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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빛을 되찾은 지 70주년이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시간에 우리 한민족은 과연 진정한 해방과 탈식민화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중일까? 반성해본다. 나는 유일신론보다는 다신론이 좋고 다신론보다는 무신론이 더 좋다. 패권 문화와 중심주의보다는 변방문화와 해체주의를, 민족주의보다는 세계대동주의를, 국제화보다는 지역공동체주의를 더욱 선호한다. 그리고 서방중심주의든 동방중심주의든 모두 올바르지 않은 편향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일부 학자들의 순한글론이나 영어공용어론이나 모두 편협하고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주류적 가치와 이념을 재생산하고 재현하는 문화적 헤게모니는 언제나 의심의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문화적 헤게모니는 화려한 연예계 스타들과 권위있는 교양 엘리트들을 내세워 달콤한 선전선동을 즐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각종 '갑질'과 인종차별과 성차별 같은 비인간적인 차별의 기제와 배타적인 폭력 형식에 적극 저항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나의 태도와 신념은 탈식민주의 비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식민주의는 한 나라의 경제, 정치, 군사와 국가주권에 대한 강탈과 통제, 간섭을 말하고, 신식민주의는 한 나라의 문화, 도덕, 지식, 언어 등 문화 제반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말한다. 탈식민주의는 과거의 제국주의를 업그레이드한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대안 프로그램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적 상흔을 깊이 간직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탈식민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형식의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도 반대한다는 점에서 무척 구미가 당기는 문화이론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종족주의와 배타적 차별에 반대하는 탈식민주의 노선은 그 자체로 골품제나 반상제 같은 신분차별의 억압과 경상·전라의 지역차별주의가 심한 한국사회의 고질병을 다스려줄 명약이다. 다원주의 문화이론을 견지하는 탈식민주의는 한국의 기업문화와 대학문화의 지나친 영미 중심의 문화제국주의와 학술 식민주의를 경계토록 하는 사상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일제 치하의 식민 경험은 여전히 트라우마를 양산 중이다. 한때 종주국이었던 일본은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를 놓고서 이리저리 갑질중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비인간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세뇌시켜 우리를 역사의 포로로, 이념의 도구로, 권력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반면에 탈식민주의는 각종 형태의 감금에서 벗어나 자유를 회복하고 주체성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국내에서 탈식민주의 담론을 가장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소개하고 있는 이가 이경원 선생이다. 저자는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운데 흑인 출신의 혁명적 심리학자 프란츠 파농에 주목한다. 파농은 식민주의 심리학의 대부격 사상가인데, 파농의 문제의식은 '식민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흑인들과 알제리 사회에 어떤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겼는가?'로 압축할 수 있다. 파농은 백인의 식민 지배가 흑인의 집단의식과 집단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관심을 곤두세웠다. 파농은 개인의 주체구성에 사회환경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파농의 눈에 비친 프랑스와 알제리는 일제와 조선으로 읽힌다. 파농을 비롯한 알제리 혁명투사들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같은 숭고한 독립투사들의 얼굴과 겹친다. 탈식민주의 담론의 이론적 스펙트럼은 크게 푸코를 기준점으로 삼아 '푸코 이전'과 '푸코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파농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더불어 '푸코 이전' 사상가, 즉 탈식민주의 이론의 초기 사상가로 손꼽힌다. '푸코 이후' 사상가는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과 트린 민 하가 대표적이고 주로 해체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람시와 파농의 공통된 특색은 사회변화와 해방의 가능성을 위한 무장투쟁노선에 있다. 파농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일원으로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인 가난한 농민계급의 입장에 서서 자주적 민족해방운동 노선을 지향했다. 파농의 사상적 계보는 네그리튀드(흑인민족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로 집약된다. 파농은 이런 사상을 주체적으로 통섭하거나 전유했다. 파농의 말대로, "나의 토대는 나 자신이다." 파농의 이 말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에 길게 늘어진 실존주의 철학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다. 실제로 파농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깊은 교분이 있었다. 사르트르의 애인 시몬 드 보봐르에 따르면, 둘은 새벽 두 시까지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대화는 어쩔 수 없이 사르트르의 수면을 보장하기 위해 중단되곤 했다. 당시 파농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네 시간을 넘지 않은 열혈 청년이었다 한다. 파농은 흑인이지만 흑인민족주의를 표방한 네그리튀드의 맹점을 간파했고, 알제리와 튀니지에서 정신과의사로 근무하면서도 정신의학에 고착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정신의 탈식민화'를 기획했다.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부과한 도덕을 지배자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식민지 문화엘리트들이 쉽게 갖게 되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 여전히 아베정권에 부화뇌동하는 친일파가 많은 이유도 일제 식민통치의 트라우마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피식민지 민족이 종주국인 일본의 황국신민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살아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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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서양인이야.”
학부 시절 들었던 어떤 강의에서 교수가 한 말이다. 괴짜로 소문난 교수였기에 그때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어떻게 서양인일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한국인은 서양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근대 이후 철저하게 서양화됐다.(지금의 나로서는 과거가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양인의 체계로 사유한다. 미적 기준도 서양인의 것을 따른다. 백인을 선망한다. 백인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동남아계나 흑인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적 없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도,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서양에서 설정한 잣대로 민족의 우열을 나누는 것이 가장 미개한 짓이다. 이를 식민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은 아직 식민성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낀 반주변부 국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 파농이 호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파농은 탈식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농, 탈식민화의 아이콘
내가 파농과 마주친 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구입하게 되면서였다. 하지만 첫 만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앞부분만 읽다 포기한 것이다. 이후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읽기’ 시리즈로 출간된 <파농>을 접하면서 파농이 어떤 인물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도 말이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마르티니크는 1946년 프랑스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파농은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터라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파농은 프랑스를 자신의 조국이라 여기며 동경했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참전한 전쟁터에서 받은 냉대와 ‘네그리튀드’라는 흑인정체성 회복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후 파농은 180도 변했다.
사고의 대전환 이후 파농은 탈식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전유(專有)해 탈식민화에 관한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한다. 파농은 사상 정립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 행동도 불사했다. 자신이 알제리인이 아님에도 알제리 독립운동에 투신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파농의 굴곡진 삶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태생으로서 식민모국인 프랑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향유했던 경험과 탈식민화를 위한 학문적·정치적 투쟁의 경험이 공존하는 파농의 삶은 그의 사상이 이상적인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실천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은 이 같은 파농의 삶과 사상에서 식민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 파농이 필요한 이유
"누더기든 최신 유행 스타일이든 그들은 무조건 유럽식 의상을 걸친다. 그들은 유럽 가구를 사용하고 유럽식 사회담론을 구사하며, 모국어를 유럽식 표현으로 윤색할뿐더러 유럽 언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과장된 수사를 남발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유럽과 유럽인이 이룩한 업적과 대등한 위치로 상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21쪽)
1920년대 마르티니크의 니그로와 2000년대 한국인은 매우 유사하다. 마르티니크의 니그로가 유럽 문화를 선망하고 그것에 집착했듯이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유럽을 미국으로 바꾸면 현재 한국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정치, 사회, 문화, 학계 등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와 한국인의 유럽과 미국 선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관련된 행태들이다. 언어는 일종의 권력이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에게 프랑스어가, 한국인에게는 영어가 상류 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로 작동했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발음을 위해 ‘혀 수술’까지 감행하는 촌극이 벌어지겠는가.
“파농은 이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신을 불안정한 위치에 갖다놓고 항상 전전긍긍하며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일종의 포기신경증에 해당하며 그것의 근본원인은 자기타자화 또는 자기소외라고 진단한다. 이 증상은 “신비롭게 여겨지는 집단[백인]에서 인정받고 거기에 편입되려는” 몸부림인 동시에, “자신의 개체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141쪽) 파농의 신랄한 비판이 진정성을 띠는 것은 파농 스스로 ‘니그로의 자기소외’에 빠져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파농은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쓴 자신이 결국 니그로였음을 인식했다. 파농의 자기반성은 이후 알제리 독립운동과 같은 탈식민화 정치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파농처럼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식민성’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알제리의 해방과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라는 지상과제(54쪽)”를 위해 평생을 바친 파농은 갑작스레 찾아든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파농의 사상은 “독일의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일본의 좌익학생운동, 라틴아메리카의 반미운동, 1979년 이란혁명 등(65쪽)”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파농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마르티니크처럼 한국도 식민지를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파농이 스스로 경험했듯이 한국도 서양을 동경하고 제3세계를 경멸한다. 이러한 경향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에서도 드러난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는 인식은 서양을 선망하고 제3세계를 경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한국은 자신이 과거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다.
파농이 맹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이 내면화한 식민성을 걷어냈듯, 우리도 깊은 성찰과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진국을 선망했지만 수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금수저’를 물기 선망했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긴지 오래다. 위를 선망해서 얻은 것이라곤 결국 모멸감과 자기비하뿐이다. 우리는 이를 자각해야 한다. 파농이 그랬듯, 변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