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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누이의 책꽂이에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처음 만났다. 그 시절의 기억이 뭐 그렇게 남아있겠냐마는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이고, 독일이 그 당시엔 선망의 국가인지라 유학에 대한 동경과 자신에 대한 갈망 등이 어린 감수성에 와닿았었다. 고교시절 연애편지 쓸 때... 음~ 이런 시절이 있었지... 일기와 편지모음인 또 한권의 책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뒤적거린 기억도 떠오른다. 이 책들은 아직도 고향집 서재에 바스라질듯한 낡은 지질로 변한 채 꽂혀있다.
'그 여자 전혜린'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조로 짜여있다. 실존의 대상인 현실의 전혜린과 그녀가 책 속에서 쓰는 소설의 주인공 '주영채'가 과거와 의식 속의 전혜린으로 나투어진다. 현실화 된 실제 전혜린의 삶을 그리면서 그녀의 정신적 밑바탕은 주영채를 통해서 가늠해보는 얼개이다. 정도상 작가는 잘 모르는 분이지만 팩트를 바탕으로 소설화 하는 글솜씨는 아주 매끄럽고 전혜린이란 인물의 가치관과 내면세계로 독자의 접근을 잘 이끌어 들이고 있다.
사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전혜린은 불안정한 삶과 사고를 가진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교수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전혜린의 신화는 재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60년대의 한국이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달라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반봉건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서울대 법대를 거쳐 독일에서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으나, 그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스러져간 시대의 지식인이었기에 평가의 잣대가 달라야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정신을 관통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나 '데미안'의 사상은 동시대 한국의 지성과는 괴리가 컸고, 그 실천 선상에 전혜린이 존재하였기에 불꽃같은 짧고 화려한 삶이라고 조명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전혜린과 어른이 된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전혜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에 있다. 무엇보다 정말 그녀가 후회없이 산것인지 의문이 인다. 루이제 린저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삶의 본질적인 모순과 갈등은 직접 생을 통해 보듬고 드러냄으로써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데미안 역시 알이란 굴레를 깨트리고 나와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자아완성의 정신이 기반이다. 그녀가 7살의 딸을 두고 자살로 마감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출생적 한계와 사상적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비운의 주인공일지언정 화려한 또는 완전한 자유의지, 자아 완성과는 다른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전혜린은 '기성질서에 도전하는 비범한 정신과 날카로운 지성'으로 평가 받는다. 귀국 후 그녀가 번역한 많은 작품들이 독자들의 문학적, 철학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자주 말한 단어는 '권태와 광기'였다고 한다. 좋게 말하는 분들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노마디즘(nomadism)이 그녀의 정신적 바탕이라고 한다. '먼곳에의 그리움'이란 그녀의 글을 보면 이런 귀절이 있다.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녀의 저서나 일기,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짙은 고독과 치열함은 '생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기탐닉의 과정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니체의 불꽃같은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펼쳐내기엔 시대의 흐름과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였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의지가 전통에 얽매일 때 남는 것은 공허함 일것이다. 그 공허함을 어떻게 이겨내고 족적을 남길것인가가 진정한 인텔리겐챠의 숙명이라고 느껴왔는데, 그녀는 자의식의 굴레에 갇혀 허우적 거리다가 결국 자신의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소설 '그 여자 전혜린'으로 돌아와 생각해 본다. 대학시절의 스무살 영채가 사랑할뻔한 백창우(나중에 스님 비슷하게 된다)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행하게도 그대는 관념적으로는 고통을 받고 있으나 밥 한 끼 제대로 굶어 보지 못했습니다."(41쪽)며 일침을 가한다. 몸으로 부딪혀 체득하지 않은 이들이 종국적으로 가지게 되는 아름다움 뒤의 헛된 슬픔이 복선과 암시처럼 깔릴 때 나는 그녀가 즐겨들었다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듣고 다시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 교향곡 혁명 CD를 찾고 있다. 혁명처럼 자신의 영혼 속에서 꿈틀거리는 불꽃을 태우고 싶어하는 자유에 대한 갈증을, 인식에 대한 목마름을, 진정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쇼스타코비치의 퍼득이는 선율에서 건져올리고 있다. 뮌헨 슈바빙의 자유에 동참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영혼과 육체는 탄호이저 서곡의 장엄함에 아늑해지지만, 그 아늑함이 만든 심연의 공간은 그녀에게 무서운 공포로 다가와 광기의 움(萌芽)이 되기도 한다.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진정한 천재가 되지못한 자신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바보처럼 자신의 세계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고, 모든 불가능의 벽을 억척스럽게 넘고, 자유로운 상상과 심연보다 깊은 사색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222쪽) 그런 천재가 되지못하고 한갖 에고이스트에 머물고 만 자신에서 구원받고 싶어했다. 그러하였기에 영채가 문철에게, 혜린이 장에게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싶은거였다. 진정한 사랑에서 소외된 인간에겐 고통이 찾아오고 허탈함이 새로운 상처가 된다(237쪽). 깊고깊은 나락은 그녀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게 한다.
나는 흰 새벽 속으로, 내 마음을 사랑과 고뇌로부터 순화할 영원한 기쁜 죽음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모든 정다운 것을, 무거운 짐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치 쇠줄을 버리듯 나는 어깨를 추키며 지나간 것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고 생 앞에―죽음 앞에―놓여있는 하얀 신작로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325쪽)
탄호이저 서곡은 영혼의 승리로 울려퍼지고 다시 고요해지는데, 그녀는 저 하늘에서 아직도 이 곡을 듣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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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은 명동의 돌체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들을 때에도, 술집 은성에서 술을 먹을 때에도 항상 혼자였다. 장 아제베도와 같은 이상형의 남자, 영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빛을 차단하며 존재에 앍고 있던 혜린은 소설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혜린은 숱한 삶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삶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여주인공을 생각했고 그녀의 이름은 ‘주영채’로 지었다. 그리고 ‘동숭동의 서울대학교에는 상처 입은 마로니에만 울창했다’라고 첫 문장을 썼다. 이렇게 혜린의 소설은 시작된다. 천재라 불리며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영채는 정작 법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는 사람 냄새가 나는 문리대를 좋아했고 어느 날 문리대에서 백창우를 만난다. 백창우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고, 그 여파로 누나는 양공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물세살의 백창우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고 고통은 백창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가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술밖에 없었다. 영채는 백창우을 만날 때마다 그의 어깨위에 슬픔이 눈처럼 쌓이는 것을 보았다. 영채는 창우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이해는 사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영채에게는 아버지의 남자 오은수가 있었다. 그는 영채의 서울대 법대 선배였고 공부밖에는 모르지만 반듯한 남자였다. 영채의 삶에 가장 커다란 벽은 아버지였다. 영채의 삶은 언제나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을 한 것도 오은수와 결혼을 하는 것도 다 아버지의 의지였다. 영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었다. 영채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한다. 그 삶은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것이다. 영채는 유학생활에서 자신과는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잔느를 만난다. 잔느는 자신이 흑인임에도 백인의 정신과 관념으로 사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고, 영채는 그런 잔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잔느를 한편으로 부러워한다. 혜린은 자신의 핏속에 집시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어느 날 운명처럼 영채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강문철이다. 그의 등 뒤에는 언제나 쓸쓸한 우수가 안개비처럼 내리고 있었고, 이 우수에 젖은 남자에게 영채의 마음은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영채는 밤마다 문철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문철과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한다. 이때부터 영채의 마음은 문철과의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영채에게는 이미 약혼자 오은수가 있었다. 그는 법적으로 이미 영채의 남편이었다. 이때부터 영채와 오은수 강문철과 잔느 네 사람의 물과 불처럼 섞일 수 없는 사랑의 갈등이 시작된다. 강문철과 잔느는 영채 앞에서 보란 듯이 연인처럼 어울려 다녔고, 영채는 오은수와의 갈등과 강문철에 대한 질투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이 빠진 부부생활도 의미가 없었고 남편보다 먼저 사랑한 남자 문철은 이제 영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나는 먹지도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문철의 우수에 찬 눈동자였다. 그것이 나를 못견디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나는 광기에 휩싸였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옷을 찢었고 번역 원고 몇 장을 불태웠다.” (224쪽 인용)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오직 사랑이라는 이 명제만이 영채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문철도 영채를 사랑하지만 문철에게는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삶의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문철과 잔느가 가까워진 것도 그들의 영혼이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채는 남편과 육체관계는 갖지만 영혼의 교감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다. 영채는 사람들과 영혼의 관계를 꿈꿔 왔지만 어느 누구도 영채의 영혼과 교감할 수 는 없었다. 그 이유는 영채의 자기애 때문이었다. 영채는 사람이 그리웠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자신이 그렇게 경멸하던 남편조차도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 외로움과 괴로움을 안고 영채는 서울로 왔고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 다음해 봄. 영채는 운명처럼 문리대에서 문철을 만난다. 영채는 지금은 문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자신에게 말했지만 그의 검은 외투가 눈앞에 어른거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어느 날 문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근거리며 전화를 받은 영채는 문철과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그리고 잔느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조국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잔느는 프랑스군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갈기갈기 찢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문철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문철도 5.16 군사 정권에 항거하다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 절실한 영채의 물음에 문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떠났다. 문철에 대한 사랑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채의 필사적인 몸짓이었고 끝까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영채의 한계는 소설 밖의 혜린을 자살로 이끌어간다
‘그 여자 전혜린’은 액자형식으로 구성된 소설로 실제의 전혜린을 대상으로 한 '혜린'과 그가 쓰는 소설 주인공인 '영채'가 전혜린의 분신으로 등장을 한다. 그러나 ‘그 여자 전혜린’속에는 절대로 평범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 혜린의 모습보다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평범한 여자 혜린을 볼 수 있다. 평범한 여자에게서 광기와 열정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혜린의 사랑에 감동이 없는 것은 그녀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가? 육체관계는 가지면서도 영혼의 교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밤마다 남편이 육체를 요구하면 애정이 없으면서도 아내의 의무라 생각하고 몸을 열었다. 육체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언제나 강간당하는 기분이었고 끝나면 자기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232쪽 인용) “나는 그를 애무했고 열심히 그의 육체와 교합하려고 노력했다. 거기에는 영혼이라든가 인식이라던가 혹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까지도 존재할 틈이 없었다. 오직 사랑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목석처럼 누워 있다가 가만히 나를 뿌리쳤다. (171쪽 인용) 남편의 육체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문철의 육체는 받아들일 수 있는 영채가 과연 육체적인 것들을 멸시할 수 있을까?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혜린이 정말 그랬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은 그만큼 내가 전혜린의 정신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린은 사랑에도 실패했지만 창우, 문철, 잔느가 가지고 있었던 부조리한 삶에 대한 저항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광기와 열정이 있었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방관자였다. 아픔과 상실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던 창우나 문철은 나름대로 그 시대에 저항을 했지만 영채는 철저히 외면을 했다. ‘교정에는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대학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대학교수인 혜린은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248쪽 인용) 문철과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철은 자신의 아버지가 고등계 형사였다가 경찰청장을 하고 있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고 그 아버지 세대와 싸우고 싶었다. 이것이 문철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러나 영채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법관을 하며 한 시대를 부러움 속에 살아왔지만 그 아버지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채는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 개인의 인식문제만 투철했었다. 이 사고 때문에 문철은 영채를 철저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문철은 아버지와 싸우지만 영채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영채는 사랑이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랐지만 문철은 사회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영채는 자신을 회의할 줄은 알았지만 사회의 현실을 회의하고 그 현실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인식에 대한 과도한 열정, 사회의 도덕이나 인습을 비웃고 자유를 갈망했던 전혜린의 모습을 ‘그 여자 전혜린’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결국 소설 밖의 혜린이 자살을 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끝나버린 사랑이 주는 삶의 아픔과 고통은 영채만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일 것이다. 문철을 잃은 영채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 ‘실컷 살지 못했어. 생을 사랑해’가 공허하게 들려오는 이유는 그녀의 절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과 문학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젊음을 살았고, 시대의 도덕이나 인습을 앞서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전혜린. 그러나 그녀에게 더 소중한 것은 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그 사랑만 있었다면 그녀의 삶도 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Sollen’ 평범한 삶을 거부했던 전혜린의 모습은 우리 젊음의 한 때에 무교동의 막걸리집에서, 명동의 생맥주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평범을 뛰어넘는 삶의 열정을 말했던 전혜린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투철한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동적인 삶을 살았고 한 남자의 아내로도 행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는 그 시대의 관습으로는 용납될 수가 없었다. 비록 소설 속에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혜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다시 그 여자 전혜린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가을이 주는 쓸쓸함과 일치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뒤표지에 내가 쓴 글 ‘술에 취해 거리를 헤맬 때, 사는 것이 영 자신 없고 모든 것들이 낯설 때 왜 전혜린의 글들이 편린처럼 떠올랐을까?.......이 무거운 현실에서 하나의 위로가 있다면 전헤린이다.’를 통해 내 젊음의 한 때를 떠 올리는 것도 잔잔한 즐거움이다. 누군들 젊음이 혼돈스럽지 않았을까 그 혼돈스러운 젊음에 전혜린은 답을 주었고 그 답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혜린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을은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이지만 ‘삶을 사랑한다’는 영채의 말은 떨어지지 말고 꼭 뇌리 속에 기억을 해야 한다. 아직도 삶은 진행중이고 그 삶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삶을 사랑해야하고, 삶은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가을에 광기와 열정의 이름으로 다가온 ‘그 여자 전혜린’이 나에게 열정이란 선물을 준다면 얼마나 삶은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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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가 새 단장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한참 전에 들었지만 이래저래 가보지 못하다 며칠 전에야 큰맘먹고 갔었지요. 으리짱짱 조명과 규모에 정신팔려 정작 책은 많이 못 보고 돌아가려던 참에 <그 여자 전혜린> 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혜린과 꼭 어울리는 허한 느낌의 표지~ 그자리에서 한 오십여쪽을 보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결국 사고야 말았지요. 10% 할인의 유혹 때문에 웬만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사는데^^; 저같이 30대 후반의 독자들에겐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노래> 등의 정도상 선생과 신화가 된 전혜린의 만남만으로도 한번쯤 눈이 갈 책인 것 같습니다. 가을의 문턱, 나의 장 아제베도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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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전혜린 그리고, 주영채 그 여자들은 단지 시대를 잘못 만난 죄 밖에는 없었다. 그 죄마저도 본인의 의지대로 아닌 원죄의 주범은 따로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만 태어 났어도 그 나이에 그렇게 떠나야 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렇다면 힘든 길을 그렇게 굽이 굽이 돌아 다녀도 되지 않았을 것을 너무 안타깝다.
자유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현실에 굴복되기도 한다. 그 여자는 그럴 수없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다. 늘 갈증을 느끼고 그 갈증을 해소해 줄 만한 환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백창우 그는 정말 이름처럼 백창우 같다. 그와 결혼 했다고 해도 그닥 달라 지지 않았을 것 같고, 멋없는 강문철과 결혼해도 많이 달라 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여자의 남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희생양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사람의 평균연령의 절반도 안되는 삶을 살다간 그 여자는 그 절반을 다른 이들 보다 압축해서 살았다고 보아 진다. 그 시대에 흔하지 않는 유학을 다녀온 것도 그것도 독일이라는 멀고도 생소한 곳에서의 잔느나 강문철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남편 오은수 억지스럽게 밀어 붙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운명의 바퀴가 자꾸 어긋나며 원하지 않는 삶들을 살게 되고 돌아온 고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삶을 더 혼돈에 쌓이게 하며,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사랑의 씨앗을 고이 키워갈 용기와 환경 모든것이 어것나 버린 그 여자의 삶을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의 길이가 짧다고 그 삶이 적게 살다 간 것 같지 않다 짧기는 했지만 다른 어떤 이들의 삶보다 힘들고 벅찬 삶을 살고 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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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내 영혼을 뒤흔들던 이름 전혜린. 존재의 아픔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했고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불태울 줄 알았던 사람. 전혜린을 읽지 않고 20대를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전혜린을 모르고 어떻게 청춘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죽음으로 신화가 된 전혜린을 소설로 풀어낸다. 소설 속 전혜린은 자신의 분신같은 주인공을 내세워 소설을 쓴다. 현실에서 미처 피워내지 못한 그녀의 욕망과 꿈을 소설을 통해 실현한다. 치열하고 아름답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삶...
전혜린을 사랑하는 이, 전혜린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하는 이 모두 읽으면 좋을 책이다. 저자의 전혜린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집착이 느껴졌다. 2010년, 다시 전혜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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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잔뜩 책을 질러넣고도 마음이 허전한지 오프라인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질러본 서적 한권.
그 여자 전혜린.
어떤 여성이기에 그 여자라는 지칭 속에 이름을 내걸고 활자가 되어 나온 이야기인지 그냥 가을의 분위기에 떠밀려 묘한 호기심에 읽어보게 된 책이었다.
전혜린이란 이름이 내게는 낯설었지만 이 여자. 제법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일제시대 중반 부유한 관리의 맏딸로 태어나,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는 화려한 이력.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탄스러울 만큼 예리한 두뇌. 1955년 가을, 전혜린은 법학을 그만두고 문학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을 떠났고, 귀국한 전혜린은 여자로서는 힘들었던 또한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서울대학에 출강.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격찬을 들으며,,,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그녀는 세상과 이별한다. 그녀의 약력은 길지 못하다. 짧게 살은 생애만큼 압축이 쉽다. 그런데 정말 호기심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서 가질 수 있던 부와 지식.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삶. 사람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그녀의 약력을 지배한다.
소설 전혜린은 정말 그런 그녀의 삶을 소설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가 왜 짧은 생애를 지니고 갔는지 그 안에서 무얼 보고 무얼 느꼈고 무얼 갈망했는지 저자는 생전 전혜린이 꼭 완성하고 싶어 했다는 '소설'과 전혜린의 삶이란 또다른 소설을 교차 서술 해가며 이야기한다.
만약 내가 전혜린이란 인물을 먼저 알고 이 소설을 봤다면 그것은 궁금증에 대한 미약한 해소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먼저 읽고 난 후의 기분은 그녀가 남긴 글을 통해 또다른 나만의 추측을 해보고 싶다는 점이다. 조금씩 그녀의 글을 탐구해봐야겠다.
나는 이 책을 가을 인문대 빈 강의실 안에서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앉은 대학이란 공간의 저 아래 역사를 이야기한다. 전혜린의 생애또한 충분히 눈길을 끄는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생각을 담아내려 애쓴 이 글 안에서 나는 또다른 시대에 나와 같은 나이를 걷던 한 여성과 시대를 보았다. 그 기분은 마치 타임머신이라는게 있다면 느낄 수 있는 기분이랄까.
낙엽마냥 가을은 우중충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고 이 책은 그런 가을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에 대한 또다른 생각의 공간을 남겨주었다.
요즘은 책읽는게 다 그런 느낌이다. 불안 불안한 20대라 그런건지..
(학생운동의 시기?! 그 시대의 글만 읽고 나면 더 그런듯..)
추천 : 가을의 느낌에 흠뻑젖어 천재라는 타이틀이 걸린 한 여성의 생애를 들여 보고 싶다면.
비추천 : 이래나 저래나 학생운동기 시절은 싫어 ! 혹은 다 가진 여자의 그런 우울함은 보고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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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리만치 혼란스러웠다. 전혜린, 그녀와 나 사이에는 7년이라는 암흑과도 같은 굶주린 세월이 죽어있었다. 매번 삶의 극단까지 내몰릴때마다 그녀의 이름을 수 십, 수 백번도 더 되뇌이며 약에 취해 술에 취해 그녀의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를 소리내어 읊조렸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내가 딛고 있는 이 지반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 되었으며 청춘 그 자체의 근본, 내 삶의 근원이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말고는 내 아픔의 통념들을 이해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치게 나를 비약시키는 것에 일조했음이다. 불투명했던 청춘을 단연코, 전혜린화 시켜 존재의 상실감과 생의 파국만을 향해 내달렸음은 물론, 수 없이 많은 밤을 불면증으로 지새우며 쉼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과연 그것이 이대로도 괜찮은가.' 그리고 '나는 왜 사는가.'. 끊이없는 이어지는 정답없는 질문들, 그것은 아프게 낙화하는 낙엽만큼이나 스산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문득, 리뷰를 끄적이다 다시 술에 취해 전혜린의 에세이인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꺼내들고는 아무곳이나 펼쳐 들었다. 지독히도 싫어했던 책에 대한 아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는 무던히도 급했는지 눈이 시린 형광색이 난무하다 못해 손목을 긋는데에 일조했던 샤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세상에, 너무도 우스워 집었던 책을 던져버렸다. 얼마나 많은 청춘의 흔적들인가, 싶었던거다. 또한 얼마나 숱한 아픔들이 서려있는지 시퍼런 멍자욱들이 가득했다. 내가 다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지금 손에 쥔 정도상의 「그 여자 전혜린」을 곧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까, 아니었다. 두 번은 전혜린을 끌어안아서도 살아있는 문장으로도 만나서도 안되었다. 단연, 기억함. 그에 그쳤어야했다. 적어도 나에겐 요절한 그 여자 전혜린은 1세기에 단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천재, 완벽한 소설 하나 남기고자 했던 집념의 여자, 그렇게 남아있음이 옳은것이었다. 전혜린, 이름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울리는데 어떻게 그녀의 삶에 다시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데도 힘겨워 금새 온 몸에 전율이 일었지만 문득 잊고 있던 것 .. . 이건 그저 허구일뿐이라는, 진정 그녀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 정성스레 읽던 책을 도중에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작가의 말을 먼저 읽어버릴까, 생각하다가 소설의 허구성을 전제로했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버리면 그냥 거기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게 되버릴까하는 초조함에 내키지않는 마음으로 기어코 그녀의 죽음을 마주하고는 염려 가득한 작가의 말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치밀었다. 그래, 작가가 소설로 끌어낸 전혜린은 전혜린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녀는 결코 쉼 없이 좌절하지도 않았으며 실패한 사랑에 전부를 내던지지도 않았으며 구원 받지 못한 생에 미련을 두지도 아니했다. 보다 더 치열했으며 보다 더 훌륭했고 이성이 아닌 정신적인 멘토임이 분명했다. 비록, 요절로 인해 시대의 초상으로 잊혀지지않을 청춘의 전설로 남겨지겠지만 시대가 흐르고 무심히 지나가도, 이 여자 전혜린은 결코 잊어서도 안되는 모든 청춘의 '첫' 걸음이 되어주기를 그리하여 생에 대한 열렬한 열정으로 뿌리 내려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줄도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이건 전혜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제목에 걸린 전혜린이라는 이 이름만 아니었다면 난 결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것이다. 오로지 그녀의 이름, 그 이름을 따라 책을 들었을 뿐 허구 가득한 소설을 읽고자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혜린을 기억하는 뭇 사람들의 평은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별점 역시 전혜린이라는 이름에 주는 것이지 이 책에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은, 전혜린의 이름으로 마케팅한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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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田惠麟) 1934년. 1월 1일. 일제 강점기 경찰을 거쳐 변호사까지 이르렀던 아버지의 1남 7녀중 맏딸로 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독일유학생이었고, 귀국 후 서울대 법대를 비롯해 이화여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했다. 독일문학을 한국에 알리고자 <생의 한가운데><데미안><압록강은흐른다>를 번역하였고 스스로의 작품도 2권 발행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암울했고 그리고 그 암울함 속에서의 뜨거운 불꽃들이 터지는 격동의 시기였던 1950~1960년대를 자기의식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결국 31살의 젊은 나이로 100년만에 나올까말까했던 천재작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시대의 탓으로 돌리리다. 그녀의 죽음을........ 아무리 천재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시대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 열등감을 견디질 못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이 책을 중간을 넘어서고 있는데도 전혜린. 이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인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혜린이라는 주인공이 나오고.. 그 주인공의 의식속에서 존재하는 이들을 이끌어 내어 소설속의 또다른 한편의 소설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 독특한 구성이 번갈아가며 혜린이 주인공이면서 주영채도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었을땐... 전혜린 = 주영채 였다. 결국 혜린은 잔느를 부러워했으나 결국 스스로 방어벽을 넘어서지 못한 영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속의 강문철, 잔느, 백창우. 그들은 그 방어벽을 훌쩍 뛰어넘어 의식밖으로 일사천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향해서. 그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얼마나 초라했을까..... 얼마나 비참했을까.....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 버리자.>
라고 시작하는 시를 지어 은성이라는 명동의 술집에서 낭독을 한 후 그 원고를 재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일요일 새벽. 그녀에겐 몹시도 괴로운 일요일 새벽이었나보다.
유난히 대학시절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라서 그런지 나의 예전 모습과 자꾸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어떠했는가. 아니 10년전 2000년의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향해 토론하였나. 그 시대는 분명 먹고 살만했다. 자격증을 비롯해 취업이 주 목표였고, 어떻게 하면 학점을 잘 받을 수 있을까에 목숨을 걸었지 싶다. 시험기간에만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사회의 지식인이라 스스로 높여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생이었다.
비록 술과 안주는 같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열정또한 같겠지.. 하지만 그 술상의 안주꺼리로 씹는 대화의 주제는 달랐다. 피터지게 독재적인 정부에 반대를 했던 진정한 學生과 시시콜콜한 연애사담이나 즐겼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나의 학창시절.
독재정권시절. 군부대로 학교정문을 막아버렸던 그 시대. 정부는 진정으로 大學生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그 학생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투쟁하였는데....
그들 덕분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은.... 그 뜻을 받들기는 커녕 고마움조차 없는 듯 해보인다.
2010년이...... 그냥 물흐르듯이 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귀한 희생과 노력과 피와 땀으로 여기까지 온거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내가 조금만 더 철학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시대적배경에 지식이 있었더라면....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같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아파하며 읽었을텐데... 지금의 이 아픈정도는 새발의 피구나.......
부모를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어린시절 학교생활, 대학의 선택에서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힘에 이끌려 억지로 하였다. 스스로 처음 선택한 독일유학길에서 자꾸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에서도 쓴맛을 보았고... 결혼생활에서도, 스스로 집필한 소설을 창작하고자 했던 수필가로서도 너무나 혼란스럽고 답답했던 그녀를 이제서라도 위로해주고 싶다.. 토닥토닥......
2004년에 그녀를 중심으로 한 "명동백작"이라는 TV 드라마를 찾았다. 이재은을 비롯해 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이 작품을 꼭 찾아서 봐야겠다.
그리고.. 그녀가 번역한 책들 중 <압록강은 흐른다> 를 꼭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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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영국 공원을 산책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나는 알고 있었다. 외로움이란 달래지는 게 아니라는 걸. 외로움이 깊어지면 문철이 미웠다. 아니, 저주하고 증오했다. 하루라도 빨리 서울에서 오은수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할 지경까지 가도 문철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랑은 질풍노도처럼 내게 달려와 나를 뒤흔들었다.
기억 속에 가득하기만 한 상처의 치유, 시간이 흐르면, 완치는 힘들지언정~ 그 상처의 아픔들은 조금씩 줄어들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 여자 전혜린을 통해 그 마음까지 공감할 수 있고, 교감이라는 이해의 신호까지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마주하게 된 그 여자.
너무나 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기에~ 무지한 나로서는 그 마음 전체를 이해하는 일은 조금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겠지만..
진정한 사랑과 사회의 체제 앞에서 그 사랑의 지속성을 논하고 좌절한다는 사실만큼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일에 페이지를 넘겨 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사실. 그만큼이나 기대가 되고, 다가올 상황에 대한 내용들이 궁금해진 이야기라는 점들을 깨닫게 된 듯 느껴진다.
모쪼록, 이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했다는 점을 말하기에는 나로서도 여전히 아리송할 따름이지만, 정도상 작가님이 표현하신, 그 여자 전혜린의 일상 속 심경들과~ 전혜린의 마음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이미지를 하나하나 만들어나가 듯.. 그 느낌들을 가득 담은 채~ 타지에서의 고독과 슬픔, 사랑과 애증을 함께 한 유영채라는 존재의 현실은, 이 작품을 읽어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내 스스로 그 등장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의 마음을 찾아나갈 수 있던~ 솔직담백한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나는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만큼의 용기를 간직하기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더 남아있을 뿐이고~ 전혜린과 장 아제베도와의 문학적인 사랑의 느낌, 그리고..... 전혜린의 삶보다도, 그 마음을 더욱 더 공감하기 쉬운 듯 느껴진 유영채와.. 그녀에게 여러 잔상들을 남기고 떠나간 또 다른 인연들에 행보에 대해서는~ 사상과 체계, 억압된 현실에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슬픈 영혼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일이..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간접적인 분위기를 읽어올 수 밖에 없었기에~ 그 소중한 인연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인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 뒤에 남겨진 그 사랑의 마음과~ 소중한 것들에 대해 남겨진 내 추악한 마음들의 속죄와.. 복잡한 심경에 대한 어떠한 생각들만큼은~ 비록 그 원인이 다를지언정, 그 마음만큼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뿐이다.
그래서, 200page를 조금 넘는 순간에 마주하게 된 문구들에서는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어~ 세~네 차례 다시금 읽어보게 된 경우도 생기게 되었으니........
로미오와 줄리엣은 절대로 결혼할 수가 없었어.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지. 만일 결혼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통속에 불과할 뿐이고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지도 않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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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자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혼자 흙탕물에 빠진 느낌이었다.
과연, 진실로 위대한 사랑인 것이 기억되기 위한 바람으로.. 내 스스로는 그와 같은 사랑을 위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운명적이라기 보다는, 가볍게 보이더라도 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바람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았을까?!
그래서 내 스스로도 혼자 흙탕물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모습들이 아니었나 반성을 해보게 되었다.
역시나, 나는... 알제리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갖고, 신념있는 선택을 통해..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앞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당했던.. 잔느의 한 마디.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는 사실들을 나직이 되뇌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랑은..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 스스로가 일반화시키는 일상적인 만남과 이별의 의미 외에도~ 철학적으로 많은 대화가 요구시 되는 사색적인 만남에 근거했다는 점이.. 어쩌면 내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라는 판단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로의 유학 생활에서 많은 상황들을 접하게 되고.. 그 속에서의 삶의 철학과 사랑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었던 그 여자 전혜린과 주영채.
한국으로 돌아와 그 인생의 속박됨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안타까운 서른 한 살의 인생이라는 점이.. 곧 서른 한 살의 시점을 마주하게 되는 내 일상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고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끔 해 준.. 매력적인 타인의 일생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이 100% 사실에 의거한 점이 아니라는 것이.. 불행인지 다행일런지... 그것은 아마 속박됨 속에서 자유로워진 전혜린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는 답이라 판단을 내려보게 되며~ 책을 읽게 되는 동안 내 스스로의 고민과 마음들에 대해~ 멋진 카운슬링을 해주신 전혜린님과 유영채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게 될 뿐이다.
그 숙제의 답은 아직까지 완성을 짓지 못한 나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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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혜린의 이름을 들어본건 15년전 즈음 대학시절때였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소설책의 제목이 낯설지않았고, 그녀가 살아온 약력이 같은 독문학을 전공하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거기까지만이었다. 내 스스로 그 호기심의 흐름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천재라고 찬사하지만 그녀의 필체속에 지독한 허무주의, 비관주의, 염세주의적인 냄새가 풍겼기에 한참 고독과 방황에 젖어, 때론 그것들과 맞서서 싸워 나가고 있는 젊은 20대 문학도에게는 독처럼 느껴졌었다.
수년이 흘러 낯설지 않은 그녀의 이름, 전혜린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책을 기웃거린 이유는 선무당이 사람잡다는 식으로 어쩌면 나의 인식의 경솔함이 한사람을 편견의 울타리속에 가둬 놓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게다가 30대 중반, 나이 40을 바라보는 지금, 20대의 방황과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기에 충분히 감당할 정서상태에 놓여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한마디로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물론 이 책한권만으로는 그녀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제목에서부터 이름을 건,그래서 한여자의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기대를걸고, 또한 심리나 정서표현에는 미흡한 평전, 다큐와 색깔부터가 다른 장르인 소설로서 만나는 전혜린, 그녀의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했다.
<그 여자 전혜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액자식 구성방식에 한동안 어수선했다. 혜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 안에 , 전지적 작가시점의 영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혜린과 '나'로 표현되는 영채가 사는 공간을 수시로 이동하며 전개된다. 생존했던 전혜린을 알고 싶어 시작된 책읽기였기에 과연 소설속 혜린이 내가 알고자 하는 그녀인가, 영채가 그녀인가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 영채도, 혜린도 내가 알고자 하는 생존인물 전혜린것임을 알았다. 소설속 혜린은 자신의 모습을 영채 속에 투영했기 때문이다. 소설속 혜린은 가공인물 백창우만 제외한다면 그녀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고 밝힌바 있다. 소위 명문대 교수부부로서 살아가는 혜린과 그녀의 남편의 삶은 폐쇄적이고, 이기적이었다. 혜린의 육체는 현실과 전통적 구속에 있었지만 영혼과 정신은 항상 장에 대한 그리음과 사랑, 그리고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한다.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괴리는 더욱더 혜린과 주변을 분리시키고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어쩌면 작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창작의 고통 안에서도 혜린은 스스로가 현실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특히 끊임없이 영혼과 육체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전통적,사회적 틀속에 갇혀 있고 굴복하며 좌절하는 혜린은 모습은 가히 안쓰럽기 짝이 없다. 1960년대 한국사회가 그랬듯이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가족제도의 여성의 역할, 아내의 역할, 어머니역할에 의무라 생각하지만 만족하지도 못하고,그렇다고 투쟁도, 합의도 없이, 무기력하게 소리없는 울부짖음만 있을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고독하다.그래서 그녀가 자유를 향한 출구고 선택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영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채 역시 무기력한 존재이다. 배우자도, 진로조차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을 정도의 지독한 봉건적, 가부장적인 전통적 사회속에 그녀는 너무나 무기력해서 언제나 주눅들어 있었다. 법학에서 독문학으로 전과를 한것이 최고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를일이지만, 사회적 전통적 책임으로 한여성을 무기력함을 표현하기엔 미흡하다. 영채는 온실안의 화초와 같았다. 영채를 향해 교정에서 독설을 퍼붓던 백창우의 비난이나, 김문철의 실존과 자유를 떠드는 낭만주의에 머물고 있다고 영채를 비난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수 있다.그녀의 사회에 대한 무기력함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잔느와 민주화투쟁에 지식으로서 적극적이고 사회참여적인 태도로 역시 죽음을 맞이한 문철, 그리고 인식의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시인이란 직업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창우와는 사뭇 다르게 표현된다.문철을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와 전통적제도에 무릎을 꿇고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모습이나, 민주화 물결이 들끊어 몸살을 앍고 있는 한국의 60년대 격동기에서도 목소리를 죽이고 있는 소심한 지식일일 뿐이다. 결국 영채는 진정한 자유와 실존에 대한 구원을 갈망하지만, 자신이 표현하는 '불가능'이라는 벽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었다. 결국 영채가 갈망하는 자유와 구원은 어떻게 실현될까, 영채로서는 답을 말하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혜린의 삶을 통해 그 힌트가 주어질 뿐이다. 사회와 전통과 합의 없이 자신의 사유만이 우월적으로 표현되지만 결국 잔느와 문철 등..그들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기적인 모습으로 허우적 대는 영채였다. 혜린의 힌트는 전통과 사회에서 탈출하듯 남편과 별거를 하고 맞이하는 죽음을 통해, 혜린이 선택한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길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혜린의 사유의 깊이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소설속의 혜린이자, 생존인물의 혜린 모두에게 말이다. <그여자 전혜린>의 작가 정도상은 상당부분 전혜린의 소설<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빌려왔으며 그대로 발췌한 부분도 있음을 후기에 밝힌바 있다.그러므로 논픽션의 소설일지라도 주인공 혜린이 영채이자, 실존인물 혜린으로 봐도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생존인물 전혜린이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거부감이 일었었다. 천재라는 평가의 근거를 찾고 싶었다. 왜 자살했던가, 그녀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과 구원의 이르는 길이 죽음이라는 결론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혜린의 사유의 깊이에 대해 감탄과 경이로움을 금할수 없지만, 그녀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 정도상은 고인이 된 전혜린에 대해 더이상의 언급은 금할것을 요구하지만, 전혜린에 관한 책을 낸 이상 그녀가 화두가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유가 깊이가 깊을지 몰라도, 그녀는 사회적 책임을 간과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작품을 통해 말하는 언어를 통해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 파급력과 영향력..... 그녀도 염세주의적인 니체며, 쇼펜하우어, 브레히트 등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테고 이후 자신의 사회적 책임에까지 생각이 안미쳤을지도 모른다. 극히 개인적인 작업으로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명인들의 자살을 미화한다면 현재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값싼 낭만주의로서 현재 진행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일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허구라는 소설적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인물 이름, 작품을 인용, 주인공 이름조차 같으므로써 소설이지만, 소설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속 소설이라는 액자구성을 통해 영채와 혜린과의 거리를 두고자 한 장치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영채는 작가 자신과 실존인물 전혜린 공동으로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고,실존의 혜린은 소설속 혜린이라는 듯이.... 그리고 시점의 차이에서도 알수 있듯이 혜린의 관한 이야기, 심리묘사는 영채의 이야기와 상대적으로 분량적으로 적게 묘사된다. 어디까지나 작가의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적 소설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소설속 혜린을 최대한 객관화시켜, 한사람의 인생의 소설화에 따른 쏟아질지 모르는 비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일가. 어쨌거나 생존했던 전혜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인물 전혜린에 대한 호기심을 극대화 시킨 작품이다.
이 책 한권으로 한사람을 살펴본다는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지난 추억여행 속으로 떠나는 것 같아 행복한 시간이었다. 브레히트며, 니체며, 쇼펜하우어,릴케,<생의 한가운데> 등....언급되는 작가...잠깐 추억이 떠올랐다. 책장을 뒤지며 학창시절 배웠던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찾아 들춰 보았다. 책장 구석안에 깊숙히 박혀 있는, 금방이라도 먼지가 되어 찢어질것 같은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라는 오래된 책도 발견했다 . 그 옛날의 기억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