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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매체에 글을 발표해왔습니다. 누리망 매체의 경우라고 해도 최근 것은 검색에서 확인되지만, 오래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면에 발표된 것은 찾아보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최근에 여기저기 발표한 글들을 모아 정리하고 있습니다.
로맹 가리의 단편소설집 <마지막 숨결>은 1935년부터 1967년 사이에 다양한 잡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살아지고 없는 잡지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묻혀 잊혀져가는 작품들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든 작품집인 셈입니다. 여기 실린 일곱 작품들은 다양한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폭풍우’가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의 섬, ‘마지막 숨결’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문지리’의 경우는 영국 중심부의 C에 모인 비행사들이 아프리카의 차드에서 가봉, 아비시니아, 리비아, 에리트레아, 하르툼, 키레나이카 등지에서 벌인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십년 후,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베를린 폭격에 나섰던 프랑스 로렌 비행연대의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냐마 중사’는 아프리카 차드, ‘사랑스러운 여인’은 중부 베트남,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의 어느 섬이 무대입니다.
무대는 다양하지만 인격 분열, 도피, 자살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음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습니다. 작품들을 읽어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마무리에 당황하게 됩니다. ‘폭풍우’에서는 예정된 일은 피하려 해도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지키려다 오히려 잃고 마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마지막 숨결’과 ‘그리스 사람’은 발표되지 않은 미완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그리스 사람들’에서는 그리스와 그리스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그리스 정교 교회가 삼백 개도 넘는다’는 대목에서는 산토리니의 해넘이를 떠올렸습니다. “해가 질 때, 이곳의 바다는 짙은 보랏빛이 되었다가 그 후에 선명한 적색으로 변한다. 그 모든 배들은 서로 바짝 다가서서 뱃머리들끼리 가볍게 입을 맞춘다. (…) 아시아에서 발생한, 보라색 날개를 단 폭풍우가 몰려와 하늘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 폭풍우는 하늘에서 길을 잃은 듯한 천둥 번개를 땅애 내리친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양이 빨갛게 농익은 토마토처럼 물컹물컹해지면서 자신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해 몸을 질질 끌며 사라진다.(173쪽)” 해무가 살짝 내려 기대했던 해넘이의 장관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제가 본 해넘이 풍경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카이크’라고 불리는 고기잡이배들이 마치 꿀을 모으는 붉은 나비들처럼 석양 속으로 모여든다.”라는 표현은 그날 해넘이를 보기 위하여 유람선이 모여들던 풍경을 닮았습니다.
이런 대목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에게 해와 하늘은 물결과 창공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서로 뒤섞이는 여과된 빛과 안개의 효과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고전주의가 윤곽의 명학성과 분명함을 이미하는 것이라면, 그건 고전적인 바다였다. 물결들은 거의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수평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직선이 아니라 파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215쪽)”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지중해는 하늘과 바다를 나누는 수평선이 분명치 않았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을 살해해달라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한다는 ‘마지막 숨결’에 나오는,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그 여자가 아주 아름답고 지성적이고 완벽했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과장은 과거를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64쪽)”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앞 문장에는 동의하나 뒷 문장에는 크게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경험을 비추어보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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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로 끝난 독서 모임조차도 독서 모임은 유익하다. 결과적으로 내가 로맹 가리와 그의 단편집을 알게 됐으니. 애초에 로맹 가리 문학을 좋아한 회원이 추천한 작품인데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토론이 무산돼 아쉬움이 남는다.
로맹 가리의 미발표 단편을 모은 이 책은 내게 매력 있고 흡인력 있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왜 그에게 상을 주고 애착을 갖는지 이 단편집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곳곳에 숨어 있는 통찰력 있는 문장들과 인물과 자연에 대한 살아있는 듯한 묘사, 그리고 반전을 시도하는 결말부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단 하나, 여자들이 문제다. 남자들에게 말이다.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조차 여자들이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물음표를 찍었다고 한다. 만일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나는 다른 의미의 물음표를 영원히 내 인생에 찍으면서 살았을 거다. 왜 남성 작가의 작품에는 창녀들이 많이 나올까? 학창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부터 성스러운 창녀 소냐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었다.
로맹 가리의 소설뿐 아니라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예외 없이 창녀거나 창녀 같은 여자들이 많이 나온다. 여성 독자로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거기에 있다. 기껏 등장한 유일한 여성 인물에게 동일시는커녕 거부감이 드니 말이다. 아니, 남성 작가가 의식하는 독자의 범주에 여성은 처음부터 포함되지 않은 걸까. 마치 참정권이 주어지기 전 시대의 여성과 노예의 머릿수는 있어도 없는 걸로 친 것처럼. 아직도 다수의 남성작가들의 머릿속엔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 인격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그가 그려내는 등장 인물로 나타난다. 남성 작가가 그리는 여성 인물은 그의 여성관을 구현한다. 청년 로맹 가리가 쓴 <폭풍우>에는 성적 갈망으로 무너진 의사의 아내가 등장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이 어떻게 정보로부터 소외되고 자기 욕망에 희생되는지 섬뜩하게 그려져 있다. <사랑스러운 여인>의 주인공 사랑스러운 여인은 귀여운 여인으로 뭇남성들의 칭송을 받다가 어리석은 여인으로 강등되더니 비극의 여인으로 끝난다. 두 작품에서 그려진 여성은 창녀는 아니라는 점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보고 싶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각각 욕망의 절제력과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파멸을 자초한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자 미완성 작품이기도 한 <마지막 숨결>에는 자살을 준비하는 나이든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남자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여성은 먼 곳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벌써 이십 년째 치료가 불가능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그의 친구이자 전직 매춘부였던 사랑교의 사이비 교주를 설득해 살인청부업자를 소개받은 그가 자기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대비하는 순간 나이 어린 창녀가 찾아와 위기를 넘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은 멀리 있고 일회적인 가벼운 사랑은 원하지 않아도 가까이에 있는 남성 세계의 이중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자신의 자살을 타살로 위장하려는 그의 이중적인 의식과 닮았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에서 펼쳐지는 <그리스 사람>으로 가면 <마지막 숨결>에 나오는 사랑교의 사이비 교주와 비슷하게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부인이 나온다. "자신을 고대 그리스의 '사랑의 여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자기들끼리 아주 복잡하게 얽힌 혈연관계를 만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한 적이 없는 (그리스) 신들"보다 나은지 모른다. 작은 섬의 외로운 남자들을 품에 안고 '미국식 등심 스테이크를 떠올리면서 침을 흘리'게라도 해주니 말이다.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섬으로 몰래 헤엄쳐 가서 정치범 수용소의 사진을 몇 장 찍어오는 것'으로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빌리를 돕는 여자는 이들 작품 속에 나오는 여성들 중 가장 현실적이다.
'그녀는 부츠 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 순간 그는 권총을 보았다. 커다란 권총이었다. 그는 새삼 그 여자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자기 옆에 있던 여자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던 남자가 비로소 그녀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부디 그것이 그의 여성관에 대한 새로운 시작이길 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소설을 읽다 보면 남성 작가가 그린 여성 인물들의 모습에서 기이함을 느끼곤 한다. 현실 속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창녀들이 자주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아마도 남성 작가의 환상과 꿈을 그린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서늘한 돌바닥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감미롭고 포근한 꿈을 꾸었다. 여자들이 자기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누르는 이상야릇하고 관능적인 꿈이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 역시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다. ...'
남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빌리의 외로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걸까. 답답하고 부정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성적 판타지 속에서 일시적인 위로를 삼을 수 있을망정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현실 속의 여성을 판타지 속에 가두고 동일시하려는 데서 이제 꿈을 깬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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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미워할 수 없는 작가, 로맹 가리! 문학을 읽고 싶다면 로맹 가리부터 읽으라고 했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로맹 가리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숨결’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작가 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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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를 매우 사랑한다. 그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고 그냥 좋다. 여태까지 봤던 글들과 이 단편집은 조금 다른 느낌이 있었다. 로맹 가리의 글이지만 이상하게 읽는 내내 독특한 기분이었다.
이 사람의 글을 접한 건 앞서 글을 썼던 「자기앞의 생」처럼 매우 담담한 어조의 화자가 글을 이어간다. 시점은 단편마다 다른데 미발표작들도 몇 개 있어서 표현이 어색하거나 내용이 뒤죽박죽인 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로맹 가리의 느낌을 맘껏 받을 수 있었고 그가 자살하기 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지 알게되었다.
나는 장편 소설은 매우 흡입력있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잘 읽는 편이다. 하지만 단편은 글 자체가 나뉘어있기도 하고 읽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되어 끝까지 읽지 못하고 오래 끄는 경우가 많은데, 마지막 숨결을 셜록 홈즈 단편선 이후로 꽤나 이른 시간에 금새 다 읽었다.
처음 ‘폭풍우’부터 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로맹 가리의 글은 대부분 이유없이 마음이 묵직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많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읽고 나서 씁쓸한 기분이 든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로맹 가리의 대부분의 책에 있는 책 날개의 작가 소개와 로맹가리의 사진을 보고 나면 미묘한 기분이 든다. 이 꼿꼿해 보이는(?) 아저씨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왜 이렇게 생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써놓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인가 등의 생각을 하다가 또 그런 기분으로 다시 글을 읽어보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엔 「나는 페루에 가서 죽다」와 「그로칼랭」을 읽을 생각이다. 항상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로맹 가리의 책, 다음 책은 어떤 기분을 들게 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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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가벼운 소설을 읽다 보면 무겁더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장을 한참 바라보다 이 책을 충동적으로 꺼내 들었다. 로맹 가리란 작가의 작품과 그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는 데서 오는 의아함 때문이었다.『자기 앞의 생』은 정말 흡인력이 있었음에도 읽다가 덮어 버렸다. 소설 주인공이 처한 환경이 암울해서였다. 그런 뒤에『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책장에 들여놨음에도 그 두 권의 작품이 아닌 이 책을 꺼내든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두 작품보다 그나마 덜 들어본 작품이었고 미발표 유작이 있어서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미발표 유작에 끌린다는 사실이 조금 부조화스럽긴 말이다.
첫 단편「폭풍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게 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하면서도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마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접한다는 우쭐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단편집이 주는 블랙홀에 금세 빠져 버렸다. 단편집은 장편이 주는 긴 느낌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여러 이야기를 만나다 보면 이야기를 모두 떠올리기도 힘들고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특성도 들춰내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푹 빠져 드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작가를 처음 대면하는데 그 작품이 단편집이라면 다음 작품을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상당한 고민이 든다. 더군다나 어찌어찌하여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느낌을 남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애로사항 중의 하나다.
이 단편집을 읽었지만, 첫 단편집을 읽고 단박에 마음에 들어 다음 이야기까지 읽어나갔지만 단편집이 주는 다양함의 늪에 빠져버렸다. 순문학의 광활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를 읽어나가고 있지만 시간에 점령당한 듯한 느낌에 젖어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지나치게 많은 단어들이 쏟아지곤 한다. 형용사가 빗발치고 부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다. 그건 로맹 가리가 지닌 매력의 일부이다.’ 라는 서문의 말에 공감하듯이(미처 형용사와 부사를 구분 짓지 못하고 뭔가 집중이 안 된다고만 느꼈을지라도!), 로맹 가리의 매력에 빠지기 전에 표현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문학이라는 영역 내에서 로맹 가리는 일종의 사륜구동 자동차와도 같았다. 그는 온갖 장르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소설, 자서전, 대담, 드골에서 바치는 송시, 두 차례의 콩쿠르 상, 영화 시나리오, 한 번의 속임수와 여려 개의 필명을 남겼다. (서문 중에서)
이 표현이 딱 맞다 싶을 정도로 단편집임에도 온갖 이야기를 누비는 느낌이었다. 두 편의 단편이 완성된 단편소설이 아니라 미완 소설의 초고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때론 섬세하게 때론 거칠고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에 혼미해진 게 사실이다. 전쟁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다가 십 년 뒤 전쟁이 끝난 뒤를 상상해서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 헷갈리고 의문을 가졌던 이야기(「십 년 후,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냐마 중사’란 인물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냐마 중사」, 그리고 무엇보다 결말이 궁금해 미완성 소설이라는 게 너무 아쉬웠던「그리스 사람」까지 이야기 속을 헤매고 다녔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이 단편집과 만나면서 로맹 가리의 작품을 드디어 읽었다는 후련함도 있었지만 숙제가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내 책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대표작을 만나는 일. 그 두 작품을 만난 뒤 이 작품을 읽었다면 조금 더 이해하면서 친근하게 읽었을지 모르나 저자의 독특한 매력이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그 독특한 매력에 빠지느냐 한발 물러서느냐는 앞으로 만날 작품 속에 달린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