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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이고 무겁지 않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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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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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의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황인숙 시인의 가장 최근 시집이다. 그리고 다섯번째다. 언제부턴가 시인의 시집을 모두 사서 읽었다. 또 몇권인가 산문집도 냈는데 역시 내 책장에 있다. 누군가에게 소개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운 좋게도 처음 접한 시집이 싫지 않았다. 여류시인의 감수성이 내게 맞았던 모양이다. 한때 현실에 관한 심각한 시들 속에서 그녀의 감각적이고 무겁지 않은 시가 한마디로 말해 쿨했다. 나는 그녀의 초기 시들이 더 좋다. 젊은이의 톡톡 튀는 발랄함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는 시들이다. 요즘의 시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나이듦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점점 나이가 들고 나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모습이 진정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탐탁치 않게 여겨지는 것은 나 스스로 나이드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일까? 나는 가끔씩 그녀의 시집들을 꺼내 읽곤 한다. 시 속에서 내 마음같은 구절들을 발견하는 것이 즐겁다. 앞으로도 시인이 부지런히 시를 쓰고 새로운 시집을 내길 기대해 본다.
n***b 2004.12.3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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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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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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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순전히 <강>  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샀다.  

 얼마전 나는 외로움의 강, 트위터를 탈퇴헀다.

 sns가 내 일상을 침범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트위터를 견디기 어려웠고 바로 그 가면무도회에서 나와버렸는데, 트위터 탈퇴 전후로 느꼈던 감정들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트위터 탈퇴 이후에 내 트친 A의 소식이 궁금해서 다음을 통해 트위터를 검색했다가 트친 A, 트친 A와 나름 엄청나게 시끄럽게 서로 언팔한 B, 그 둘과 맞팔 관계였던 C의 멘션들을 봤다.  C는 A와 대화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B와도 서로 다른 주제로 대화 중이었다. 물론 A,B는 서로 대화가 안 되는 중이었다. 이거는 무슨 '소통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희극을 보는 것도 아니고, A와 B가 어떻게 하다가 언팔했는지 C도 다 봤을 텐데 그 둘과 동시다발적으로 대화했던 C를 보는 순간, 나는 C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평소에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C는 종종 내 유리신경줄을 박박 긁어대는 외로움이 가득한 글들을 쏟아냈었는데(직접 나에게 얘기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내 신경줄을 막 긁어댔음), C에게는 자기의 외로움만 달래줄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인지, 상대의 표정이나 감정 같은 건 상관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녀들이 당신의 정신적 위안부, 자위도구입니까?' 그 말이 진짜 내 마음 속에서 터져 나왔다.

 

 사실 C와 내 사이는 농담 몇 번이 전부다.  한번은 C가 나한테 '농담'으로 던진 말이 있었는데 사실 그게 나한테는 '금기어'였다. 나는 트위터 밖에서 엄청 당황했지만, 트위터에서는 대충 둘러대는 말로 '거절'했다. 아마 C는 내 반응이 이해가 안 갔을 거다.  나를 전혀 모르기에 우연히 나라는 인간의 최소한의 윤리를 건들면서 C는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버렸다. 어쩌면 C도 트위터에서는 태연하게 A,B 양쪽과 대화를 해도 트위터 밖에서는 A와 B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과의 SNS에서 관계라는 걸 기대했던 A와 나는 바보였다.   

 더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나는 트위터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외로움의 강, 그게 트위터다. 그런데, 외로운 사람 모두 트위터로 달려가면 나처럼 트위터에서 도망가는 사람도 나온다.

 

* 사족이지만, A와 C가 행복하길 바란다.

* 내가 트위터에서 탈출할 때 내 유일한 문제가 트위터였다. 일상과 SNS,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참 싫었다.

l******1 2014.07.1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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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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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이 뭘까, 했다. 같은 제목의 시도 있기는 하지만,이 시집을 읽고 나서는 '자명' 하다는 표현이 와닿았다.손끝에 그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고, 그런 냄새가 나는 듯하고, 그런 색감이 보이는 듯 해서였다.감각들이 선명하게 묘사되는 시가 많다. 「명아주」 는 마치 그 밭에 나도 들어가본 것만 같았고 (실제로 가본 적은 없다)「아주 외딴 골목길」 은 언젠가 이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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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이 뭘까, 했다. 같은 제목의 시도 있기는 하지만,
이 시집을 읽고 나서는 '자명' 하다는 표현이 와닿았다.
손끝에 그 감촉이 느껴지는 듯하고, 그런 냄새가 나는 듯하고, 그런 색감이 보이는 듯 해서였다.
감각들이 선명하게 묘사되는 시가 많다.


「명아주」 는 마치 그 밭에 나도 들어가본 것만 같았고 (실제로 가본 적은 없다)
「아주 외딴 골목길」 은 언젠가 이름 모를 골목을 기웃거렸던 생각이 났다.
특히 「모진 소리」 라는 시는 글이 아주 단순한데도 쩡-하고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풍경들 중 근처에서 가장 익숙하게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은  「조용한 이웃」 이었다.
'봄기운을 두 방울 떨군 /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다니,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는 능력이 참 부럽기만 하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시는 맨 처음에 나오는 「강」 이었다.
어디선가 읽은 적 있는 시인데 이 분의 시인 줄은 몰랐다.
여러 마음을 강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그리고 거기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고,
각자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일들을 위로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 가장 신선했던 시는 「노인」 이었다.
노인을 감정의, 행위의, 잠의 서민으로 표현한 것이 무척 와닿았다.
기억의 서민이자 욕망의 서민, 生의 서민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바쁨과 효율성을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 에 대해 묻는 질문을 생각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겠다.
그런데 질문에 따라 분위기는 달라진다는 것은 알겠다.
말의 느낌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시 같다.



바쁜 일상 중에 시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잠시 멈추었다 간다.

s******2 2017.03.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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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서 내 나이를 본다--- [시집-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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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상상력은 소설에서 보여주는 상상력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듬인가, 통통 튀어오르는 시적 언어의 리듬감. 같은 상상력이라는 말에 있어서도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어려웠지만 이 시집을 깊이 읽었다.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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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상상력은 소설에서 보여주는 상상력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듬인가, 통통 튀어오르는 시적 언어의 리듬감. 같은 상상력이라는 말에 있어서도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어려웠지만 이 시집을 깊이 읽었다.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하늘은 그들의 부엌/오늘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그리고 봄기운을 두 방울 떨군/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 것이다(34p에서)' 이 시를 지나갈 때 내 가슴에서 쨍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나는 시인의 나이도 엿본 것 같았다. 세월의 한가운데를 돌아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졌다. 더이상 젊지 않을 것 같은 나이, 더 이상 푸른 꿈 때문에 좌절하거나 솟구치거나 할 것 같지 않은 나이. 조금은 쓸쓸하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여태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돌려보내 주고. 내가 나이를 먹고 늙는다면 이렇게 되었으면 좋으리라 싶은 그런 모습을 하고서. 어쩌면 이것은 순전히 내 느낌만일 수도 있다. 시를 통해 만난 나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이제는 우울이 그리 슬프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많이 살아온 기분이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고, 삶이 행복한 것만도 아니고,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것. 그런 날이 올 것을 확신할 수 없어도 그래서 심지어는 '영락이라는 말은 슬프다...영락한 것 같다는 말은 슬프다(16p)'고 생각은 하면서 그래도 그 슬픔이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 나는 시집이 마음에 들었다.

YES마니아 : 로얄 j***6 2004.01.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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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서울마실 (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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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0시와 서울마실― 자명한 산책 황인숙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3.12.11.  서울로 마실을 나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나옵니다. 우리 집 곁님은 아직 많이 아픈 사람이라 함께 마실을 다니기 어렵습니다.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나오든,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든, 나는 언제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입니다.  서울마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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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0


시와 서울마실
― 자명한 산책
 황인숙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3.12.11.


  서울로 마실을 나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나옵니다. 우리 집 곁님은 아직 많이 아픈 사람이라 함께 마실을 다니기 어렵습니다.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나오든,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든, 나는 언제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먼길에 두 아이와 함께하며 생각합니다. 곁님이 아이들과 함께 다니지 못하니 늘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곁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으면, 나로서는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는 즐거움을 못 누립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챙깁니다. 아이들 입을 옷을 꾸립니다. 큰 가방에는 아이들 짐이 그득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시로 갑니다. 순천에서 인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 아이는 버스역 맞이방에서 한참 뛰놉니다.

  시외버스를 탄 아이들은 버스에서도 놉니다. 노래를 부르고 서로 얼크러집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날 무렵, 큰아이가 먼저 곯아떨어집니다. 이윽고 작은아이도 곯아떨어집니다. 두 아이는 서로서로 기대고, 나는 두 아이를 살며시 토닥이면서 재웁니다. 드디어 인천 버스역에 닿을 무렵 큰아이를 깨웁니다. 가방을 메고 작은아이를 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적에 큰아이가 일어나 주니 고맙습니다. 큰아이는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았어도 씩씩하게 걷습니다. 한손으로는 작은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큰아이 손을 잡습니다. 버스역 뒷간으로 가서 두 아이 쉬를 누입니다.


.. 빨간 신호등이 푸르러지도록 / 사람들은 무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  (무교동)


  버스역에서 전철역으로 갑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갑니다. 두 아이는 계단을 타니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시골집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온갖 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도시는 땅뙈기가 좁다면서 위로 높거나 아래로 깊습니다.

  계단놀이를 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전철역으로 들어서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계단이로구나, 도시에서는 늘 계단투성이가 되니 사람들이 승강기를 타고 싶겠구나.

  전철을 탑니다. 아이들과 전철을 탄 지 얼마나 되었나 돌아봅니다. 여섯 달쯤 되었던가. 큰아이는 손잡이를 안 잡고 서려 합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큰아이는 전철이 서고 달릴 적마다 비틀비틀 춤을 춥니다. 춤을 추는 전철이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두 아이는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너희한테는 어느 곳이나 놀이터가 되는구나.


.. 모진 소리를 들으면 /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  (모진 소리)


  전철을 내립니다. 저녁바람이 셉니다. 삼월을 갓 지난 인천은 아직 쌀쌀합니다. 고흥에서는 따순 바람이 불지만, 인천에 봄바람이 불려면 아직 멀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흥집을 나설 적에 덥다면서 겉옷을 안 입으려 하던 아이들입니다. 겉옷을 챙길까 말까 하다가 두고 나왔습니다. 너희가 추위를 한번 겪어야 너희 겉옷을 스스로 챙기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가방에 겉옷을 챙길 수 있으나, 늘 다 챙기지는 말아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일곱 살 네 살 나이는 아직 많이 어리지만,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어떻게 지내야 한다고 여길까요. 내가 좀 짓궂게 구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번 마실길에서 큰아이 새 겉옷을 장만하자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두꺼운 겉옷은 있으나 바람막이 같은 겉옷은 없거든요. 시골에서는 아이들 옷을 새로 장만하거나 얻기 힘들거든요. 큰도시로 마실을 나온 김에 아이들 옷을 살펴보자고 생각했어요.


.. 구름이 / 가만히 있다. / 가생이가 하얗게 / 햇빛을 쪼이면서. / 졸리운 돌고래처럼 ..  (르네 마그리트의 하늘)


  인천 지하상가에서 큰아이 웃옷과 바지 한 벌을 새로 장만합니다. 큰아이는 처음에 ‘안 추워. 안 살래.’ 하고 얘기했지만, 토끼 무늬 들어간 웃옷과 고양이 무늬 들어간 바지를 바라보며 ‘토끼 예뻐. 고양이 좋아.’ 하고 말합니다.

  큰아버지 사는 인천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튿날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전철길에서 큰아이는 큰아버지 보고 싶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며 웁니다. ‘얘야, 너 큰아버지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큰아버지하고는 안 놀았잖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나와서 운다고 돌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이모를 만나자고 했잖니. 너, 큰아버지도 보고 싶다 했지만 이모도 보고 싶다 했잖아. 이제는 이모를 보러 가자.’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눈물을 그치지 않습니다. 전철에서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를 오른어깨에 기대어 잠들도록 하고는 무릎에 큰아이를 앉힙니다. 등을 쓸면서 다독입니다. 큰아이는 품에 안긴 채 시무룩합니다.

  저녁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이레만에 얼굴을 봅니다.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큰아버지를 잊습니다. 밤에 택시를 불러 일산으로 갑니다. 택시에서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안고 업으며 이모네 집에 가니, 깊이 잠들던 아이들이 이모와 이모부 목소리에 살몃 눈을 뜨더니 얼굴에 웃음빛이 흐릅니다. 녀석들, 좋니? 즐겁니?


.. 바람의 축축한 혀가 /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 슬며시 눈을 뜯고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  (젖은 혀, 마른 혀)


  아이들 이모와 이모부는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섭니다. 두 분 모두 회사에 가서 일을 합니다. 아이들은 ‘빨리 와.’, ‘얼른 와.’ 하고 인사합니다.

  이부자리를 갭니다. 커텐을 걷고 창문을 여니 바깥에서 소리가 흘러듭니다. 어떤 소리가 이곳으로 스며드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 건물에서 뭔가 복닥이는 소리, 웃집이나 아랫집에서 물을 쓰는 소리,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들이 골고루 들어옵니다.

  삼월이 무르익는 일산인데, 멧새나 들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없습니다. 개구리가 깨어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풀벌레가 고개를 내미는 소리는 없습니다. 나비가 춤을 추거나 벌이 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봄바람 따라 봄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들꽃이 봄맞이를 하는 노래는 없습니다. 천천히 터지는 꽃망울이나 잎망울 속삭임은 없습니다.

  이 도시에는 어떤 소리가 있을까요. 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노래를 나눌까요.


.. 고양이가 운다 / 자기 울음에 스스로 반한 듯 / 부드럽게 / 고양이가 길게 울어서 / 고양이처럼 밤은 / 부드럽고 까실까실한 혀로 / 고양이를 핥고 / 그래서 고양이가 또 운다 ..  (밤과 고양이)


  황인숙 님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2003)을 읽습니다. 황인숙 님이 누린 나들이를 떠올립니다. 황인숙 님이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들으며 살결로 느낀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황인숙 님이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맞이한 삶은 어떤 빛인가 곱씹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춤을 추는 하루를 누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 눈을 감고 담쟁이는 / 한껏 사지를 뻗고 담쟁이는 / 온몸으로 모든 걸 음미한다 / 달콤함, 부드러움, 축축함, 서늘함, / 살랑걸림, 쓸쓸함, 따분함, 고요함, / 따사로움, 메마름, 간지러움, 즐거움 ..  (담쟁이)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와 함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걸레질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삶에 노래는 어느 만큼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노래가 어떤 빛깔과 무늬로 드리울까요. 우리 삶에서 노래는 얼마나 곱게 빛날까요.

  서울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꽃노래를 부르며 나들이를 즐길 수 있기를 빕니다. 회사원으로 지내든 집에서 살림을 가꾸든 다 함께 꽃춤을 추면서 웃을 수 있기를 빕니다. 시 한 줄은 한 발자국입니다. 시 두 줄은 두 발자국입니다. 시 석 줄은 세 발자국입니다. 천천히 거닐듯이 천천히 시를 씁니다. 즐겁게 걷듯이 즐겁게 시를 씁니다. 바쁜 사람은 바쁜 시를 쓰고, 아픈 사람은 아픈 시를 씁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시를 씁니다.

  서울 낮하늘도 파랗고, 서울 밤하늘도 까맣습니다. 서울 하늘에도 구름이 흐르고, 서울 보도블럭 틈바구니마다 갖가지 봄풀이 돋으며 푸른 숨결 나누어 줍니다. 4347.3.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이달의 사락 h*******e 2014.03.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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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시인이 세상을 보는 담담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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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서 황인숙 작가의 나이가 읽혀진다. 40대 중년을 지나고 있으며, 중년의 눈길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체념한 것도 아닌 무덤덤하다는 생각이다.    <자명한 산책> 시를 읽으니 좋다. 보도블록위의 금빛 낙옆을 퍽퍽 차고 걸어가거나, 아니면 안심하고 사뿐하게 밟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낙옆 밑에 함정이 있는 것
"중년 시인이 세상을 보는 담담한 시선" 내용보기

 이 시집에서 황인숙 작가의 나이가 읽혀진다. 40대 중년을 지나고 있으며, 중년의 눈길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체념한 것도 아닌 무덤덤하다는 생각이다.

 

 <자명한 산책> 시를 읽으니 좋다. 보도블록위의 금빛 낙옆을 퍽퍽 차고 걸어가거나, 아니면 안심하고 사뿐하게 밟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낙옆 밑에 함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도블록인 것이 명확하지 않는다.

 

 거리에 대한 시들이 주위를 끄는데 <工作所 거리> 칠성동 철물 거리를 지나는 나의 학창 시절이 떠 오른다.

 

 나이를 느낄 수 있는 시에서 <그날>에 대해서 죽음에 대한 담담한 시각을 느낄 수가 있고, <관광>에서 은퇴한 노인의 과거를 생각하며 마음이 풍요한 풍경을 담아낸 것 같고, <방금 젊지 않는 이에게>에서 청춘의 아쉬움 같은 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가장 좋았던 시는 아래와 같다.

 

 

 

 해방촌, 나의 언덕길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툇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급, 경사길.

z******g 2011.02.2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