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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은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가?” 나는 바쁜 회사생활을 이유로 TV시청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TV시청은 예능프로그램에 편중되어 있었다. 지하철 무료신문이 등장하고,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많은 수의 인터넷 기사들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사회, 경제, 정치와 단절된 체 살아왔다. 최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보다 넓은 시야의 확보를 위해 인터넷 기사들을 위주로 정보를 습득하고 있지만, 이 책을 보기 전까진 습득되어 지는 기사의 정보들을 객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해 왔고 주변 지인들에게 주제넘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 이 책의 특징은 한국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워렌 버핏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워렌 버핏이 말하는 기업의 본질 가치와 상식을 한국 언론의 실체와 몰상식에 대조하고 있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언론의 미래 예측과 투자 정보들의 실체를 워렌 버핏의 투자 안목과 대조하여 서술해 나간다. 또한 워렌 버핏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면 이 사회는 보다 포괄적이고 순탄하게 진보해나갈 수 있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의 행태 KBS나 MBC는 1970~80년대의 보도된 방송자료를 디지털화 하는 일을 꺼리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최강국에 세계적 첨단 방송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는 두 방송사가 왜 자신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디지털화 하는 기초적인 작업에 인색한 것일까? 이 이유는 1980년대에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많은 방송기자들이 현직 언론인 간부들이거나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행했던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파렴치한 것들이었기 때문인데, 이를 뒷받침 하는 보도 자료 중 하나는 80년 광주사태의 폭도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계엄군이 피를 맞아 쓰러지는 모습만의 반복편집이다. 화면 속의 계엄군들은 시민들에게 맞기만 할 뿐 결코 때리지 않는다. “폭도들이 국가 안위를 위협했지만 계엄군의 도움으로 용공분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찾았다”는 점만을 강조한다. 학생과 시민을 빨갱이로 몰고, 얼마 전 <<하우스 푸어>>의 서평을 작성할 때 적은 내용이 있다. 언론매체의 주 수입원인 아파트 광고를 위해 사실과는 왜곡된, 거품 가득한 광고문구를 여과 없이 게재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의 정당성을 위해 마련되는 전문가들의 공식입장 또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경제 전문가나 교수라는 허울로 등장하는 이들의 또 다른 직업은 특정 업체의 부동산 컨설턴트나 이사 등의 감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또 다른” 직업은 기사 게재시 언급되지 않는다. 아니 아마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두 번째 직업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편향된 정보를 흘려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니까 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제면엔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다. “급등”이니 “폭락”이니 하는 단어들이 그것인데. 이는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현실의 왜곡된 과장이다. 불과 몇%의 수치가 하락하거나 상승하는데도 기사는 폭등이니 폭락이니 하는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소비자의 뇌리엔 몇%의 수치보단 폭락이나 폭등이라는 단어만 남게되며, 이는 대중 심리의 불안을 야기 시키고, 심대한 정신적, 물질적 손해를 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한국은 상업주의의 부작용과 더불어 일제 시대부터 비롯된 ‘출입처 제도’라는 것이 있다. 언론사의 ‘주요 출입처’는 모두 권력 있는 정부기관 또는 돈 있는 대기업을 의미하는데, ‘주요 출입처’를 부여 받는 것은, 직급 체계가 단순한 기자 사회에서는 일종의 ‘승진’과 같은 것 이다. 주요 출입처의 기자들은 자신이 마치 권력자인 양 착각할 때도 있고, 때로는 자신들이 권력기관과 마치 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는 출입처 사람들과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진실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마치 ‘인륜’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출입처에 대한 실랄한 기사는 출입처 기자를 통해서 아닌 외부의 기자에 의해 게재되는 확률이 높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워렌 버핏의 안목 사실 우리나라의 언론을 비판하는 챕터 사이사이마다 워렌 버핏에 대한 챕터가 등장하는데, 조목조목 따져 적지는 않겠다. 결과적으로 워렌 버핏의 상식은 우리나라 언론의 몰상식과 대조하고 앞 길을 조망하기 위해 선택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것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항상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고 인터뷰하며 곧 주가가 오른다. 어디어디 아파트의 프리미엄이 좋다는 식의 기사를 아무렇지 않게 싣는다. 여기저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 주가의 미래를 예견하고 미래를 점친다. 해당 기사의 여파로 하우스푸어가 늘고 빚이 늘어가는 개인 투자자들은 그들의 안중엔 없다. 미국 대 공황을 몰고온 서브프라임 모지기 사태가 대표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세계 최고의 수익률을 낸 워렌 버핏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세계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 것인가? 워렌 버핏은 추정과 사실을 구분하며 기업의 가치로 판단하고 투자 결정은 스스로의 판단에 준거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은 폭락이니 폭등이니 하는 대중심리를 흔들리게 하는 과대포장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지금 당장 매도 혹은 매수하지 않으면 후회를 할 것이란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낸다. 진실보도 보단 돈 되는 기사를 좋아하는 것은 언론사에 속한 직장인이란 관념이 지배적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판단을 믿고 오랜 시간 마음을 다스리면 결국 본인이 파악한 기업의 본질 가치에 수렴할 것이라는 워렌 버핏과 대조적으로 초단위로 호흡하는 우리나라 언론의 떼거리즘과 판매부수의 증가 혹은 자극적인 기사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관심 덕분에 진실보도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주가는 단기적으로 인기투표이지만 장기적으론 체중계와 같다"는 버핏 스승의 말은 저마다 건정성을 망각하고 경쟁 속에서 허우적대다 결국 절벽 끝으로 추락하는 레밍과 같은 투자자들에게 절실한 가치관은 아닐까 생각한다. 언론과 우리가 나가야 할 길 대통령의 말 이라고 무조건 천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애널리스트의 분석이라고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언론은 “왜”라고 물어야 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또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결론을 도출했는지 따져야 한다. 정부와 기업의 권력 앞에 꼬리를 내리고 받아쓰기 기사만을 내어 놓는 현실, 진실의 추궁보단 안정적인 직장의 한 사람으로써의 행로를 선택한 그들. 연예인들의 소문이나 험담등 소위 가쉽거리에만 촛점을 맞춘 저질 기사들. 이젠 돈과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진실만을 보도하겠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똘똘 뭉친 언론인은 허구의 소설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것 일까?
"버려서는 안 될, 결코 버릴 수 없는 원칙이 있다. 사명감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감시자로서의 역할이다. 잠시라도 그 점을 망각하면 기자가 아니다. 왜 기자들이 대우를 받는가. 왜 존경을 받았는가. 인간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악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과 싸우는 전사이기 때문이다. 군인이 총 들고 적과 싸우길 거부한다면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검찰과 경찰이 범죄자를 잡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탄압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기자가 불법과 부정을 외면하고 악과 손잡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비난 받아야 한다. 그들의 펜은 정의가 아니라 흉기다." - 이기명(칼럼니스트)
비판 받아야할 대상은 언론과 기자들만이 아니다. 눈앞의 물질과 힘에 굴복하여 한쪽으로 편중된 보도만을 일삼는 그들 아래는 <<동물농장>>처럼 우매한 대중이 있다. 인터넷의 세계가 열리고 수 많은 인터넷 기사들이 난무하는 요즘, 여과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뇌당해 자신도 모르게 언론의 통제를 당하는 대중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스스로 통제받는 것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 채 통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이 다른 동물들의 지적 우둔함을 이용하여 눈과 귀를 멀게하는 일련의 방법들이 언론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는 지금의 대중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인 정보의 홍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과 비판적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국민 스스로 알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대형 언론사들 역시 소비자인 대중의 저항 없이 그들의 이익과 권리를 결코 스스로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당초 우리 것이었는데도 돌려주지 않는다면, 가서 되찾아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본디 쟁취하는 것입니다.” –p245
하지만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의 세상에서 살고있다. 하루에만 인터넷 기사는 수 천~ 수 만편 가까이 게재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어떻게 객관적인 진실과 왜곡된 진실을 가려낼 수 있을까? 결정은 스스로의 판단에 준거한다는 워렌 버핏의 말 처럼, 정보를 이용함에 있어 가치 판단에 대한 기준은 개개인이 스스로 정립해 나가야 하는걸까? 무제한적으로 공급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몸부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워렌 버핏이 되어야만 한다는 과제를 떠 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을 담은 책이 또 있었을까?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강대국을 비판한 <<나쁜 사마리아인>>도 꽤나 비판의 강도가 세다고 생각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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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국에서 KBS 15년차 기자는 상당히 괜찮은 직업이다. 다른 대기업의 15년차 간부 못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국민이 주인인 공영 방송이니 사장에게 밉보이고 해고 당할 염려 또한 별로 없다. 전 국민이 보는 방송에서 일을 하니 그 영향력이 상당하고, 기자라는 직업의 신념을 자신의 이익과 적당히 물타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솔솔하게 사용할수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2009년 기자 생활 15년차를 맞았던 KBS 최경영 기자는 제 발로 그 좋은 직장을 뛰쳐나왔고 기자 생활 16년차가 될 수 있었던 2010년, 자신이 일했었던 KBS를 매섭게 비판하는 <9시의 거짓말 , 시사인 출판>이라는 책을 써냈다. |
![]() 정권의 방송 장악으로 시끄럽던 2008년 여름, 언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에서 활동하던 한 기자는 이른바 보복 조치로 탐사보도팀에서 스포츠 중계팀으로 발령받았다. 그이가 이 책의 저자인 KBS 최경영 기자이다. 그 후 휴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학 공부를 하고 있단다. 한국의 신문이나 TV에 등장하는 '전문가'들 또한 객관적으로 현상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처럼 등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한국 언론이 말하는 '국익'은 부자와 군력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TV 또는 신문에 등장하는 상당수 부동산 관련학 교수들도 간접적으로 시행사나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 연관돼 있다. 심지어 언론에 등장하는 부동산 관련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직접 부동산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거나 심지어는 땅 장사, 빌딩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우리 사회의 언론과 전문가는 대중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움으 주려 하기보단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일까'하는데 더 애를 쓰고 있다 고한다.
정부나 기업의 홍보 전문가들의 말을 받아 쓰기만하는 언론이 제공하는 기사를 보느니 차라리 정부나 기업, 시민단체의 보도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명확하다. 또 그게 좀더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은 대중이 깨어나야 할 때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 해야만 한다. 깨어난 대중이 이성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가치투자이고 현명하게 투표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언론의 자유는 대중의 자유이며 정당한 우리의 몫이기에 돌려주지 않는다면 시민의 힘으로 되찾아 오는 수 밖에 없다. 용기있는 양심의 고백을 읽으며 자유는 쟁취하는 자의 것임을 재차 확인한다.
이 책은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나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는 투자자뿐만 아니라 언론을 찰떡같이 믿고있는 국민모두가 언론보도와 주가와 주식관련 뉴스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일조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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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정부의 언론 장악이 한참일 무렵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KBS 사원행동을 했던 한 기자가 있다. 그는 이달의 기자상을 여섯 번이나 받을 정도로 탐사보도 영역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탐사보도팀에서 스포츠 중계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이유야 짐작할 수 있는 바대로인 보복인사. 한국 언론이 즐겨 쓰는 ‘국익’ ‘화합’ ‘안정’과 같은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단어에는 그들이 보호해주고 싶은 사회 기득권의 이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원화된 이익사회입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직장인의 이익이 모두 다르고 또 그 안에서도 개별적 이익이 갈라집니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어떤 집단은 혜택을 받고 어떤 계층은 거꾸로 불이익을 받습니다. …… 자본주의에 바탕한 민주 사회는 이렇게 이익이 천차만별입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이 말하는 국익은 기실 신기루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매 순간 갈등하고 타협합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는 ‘국익’이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포장하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p.28-29)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부당한 것인지 명백히 구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그 부당함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언론은 결과적으로 그 부당함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p.62)
값싼 뉴스는 과잉으로 넘쳐나고, 진짜 정보는 없는 상황, 특히 논쟁적인 주제에서 뭔가 뉴스는 많은데 정보가 없는 현대 미디어의 상황을 스탠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프록토는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라는 용어로 정의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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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눈감아야 할 100가지 이유
동서고금의 성공하는 리더들의 습관 중에는 독서와 함께 종이신문 읽기가 손꼽힌다. 리더의 출근길에는 항상 신문이 들려있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잠깐의 시간을 두어 일간지와 경제신문을 읽으면 세계의 어제를 알 수 있고, 오늘과 내일을 내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도 옛말이 된 듯하다. 오늘날의 아침 신문엔 의견과 가십, 광고와 선전만 가득할 뿐, 정작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줄 정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당장 주위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한 번 펼쳐 보자. 우리나라 거대 종합 일간지 지면의 40% 정도가 광고이고, 부동산, 건설, 주택시장 관련광고가 대부분이다. 기사는 또 어떤가? 포털사이트의 첫 화면처럼 대중의 관심public attention을 끌기 위한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그득하다. TV를 켜도 마찬가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시간만 되면 즐겨보던 '뉴스 프로그램'이 꽤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말 그대로 '그 놈이 그 놈'이다. 인터넷을 화면으로 그대로 옮긴 후 앵커들은 프롬프터로 읽어내고 있다. TV 프로그램중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드는 프로그램이 뉴스라던데 요즘도 그럴까?
대한민국 언론에 진실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 온전히 세상을 읽고 싶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오염이 심각하다. 언론의 본분은 ‘대중의 관심사’가 아닌 ‘대중에게 필요한 사안’들이 아니던가? 언론은 지금 ‘직무태만’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의 경제가 요동쳤던 2008년 가을, 뉴욕의 주식시장에서 다우지수가 하루에 500포인트가 넘게 떨어지고, 리먼 브러더스처럼 파산 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들의 주가가 20~30%씩 폭락했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였다가 파산한 AIG는 단 하루 만에 주가가 60%나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이 시기(9월1일~12월 31일) 미국 최대 경제신문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기사 중에 금융위기라는 말이 1,743번이나 언급되었고, 공포fear 라는 단어는 587번, 공황panic 이라는 단어는 351번 언급되었다. 하지만 뉴욕과 무려 12,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14시간 시차의 한국의 한 대표적인 경제신문은 금융위기라는 단어를 월 스트리트 저널의 3배 가까운 4,870번이나 언급하며 파산위기에 직면한 미국보다 더 ‘공포’스럽게 금융위기를 보도했다. 이러한 자극에 한국의 투자자들은 동요되었고 자연히 ‘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데 언론의 사명은 필수적 사회 현안을 대중이 알기 쉽게 전달해서 대중을 깨우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은 왜 이처럼 대중의 관심에만 주목하고 부풀리려하는 것일까? 이유는 대중의 눈길이 가는 곳에 ‘광고주’가 있기 때문이다. 상업주의 언론에서 기사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단이 되었다.
답답한 것은 오늘날이 뉴스 비즈니스News Business의 시대인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문을 펼쳐 뒤지고 뉴스채널을 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9시의 거짓말>은 일종의 내부고발서다. KBS에서 탐사보도 영역으로 ‘이 달의 기자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최경영 기자는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KBS를 비롯해 상업주의 언론으로 전락한 한국 언론을 비판하고, 그런 언론에 수십 년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휘둘려온 한국 대중도 함께 비판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바라보는 눈이 기자의 시선이 아닌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부자, 워렌 버핏이라는 점이다. ‘워렌 버핏은 신문기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찾고자 하는 답이었다.
“한국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워렌 버핏을 해석했습니다. 워렌 버핏이 말하는 기업의 본질 가치와 한국 언론의 진실을 등가로 보았습니다. 워렌 버핏의 상식과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대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워렌 버핏의 상식이 한국 언론의 몰상식보다 기업의 본질 가치나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길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세계 최대 자본가의 상식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한국 언론의 몰상식보다는 훨씬 효용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10~11쪽)
워렌 버핏이 뉴스를 대하는 관점과 철학은 언론과 대중, 언론 보도와 주식시장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낯설게 한다. 한편 주식 투자자로서 그의 삶과 가치관은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워런 버핏은 1년에 50주 동안 생각하는데 쓰고, 남은 2주 만을 일한다고 한다. 그 역시 매일 신문을 펴서 뉴스를 읽지만, ‘뉴스에 사고 파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투자론은 차라리 선문답과 같다. “시장은 대체로 옳다.” “나는 내가 투자한 기업의 다음 분기 실적도 알 수 없다.” “언제 네 머리를 깎아야 할지를 이발사에게 물어보지 말라.” “주식의 포트폴리오는 6개 기업 정도면 충분하다.”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주식투자자가 할 일은 별로 없다.”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절감하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부자의 투자 철학은 진실에 다가서고 싶다면 긴 안목을 가져야 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투자할 기업을 선정할 때도 당장의 이익이 아닌 10년 후를 내다봐야 하고, 50주 동안 신중에 신중을 더해 선택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나는 틀릴 수 있다’는 점도 항상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판단의 근거는 늘 자신이 검증한 기업의 본질 가치에 둔다.
반면 신문과 뉴스 속에 비춰지는 한국 언론은 항상 초단위로 호흡한다. 오늘 얼마나 오르고 내린 수치는 큰 뉴스이고, 이슈가 된다. 언론은 항상 진리를 구현한다고, 항상 사실만을 쓴다고 주장한다. 기자들은 자신이 많이 아는 줄 알고, 상당히 객관적인 척 한다. 그리고 시장은 항상 옳다고 말하고, 시장을 항상 믿는다고, 그리고 대중의 뜻을 항상 신뢰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의 가사는 대부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하면 토마스 제퍼슨이 “착오와 거짓으로 점철된 신문을 매일 읽는 사람보다 신문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 좀 더 진실에 접근한다.”고 일갈했을까.
오늘자 신문의 뉴스에 주식을 사고파는 대중은 언론에 의해 들쥐 떼처럼 몰려다니며 벼랑 끝으로 치닫지만, 대부분의 펀드매니저들은 뉴스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기업을 탐방하고 기업주를 직접 만나 자신이 알고자 하는 정보를 이미 획득했기 때문에 뉴스는 가십거리는 될지언정 정보로서의 효용가치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역으로 뉴스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한다. 워렌 버핏과 같은 현명한 투자자 역시 대중들의 속성을 이용해 기회를 찾았다.
뉴욕 증권가에서 2,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고향 오마하에서 평생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워렌 버핏. ‘언론’으로부터 휘둘리지 않도록 물리적인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통해 ‘주가는 인기투표가 아닌 체중계’여야 한다는 가치투자의 전제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뉴스읽기에 색안경이 필요한 개인투자자라면 일독할만하다.
이 리뷰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출판전문저널 <기획회의>(340호)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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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한민국 사회에는 두 종류의 언론이 존재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 및 KBS를 필두로 하는, 권력의 눈치만 보는 방송3사가 그 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한겨례, 경향, 프레시안, 오마이 뉴스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언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언론들은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에서 대치하고 있다.
한국에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관련 팩트들만 정확히 보도하는 언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어떤 사안에 대한 보도가 완벽한 중도를 지킬수는 없을 것이다. '언론보도'의 본원적 성격 자체가 수적 개념이 아닌 주관적 의견의 개념이기때문에 인간인 이상 정확히 그 가운데에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정도껏의 편향은 눈감아 줄수 있다.
하지만 95%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들이 5%의 특정집단을 위한 편파적 보도를 한다. 이는 5%란 소수계층만을 위한 변명이나 옹호만을 나머지 95%의 절대다수대중에게 하는 꼴이다. 우리 대중들은 분노한다. 언론이란 본래 절대다수에게 공정한 보도를 해야하는게 아닌가? 그 절대다수가 언론보도의 소비자들 아니더냐?
아니다. 언론사들의 진정한 고객은 바로 그 5%집단이다. 언론사 운영비 및 수익의 70%가 5%집단의 광고비에서 나온다. 그리고 정경유착의 뿌리가 깊은 한국사회에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국익' 이란 부자들과 권력자의 이익을 말한다. 언론이란 것을 이용해서 그들은 대중의 시선을 그들만의 프레임에 가둔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들의 프레임안에서 그들이 알려준 것만을 듣고 그들이 알려주지 않은 것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만의 의도에 따라 그들만이 제시한 결과만을 본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것인가에 대한 제안조차 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95%의 절대다수를 위한 언론도 있다. 그들은 진보적 입장에서 95%의 절대다수를 위한 보도를 한다. '권력의 감시견' 이자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도를 하려는 언론사들도 존재한다. 물론 그들도 아주 '객관적'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현MB정부의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인 사회에서 적어도 그보다는 '상식적'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까지 KBS가 9시의 거짓말을 계속할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될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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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KBS 기자의 "나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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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밤 새워 읽고 싶은 책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10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것처럼 통쾌한 기분을 만끽하였습니다.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는 저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요즘 KBS를 보지 않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는 수신료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집권 이후의 KBS의 보도행태가 군사정권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소리보다는 정권의 소리만을 앞세우는 게 요즘의 KBS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안타깝고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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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저 역시 전두환의 땡전뉴스를 보며 자라났습니다. 아버지가 구독하시던 조선일보를 20년 넘께 함께 읽으며 성장했습니다. 그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제 가까운 친척 형님 중에 서울대 출신 조선일보 기자가 있었기에 저의 믿음은 더욱 컸습니다.
하지만 이제 KBS와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보수언론의 기사들을 거의 보지도 읽지도 않습니다. 추석이나, 설 때 만나서 듣는 친척 형님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그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러 버립니다.
때로는 기사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일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과 인생의 가치관을 세워나가야 하던 대학시절에 보수언론이 쏟아내는 거짓과 위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을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향하는 진실과 정의가 저와 같은 힘없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력과 자본에 빌붙어 그들의 생존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친척 형님 역시 정의의 파수꾼이 아니라, 먹고 살기에 급급한 조선일보에 고용된 일개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문과 방송이 몇 개나 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또한 존경할만한 언론인들은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왜곡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이 되겠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런 안타깝고 부끄러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저는 여전히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집권한 이후의 KBS를 불신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최경영 기자를 보면서 어쩌면 KBS가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어봅니다. KBS에도 아직 이런 기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반갑습니다. 머지않아 최경영 기자가 KBS에 복귀하고, 국민의 편에 서서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KBS를 만나게 될 때 그동안 밀렸던 수신료를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납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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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싶어하든 말든 뉴스는 끝임없이 밀려든다. TV의 화면과 신문의 지면은 24시간 내내 뉴스를 토해낸다. 심지어 인터넷은 그 수많은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우리는 뉴스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의심해보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뉴스의 양과 전달 속도 때문에 문자 그대로 새로운 ‘뉴(new)스’로 내몰린다. 그렇다하더라도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이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한다면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나의 순진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9시의 거짓말>은 “한국 언론, 너는 진실을 보도하고 있는가?”라며 프롤로그를 연다. KBS 시사보도 영역에서 주로 활동한 저자 최경영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MBA과정도 이수할 만큼 경제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언론계 종사자인 저자가 표제에 ‘거짓말’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한국 언론에 칼을 겨누는 이유가 뭘까?
저자는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할 자유를 박탈당한 현실이 통탄스러’워서, ‘우리 사회 언론의 가치관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책을 시작했다고 한다. 상징 조작을 통해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고, 기계적 중립으로 거짓과 위선의 농도를 희석시키고, 추정과 편견을 사실인양 앞자리에 앉히고, 진실 보도는 외면한 채 돈 되는 보도를 우선하며 권력과 기업의 입장만 대변하는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저자는 한국 언론의 몰상식 하나를 비판할 때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자본가 워렌 버핏의 상식 하나를 대비시킨다.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확인되고 검증된 것에만 투자하며 탐욕을 쫓아 버블을 만들어내는 월 스트리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워렌 버핏. 그가 말하는 기업의 본질 가치와 한국 언론의 진실을 등가로 본 저자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세계 최대 자본가의 상식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한국 언론의 상식보다 훨씬 효용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무대에서 환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서커스단 코끼리에겐 무대 뒤편에서 채찍과 당근을 들고 서 있는 조련사가 있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자본의 단맛과 권력의 쓴맛 앞에서 주저하며 조련사의 의제(議題)만 세팅한다면 서커스단 코끼리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9시의 거짓말>은 독자를 무대만 바라보며 진실의 반쪽만 아는 관객에서 진실의 전부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하도록 의식화시킨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면 관공서의 깃발이 다림질 한 듯 쫙 펴진 채 휘날린다. 언론이 저 깃발 같아야 하지 않을까?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분명히 정체를 드러내는 깃발. <9시의 거짓말>은 한국 언론의 몰상식 위에서 대중을 향해 진실을 외치는 아우성이며 기성 언론에 날리는 불화살이다. 이 작은 불화살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진실된 ‘자유 언론’의 불을 일으켜 주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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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열을 내다가 항상 도달하는 결론이 있다. 바로 지금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 결론이 거기에 이르면 허탈감에 빠진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니까. 게다가 언론이 정치와 사회경제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언론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군림하니 그것을 누가 견제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다. 언론인 스스로 자신의 고유 역할을 되찾는 수밖에. 그러나 말이 쉽지 이 또한 쉬운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이처럼 작정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에게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은이가 말하듯이 기자는 직장에 충실해야 하는 월급쟁이일 뿐이라고 생각할 때 언론인 본연의 의무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다.
공중파 방송에서 하는 이야기나 신문에서 하는 이야기가 전부 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고' 있을 뿐이지 어떤 현상에 적용시키지는 못한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언론에서 보여주는 범위를 벗어나서 사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나도 뉴스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일지언정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안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아니, 솔직히 그 전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적극적인 운동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계열에서 그 정도면 운동권이라고 할 만한 선배의 말을 듣고서야 뭔가 번쩍하는 느낌이었다. 뉴스에서는 말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언론사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고 누구를 어느 방향에서 인터뷰하느냐에 따라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제 일반상식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왜'라는 의문을 갖고 언론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전에는 기자나 아나운서의 의견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뉴스에서 어떻게 그 언론사의 논조가 드러날 수 있는지 의아해했으나,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특히 이념에 따라 보는 시각이 확연히 차이나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를 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가만히 있으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의심을 가질 때라야 비로소 보인다. 즉 개인이 똑똑해져야 한다는 얘기다. 지은이가 기자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드라마에서조차 현 정부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한 이야기를 해서 뜨악하기도 했다. 특히 요즘처럼 방송 대부분을 G20에 맞추는 것을 보며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원전수주 때도 좀 심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뒷이야기가 있었단다. 여기서는 주로 경제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는데 외국 언론은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의 원전수주가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그 때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안들은 부풀려서 보도하던 언론들이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방문과 시기를 같이 해서 발표하기 위해, 즉 대통령의 업적인 것처럼 보여지게 하고 싶어 그랬다는 얘기다. 당시에도 원전수주를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보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뉴스에서는 마치 이 정권이기에 가능한 치적인 양 보도했던 기억이 난다. 지은이가 지적하기를 이것은 기자들이 정부나 기업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좀 더 호기심을 갖고 깊이 파고들어가려는 기자본성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어디 그러한 적이 한두번인가 싶어 허탈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일간지의 신뢰도가 워낙 떨어져서 일간지 대신 인터넷에서 본 뉴스를 인용하며 마치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포털에서 본 뉴스가 바로 일간지가 내보내는 뉴스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사실은 간과한 채 인터넷이라는 형식에만 집착한 결과다. 외국에서 주목하는 오마이뉴스가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전 정권과 친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현 정권에 밉보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시민의식이 거기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런지.
상당부분 내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에 속 시원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나와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근거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차분히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감정적으로 비판만 하는 어조라서 반대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귀기울여 들을 것 같지 않다. 내가 조선일보를 아예 한 단계 접고 대하는 것처럼. 그 부분이 아쉬웠다. 좀 더 이성적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하고.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 어느 선까지는 안다는 전제하에, 아니 당연히 알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전제하에 흥분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도 종종 남편으로부터 현실은 외면한 채 이상만 추구한다는 핀잔을 듣곤 한다. 또 하나, 정치나 사회뉴스에 대한 이면의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경제를 주로 이야기해서 약간 아쉬웠다. 그나저나 지은이가 작정하고 썼다는데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과연 이 기자는 복직하고 계속 남아있을 수 있으려나. 이처럼 신랄하게 본인의 회사를 비판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