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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이라는 전지구적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물질문명의 발전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최고로 성취된 곳으로, 이들의 정신과 자연관, 그리고 환경윤리 담론과 논쟁을 살펴보는 것은 전세계적인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는 ≪미국의 자연관 변천과 생태의식≫에서 미국인과 미국사회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 왔으며, 산업화 과정 속에서 자연을 어떻게 훼손했고,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려 했는지를 분석한다. 이는 현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자연관을 지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제시한다. 낙원이거나 황야거나 자연은 미국의 역사(歷史)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 사회와 영국의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을 유럽 문명과 대비되는 ‘아르카디아*’로 인식하며 미국을 이들의 식민 지배에 적합하도록 상징화했다. 미국은 그들에게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가져다 주는 풍요롭고 이상적인 자연이자,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이었다. 이때까지 미국의 자연관은 유럽과의 관계로부터 형성되었다. 미국의 자연관은 이들의 개척과 건국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청교도들은 유럽과의 단절에 기반을 두고 미국을 신대륙으로서 개척한다. 이 자연관이 바로 ‘울부짖는 황야’다. 당시 청교도들은 새로운 미국의 시작을 알리며 “야수와 야만인으로 가득찬 섬뜩하고 황량한 황야”를 청교도의 종교적 이상을 떨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에게 문명화란 황야를 낙원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이는 그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자연관은 미국이 독립하여 신생 공화국을 창립하면서 낭만주의적 자연관으로 변화한다. 미국인들은 계몽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으로 미국이 문명으로 인해 더럽혀진 구세계와는 달리 야생성으로 가득찬 순수한 신세계라고 여기게 됐다. 이는 그들에게 숭고하고 아름다운 황금시대의 터전이자 신의 질서와 조화가 투사된 땅으로서 긍정되었다. 자연은 신의 체화이자 신성의 표상으로서 미국인의 미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진보와 발전에 대한 믿음의 붕괴 그러나 미국의 진보와 성장의 신화는 19세기 산업화 시대에 심각한 자연훼손을 야기했다. 이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는 생태학적 사유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는 문명의 폐해와 껍데기로부터 '각성'하여 '삶의 본질적 사실'들을 직면하고자 자연으로 들어간다. 그가 보여준 것은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서부로의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야생지와 생물종의 보호 및 관리를 두고 미국에서 보호주의와 보전주의가 등장해 대립했다. 보호주의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므로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보전주의는 낭만주의적 자연관에 기반을 두고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강조하는 관점이다. 이때 보전주의의 영향으로 미국 전역에서 옐로우스톤을 비롯한 국립공원이 창설되어 야생지가 보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환경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촉발된 것은 1945년 원자폭탄의 출현과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이 계기였다. 특히 카슨은 저서에서 DDT를 비롯한 살충제와 합성물질이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고발했으며,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파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충격과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사건들을 통해 미국인들은 이제는 그들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전체론적인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적 환경운동의 흐름 1960년대 이후부터는 레오폴드의 '대지윤리'를 필두로 현대적 의미의 환경운동인 '생태중심주의'가 대두한다. 이 시기의 환경운동은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며 자연을 '생명공동체'로 포함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에게 대지는 자원이나 소모품이 아닌 인간도 그 일부로 존재하는 공동체였다. 레오폴드의 환경담론은 인간이 생태계 전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체론과 의식의 개혁과 혁명을 주장하는 심층생태학의 시초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초부터는 '에코페미니즘'이 등장해 주목을 받는다. 메리 오스틴은 ≪갈수의 땅≫에서 가부장적 서구 문명이 초래한 환경파괴와 여성억압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그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위에 쌓인 권력과 반생명적인 문화에 대해 도전하는 한편, 미국 원주민들의 삶을 재조명하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의존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와의 연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물과 동등하게 '소통'하며 생태적 영성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는 생태비평이 주로 야생자연을 다룸으로써 정작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국민의 80% 이상이 도시와 근교에 살고 있으며, 이들은 매일같이 실질적인 환경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이는 전세계적인 통계를 봐도 마찬가지다. 이때부터 생태비평은 도시환경문제로 관심을 이동하게 되며,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탈인간중심적 자연관 대신 환경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자연관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생태비평은 자연 대 문명의 이분법을 폐기하고 인간의 도시환경을 포함하는 '갈색자연'을 조명하면서 자연의 소중함과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이끌어냈다. 전지구적 기후위기 앞에서 오늘날까지 미국의 환경운동에서는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가 갈등을 빚으며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 상반된 두 태도의 역학이 이제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생태적 재난에 처한 지구 생태계와 우리의 생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상을 꿈꾸면서도 항상 현실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해오며 오늘날의 산업의 발전과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심화시키면서 환경문제를 악화시키는 한편 그 해결책 또한 공허하고 무력하게 만들어오기까지 했다. 국제사회가 미국에 환경에 대한 많은 책임을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와 같은 사상사로부터 본받을 점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성과 비판을 멈추지 않으며 주류 이론을 끊임없이 수정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황야에서부터 낭만주의로, 낭만주의에서 극단적 생태중심주의로, 극단적 생태중심주의에서 대지윤리와 에코페미니즘으로, 그리고 오늘날 도시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쳐왔다. 한국에서는 환경문제가 민주화와 사회양극화 등의 정치적 이슈에 밀려 시민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환경운동이 일부 환경단체가 정부와 기업의 각종 개발정책에 반대하며 갈등하고 있는 양상이 반복되며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가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자연관을 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부만의 갈등과 반목이 아닌, 모두의 토론과 실천이 아닐까. *아르카디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에서 비롯된 말로, 시적 파라다이스이자 옛 황금기를 뜻하는 이상적인 자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