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정말 쉽게, 그리고 잘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류대영 선생님수업 시간에 읽은 책 중 가장 대중적인 책이었고, 그래도 제목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말을 하는 책이었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뭐 나도 대중이니까, 나도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내 책꽂이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왜 읽느냐고 묻길래 성경의 이해 시간에 서평을 쓰는 책이라고 했더니, ‘류선생님이?’ 하며 약간의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확실히 수업 시간에 읽었던 다른 책들에 비해서는 학문적 깊이에 대한 차이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다뤘던 다른 책들은 너무 좋았음에도, 약간의 난해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섣불리 추천해 주기가 민망했는데, 이 책은 내가 읽었다고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읽었다며, 참 좋은 책이었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필립 얀시의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닌데, 예전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 때도 생각했었다. 책을 쉽게, 그리고 임팩트가 있는 필체로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주구나. 어쨌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데는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이 책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비유에서 만난 예수님도 참 좋았었고, 특히 그 책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어서 너무 좋았었는데 이 책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지만, 그보다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님 자체에 대해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신으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만 알려고 하고, 인간으로 오셨을 때의 예수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 하지 않았었는데 그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된 건 내게는 정말 감사 그 자체였다.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리고 그 당시에 육신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는 한 편에는 당신께서는 당신이 이미 3일만에 부활할 것을 알고 계시는데, 그 때의 일시적인 버림이 그렇게까지 맘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치워달라는 기도를 드렸던 예수님 역시 죽으러 오셨으면서 그렇게까지 마음이 괴로우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내게 예수님은 신이시니까, 예수님의 신적인 측면만 너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이해하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정말 감사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진심으로 (물론 그 깊이에 있어서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핵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두려운 것은 당연한 건데, 그리고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을텐데, 게다가 자신의 속에는 기적을 능히 행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는데,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이 있고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충분히 갖췄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극히 낮추라고, 저들을 위해 죽는 게 진정 저들을 위한 길이며 그렇게 했을 땐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과 영화를 보장해 주겠다고 설령 말씀하신들, 난 그 일을 정말 기쁜 맘으로 할 수 있을지, 인간으로서의 내 모습을 예수님에게 대입해 보니 난 아직도 나를 너무 사랑하고, 그렇게까지 나를 버리고 낮추는 게 정말 괴롭고 힘이 들 것만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예수님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고, 그게 너무너무 감사했던 거다. 특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 역시 예수님의 인성을 이해하고 나니, 정말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예수님은 예수님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없지 않았는데, 사탄의 유혹의 핵심은 자신을 한없이 낮춰 내려오신 예수님이 자신을 더욱 낮추셔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 자신을 그렇게 낮추지 말고, 자신의 진가를 보여 자신을 높이라는 것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이러한 유혹을 이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예수께서는 세상의 지배 규칙들에 복종하지 않으시고, 그 유혹을 이겨내셨다. 그리고 묵묵히 낮은 길을 선택하셨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으신, 너무나 철저하게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에 또 참 감사했다.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서 좀 더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내 개인사에서도, 내가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차라리 명확하게 너의 길을 이것이니라, 라고 말씀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절대적인 그 힘을 알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휘둘러 주신다면, 하나님도 우리도 좀 더 사는 게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눈 앞에 보이는 확실한 길보다, 하나님은 멀리 보시고, 멀리 계획하시는 분이시며, 그러한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권력은 복종을 강요할 수 있지만,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는 저자의 견해는 정말 탁월했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절대 예외가 없는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품을 통해서 바람직한 선의 모습에 대해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예수를 조금 알 것 같다. 그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내가 예수에 대해 얼마나 잘 알지 못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 느낄 수 있었고, 예수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이제서야 정말 조금, 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구나,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를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지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정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들면서, 앞으로 알아갈 예수 더욱 이해하기 작업에 시작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운 작업이 될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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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의 글은, 놀랍도록 정연하다. 그리고 단시간에 주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하면서도 결코 도중에 길을 잃는 법이 없다. 그의 글들에 담겨 있는 공통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 혹은 회의를 가졌을 법한 주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는 책은, 말 그대로 예수의 이야기다. 이때 우리말 '의'가 영어의 'of'나 'about'과 대응된다고 볼 때, 이 책은 두가지 전치사에 모두 대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직신학의 한 장(章)으로서의 기독론이나, 역사적 예수 연구(The research of Historical Jesus)라는 신학적용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말하는 시중의 기독서적이 다분히 '신앙고백'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기독인들에게 슈바이처 박사 (아프리카의 슈바이처와 동일인이다. 그는 놀랍게도 가장 영향력 있는 신약학 교수였으며, 그 정점에서 오히려 선교를 위해 의학을 공부했다)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나, G. 타이센의 두툼한 책을 읽어야 '예수'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과 지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매함일 뿐이다. 하지만, 사실 신학과 신앙은 그 사이에 놓일 수 있는 가교가 부족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손엔 성경, 다른 한 손엔 신문'을 외쳤던 칼 바르트의 목회자 상은 현대 교회 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나치게 보수화되고 교권화되는 한국교회의 상황은, 목회자를 '선동가'로 혹은 '펀드매니저'로 전락시켜왔다. 이를 두고 '교회의 세속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볼 땐, 대다수 교회 목회자들의 자질부족에서 문제가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학적 사고를 신앙적 이해로 디코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고된 연구의 결과물은 결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더미 안에서 먼지만 쌓아가고, 목회자들은 감정적인 모습으로 예수의 실체를 가리고, 온갖 기복적 요소로 덧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R.불트만이 경계했던 '신화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지경까지 '오해'와 '미화'를 일삼고 있진 않을지. 그런데, 필립 얀시도 이런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역시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했던 것 같다. 기독교의 복음서에 등장한 때론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를 보면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고민했던 것 같다. 사회적 미화와 은근한 왜곡. 또 강단의 부적절한 비유와 더불어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한 노골적인 인용 등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일부 대형교회의 예수님은 자유주의의 수호자이며, 시장경제체제의 진솔한 옹호자이고, 빈익빈 부익부의 가치를 사랑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겸허를 보이시는 분이다. 그분은 공산주의에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헨리 조지 식의 토지 이해를 증오하시는 분이다. 놀라운 치료의 능력으로, 나의 기름진 지방간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기적의 능력으로 평당 10만원이던 내 땅을 순식간에 평당 200만원의 금싸라기로 만드시는 분이신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오래참고 용서하시는 분이어서, 내가 간혹 골프모임에 참석하느라 예배를 빠지더라도 용서하시고, 귀찮은 교회 모임이나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눈물 글썽이며 나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에 동의할 것인가? 과연 예수님은 '동의'와 '합의'를 통해 선포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분이신가. 필립 얀시는 결코 가볍지 않게 이 사색을 이끌어 간다.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해묵은 질문을 던져놓고, 우리가 미쳐 가보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이끌어 마음의 부스러기처럼 간직하고 있던 의문을 꺼내게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하던 그의 책을 꼼꼼히 읽어보자. 그곳에는, 흔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러하듯, 설교조의 이야기는 없다. 무언가 준엄하게 가르치려는 목소리도 없다. 오히려 내가 고민하던 그 자리에서 오래 함께 앉아있던 사람의 고민만이 가득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또는 더욱 치밀하게 그 고민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신앙을 천박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고, 진심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게 하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 그림자도 알지 못하면서 그 분이 내 안에 있다 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의적인 결론이다. 이제 그분을 알기 위해 작은 시간을 들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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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부터, 그러니깐 한국 시간으로는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이란 주현절 이후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40일을 일컫는다. 대개 기독교인들은 이 40일 동안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낸다.
2009년 사순절 기간을 '제대로' 보내고 싶은 기독교인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당연히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제일 많이 언급하는 것도 '예수'에 관한 것이고, 아무리 성경을 안 읽어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무늬만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적어도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 한 권 정도는 완독을 했을테니깐 말이다. 그 밖에도 우리는 예수의 탄생과 행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숱한 이야기들을 읽고 듣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에 대해 잘 아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하는 사람이든 '글쎄...'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든 간에 이 책은, 그동안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잘 알지 못했던 예수에 대해 보여준다.
여기서 질문 하나.
당신은 도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개의 경우 도마는 '믿음 없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도마로서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도마는 믿음 없는 사람일까?
개인적으로 필립 얀시를 좋아하지만, 필립 얀시는 분명 도마같은 사람이다.
따라서 너무 뜨겁고 열정적이고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하는 크리스챤이라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이 인간 도대체 뭐야?'
그렇지만 필립 얀시를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사람은 기존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것까지 재검토하고 다시 생각함으로써 예수를 재정립하고 바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입해준 믿음이 아니라 내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깊이 회의하고 의심하고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다시 만나는 예수. 그것이 필립 얀시가 지향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타성에 젖어 있거나 신앙 생활 자체가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점검하고 다시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예수천국 불신지옥'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뭔가?'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필립 얀시가 말하는 예수, 그 예수를 깊이 알고 깨닫게 된다면 더 이상 우리가 믿는 종교는 적어도 '인민의 아편'은 아니게 될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이 책에서는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승천까지를 연구하고 묵상하고 있다. 그당시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서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해준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볼 수 있게 해주고, '과연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준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왜 중요한지, 그것이 왜 유의미한 것인지 설명한다.
성경에서 예수는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 Son of Man)라고 지칭했다. 즉 예수는 완벽한 신이었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인간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예수' 역시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었던 예수의 모습이다. 완벽하게 신이었지만 완벽하게 인간이었던 예수.
탄생에서 승천까지의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신이었지만 인자였던 예수의 모습은 무척 은혜가 된다(이건 직접 읽어 봐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몸소 체험해보는 경험을 해보기 바란다).
지나치게 은사 위주로 경도된 신앙이 위험한 것처럼 지나치게 이성적인 신앙도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아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바로 알 때 바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맑은 샘물처럼 정갈한 글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깊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당신이 도마와 같았던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고 큰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쉽게 뜨거워진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 수 있지만,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과 신앙은 반석과 같이 탄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우리집의 가훈이기도 하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을 통해 가장 값진 사순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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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들이 강했으나 당신께서는 약했다. 그들은 당당히 걸어서 옥좌로 나아갔지만 당신께서는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에는 오직 하나님의 상처만이 말을 걸 수있다. 다른 신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당신께서는 홀로 상처를 입었다."( 에드워드 실리토)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저는 동의 할 수있습니다. 저자 처럼 오래 에수란 존재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온것은 아니지만 저자와 같은 고민은 늘 해왔으니까요. 저자의 그런 고민에 동의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래 동안 읽었습니다. 거의 몇달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야 이 책을 덮게 됩니다. 지금 이순간 무엇보다도 저자가 발견한 것이 내게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저자가 만난 예수란 어떤 인물인가..
1. 죄인들의 친구였으나 죄 없는이..
예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본다면 오늘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대였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모습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존재는 달랐습니다. 복음서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는 죄인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이 그를 죽음에 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인이 아니였습니다.
2. 하나님이자 인간있었던 이..
인간예수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부인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 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신이고 신이 사람이 될수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정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신이아니라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것을 예수가 직접그런것이 아니고 후대에 곡해되었다고 주장할 수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3. 하나님의 표상
이땅에서 하나님을 본사람이 있을까.. 성경에는 하나님과 교제하였다거나 동행했다는 존재가 있습니다. 에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개합니다. '친밀감', 신이란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게 경외감을 갖게 하거나 저멀리 하늘에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4. 인간의 표상
신(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자는 친밀감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기쁨과 놀라움을 말합니다. 바로 옆에서 함께 한다는 것, 놀랍지 않는가..
5. 사랑이신 이
사랑이란 단어는 늘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바로 사랑의 실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입니다. 에수의 삶은 그 자체가 사랑이었습니다.
6. 상처바은 치유자..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인식입니다. 그런 인식의 바탕속에서 그에 대한 사랑이 나온다고 생가갑니다. 그럼 점에서 예수는 너무나 완전한 멘토인 것입니다.
저자의 견해 처럼 예수란 존재는 내게 너무나 귀하게 다가옵니다.이런 존재를 나의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참오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예수란 존재를 몰랐다면 내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기쁜 하루입니다. [인상깊은구절] 예수를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내 드러낸 또 한가지 명제가 있었다. 그것은 교회 자체가 켜켜이 쌓은 먼지와 오점을 걷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이다 |
| 이 책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예수가 아니라 복음서가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는 예수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여러 자료를 통해 살피고 있다. C.S.루이스의 고백처럼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계시는 당신을 보여주소서”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너무나 오해되고 우리 마음대로 그 분을 규정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 분은 너무나 겸손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 하시고 자신의 신적능력까지도 제한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시면서까지 인간을 이해하셨다. 그 분은 우리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 그러나 결코 그는 당신의 사랑을 강권적으로 강요치 않으셨다. 우리가 거부할 권리를 주시고 우리의 의지로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바라고 원하셨다. 그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힘없는 자가 되셨다. 그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범을 몸서 보여주셨다. 과연 그리스도인인 나는 주님에 그 사랑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님의 모습을 그 사랑을 깊이 체험케 하는 책이다. 필립얀시 책 중에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주님의 그 사랑...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 가운데 거하고 싶다. 주님께서 나를 진정 사랑하시듯 나도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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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그리고 앞으로 믿을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다시 한번 냉정하 게 생각한다. 나의 개인적인 느낌, 어느 한 그룹의 시각에서만 비춰진 모습이 아닌, 객관적이면서 아니 객관적이어서 더 진리인 하나님 !! 오 !!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
감정에 치우치다보면 덜 정직해지고 덜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에 대한 나의 신앙이 이제껏 그랬다. 주관적인 나의 생각으로 그분의 원래의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진 않았는지, 아니면 일어나지도 않은 많은 일들을 믿고 싶어 하진 않았는지.......내가 만약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과 같은 믿음이 생길지는 의문이다. 지금 나의 주위 사람들의 믿음을 본받는 내가 그때의 주위 사람들의 실수를 따라하지 않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난 내게 들려오는 감미로운 신앙의 자극으로만 예수님을 알면 안 된다. 감정의 기복이 나의 믿음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야 이고, 정말로 길과 진리이시라는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하신 것 같다.
과거 주일학교에 걸려있던 예수님의 초상화에서 느껴지는 온화한 미소와 각이 잘잡힌 체형과 얼굴....... 단지 이런 외적인 모습으로만 인식 되던 예수님의 진짜모습을 찾아내기 위한 필립얀시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말로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시작해야 되겠다. 패커는 그의 책 ‘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일각의 수고에 이런 말을 했다. “ 그것들이 자신이 묘사하는 신적존재의 인격적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진리의 대부분을 불가피하게 숨기게 된다.” 어쩜 우린 우리가 이미지적인 요소로 부각한 예수만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단지 우리의 필요로 인해... 필립얀시가 이 책을 통해 발견해낸 예수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영광의 자리에 있지 못했고, 금장식이 호화롭게 달린 겉옷을 두른 적도 없고 하늘의 천사를 데려와 모든 악한 세력을 멸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는 자기에게 멸시와 천대를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세리와 창녀, 병든자, 불구자들 주위에서 ‘ 마음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역설하며 팔복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직접 그가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셨다. 또 충분히 하늘의 비밀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간이 쉽게 이해하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쉬운 표현을 아끼고 완강한 유대인 앞에서도 진리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으신다. “ 예수는 진리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자였다 “ 예수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 그 철두철미하고 완전한 명령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라“ 우리의 편의대로 단지 몇 %만 지킬 수 없는 그분의 명령 !!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한다. 정말 원수를 사랑해야 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 대야한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는 그 반대가 더 맞지 않을까? 그럼 우리는 다 그분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필립얀시는 이 절대적 명령을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마른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처럼 산상수훈은 단호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존재임을 피력한다. 그 절망과 그 비참함을 절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다. 우리가 절대적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절감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로운 품 이외에 다른 안식처는 결코 없다. “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 하지만 그 기적을 본 세대들은, 직접 옆에서 본 세대들은 지금우리들처럼 직접적인 기적이 없는 세대들 보다 주님을 따르지 못했다. 기적이 믿음을 만들어 내지 못하므로 예수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쉬쉬하셨다. “기적은 원래대로 회복될 때 어찌되리라는 것을 미리 엿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예수님의 마지막 밤, 마지막 만찬. 다가올 죽음을 아시고, 자신을 팔 제자를 아시면서도 그들의 발을 씻기신 이해 못 할 주. 갈보리 외면의 현장. 배신의 언덕에서 신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조롱하는 로마군병의 소리를 가만히 들으시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분. 갈보리 절규 속에 죽으신 주. 하지만 그 은혜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죽음 앞에 원수 사탄은 오히려 힘을 잃고 주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사랑 힘입어 다시 사는 그 아름다운 사건.
3일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가 부활을 알리신 주 배신한 그들, 당신을 부인한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사 구운 떡과 고기를 손수 먹이시던 자상한 주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 내양을 먹이라” 11명의 제자는 그때부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 순교의 죽음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사 완전한 성품이루시고 완전한 계획이루시고 일부러 가난하게 되사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죽음을 초월하신 분이 죽으사 우리를 살리셨네. 오 !!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여!!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말씀이시라. “ 내 양을 먹이라 ”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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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간에 예수라는 이름을 모두다 들어보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에 나는 모두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do you know jesus?" 나는 이책을 읽기전 이렇게 묻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yes" 하며 당당히 말하였을 겄이다.
하지만 이책을 읽고 난뒤의 난 누군가 다시 내게 "당신이 진정 예수님을 아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질문에 대해 자신이 없는 없는 나의 얼굴이 금방 보일겄이다. 나는 예수님을 안다 하지만 그를 잘 모른다.. 얼마나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교만했는가 ? 그리고 그 교만함으로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하는 생각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누구보다 몸소 그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그 사랑의 결정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너무나 마음과 몸으로 믿지 못하고 머리로만 예수님을 믿었던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어쩜 이책을 읽고난 지금도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건 교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순간 조용히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고 싶은건 그분의 그모습들을 이책을 통해 알았고 그분의 그모습들을 닮고 싶기 때문이아닐까? 난 마지막으로 너무나 흔하지만 진실한 질문 하나를 내 자신과 예수님를 믿는다는 많은 이들에게 하고싶다. "do ypu know jesus?" [인상깊은구절] 신앙은 기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기적이 신앙에서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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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존의 환상적인 지식에서부터 의문을 갖고 시작한다. 정말로,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을까, 산상수훈의 팔복, 그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 소리인가, 부활을 믿을만한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인 높이에 갖다 놓고, 인간적인 질문을 던진다. 또, 때로는 반대로 인간적인 위치에 갖다 놓고는 신만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 시작한다. 정말로 그렇까, 그것이 가능한 소리인다. 대답은 그랬다. 이 보다 더 사실은 없다고. 가슴에서 출발한 신앙이 머리로 관통해 들어가고, 머리 속의 신앙이 가슴 속을 파고 들어가게 하였다. 정말로, 제목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생각하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인상깊은구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는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려고도, 다른 사람엑 의지하고픈 심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인을 삼으려고 제자들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을 친구로 삼았다. 그는 기쁜이든 슬픈이든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었고, 어려운 때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예수의 가족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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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시가 쓴 또 하나의 탁월한 베스트 셀러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정직한 책이다. 그는 정직하게 질문하고, 정직하게 고민하고, 정직하게 연구하고, 또한 정직하게 답한다. 2천년 역사의 더께 위에 온갖 수사어구들로 채색되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 이전에 교리와 상투성의 색안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예수의 모습을 그 자신 새로이 느끼고 그려낸다. 얀시는 예수의 시대, 그가 활동하던 그 시기에 예수께서 태어나던 그 마구간, 그가 자라나던 그 동네, 그가 세례를 받던 그 강, 그가 시험을 받던 그 광야, 그가 기적을 행하던 그 마을들, 그가 말씀을 전하던 그 산, 그가 풍랑을 꾸짖던 그 호수, 그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그 산상, 그가 십자가를 끌던 그 길, 그가 십자가에 달린 그 언덕, 그가 부활 후 나타나신 그 방, 그가 승천하던 하늘이 보이던 그 땅에 모여있던 한 무리의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 그 상황의 내외적인 면을 모조리 관찰한, 날카롭고도 정직한 기자의 모습으로 여지껏 알지 못했던 바로 그 예수의 모습을 우리 안에 각인시킨다.
사실상 하나님 앞에 가장 진실해야 할 우리가 진실한 모습으로 서지 못할 때 복음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타락한 죄인의 본성을 지닌 우리에게 의심은 일면(一面)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그 의심을 다루는 우리의 부정직함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모든 의심을 사단이 준 것으로, 사악한 세속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그 진실성을 잃게 된다. 정직하게 질문하여 정직하게 답을 받는 대신 거짓된 위장의 은폐물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 되고 만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결코 허우적대는 것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을 향해 달려간다. 차라리 "의심많은 도마"처럼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는 이는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정직한 자는 겸손할 수 있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리고 그는 참된 신앙을 감격스런 외침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이후 세 번째로 읽은 얀시의 책이 역시 비껴가지 않고 나를 감동시킨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또 새로운 책으로 내게 또 하나의 지평선을 보게 한다. 기름진 거름더미 속에 눈으로는 구별되지 않은 불순한 유해성분이 있는 것처럼, 풍성한 가을걷이를 남겨둔 대평원의 익은 알곡들 속에 보이지 않고 구별되지 않는 가라지가 그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우리네 신앙의 쌓여진 둔덕 속에도 우리를 참된 지식과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불순물이 숨겨진 채 서서히 우리를 왜곡시켜 나가는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것이 사실로서 존재하기에 그것은 우리의 고백일 수밖에 없다. 때로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들, 보이지 않는 채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가 더욱 치명적이듯 드러내야 할 정직한 고백은 우리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넘어서서 반드시 나타내어질 필요가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나는 지금껏 정말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분을 대한 적이 없었음을 느낀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분과 내가 대면하게 되는 그날에 내가 알고 있었던 그분이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그분임을 느낄 수 있다면 내 평생의 삶은 후회가 없으리라. 이런 생각들로 나를 자극시켜 준 얀시에게 또 한번 감사하고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동일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넘쳐나는 감격 안에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글의 마지막 예화가 강한 여운의 감동으로 뇌리를 둘러싼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의 할머니는 루이지애나 전원의 한 성공회 공동묘지, 150년 된 참나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묘지 비석에는 고인의 유언을 따라 단 한마디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기다림.'"
그 날을 기다린다. [인상깊은구절]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의 할머니는 루이지애나 전원의 한 성공회 공동묘지, 150년 된 참나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묘지 비석에는 고인의 유언을 따라 단 한마디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기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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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쓰여져 있는 리뷰만으로도 충분할 이책에 내가 또 하나의 리뷰를 더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를 위해서라기 보다 나 스스로의 위해서라고 솔직히 고백해야 겠다. 책을 통해 느껴던 감동을 갈무리하는 방편으로 감탄사를 늘어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 있을까? 예수와 우리의 거리를 이렇게 단박에 줄여버린 책이 있을까? 저자의 의심과 회의에 공감할 수 밖에 없고, 그가 찾아낸 예수의 모습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나도 역시 알지 못했던 예수였으며, 그가 알게 된 예수는 이제 내가 조금씩 알게 된 예수이다...
이 책은 신학적 질문에 답하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수 없는 부분에 추상적인 개념을 끌어들어 설명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졌던 진지한 고민과 괴로운 문제들 사이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 결국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해버린 우리에게 의심과 회의가 허락된 적이 없는듯하다. 우리는 괴로워하며 견뎌야 했고, 타인의 정죄와 염려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의심을 토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많은 말들은 결국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선포된 것이 아니가?!! 결국 저자는 의심과 회의를 통해서만 열리는 신앙의 문을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독자들은 그 문을 통과해 '보이신' 하나님의 참모습에 더욱 다가가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사실, 하나님에 대한 내 조악하고 무미건조한 개념들은 예수로 인해 상당부분 교정되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그리그도인인가? 이따금씩 나 자신에게 던져 보는 질문인데,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솔직히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달리 훌륭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예수 때문이다. 총기가 넘치며, 길들여지지 않고, 온유하며, 창조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굴복시킬 수 없는,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대단히 겸손한 이 예수야말로, 나를 탐구해 보라며 당당히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다.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바로 그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