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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금기인 저승 즉 지옥으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지옥의 神인 하데스를 감복시켜 죽은 아내의 영혼을 데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오르페우스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결말 짓게 된다. <세상의 마지막 밤>은 바로 오르페우스의 신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아버지의 지구지순한 사랑과 대을 이은 복수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대판 오르페우스인 피포의 아버지 마테오 역시 오르페우스처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린 아들 피포를 잃게 되고 삷을 방황속에 허비하다가 마침내 살인자를 찾아 복수에 나서지만 결국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더 없는 나락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마침내 소아성애자 교수의 도움으로 저승으로 통하게 되는 문을 통과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들 피포를 다시 이세상으로 데려오지만 정작 자신은 아들 목숨의 댓가로 지옥에 남게 된다. 그리고 지옥에서 다시 돌아온 아들이 성장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복수를 완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얼피보면 그저 그런 소설로 다가올 수 도 있다. 모성애 못지 않는 극단적인 부성애의 표출과 그 사랑에 대해서 복수로서 마무리하는 되갚음이라는 평범한 구도와 지옥과 현실을 오가는 다소 SF적인 플롯으로 약간의 신비감을 더한 작품정도로 보일 소지가 다분히 존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획일적으로 단순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마테오 역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떠나서 대승적으로 작가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죽음과 삶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우리시대에 어쩌면 죽음도 삶의 일부 내지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지옥의 통로를 찾아 인생을 매진했던 교수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은 죽음이 우리 내부에서 살며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넘추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것을, 즉 죽음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 내면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의 세계가 서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비의 날개 한쌍처럼 서로 포개져 있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시 잊어버린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원제 지옥의 문(La Porte des Enfers)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쩌면 우리가 흔히 출입하는 하나의 작은 문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나폴리의 지진(역사적으로 1980년 11월 나폴린 인근인 메쪼죠르노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차용했다)으로 죽은자와 살아있는자의 경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진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은자가 다시 산자들의 틈에 뒤섞이고 산자 역시 죽은자들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발상자체가 매우 유니크한 플롯이라고 해야 겠다. 또한 작가는 마테오가 아들을 구해 지옥의 문을 나서는 순간을 재치있게 처리했다. 죽음과 삶을 구분했던 오르페우스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삶과 죽음은 단지 문의 이편과 저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마테오는 과감하게 자신 목숨의 댓가로 아들을 문밖으로 밀쳐내는 설정에서 작가는 죽음과 삶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나 소설하면 대게 독자들이 떠올리는 것은 예술성이다. 미디어의 색감이 아름다운 영상과 주옥같은 빛의 향연 그리고 작가의 예술성이 극에 달한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보통의 프랑스문학과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왠지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와 복수를 감행하는 내러티브 자체가 프랑스적이라고 하기엔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폴리 거리의 묘사나 죽음과 삶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심지어 복수를 향한 증오의 증폭이나 그 과정에서의 심리적인 묘사는 극히 프랑스적인 예술감이 그대로 베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카론의 배를 타고 아케론(비통의 강,눈물의 강), 시름의 강(코퀴토스), 불길의 강(플레게톤), 망각의 강(레테), 증오의 강(스튁스)을 건너면서 죽음의 세계를 확실하게 삶에서 분리한다. 하지만 작가는 영혼들이 사라지는 것을 산자들의 기억에서 차츰차츰 잊혀져 갈때야 비로소 죽음이 당연시 됨을 말하고 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잃었듯이 그리고 마테오가 아들을 사고로 잃었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작은 일부분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 오는 것이고 이러한 죽음은 세월이 지나면 삶의 한부분속에 녹아 들듯이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혹시 아나 지하의 공동구와 연결된 우리 주변의 멘홀뚜껑이 실은 지옥의 문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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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우리가 올해 저곳으로 보낸 이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 한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건물 더미에, 바다에, 손과 발을 묶은 채 불 속에, 비에, 헬기 추락으로, 지하철에서. 어떤 건 늘 일어날 만큼 자연스럽고 어떤 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실수로 시작된 일. 그마저도 진상규명과 사후처리는 너무 늦고 불투명하고 미온하다. 로랑 고데라는 작가는 생소하지만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들을 생각했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 사람에게로 다시 오는 그들을.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고 땅에 묻히고 아프고 서럽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딱 한 번의 기회를 얻어 그들을 잃은 소중한 사람에게로 오는 상상을 해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과 영화가 자유로워진 만큼 아주 특이한 설정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문학적 기교가 뛰어나다거나 문장이 특출나지도 묘사가 탄탄하지도 않다. 오히려 소재와 줄거리를 빼면 이 작가의 문학적 기교는 단조로울 정도다. 단지 그가 복수를 위해 다시 이 세상으로 오는 것뿐. 죽은 자도 자랄까. 그는 자란다. 든든하게 자라 아들을 향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살지도 죽지도 못한 유령같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금지된 세계로 온다. 등굣길 마피아 총격전에서 아들을 구하지 못한 아버지 마테오는 아들의 질문에 무심했던 죄의식에 시달리며 평생 택시운전을 하며 이 도시를 떠돈다. 그러다 우연히 아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인 지옥으로 가는 문을 알게 되고, 한 번이라도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기어이 문으로 들어갈 작전을 세운다.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과 합심해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야기는 신화와 맞닿아 있다고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레이스, 가리발도, 소아성애 교수 그리고 아버지 마테오의 여정은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찾아나선 자들의 용기를 형상화하면서 살아있음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갇혀 남편을 원망하다 떠나버린 엄마 줄리아나의 역할은 그녀가 아들을 묻기 위해 남편을 떠나버렸기에 소소하고 미미해졌지만 피할 수 없어 부딪치는 마테오와 극복할 수 없어 잊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는 건 또다른 문제다. 그녀가 왜 모든 책임과 원망을 남편에게로 돌려버렸는지, 아들을 잃은 부부는 왜 슬픔을 나누지 못했는지 같은 이야기와 동떨어진 다소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외적 문제들 말이다.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건 복수가 아니라 그리움, 그리움이 아니라 희생이다. 아들을 죽인 자를 찾아 복수하기보다는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서라도 단 한 번만 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아들을 내보내고 대신 갇히는 아버지의 마음과 그런 아버지를 막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가는 아들, 그들이 함께한 세상의 마지막 밤을 상상하는 건 굉장한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 아니다.
끝끝내 서로를 향한 마음을 고수하기만 했던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두 남자가 만나는 곳으로 안내받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그들이 어떤 기분과 감정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고 버텼는지, 어떤 눈빛과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 교차하는 애틋함과 사랑을 서로 이해했는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느껴보는 것. 현실에서 갑작스레 만난 타인의 슬픔을 관망하거나 비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일이다. 살아서 지옥으로 간 남자와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남자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세상을 용서하게 됐을까. 하필이면 다른 누가 아닌 저들에게 떨어진 지옥 같은 시간을 향한 증오를 상쇄시킬 수 있었을까. 이제 죽은 아들은 지상에서, 산 아버지는 지하의 지옥에서 산다. 실수로 헤어진 그들에게 다시 허락된 시간은 잠시 뿐, 그들은 다시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산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더불어 헤어짐과 잊음, 이별과 죽음에 대해서도. 여전히 다 알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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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한바가지에요 죽음에 대처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본 상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압도적 고통의 무게를. 사랑하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는 건 평생 내가 살면서 지고 가야 할 슬픔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다. 따지보고면, 이기적인거야. 어려운 건 복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여기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몰라, 불안과 초조가 홍수처럼 밀려온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있다. 이 남자는 우아하다. 자기 능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자를 찾아 복수하기 보다는 연인을 되살리고자 마음 먹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자신의 뛰어난 연주로 잠재우고 지옥으로 갔다. 지옥의 왕과 왕녀 하데스와 페르세포를 만나 또 하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왕과 왕녀는 감동 받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인의 삶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연인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야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어쭈 이것 봐라?'라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시련을 더한다. 지옥을 나설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지상을 두어 걸음 앞둔 오르페우스는 방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연인은 다시 끝모를 지옥으로 끌려 갔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는 마테오와 피포가 나온다. 피포가 주인공이다. 마테오는 피포의 아버지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어느 평범한 아침 마테오는 피포의 손을 잡고 등교길에 나선다. 약간 늦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해 빨리 걷는다.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아프다는 말도 못한채, 질질 끌리듯 따라간다.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마피아의 총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다. 아내는 아들의 복수를 원했다. 마테오가 그 더러운 마피아 놈의 심장에 차가운 총알을 꽂아 넣길 원했다. 아버지는 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 어려운 건 복수라니까. 택시 운전수 였던 마테오는 일은 하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평생 동안 지옥을 연구한 교수를 만난다. 교수는 지옥의 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옥에 내려간 피포를 찾은 마테오는 아들을 안고 경계에 선다. 두어 걸음 앞에 세상이 있다. 마테오는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남자였다. 죽음 하나에 삶 하나. 마테오는 지옥의 문 밖으로 피포를 던져 삶과 죽음의 거래를 끝마친다. 20년 뒤 피포는 마피아를 찾아 배를 가르고 20년 전 그 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비겁한 아버지가 용감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복고의 아이러니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래됐으니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여전히 강력한 서사의 힘을 뽐내며 끝없이 반복되는걸? 문학은 그 반복이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와 만화, 드라마가 2,000년 넘게 계속된 건 아니니까, 질림의 수준은 다를 수 있는 거다. 다른 가능성은 타 매체가 보여주는 서사의 천박함에 화가난 경우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왔는데 그걸 이 따위로! <세상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인이 로랑 고데가 그린 고전적 서사의 전형이다. 어느 곳 보다 빠르게 서사가 멸종한 프랑스. 그런 프랑스에서, 마치 고대의 부활을 외치듯(르네상스!), 저자는 그리스 신화의(서사의 기원!) 모티브를 보란듯이 차용한다. 지옥 여행자 오르페우스. 로랑 고데는 오르페우스가 가져온 삶과 죽음의 빵 사이에 부성애를 끼워 2,000년도 더 된 평범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 옛날 식 샌드위치가 오히려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독하다. 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고 오직 옛것이 돌고 돌며 되풀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러나 이 서사가 현대적 프랑스와 거리를 둔 신선한 반향일지는 몰라도 현대적 대중성을 내재한 흥미진진한 지옥 여행은 아니라는 점은 알아뒀으면 한다. 프랑스인은 죽었다 깨나도 <해리 포터> 같은 건 쓸 수 없거나 그런 걸 쓰기엔 너무나 우아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그 슬픔과 비탄에 가정을 깨뜨리곤 한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 자식을 향한 그리움은 누군가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기 쉽고 그 비난은 종종 배우자인 경우가 많다. 왜 조금 일찍 나가서 아이를 마중하지 않았는지, 왜 차길을 건너며 아이의 손을 더 꽉 붙잡지 않았는지, 왜 아이가 혼자 노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는지, 왜왜왜왜왜!!! 비난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일상을 저버릴 정도로 비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 또한 가정을 깨는 원인이 된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말할 수 있다. 그럼 상대는 어떻게 벌써 그 아이를 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분노의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일은 세상에 비일비재하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등도 세상에 널렸다. 비슷한 류의 많은 창작물을 봐왔지만 이 작품과도 같은 전개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2020년의 더운 여름날 필리포 스칼파로 데 니티스라 불리는 사나이가 자신의 직장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환상적인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고, 오늘은 그 일을 하는 마지막 날이다. 그는 오랜시간 공을 들여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사람, 토토 쿨라초가 커피를 주문할 때를 기다렸다. 그를 위한 커피를 만드는 대신 그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 그 날을. 꼬마 피포는 1980년 6월, 아버지 마테오 데 니티스의 손에 잡혀 포르첼라 거리를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 줄리아나 대신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한 마테오는 끝도 없는 차량의 행렬에 더 이상 차를 타고 가기를 포기하고 지친 피포를 다그쳐가며 지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5분만 쉬고 싶다고, 신발끈이 풀렸다고, 아빠가 잡아당기는 손이 너무 아프다고 붉어진 볼을 하고 마침내 피포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조차 서두르라는 성난 말투를 내질렀을 그 때 그 거리에서 공포의 총소리가 들렸고 작은 피포의 몸은 축 늘어져버렸다. 그렇게 피포는 죽었다.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화를 내던 아버지 곁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아비는 밤마다 아들의 울던 얼굴이 꿈에 나타났고, 그래서 자신의 택시로 밤거리만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아내인 줄리아나는 차마 아들의 무덤에 가지도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라는 표현들을 자주 본다. 아마도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작품 속 줄리아나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어쩌면 문학작품에서조차 아, 이 정도의 감정표현은 너무한가 싶어서 자제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면 이 작품에서의 표현은 보자마자 그래 내가 자식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망하게 잃었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줄리아나는 결연히 마테오에게 말한다. 피포를 데려오라고. 그럴 수 없다면 피포를 죽인 놈이라도 데려오라고. 그를 죽이고 돌아온다면 마테오에게 묻은 핏자국을 빨아주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마테오는 형사를 통해 찾아낸 피포의 살인범을 마주하고도 총을 쏘지 못했고 그렇게 줄리아나는 마테오 향해 두번째 저주를 퍼붓고는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던 호텔에 머무르며 온갖 성당의 담벼락 구멍마다 자신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꽂아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 어느 것에도 답은 없었고, 그러자 줄리아나는 성당을 향해 세번째 저주를 시작했고,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두고 주님을 욕보였다며, 미신을 부끄러워 하라는 신부의 발치에 침을 뱉고 주님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할 날만을 기다린다며 소리를 지른 채 나폴리를 버리고, 아이를 위한 기억을, 마테오를, 자기 자신을 버렸다.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수도없이 지나가던 어느날 마테오는 성당에 가려던 그레이스를 만나 가리발도 카페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알고 있다는 교수와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고해를 받아주는 마체로티 신부를 알게 된다. 교수는 말한다. 오늘날의 세상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건조해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경계는 모호하고 어느 부분 서로 포개져 있다고. 그리고 그 경계를 찾아가면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래서 마테오는 줄리아나를 위해, 그리고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심지어 어이없는 분노에 갇힌 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떠나가버린 피포를 위해 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체로티 신부가 그 길을 함께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그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마테오가 마체로티 신부와 함께 저승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는 단테의 <신곡-저승편>이나 <신과 함께>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어린 피포의 영혼을 찾아내는 마테오, 그리고 피포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마테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는다. 이제 마테오는 피포의 영혼을 이승으로 보내는 대신 저승에 남아야 할 운명이 되었다.
그렇게 1980년에 죽었던 피포는 어머니 줄리아나의 저주에 힘입고 아버지 마테오의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 그레이스의 손에 키워지고, 가리발도에 의해 커피를 배우며 교수와 마티첼로 신부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토토 쿨라초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포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마침내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신을 놓아버린채 고통의 병원에서 스스로를 공포와 불면에 가두어버린 어머니 줄리아나를 찾아간다. 아버지 마테오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가장 하드보일드한 가족사랑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저주가 난무하고 복수의 피가 흩날리며 지옥의 문앞이 아니라 이승에서 저승까지를 왕복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매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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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돌아오면 피로 얼룩진 옷을 내가 세탁해 줄게"
만약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나는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 생각해보았다. 물론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해야 분이 풀릴까 하고. 내가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범인을 납치해서 수십 년 동안 죽는 것보다 더 괴롭고 끔찍한, 아마 이승에서 겪을 모든 아픔과 고통을 줄 것이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을 할 수 없게, 자살을 하지 못하게 혀를 먼저 자를 것이며......끔직해서 다 얘기하긴 싫다. 나의 분노를 차마 머릿속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평범한 한 가정. 마테오(아빠)는 피포(아들)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마피아들의 싸움에 아들은 총을 맞고 죽는다. 어린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총에 맞아 그자리에서 죽는다. 아이를 잃은 마테오는 자책감으로 힘들어 하고 아내 줄리아나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부인은 남편에게 책임을 지라며 얼른 가서 살인자를 죽이라 소리친다. 마테오는 살인자를 찾아가 죽이려 했지만 이내 실패하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방황하며 지내던 어느 날 한 신부와 교수에 의해 '지옥으로 가는 문'을 알게 되고 아들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그 문을 찾아 떠난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아들. 하지만 죽은 아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필요하다. 마테오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죽음에 길로 들어서고 그렇게 아들은 다시 환생하게 된다. 살아난 아들은 복수를 꿈꾸며 다시 삶을 시작하는데......
<세상의 마지막 밤>의 시작은 화끈했다. 복수하는 장면이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스토리 라인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으면 조금 지루했을 수도 있다. 복수하는 강렬한 초입부분으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했다. 그 덕분인지 마지막까지 잘 읽혔고 판타지 부분도 나름 재미있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파괴된 가족이야기, 이걸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어느 정도는 예견되는 부분도 있지만 지옥문의 등장으로 아빠가 아들 대신 죽는 것으로 아들을 살리는 내용은 압권이었다. 물론 소설이 허구적인 이야기지만 판타지적인 요소를 섞어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건 아닐까? 또 반대로 말하면 조금 황당할 수도 있을 수도..
피포의 죽음으로 아빠는 죽음으로 대신했다면 엄마는 어땠을까? 신에게 간곡히 청하며 아들이 살아돌어오길 바랬다. 하지만 자신의 바램이 무참히 깨지자 오히려 신을 저주하는데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연기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세상의 마지막 밤>은 환상적인 소설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이 날 만큼 뭉클하기까지....
ps_만약 이 소설을 읽는다면 밤 11시~새벽 사이에 읽기를 권합니다. 해가 떠있을 때는 읽지마세요. 맛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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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의 삶을 조금씩 죽음으로 물들이는 사람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그 터널과 같은 깊은 고통을 거치는 듯 보였지만, 들리는 이야기와 건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루어 보면 모두가 그리 안정을 되찾는 건 아닌 듯했다. 하물며 내 주변의 사람들도 영원히 상실감을 극복해내지는 못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사랑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위로나 격려는 우스워보이기까지 할 것이고, 스스로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울 테지.
주인공 피포가 죽던 여섯 살의 나이에, 나는 반대로 내 조부를 떠나보냈고 그것만으로도 아무 것도 모를 나이에 온갖 상실감을 내비쳤다고 어머니는 줄곧 말해주셨다. 내 조부를 지금은 그저 어렴풋하게 추억할 뿐이지만, 해가 가도록 그리워 한 내 사랑의 대상은 당시 내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물론,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마피아의 총격전으로 아들을 잃은 젊은 부모의 절망에 내가 겪었던 슬픔을 비견하긴 어렵겠지만, 부모의 사랑과 죽음을 가까이하는 느낌에 대한 공감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거대할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세상의 마지막 밤>은 문장 하나하나에서 불안과 슬픔이 묻어날 정도로 어둡다.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하는 용기 있는 아버지 마테오와 이글거리는 분노를 저주의 말로 뱉으며 자신과 세상을 무너뜨리는 어머니 줄리아나. 이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졌다가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부서지는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줄리아나의 분노와 마테오의 용기는 분명 비범한 구석이 있고, 진실이라 해도 믿기 어려운 신화적인 이야기 안에서 마테오의 사랑은 신성함이 보이기까지도 한다. 한편 20년 뒤, 되살아난 아들 피포가 보여주는 행동에서 비로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조금 더 현실적이고도 서글픈 답이 내려지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
마테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자신의 삶에서 남은 것은 용기 아니면 비참함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줄리아나로부터 비난 받으며 비겁한 듯 행동했지만 결국 어마어마한 용기를 냈다. 마테오의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죽음을 거스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피포는 비겁한 듯 아버지를 되찾으러 가지 않았다. 하지만 피포를 나무라기는 어렵다. 삶을 맞바꿀 그의 아버지의 용기가 엄청났을 뿐, 누구도 다시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피포는 알았을 테니까. 인간이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저자 로랑 고데가 자신이 떠나보냈던, 사랑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듯, 어머니를 잃은 한 지인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차마 그의 슬픔을 주제 넘게 건드리는 일이 될 테니 직접 건네진 못하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읽는다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는 어미의 눈물만을 위한 자리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외설이다. (65쪽)
"우리에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용기 아니면 비참함. 그밖에 다른 건 없습니다." (113쪽)
"여러분에게 하려는 말은 내가 지어 낸 게 아니에요. 어떤 방식으로든 말입니다. 나는 잊힌 사실을 찾아내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그리고 그 때문에 슬퍼지지 않기 위해 그것을 진보라고 부르죠.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발견한 흔적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어요. 지도. 문서. 물건. 기호. 거기에 관심을 보인 연구자들과 대학들은 그것을 번역하고 분석하고 설명해 왔지만, 사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어요. 왜냐하면 그들 중 옛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183쪽)
"우리가 이승에서 아직도 생각하는 망령들, 우리가 그 기억을 떠받들고 그를 위해 눈물 흘려 주는 망령들은 빛을 발산한다. 그 망령들은 무를 향해 미세하게 움직인다. 반면 다른 것들, 우리에게 이미 잊힌 죽은 자들은 빛 없이 퇴색되어 나선 중신을 향해 전속력으로 미끄러진다." (226쪽)
그들은 낡은 세계는 죽었으며, 이제 새로운 삶에 전념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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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부터 만지작 거리다 겨우 2월 설날을 계기로 다 읽어 버렸다. 책장을 넘기는 첫장부터 나의 눈을 멈추게 하고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이 맘에 쏙 와 다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읽어내려가다 드디이 본론과 마주쳤을때 혼란과 궁금증이 유발되어 매일 밤마다 침대에 누어 졸린 잠을 치우고 한줄이라도 읽었던 소설... 내용은 간단히 부모님의 사랑으로 특히 아버지의 사랑으로 죽었던 아들을 지옥에서 다시 살려내는 꿈 물론 희생은 뒤따르지만... 쉽고 간결하지만 충격적이고 환타스틱한 내용에 책장을 넘기는 내내 즐거웠고 쉽게 읽어내려가서 기분좋았던 책. 이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보지만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맘이 생겼다.
세상의 마지막 밤.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