는 것일까?’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 물음에 평생을 바쳐 답을 구하기로. 아마 그래서 신 목사는 평양을 떠나는 대신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과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는 결정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결단을 내리면서도 그는 두려웠을 것이다. 거의 죽음이 예정된 길이니까. 아마 그가 이 대위에게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p. 283]라고 얘기한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는, 일종의 주문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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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대 장교 이대위의 입장에서 경험한 평양 점령시 공산군 점령 시 발생한 14명의 목사 실종사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각각 등장인물들이 쌓아가는 진실의 모습이 너무도 흥미롭게 그려지는 소설입니다. 보통의 경우 그 진실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궁금증에 책을 흥미롭게 읽어 나가게 되는데, 이번 순교자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습니다. 삶이 여러가지 사건과 사고들로 흔들려가면서 나이먹어 가는 단순한 노회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거 같고, 작가적 능력에 내가 순응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14명의 목사 중 단 2명만이 생존하게 되는데, 젊은 목사 한명은 그나마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고, 신목사는 진상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진상에 대한 내용은 이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므로 생략합니다만, 나름의 추측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이 책의 묘미는 사건의 핵심인 신목사를 중심으로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대위가 파악하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분명하진 않지만, 나름의 배경과 생각을 갖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주 미묘한 등장인물간의 교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목사는 참으로 묘한 인물입니다. 작가가 신목사의 의식과 과거를 전지적으로 파헤쳐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하지 않는 철저히 주인공의 주관적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 듯 합니다만, 책을 읽어나가서 어느정도 사건의 전말이 표출된 상황에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큰 핵심인 고군목과 장대령의 의도와 사고도 파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즉 이대위는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말미 고군목, 장대령 등을 만나 신목사의 상황을 정확하지 않게 듣게되는 상황에서도 화자가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도 원인이겠습니다만, 난 작가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등장인물을 그려나간 게 아닌지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는 실제로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이 소설을 영어로 썼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이대위와 비슷한 배경입니다. 기독교적 감성을 소설의 제재로 사용하고,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특색있는 등장인물을 통해 그려나가는 보편적 문제의식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뭔가 한국 작가와는 - 물론 내가 한국 작가를 통찰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 다른 서사구조 또는 글의 전개 방식이라고 했습니다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인간 의식의 작용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내는 관념적 생각들을 통해 예술, 철학, 과학, 종교 등 모든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조건에 대해 어느순간 인간 스스로 망각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중 작가가 경험했거나 들었던 내용을 조합해 창작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그러한 어느 하나의 사건에서 어쩌면 단순한 사고일 수 있는 내용을 이렇게 깊이있게 전개하는 작가적 능력에 경탄했습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신은 있을까요? 이야기의 단순한 줄기는 위에서 언급했던 한줄이지만, 이 책을 탄생시킨 본질은 저자가 전쟁을 참혹함을 경험해 신의 존재에 대한 아주 단순한 의구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스스로 신과 통한다고 주장하는 인간 - 목사, 신부, 스님, 랍비, 선지자 등 - 의 주장이며, 그 교리를 정리한 문서 등도 결국은 인간이 신적 체험 혹은 또다른 작용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옮긴 문자입니다. 그 너머의 사실은 내가 판단할 자격과 능력이 안되며, 또한 알지도 못합니다만, 가끔은 그 사제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신적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으며, 그들 스스로 신을 부정하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내가 읽기에 이책은 기독교 신 하나남의 영적 또는 종교적 은혜보다 신목사 개인이 사제로서 만들어낸 관념적 성취에 인간들이 더욱 은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이자 객관적 판단자 역할 그리고 주인공인 이대위의 마지막 생각이 시사하는 바는 절대적입니다. " 또 다른 한무리의 피난민들이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을 지붕 삼고 모여 앉아 두고 온 고향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기하리만큼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
| 제목에서부터 알수 있듯이 이 책은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읽기에 좋은 소설입니다. 우선 소설속의 주인공이 목사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묻는 내용입니다. 배경은 전쟁이지만 결국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내용이라서 생각해 보기에 좋은 소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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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P.37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_P.45 그건 그렇고 나 말일세, 첫 백병전을 치르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중대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내가 대위로 가진급하고 중대를 떠맡게 됐네. 괴뢰군 일개 중대와 어느 골짜기에서 야밤중에 부닥뜨려 총검으로 백병전을 치른 거야. 양쪽이 모두 돌격했는데 처음엔 정규 백병전 같았지. 그러나 잠시 후부터는 쌍방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 난투전이 벌어졌어. 문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 데다 양쪽이 모두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 우리가 어느 쪽을 죽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네. 모두 똑같은 언어로 “누구야. 너 누구야?”만 외쳐대고 있었으니 말일세. 처음엔 당황해서 멈칫거렸지만 그것도 잠시고 모두가 뭐랄까,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저 닥치는 대로 죽여대는 거야. _P.113 “신 목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가 한 짓을 그의 신에게 고하고 있는 꼴을 좀 상상해볼 수 없겠나? 그런데 그의 신은 그러는 신 목사의 등을 온화하게 토닥거리면서 말하지. ‘괜찮다, 내 아들아.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고 신은 용서하는 거야.’ 어떤가, 자네 생각은?“ _P.167 성 중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24장 12절 _P.253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_P.255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_P.256 “용기를 가지시오, 대위.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난 질문을 하고 생각하게 하는 글을 좋아하는데 『순교자』가 그랬다. 남북전쟁, 유엔군이 평양 점령에 성공하고 이 대위는 평양으로 파견되어 공산당에 의해 14명의 목사가 납치되고 2명의 목사만 돌아온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대위는 생존한 신 목사와 한 목사를 만나지만 한 목사는 이 사건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겼고 신 목사는 입을 닫는다. 살해된 12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추앙되는 상황에서 진실은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신 목사만이 끝까지 저항했기에 살아남았고 한 목사는 정신 이상으로 살해되지 않았지만 군은 공산당의 잔혹성과 목사들의 죽음이 순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이익을 얻기 위해 진실은 은폐하려 한다. 이 대위는 신 목사가 진실을 말하기를 바라지만 신 목사는 자신을 배신자로 만들고 나머지 목사 12명을 순교자로 만든다. 영화 『사바하』에도 같은 질문이 나오는데 신의 존재를 믿던 목사가 인생의 큰 변화에서 과연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반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바하』의 박 목사는 신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려고 한다. 『순교자』의 신 목사는 자신은 믿음을 잃었지만 다른 이들의 희망을 위해 괴로워하며 자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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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국의 『순교자/문학동네/도정일 옮김』 는 1964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주목하게 된다. 역자는 그 의미를 한국 전쟁 발생시점에서 14년 만에, 휴전 기점으로 10년 후라는 것 만으로도 이미 ‘경이롭다’(313p.해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현재 진행형 고통 속에서 여전히 혼란스러울 시점에 서른 두 살의 젊은 작가는 완벽한 작품화를 통해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록으로 보전하고 객관화 시킴으로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 “이 작품은 욥,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위대한 전통 속에 있다.(314p)”고 초판 출간시 뉴욕 타임스는 평가했다는데 읽는 내내 언급한 인물과 작품들의 그림과 장면들로 쉼 없이 왕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50년 6월 어느 이른 아침 전쟁이 터졌고 북한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무렵 우리는 인류문명사 담당 강사로 재직했던 대학을 이미 떠난 뒤였다.(11p)” 유엔군이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했던 전쟁이 발발한 해 10월, 육군 본부 정치정보국의 파견대 본부를 장로교회 평양 중앙교회 맞은편으로 잡는다. 화자인 이 대위는 ‘실종된 목사들에 대한 조사’임무를 맡는데 집단 총살 당한 열 두명과 살아있을 두 명을 찾아내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 이 대위의 동료이면서 친구인 박 군의 아버지도 이미 죽은 목사들 중 한 명이고 신앙의 갈등으로 부자의 연을 끊었던 박군은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추적한다. 과연 당신의 말처럼 끝까지 소신을 지켜낸 죽음이었을까, 실패한 죽음이었을까를. 살아남은 두 목사, 신 목사와 충격을 못 이기고 미쳐버린 젊은 한 목사까지 그 둘과 죽음을 맞은 열 명에 대해 열은 어떻게 죽었는가 왜 둘은 살아남았는가, 목사들의 순교에는 살아남은 자의 배반이 있었을까 의심의 눈초리는 답을 요구하고 순교자와 생존자의 프레임은 견고해가며 점차 원하는 답을 의도한다.
반복되는 화두는 ‘진리란 무엇인가’이다. 신 목사의 진리는 양심의 진리, 신앙의 진리(55p)고 이에 반해 이 대위에게 진리는 ‘인간에 관한 사실(55p)’로 결을 달리한다. 장대령은 “열두 명의 순교자들은 위대한 상징이야. 그들은 고난받은 교인들의 상징이자 궁극적인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지.(75p)”라며 목표하는 진리가 분명하다. 고 군목의 출현은 또 다른 물음을 동반한다. 군목이 버려야 했던 결국 공산당에게 죽음을 맞은 네 사람 중 한 명은 빨갱이들의 끄나풀(80p)이었지만 자신의 교회 장로의 아들로 영웅적인 죽음이었다 믿고 있는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진리 편 아닌가. “그 사람은 이미 늙었고, 자네가 말한 그 영광스러운 환상이 필요한 사람이야. 어떻게 감히 그 늙은이에게 또 고통을 안겨줄 수 있겠어?(83p)“ 신목사는 그를 만류한다, 그의 진리 실현을 가로막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누가 진리 편인가, 진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진리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더라도 선한 목적이면 용납해야 하는가, 선과 악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이 질문은 마지막까지도 계속 된다. 신 목사에게 이 대위는 말한다. ”저라면 진실을 얘기하겠습니다. (중략) 진실은 뇌물을 먹일 수 없는 겁니다.(85p)“ 하지만 은밀히 요청되고 만들어지는 진실을 본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103p)“ 진실은 그것이 진실이기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이 대위에게 장 대령은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153p)”며 반대한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대의를, 또 순교자들이 순교자로 남는다는 선한 목적을 위해, 장 대령은 신 목사에게 양심을 보증하기로 한다. 이는 선한 거짓말을 견딜 양심이다. 양심의 순결을 더럽히지 않는, 양심의 품질과 관계 없는 일종의 면역된 양심(109p)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는데 모든 이론은 예비되고 조정 가능하다.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37p)”,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난을 진정 알고 있을까요?(202p)” 되풀이되는 이 질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나열한 예들을 상기시킨다. 죄없는 어린이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학대의 사례를 들며(1권479~496p/문학동네) 그런 신이라면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나라의 입장권을 돌려주겠다고 단언한다. 죄 없는 그들이 고통당할 때 신은 그 고난을 알고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하는 질문은 오래 되었고 여전히 반복된다. 신 목사는 아내와 한 목사의 죽음이라는 두 번의 쓰디쓴 실패로 무서운 결단을 하고 그것을 자신의 십자가라 부른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내면의 확신을 홀로 간직하겠다며 ‘하나님의 종에게 숨겨진 그 무서운 진실(263p)’을 감춘다.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중략)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257p)”신과 인간의 이분법 속에 인간의 서를 선택하는 목사. 가엾은 인간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감게 하겠다는 희망은 다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논리와 일치한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을 지닌 작품으로 매 장이 의외의 전환이나 새로운 절정으로 맺어지기에 다음 장으로 속히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장면의 전환과 그에 따른 극적 효과는 연극을 보듯이 눈앞에 그려지고 예상을 빗겨가는 진행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각 인물들이 쫓는 개별 진실을 예측하면서도 역사의 수레바퀴 속 미미한 하나의 톱니로 마모되고 부스러지는 인간 비극을 담담히 그려낸다. 고립되는 도시 평양으로 운전대를 돌리며 죽음을 목전에 둔 중환자들 곁에 남는 의사 민 소령에게는 『페스트』의 리외가 보인다. 그들은 모두 설득되지 않는 자기만의 의지를 살아내고 그 결과를 수용한다. 마지막 페이지의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전해질 때 밤낮 없이 댕그랑거리던, 이제는 흔적 없는 그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 놓지 않아야 할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 “신은 침묵하는가”일 것이고 이는 새로운 매일의 답안지를 요청한다. 무참히 고립되었던 도시 평양과 페스트의 오랑과 욥의 우스땅은 동일한 인간 조건을 의미하지 않을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1:1)” 욥의 고난과 순종과 영광을 생각한다.
책속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 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3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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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6,25 전쟁의 배경을 그린 이 책 속 주인공은 비기독교인 이대위다.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6.25역사의 다른 면을 보게 되어 많은 것들을 느꼈다. 책 속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지상에서 우린 왜 그토록 많은 불의와 비참을 겪어야 하느냔 말야. 무엇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하느냔 말야?'. 이 문장을 보면서 한동안 생각이 잠겼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 말은 지금까지도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읽는 내내 마음 아픈 부분도 많았다. |
| 무거운 책이다. 엄숙하고 군더더기 없는 제목은 차치하더라도, 노벨상 후보와 한국인 이름 작가지만 번역 처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더라도, 쉬이 읽히지는 않는 작품이란 느낌이다. 편견은 맞았다. 공산당 으로부터 실종된 13명의 목사 중 2명 만이 살아 돌아온다. 기본적으로 미스테리의 요소를 띈 작품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이 한창인 평양, 국군이 점령중인 평양이다. 배경도 장르도 무겁다. 저자는 카뮈와 휠덜린에 영향을 받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의외로 차근 차근 읽어보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아마 미스테리의 모티브가 책을 이끌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이 함축한 여러 요소들을 읽어내긴 위해서는 사전 지식과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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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라고 하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등장 인물 중에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은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는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사전적인 의미의 순교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죽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순교자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교자라는 말이 꼭 종교적인 맥락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만약 종교적인 맥락에 한정시켜서 종교를 위해 투신하는 사람만을 위한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교자보다는 열성 신도가 더 어울린다. 순교자와 열성 신도는 다르다. 전자에는 어떤 위엄이 있고 종교를 떠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반면 후자는 종교의 팬덤 같다. 그래서 딱히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보면 순교자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독립 투사 같은.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라면 그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기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위엄 대신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든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종교에 관한 연설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믿음이 확고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존경심이 들지는 않는다. 거기서 느끼는 것은 위엄이 아니라 광기다.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라면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할 텐데 정작 그렇게 믿음이 확고한 사람을 보면 별로 순교자와 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만 봐도 자기가 믿고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목사조차 신이 정말로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도 뭐가 진실이고 뭐가 진짜 옳은 길인지 갈팡질팡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무엇이 불확실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일까. 불확실한 믿음에는 없고 확실한 믿음에는 있는 것 때문이 아닐까. 바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 말이다.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 자기가 믿는 것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확고한 믿음이란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삼단 논법으로 하면 이렇게 된다. 1. 내가 믿는 것은 옳다. 2. 옳은 것을 믿는 사람은 옳다. 3. 나는 옳다.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믿음이 대상을 투과해서 자기에게로 돌아온 셈이다. 이때 사람은 독선적으로 변하고 혼자만의 유토피아를 만든 후 그곳의 주인이 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다. 맹신은 확신과 다르다. 확신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것이라면 맹신은 내가 틀렸을 리 없고 너희가 틀렸다고 믿는다. 요컨대 부정을 포함한 믿음이 확신이고 부정을 배제한 믿음이 맹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건강한 야심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옳다고 믿는 것 외에 그 믿음을 위협하는 안티 테제가 항상 있어야 한다. 안티 테제에 맞서 자신의 테제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발전시키면서 우리는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테제가 수용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간다. 마치 근육이 계속 상처 입으면서 자라는 것처럼. 확신은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진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무수한 생각들과의 경합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신의 구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맹신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야심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맹신에 빠진 사람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신의 세계에 안티 테제를 불러오는 것을 멈춰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아무리 격앙되어 있어도 아무리 멋진 말로 점철되어 있어도 아무런 울림도 주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말이 아니라 공명이다.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를 볼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공명이 일어나고 그 공명은 우리가 아직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때 우리는 창고의 문을 열고 오랫동안 싸우지 않았던 자신의 낡은 테제를 꺼낸다. 그것은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고 전체적으로 낡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안티 테제와 싸우는 와중에 우리의 테제는 계속해서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와 무관하게 순교자에게서 위엄을 느끼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하나의 전범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관념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할 일은 뚜렷하다.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에서 종종 ‘헛것’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순신에게 헛것이란 대의나 정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할 일은 왜구와 싸우는 일처럼 명료했다. 확신도 그러한 것이다. 확신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관념이 아니라 안티 테제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역동성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확신은 무엇이 옳은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력이고 그 동력은 거창한 언어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할 일을 구체적으로 해나가는 데서 연료를 얻는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아무도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순교자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할 일을 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물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최선이 아니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최선이다. 2025년 8월 18일부터 2025년 8월 23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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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수복된 평양에 입성한 이대위는 북한군의 목사 집단 학살 사건의 진상조사를 맡게 된다. 학살의 반대급부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고 싶은 미군은 사망자 12명을 공산정권의 박해에 순교한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이들은 구차한 모습을 보였고, 이 광경을 본 한 목사가 실성했으며, 살아남은 신목사만이 변심하지 않아 살려줬다는 학살자의 증언이 나온다. 이 모든 상황에 침묵하던 신목사는 오히려 본인이 배교로 살아남은 죄인이며, 이미 고인이 된 12명의 목회자들이 참된 순교자라며 거짓 증언을 한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이대위에게 신목사는 본인이 증언하지 않으면 성도들의 희망이 사라져 그들을 저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본인은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외롭지만 진실을 아는 자의 괴로움을 버텨내고자 한다. 중공군의 남하가 시작되고 평양에서 퇴각하는 미군은 신목사 등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미리 데려가려 하지만 강력히 거부하며 그곳에 남아 가장 약한 성도들과 함께 한다. 부산으로 내려온 이대위는 훗날 신목사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된다. (평양에 남았다가 역시나 행방불명 처리 된 자,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많은 사람을 살린 사람, 간신히 살아돌아와 또다시 성도들과 함께 터를 일구는 군목 등)
진실의 이면, 당위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진실의 여부 만큼, 목적이 중요하다. 진정한 목적이 진실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왜곡된 진실은 왜곡된 진실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발현되었다. 진실의 이면을 알면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왜곡의 본 목적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왜곡의 본 의도까지가 실체적 진실이다. 2.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람은 성선의 마음과 성악의 마음 둘 다를 가지고 있다. 성선과 성악 중 인간의 이기심에 취합하는 건 성악이기 때문에 더 우세하지만 성선의 마음 또한 인간의 기본 성품이기에 이를 외면할 수 없는 것 같다. 타고난 기질+평소 키워나간 품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지. 누구에게나 성선과 성악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위기에 상황에 성선과 성악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타고난 기질+후천적 교육 및 노력의 결과라 생각한다. 진정한 종교는 후천적 교육 및 노력을 계속하여 그 자체를 체화시키는 것.. 신목사와 군목, 박대위 등은 신이 없다 생각하고 좌절했지만 결국 가장 약한자들 곁에 남아있기 위해 모든것을 버렸다. 긴 시간 신앙생활을 하며 훈련하지 않았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힘의 본질이 신앙의 힘과 의미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순교의 유무는 의미를 잃는다. 누군가에게는 말과 행동으로 하는 배교가 절대적 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무엇을 위해 내려놓음이기에 배교가 아닐 수도 있다. 진정한 순교의 여부는 오직 스스로의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무엇으로 결정되어지는 듯 하다. 차마 예수님의 탕화를 밟지 못해 순교하는 사람과 내 옆의 불쌍한 자들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배교하는 사람(엔도슈사큐 침묵이 생각남) 모두 본인이 차마 할 수 없고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로 결정되어진다. 중요한 건 차마 내려놓을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어 지는 게 아닐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