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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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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이종수생각정원/2016.3.4. <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 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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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이종수

생각정원/2016.3.4.


<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 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조선의 사림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깊은 존경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p.4)” 무엇 때문에 조광조라는 사람을 그렇게 존경하게 된 것인가를 밝혀내고자 한 것이 평전을 쓰게 된 동기라 한다.


조광조는 어떤 사람입니까?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 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았습니다.(p.4)” <선조신록> 1567년 11월4일- 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답이다.


조광조 사상의 근간은 소학에 있다. “<소학>은 1187년 주희, 그러니까 성리학의 대가인 바로 그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책으로, 역대의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저작이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이다. 선집의 형태인 만큼 말 그대로 주옥같은 가르침이 가득했으니, 실제 배움의 현장이나 삶에서 적용하기에도 효과적인 면이 있었다.(p121)” 이런 주자학을 실천하기에 힘쓴 것은 그의 스승 소학동자 김굉필의 영향이다.


“조광조가 달랐던 점은 그가 서책이 아닌, 정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 상소에서도 밝힌다, 학문과 함께 능히 왕을 보필할 만한 재질을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성리학적 이상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그가 임금을 이끈 방향 또한 그랬다. 자신의 군주에게 요순의 시대를 따르라는 것이었다.(p.298)” 주자학을 현실에서 실현하려 노력하였지만 중종의 역량 부족으로 좌절하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중종이 신임하던 조광조를 내치게 되는 원인이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하였다.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서 나오고 있으니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조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온순하여 옳은 사람같이 보이기에 수년 사이에 벼슬을 뛰어서 높이 썼으니 내가 마침내 주초의 꾀에 떨어진 것이다.(p.249) -안로 <기묘당적보>- 이와 같이 신하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면서 반정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소학’을 통해 배운 주자학적 삶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하다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 사사된 조광조의 삶을 통해 16세기 조선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본 책이 <조광조 평전>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다.

이달의 사락 k******4 2024.04.02.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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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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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조선의 사림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깊은 존경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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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조선의 사림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깊은 존경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달의 사락 k******4 2017.11.30. 신고 공감 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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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이종수 생각정원/2016.3.4. sanbaram   <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 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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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이종수

생각정원/2016.3.4.

sanbaram

 

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조선의 사림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깊은 존경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p.4)” 무엇 때문에 조광조라는 사람을 그렇게 존경하게 된 것인가를 밝혀내고자 한 것이 평전을 쓰게 된 동기라 한다.

조광조는 어떤 사람입니까?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 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았습니다.(p.4)” <선조신록> 1567114- 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답이다.

조광조 사상의 근간은 소학에 있다. “소학1187년 주희, 그러니까 성리학의 대가인 바로 그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책으로, 역대의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저작이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이다. 선집의 형태인 만큼 말 그대로 주옥같은 가르침이 가득했으니, 실제 배움의 현장이나 삶에서 적용하기에도 효과적인 면이 있었다.(p121)” 이런 주자학을 실천하기에 힘쓴 것은 그의 스승 소학동자 김굉필의 영향이다.

조광조가 달랐던 점은 그가 서책이 아닌, 정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 상소에서도 밝힌다, 학문과 함께 능히 왕을 보필할 만한 재질을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성리학적 이상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그가 임금을 이끈 방향 또한 그랬다. 자신의 군주에게 요순의 시대를 따르라는 것이었다.(p.298)” 주자학을 현실에서 실현하려 노력하였지만 중종의 역량 부족으로 좌절하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중종이 신임하던 조광조를 내치게 되는 원인이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하였다.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서 나오고 있으니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조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온순하여 옳은 사람같이 보이기에 수년 사이에 벼슬을 뛰어서 높이 썼으니 내가 마침내 주초의 꾀에 떨어진 것이다.(p.249) -안로 기묘당적보>- 이와 같이 신하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면서 반정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소학을 통해 배운 주자학적 삶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하다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 사사된 조광조의 삶을 통해 16세기 조선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본 책이 조광조 평전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다.

이달의 사락 k******4 2016.04.27.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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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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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 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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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7년의 전쟁>,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등의 저서가 있는 이종수는,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서문에서 조선 500년 역사에 그의 활동은 4년 남짓. 작은 점으로 지나칠 정도의 흔적일 뿐,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미미한 시간이다. 그런데도 왕조의 남은 400년 동안 조선의 사림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깊은 존경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p.4)” 무엇 때문에 조광조라는 사람을 그렇게 존경하게 된 것인가를 밝혀내고자 한 것이 평전을 쓰게 된 동기라 한다.

 

조광조는 어떤 사람입니까?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 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았습니다.(p.4)” <선조신록> 1567114- 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답이다.

 

조광조 사상의 근간은 소학에 있다. “소학1187년 주희, 그러니까 성리학의 대가인 바로 그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책으로, 역대의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저작이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이다. 선집의 형태인 만큼 말 그대로 주옥같은 가르침이 가득했으니, 실제 배움의 현장이나 삶에서 적용하기에도 효과적인 면이 있었다.(p121)” 이런 주자학을 실천하기에 힘쓴 것은 그의 스승 소학동자 김굉필의 영향이다.

 

조광조가 달랐던 점은 그가 서책이 아닌, 정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 상소에서도 밝힌다, 학문과 함께 능히 왕을 보필할 만한 재질을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성리학적 이상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그가 임금을 이끈 방향 또한 그랬다. 자신의 군주에게 요순의 시대를 따르라는 것이었다.(p.298)” 주자학을 현실에서 실현하려 노력하였지만 중종의 역량 부족으로 좌절하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중종이 신임하던 조광조를 내치게 되는 원인이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하였다.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서 나오고 있으니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조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온순하여 옳은 사람같이 보이기에 수년 사이에 벼슬을 뛰어서 높이 썼으니 내가 마침내 주초의 꾀에 떨어진 것이다.(p.249) -안로 기묘당적보>- 이와 같이 신하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면서 반정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소학을 통해 배운 주자학적 삶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하다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 사사된 조광조의 삶을 통해 16세기 조선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본 책이 조광조 평전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다.

이달의 사락 k******4 2017.04.07.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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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소학’을 통해 배운 주자학적 삶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하다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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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때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비웃기까지 하는 지금. 조광조가 통탄했을 그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 500년이 흘렀으되 조광조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소학을 통해 배운 주자학적 삶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하다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되어 사사된 조광조의 삶을 통해 16세기 조선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본 책이 조광조 평전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다.

이달의 사락 k******4 2017.01.01.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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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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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꽤 이른 나이부터 행동의 기준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배움과 판단에 의거한 도(道)에 둔 사람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내의 청송당 터에서, 운현궁에서 익선동으로 넘어갈 때 볼 수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출생지인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묻혔고 인근 심곡서원에 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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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꽤 이른 나이부터 행동의 기준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배움과 판단에 의거한 도(道)에 둔 사람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내의 청송당 터에서, 운현궁에서 익선동으로 넘어갈 때 볼 수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출생지인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묻혔고 인근 심곡서원에 신주가 모셔졌다. 조광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목숨을 잃었다. 실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중종 14년인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가 옥에 갇힌 후 사관이 참여하지 않았다.

 

조광조 세력은 붕비(朋比; 붕당을 세워 자기편을 두둔함)의 죄를 받았다. 대명률에 따르면 참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다가 하룻만에 붕비의 죄명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광조는 중종으로부터 친히 국문받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이다. 조광조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에 처한 김굉필을 직접 찾아가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소학(小學)을 좋아해 스스로 소학(小學) 동자라 칭했던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소학은 성리학의 대가 주희가 지시해 편찬한 책이다. 역대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책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이 스승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를 애도하는 글)을 사초(史草)에 싣자 연산군이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을 죽인 사건이다. 김굉필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다.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지만 세조의 등극을 문제시한 선비들을 벌하지도 않았고 문제제기를 수용하지도 않았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학문은 사장(詞章; 시문 짓기)이 아닌 경학(經學;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 그가 사장(詞章) 시험에 불쑥 응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조광조에게 문장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조광조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를 따르자는 기치를 내건 개혁을 주장했다.(58 페이지) 신하들에 힘입어 왕이 된 중종은 공신들에게 질릴 만큼 질린 임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모두 죽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만난 것은 이 이후다.

 

재위 10년차의 중종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유생들로서 대책을 논하라는 알성시 책문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는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며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는 이치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답했다.

 

또한 임금은 대신에게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답했다.(이는 정도전의 논리와 통하는 바다.) 알성시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된 지 석달만에 사간원 정언(正言)을 제수받았다.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받은 지 이틀만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파직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고작 6품의 초임 간원이 자신이 속한 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언관 모두를 탄핵한 것이다.(84 페이지) 중종 시대에는 재해(災害)가 많았다. 이에 반정이 잘못 되었으니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중종은 답하지 않았다.

 

“구언(求言; 임금이 신하의 직언을 구함)한 뒤 아뢴 바가 비록 광패(狂悖; 행동이 도의에 벗어나서 미친 사람처럼 사납고 막됨)하더라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니 상소 내용이 비록 그르다 하더라도 죄를 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중종은 두 사람(박상, 김정)을 유배에 처했다.

 

중종은 죄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모를 것이기에 죄를 준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두 사람의 말이 지나치면 쓰지 않으면 될 것을 죄는 왜 주는 것인가, 물으며 대간이 오히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파직할 것을 청했다. 중종과 조광조는 의견이 어긋났다.

 

중종이 다른 정언(正言)들은 용납하였는데 어찌 조광조만이 용납하지 않느냐 말하자 조광조는 사람들의 의견이야 저마다 다를 수 있는 법, 그들이 용납했다고 자신 또한 그래야 할 까닭이 있느냐 말했다.(103 페이지) 결국 조광조의 뜻대로 사건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의견이 둘로 나뉜 것은 여전했다. 조광조는 경계심의 대상이자 기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조광조는 이듬해 3월 홍문관 부수찬(종 6품), 후에 수찬(정 6품)의 자리에 올랐다.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임금의 경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말했다. 당시 하급관원이라도 실력이 남다르면 핵심적인 경연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연산군은 성군포기선언을 했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한 경연 스승 정여창을 미워하다가 유배 끝에 부관참시까지 했다.(116, 117 페이지) 세자 시절이 없었고 정국이 혼란스러워 마음 편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던 중종은 조광조가 경연관으로 참여한 몇 년간 열심히 공부했다.

 

조광조는 홍문관 부수찬(종 6품)이 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당상관인 정3품 부제학에 올랐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실질적 책임자다.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등에 대한 처우 문제가 불거졌다. 성균관 유생들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김굉필 등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자, 김정, 기준, 정응, 김구, 윤자임, 박훈, 박세희, 김식 등이 조광조 세력이었다. 문묘(文廟) 종사(從祀)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모셔진 신하에게 왕도 무릎을 꿇어야 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 오르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군신의 도가 사제의 도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는 정광필이 사육신 추장(追葬)과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은 혹시 조광조 무리의 정치세력화를 염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란 말을 한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에 대한 문묘 종사 반대 논리를, 스승은 자구(字句)나 파헤치는 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말로 물리쳤다.

 

김굉필은 제대로 된 학술서 하나 남기지 못한 인물이다.(김굉필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광해군 시기에 이르러서다.) 조광조의 생각들을 따르다 보면 조선을 처음 만들어가던 정도전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무엇에 정치의 기본을 둘 것인가, 군신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자세가 그렇고, 그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그렇다.

 

두 사람 모두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자였으니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첫 기초를 세웠다면 조광조는 100년이 지난 조선을 다시 증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168 페이지) 당연히 이해가 얽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 혁파 상소에서 ”대저 시비를 가리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사정(邪正)을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미혹(迷惑)하지 않는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확실하게 의심없는 것을 단(斷)이라 합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모두 임금의 일상 생활에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보존하여 변함이 없으면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함에 있어 갈피를 못잡고 주저하는 병통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것이 있으시겠습니까?“라 말했다.

 

중종은 ”조종조(祖宗朝)에서 혁파하지 못한 일을 내 어찌 스스로 잘난 체하여 고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중종 시대에 재해가 많았거니와 심한 지진이 있었다. 조광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소인이 인사(人事)를 잘못한 탓이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누가 보아도 조광조를 지칭한 상소였다.

 

조광조는 아직도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상소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사직하더라도 소격서 혁파는 윤허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격서는 고려에서 시작된 것이니 없앤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으나 중종은 그 퇴로(退路; 출구전략?)를 걷어찼다.

 

조광조는 소격서 혁파건으로 계속 상소했다. 결과론인지 모르지만 소격서(혁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란 의문이 든다. 결국 중종은 소격서 혁파를 윤허했다. 두 달 후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치적 부담이 큰 자리였다. 사실 소격서는 재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었다.

 

이제 위훈삭제(僞勳削除)건이 남았다. 중종 당시 책봉된 정국(靖國) 공신들에 대한 책봉을 거두어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었다. 중종 반정은 가장 많은 공신이 책봉된 사건이었다. 중종과도 밀접히 관련된 문제였다. 더구나 주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준 선물을 거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광조는 자신들의 세력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된 김우증(金友曾)에게 참형을 선고하지 않음으로써 대간들에게 탄핵당하기까지 했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 제도 시행을 추천했다. 천거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다. 현량과는 조광조가 출사 이전부터 구상했던 정책 중 하나다. 조광조의 개혁 구상 가운데 유일하게 사심 어린 정책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조광조는 중종이 정국공신 개정을 불편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종을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었다.

 

조광조도 공신 책봉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4등 공신만 개정하자는 타협책도 제시되었다. 공이 없이 공신이 되었다며 스스로 공신 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종은 반정 당시 경황이 없어 공신 책봉에 문제가 있었음을 뼈아프게 시인하며 개정을 명했다. 117명 중 76명이 개정 대상자로 정해졌다.

 

기묘년(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는 전격 체포되었다. 조광조에게 중죄를 적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를 지지해온 사람들이 함께 죄를 받겠다고 청하고 나섰다. 조광조는 감사(減死)되었다. 사건의 발단이 남곤 등의 참소가 아니라 임금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임금이 몰래 일을 꾸며 자신의 신하를 제거하려 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비겁한 처사였다.

 

조광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조광조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중종은 조광조 사사(賜死)를 명했다. 사사의 명이 전해지자 조광조는 오히려 태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조는 함께 사사에 처해지게 된 동료들과 달리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을 뿐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에 취했다.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에 의하면 조광조(趙光祖; 1482 - 1520), 김정(金淨; 1486 - 1521), 김식(金湜; 1482 - 1520), 김구(金絿; 1488 - 1534) 등은 붕당의 죄를 지었고 기준(奇遵; 1492 - 1521), 윤자임(尹自任; 1488 - 1519), 박세희(朴世熹; 1491 - ?), 박훈(朴薰; 1484 - 1540) 등은 그들을 추종한 죄를 지었다.(265 페이지)

 

어떻든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지도, 이 기막힌 처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광조의 논의가 궤격(詭激; 언행이 온당하지 않고 과격함)하다는 말에도 수긍할 수 없으며 우리의 근심은 오직 나라를 위한 것이었을 뿐 사사로이 부화(附和;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름)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임금께서도 자신에게 그 믿음을 허락하신 것이었는데, 지금 다른 참소로 인해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리시는 것이 아니냐 호소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했고 함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유인숙(柳仁淑; 1485 - 1545), 공서린(孔瑞麟; 1483 - 1541) 등은 조광조와 같은 벌을 받겠다며 옥에 가둬달라 청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사사건건 조광조의 정책을 막아서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 - 1538)마저도 조광조를 위한 탄원을 멈추지 않았다. 탄원 물결은 정광필이 영의정 자리에서 체직(遞職)당한 뒤에 멈추었다. 조광조는 경기도 평택 농성(農城) 땅에 유배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먼 길 가기 어렵지 않게 관을 얇게 만들라고 명했다.

 

의아한 것은 중종의 태도다. 조광조의 정책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왜 제때 말하지 않은 것일까?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그렇게 돌변하다니..조광조의 죽음은 이상하다. 아무도 청하지 않은 죽음을 임금이 홀로 결정한 것이다. 사관은 중종을 마치 두 임금 같았다고 기록했다.

 

연산군 시대의 두 사화(士禍)는 어쨌거나 폭군이라 비난받던 임금이 남긴 결과였다. 하지만 기묘사화는 요순시대를 따르겠다던 임금의 결정이었다. 중종은 스스로 발탁하여 믿고 의지했던 신하들을 일방적으로 배반한 신의(信義) 없는 임금이 아닐 수 없다.

 

중종은 아무래도 조광조에게 질투를 느낀 것 같다.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고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조광조에 비해 군주임에도 자신은 참 보잘 것 없다고 느낀 것 같다. 저자는 중종의 다스림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말한다.(290 페이지)

 

“중종이 알았다면 섭섭했겠지만” 조광조는 중종 승하 다음 해인 인종 1년(1545년)에 복권되었다. 조광조는 선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광조는 단지 더 나은 정책과 제도만이 아닌, 조선의 정신과 그 방향을 고민했던 인물이다.“(298 페이지)

이달의 사락 m******1 2021.01.11.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현실의 하늘은 낮은데 이상은 지극히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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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하늘은 낮은데 이상은 지극히 높았다.. ㅡ 리뷰평전은 글쓴이를 감화시킨 역사적 인물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한 객관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지은이의 주관적 평을 담은 글쓰기 양식을 말한다. 당대 현실을 재구성하고 인물의 말과 행동, 외양에 대한 묘사를 상상하여 그리는 데는 작가의 상상적 역량을 한껏 펼칠 수 있는, 다분히 문학적인 글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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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하늘은 낮은데 이상은 지극히 높았다..
ㅡ<조광조 평전 / 이종수> 리뷰


평전은 글쓴이를 감화시킨 역사적 인물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한 객관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지은이의 주관적 평을 담은 글쓰기 양식을 말한다. 당대 현실을 재구성하고 인물의 말과 행동, 외양에 대한 묘사를 상상하여 그리는 데는 작가의 상상적 역량을 한껏 펼칠 수 있는, 다분히 문학적인 글쓰기이다.

<조광조 평전>의 작가 이종수는 국문학과 미술사학의 전문가로서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력이 십분 발휘되어 <조광조 평전>을 통해 독자는 잘 쓰여진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대하듯 미적 감동과 문학적 여운을 얻게 된다.

하고많은 인물 중에서 작가로 하여금 그의 평전을 짓도록 한 조광조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조광조의 무엇이 중종실록을 비롯한 객관적 역사 사료 앞에서 무게중심을 애써 잡는 저자를 조광조에게 사뭇 기울어지도록 만든 걸까? 책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저자의 기울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현재 시점에서도 조광조의 인품에 감화되어 진동 중인 듯 보인다.

조광조는 중종조, 조선의 유교 국가 실현을 위해 실천을 강구한 과격한 정치개혁가이다. 중종에게도 임금 자리를 빚진 반정 공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였는데 1515년 조광조 나이 34세 알성시에서 이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알성시에서 정6품의 관직을 받고 세 달 후 사간언 정언을 제수받은 초임 간원 조광조는 자신이 속한 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언관을 탄핵하는 상소를 시발점으로 개혁의 돌풍을 일으킨다.

조선시대에는 구언제도가 있었고 구언에 응하여 올린 상소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아무리 군주의 무능을 일깨우고 정치의 무도함을 꾸짖는다 해도 절대로 벌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다. 이것은 언로를 막지 않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신씨복위상소를 올린 김정과 박상을 벌해야 한다고 간한, 오히려 언로를 지켜야 했을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에 대한 탄핵을 조광조가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구언을 통한 언론 확보의 중요성을 일깨운, 조광조의 원칙이 중종에게 받아들여졌다. 도덕적 원칙 앞에서 힘 있는 공론이 형성되어야 실질적 개혁이가능한 일임을 두 사람은 모두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내수사 장리'와 '기신제' 혁파와 소학 운동, 민본제 실천을 위한 공납 문제의 해결 등 일련의 개혁들이 다소간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차곡차곡 진행되었고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유교의 도통을 체계화하는 일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격서 혁파 사건에서 중종과 조광조 사이에 미세한 틈이 벌어진다. 임금을 위한 간언이 아니라 총명강단을 갖추지 못한 군주를 책망하는 조광조의 상소에서 조광조가 정녕 자신을 위한 신하인지, 자신의 학문을 군주보다 더 사랑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마음 속 큰 지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1519년 정국공신을 개정하는 조광조 생애 마지막 개혁에서 조광조는 중종의 버림을 받는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중종과 조광조의 마음 속을 드나들며 그 이유를 가늠하지만 이상주의자인 조광조의 버림받음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절절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상대가 무엇을 더 요구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건넬 만한 것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조광조에게 거듭 내렸던 승진의 은혜를, 그것을 통해 얻었을 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권력의 달콤함으로도 길들일 수 없고 권력을 구걸하지 않은 신하 조광조에게 더 이상 건넬 게 없는 중종의 구차함으로 조광조를 옹호하고 그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야심한 밤을 틈탄, 당사자의 얼굴도 비치지 않은 급작스런 중종의 이별 통보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형식이 배제된 그간의 믿음과 사랑을 초라하게 만든 허망한 것이었다. 유배지에서 사사의 명을 받은 조광조의 죽음에 대해 중종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전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 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것 같다."

조광조 사후 중종은 조광조가 구상했던 모든 정책들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그리고 중종이 승하한 다음해인 인종 1년에 조광조의 명예를 돌리는 복권이 허락되고 선조 1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며 2년 후에는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진다. 그후 스승 김굉필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어 유학자의 최고 반열에 오른다.

왜 조광조인가. 그는 타고난 자질과 이상의 크기 그리고 이상과 일치되는 삶의 태도를 아우른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서책이 아닌 정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고 조선의 정신과 그 방향을 고민했던 인물이다. 이것이 저자로 하여금 조광조 평전을 집필하게 한 그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조광조의 시대는 현실의 하늘이 낮은데 비해 그의 이상은 지극히 높았던 데에 그 시대와 인물의 비운이 있었다.
g****n 2016.06.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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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행하면 내일은 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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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행하면 내일은 제도가 된다조선 역사 500년, 중종의 재위기간 38년 중 4년은 지극히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 4년이라는 시간이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조광조다.‘완벽한 유학자에서 과격한 개혁가’, ‘개혁의 의미마저 의심받고 있는 실패한 정치가’ 이는 조광조에 대한 엇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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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행하면 내일은 제도가 된다

조선 역사 500, 중종의 재위기간 38년 중 4년은 지극히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다. 4년이라는 시간이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조광조다.


완벽한 유학자에서 과격한 개혁가’, ‘개혁의 의미마저 의심받고 있는 실패한 정치가이는 조광조에 대한 엇갈린 시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시선이다.

 

조광조에 대한 이황의 글을 보자.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 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았습니다."(선조실록 1567.11.4.) 선조임금이 그의 스승 이황에게 조광조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그에 대한 이황의 답변이다. 이를 참고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거울에 비친 조광조는 어떤 사람일까?

 

열일곱 나이에 유배지의 스승 김굉필을 찾아 떠난 조광조의 길이 결국 자신의 유배지에 이르기까지, 길지 않았던 그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날 조광조를 어떤 시선으로 봐야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림문답', '이야기 그림 이야기', '그림에 기댄 요일', '류성룡, 7년의 전쟁' 등으로 만나 일부러 찾아보는 저자 이종수의 글이다.

 

두 번의 사화 후 중종반정에 이르기까지 명분 싸움으로 치달았던 시대를 보내는 동안 조선은 늘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누구나 민본을 내세우지만 어느 사이 권력의 핵심에 선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한 권력 장악에 주목하여 날로 피폐해지는 백성들의 삶을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한번쯤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이념을 기반으로 점검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한 사람이 어쩌면 조광조가 아닌가 한다.

 

탐욕과 태만으로 물든 조선을 흔들어 출발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개혁을 추진한 그가 바로 조광조다. 유학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도리는 무엇인가? 이로부터 도출된 해결책을 바탕으로 그는 실천을 강조한다. 실천의 중심에 인간의 가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조광조 사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었다. 짧은 4년이 500년을 뛰어넘는 정신으로 추앙받은 것이다. 그 기저에 존재하는 것이 학문을 하는 선비의 실천정신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저자 이종수가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오늘 실행하면 내일은 제도가 된다.”는 조광조의 말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고 보인다. 이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꼭 필요한 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 제시이기도 하다.

m*****8 2016.04.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