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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57’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인 웨슬리 스나입스가 비행기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은 ‘ART OF WAR’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손자병법’이다. 나중에 스나입스는 진짜 ‘ART OF WAR’란 영화에 출연한다. 두 번째 이라크 전쟁의 작전명을 ‘손자병법’에서 딴 ‘충격과 공포’로 명명한 것만 보아도 이 책이 얼마나 서양에서 인기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손자병법’을 영어로 읽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불과 10 쪽을 읽지 못하고 포기했다. 도대체 지명과 인명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도 읽어 보았고 인명과 지명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오자서나 합려의 영어식 표기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중국고대사의 인물들 중 영어식 표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공자(Confucious)와 맹자(Mencius) 뿐이다.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로마 이야기가 나와서 선생님은 삼두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 세 명의 이름을 아는 사람 있냐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나는 즉시 시저, 카이사르, 케사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나의 센스에 포복절도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아쉽게도 같은 반 친구들은 거의 웃지 않았다. 2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는 홍콩 영화였으며 당시의 홍콩 배우들의 사진 한 장 없던 학생들이 드물었다. 이소룡, 성룡,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왕조현, 임청하, 관지림, 장민 등등... 그러나 지금 홍콩이나 중국의 유명배우들을 알고 있는 중고생은 얼마쯤 될까? 중국인들과 중국어를 전공한 사람을 제외하고 위에 있는 배우들의 중국식 이름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원래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이름을 각국마다 다르게 부르는 경우까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국에서는 애리스타틀(Aristotle)이라고 읽는다. 만약 누군가 미국으로 철학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서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들어야 한다면 그리스 철학자들의 미국식 발음을 다 알아야 하겠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당연히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유명인을 제외하고는 혼란이 일어날 경우가 많이 있다. 만약 번역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라면 인명 표기를 할 때 미국식 인명으로 바꿔서 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표기법이 원래 발음과 다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번역자는 원래 발음에 가깝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조차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저가 케사르도 되고 카이사르도 될 수 있으며 가이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전혀 따르고 있지 않다. 비단 따르고 있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이름에 일관성도 없다. 심지어 독일 사람은 영어식으로 읽고 프랑스 사람은 영어식(?)으로 읽는다. 고대 그리스 인물은 영어식으로 읽었다가 독일어식으로 읽었다가 다시 그리스 식으로 읽기도 한다. 매머드라고 불렀다가 맘모스로 부르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아내인 예니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제니(Jenny)로 발음만 개명시킨다. 다윈의 아내는 애마라고 부르는데 애마부인만 생각난다. 흡사 사과를 애플로 부르지 않고 에플로 부르고 달걀을 에그로 부르지 않고 애그로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a를 ‘에’로 발음하고 e를 ‘애’로 발음한다. 심지어 그것도 일관되지 않다. 이런 오류가 많으면 책에 수 백가지가 넘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보통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정말 문자 그대로 오류가 수 백가지가 넘는다. 가장 대표적인 오류는 아이스킬로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참고로 아이스킬로스는 이 책에서 세 가지로 읽힐 수 있다. 에쉴러스 에이칠러스 아이스킬로스로... 그리고 그가 지은 책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아닌 한계를 가진 프로메테우스로 바뀐다(원제가 ‘Prometheus Bound’인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로 번역하지 않고 ‘프로메테우스의 한계’로 번역했다). 내 생각에는 프로메테우스도 프라미씨어스로 읽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도대체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핵심’을 왜 ‘어둠의 심연’ (원제는 ‘Heart of Darkness’이다)으로 바꿔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Oracle of Reason’은 왜 ‘이성의 계시’가 아닌 ‘이성의 철인’으로 바꿔야 했는지에 비하면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들에 비하면 Spinoza를 Sponoza로 쓴 것이나 Engels를 Ehgels로 표시한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이렇게까지 비판한다면 실제 증거를 대는 쪽이 좀 더 좋겠다. 153 쪽의 각주 162번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에이칠러스는 다음에서 인용하였다. Ibid., 31. 종교에 대한 고대 유물론자의 비판이 루크레티우스와 루시안에 이르러 가장 왕성하게 발전되었으나 그런 아이디어 (예를 들어 고대 신화의 파멸)가 고대 문명을 파멸시켰다는 견해에 대해 아이스킬로스는 경멸했다고 마르크스는 믿었다. “만약 과학적 연구가 종교의 과오에 대해 침묵한다면, 만약 로마 당국이 루크레티우스와 루시안의 저서를 삭제할 것을 권고받는다면 그 때 세계는 파멸에 이르지 않겠는가?”라고 마르크스는 물었다. Marxs and Engels, Collected Works, vol. I, 190. 마르크스는 루시안의 가장 열정적인 자서전적 서사인 「알렉산더 허풍쟁이 예언자」(Alexander the Quack Prophet)를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 서사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미신과 종교적 사기행각에 대해 가장 용기 있는 반대자로서 묘사되었다. 알렉산더(Alexander of Abonoteichus, 역주: 로마제국의 작은 도시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루시안은 그를 가짜 예언자로 묘사했다)는 에피쿠로스의 『중요한 교의』를 불사르고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 중 한 명을 돌로 쳐 죽이려 함으로써 이런 반대를 억눌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Lucian, Selected Satires(New York : W.W. Norton, 1962),267-300」 이 각주 하나에서 틀린 것 혹은 일관성이 없는 것은 몇 개일까? 먼저 한 각주에 이미 에이칠러스와 아이스킬로스가 동시에 나온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로 읽었다면 당연히 루시안도 루키아노스로 읽어야 한다. Marx의 철자법도 틀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곳을 분기점으로 하여 앞의 글과 뒤의 글이 조금은 양상이 바뀐다. 이후에는 오타도 비교적 적어지고 좀 더 가독력이 높아진 것이다. 비록 리카르도(왜 리카도라고 하지 않는지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라고 줄기차게 부르기는 하지만 맬서스와 리비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때 가장 책이 재미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을 라이시엄으로 부를 때부터 표류하던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대한 설명은 아이스킬로스를 더 이상 에이칠러스라고 부르지 않을 때부터 제대로 된 글이 된 것이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이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이름인 트레마욱스가 425쪽에 등장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Pierre Tremaux를 삐에르 트레모라고 읽지 않은 것은 트레모가 프랑스에서 영국이나 미국으로 국적을 옮기면서 프랑스식 발음에 환멸을 느껴 발음하는 법을 바꿨기 때문일까? 심지어 그런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포이에르바하와 고전적 독일 철학의 성과’라는 제목은 너무 심한 것 아닐까?)의 제목을 임의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과연 번역자는 기존의 마르크스 번역 서적을 살펴보기라도 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마르크스의 생태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듯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300 쪽까지는 유물론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이는 기존의 마르크스 입문서나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설명이 좀 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번역자는 마르크스에 대해 전문가라고 인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리비히의 논의를 받아들여 도시와 농촌의 통합적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구아노 같은 천연비료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화학 비료가 등장하지 않았고 농업기술이나 석유화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마르크스의 의견은 발전적이기는 하나 그를 위해 변명을 계속하는 것은 교조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위대함은 인류학이나 생태학에서 오는 것이 아닌 그의 혁명철학에서 온 것인데 마르크스를 위해 변명을 하면 할수록 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종의 기원’의 유물론적 해석을 통해 마르크스의 성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시도도 좀 허황하다. 이미 종교와의 투쟁은 다윈의 후예인 도킨스가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마르크스는 유물론은 혁명으로 이행해야 하며 철학자의 목표가 사회의 변혁에 있다고는 했지만 과연 ‘자본론’의 해석이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되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초기의 ‘공산당 선언’까지 보여지는 마르크스의 실천성이 과연 후기의 ‘자본론’에까지 일관성을 갖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포스터의 글은 분석의 정교함은 인정할만 하지만 그 이후의 실천적 행동에는 의문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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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받아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었다. 그전에 읽은 동일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태혁명]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재난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물주의적 분석도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손에서 책을 놓아 버렸다. 동일 저자가 쓴 책인데도 [생태혁명]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었는데, 이 책은 내용이 머리속에서 빙빙 맴돌기만 한다는 것을 느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읽어보겠다고 마음먹고 읽기를 계속하여, 마침내 읽었지만 머리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생태혁명]에서 한부분으로 다루어진 내용에서 알게 된 것이 더 많다는 느낌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저자는 300여 페이지를 유물론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생태학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19세기의 유물론과,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생겨난 자연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한다. 유물론은 물질의 속성에 대한 이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은 사고에 앞서 존재하며, 자연과 물질에 의존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개념은 실천적 유물론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유물론을 자연역사의 과정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연적 물리과학의 영역으로부터 유물론을 분리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역사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 사회영역은 인간역사 내에 존재했던 자유와 소외를 반영하며, 따라서 과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모든 면에서 과학적 이려면 유물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크스가 다윈의 진화론에 많은 관심과 동의를 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생태학에 대해서도 저자는 마르크스를 옹호한다. 부르주아의 생태학적 관심이 생겨나기 전부터 마르크스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약탈을 비난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인간노동의 소외과정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소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반생태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최근 들어 마르크스의 저작물들이 생태학적 통찰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추세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크스는 생태학적 사고방식에서 자연과 인간관계의 변화를 사회적 변화로 연결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마르크스가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을 통합시킨 것은 자본론에서였다. 그는 노동과정을 인간과 자연사이의 과정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신진대사 개념을 적용하였고, 따라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분석의 핵심요소는 신진대사 균열이론이었다. 신진대사 균열이론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기반인 자연조건으로부터 물질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적 관계에 균열이란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토지로부터 인구의 극단적인 분리에 뿌리를 둔, 사회내의 인구분리에 의해 특정 지어진 계급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신진대사 균열은 화학비료의 경우에서 보듯 일시적으로는 기술이 치유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회복이 불가하며, 마르크스는 따라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중심과제는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수립이라고 인식하였고, 공동체적 사회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생산을 통하여 신진대사의 균열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가 쓴 책들은 조금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책들은 그렇게 어렵다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헌데 이 책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아니,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아마 유물론에 대해서, 아니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해서 나의 이해가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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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마르크스는 종종 반생태학적 사상가로 오해를 받는다. 이는 그가 자연에대해 보였던 어딘지 정리되지 않은 듯한 비체계적인 관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자주 인용되는 그의 자연에 대한 다음의 정의 때문이다.
이렇듯 자연의 정의가 선험적이고 대상적으로 명시되고 인간의 사회활동의 극복해야할 한계처럼 정의되었기에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그들의 저서에서 일체 반생태학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일종의 '넘겨집기'처럼 그런 오해가 자연스레 생겼다. 그런 오해가 확신에 가까이 증폭된데는 두가지 요인이 추가적으로 영향을 준다. 하나는 구 소련체제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원용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반생태적 행태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생태학이 가진 반개발주의적 교조성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연구한 사회학자로 이 책의 저자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그런 세간의 오해와 그 근거없는 오해의 고착화가 무척이나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지만, 결국 결론적으로 그 오해의 불식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래서 다소 주관적일 수 있는) 진실의 전달에 초점을 맞춘다.
유물론.. 그 오래된 세계와 자연에 대한 인식의 틀
저자는 마르크스 철학의 토대를 에피쿠로스로부터 유래된 고대 유물론적 세계관과 헤겔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론에서 찾는다.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에 의해 태동한 고대 유물론적 세계관은 이후 베이컨의 경험론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서양철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경우 데모크리투스의 물리학적 결정론과 이의 영향을 받은 베이컨의 자연정복의 개념 등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기계론적 유물론 관점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이 존재한다. 에피쿠로스는 불가항력의 물리적 결정론과 종교의 목적론적 원리를 모두 반대하였다. 이러한 양비론적 관점은 자칫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의 도마위에 오를 충분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르크스는 그런 에피쿠로스의 관점에 주목한다. 소외라는 개념을 도입해 인간의 노동과 생산의 관계를 비정하게 분석한 마르크스의 통상적 접근이 주는 선입견 안에서는 다소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이런 관심은 재미있고 또 파격적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데모크리투스의 물리학의 결정론과 종교의 목적론적 원리를 모두 반대했다는 사실로부터 많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물리학자들의 운명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신에 대한 신화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신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면 신의 신화를 따르는 것은 신의 은총을 위한 희망을 남기지만 물리학자들의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은 냉혹한 필연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가 믿는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우연이며 기회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철학에 봉사하는 것'은 진실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중심점은 최종적인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유에 대한 강조였다. ····· 에피쿠로스는 '원인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한 최초의 사람들, 즉 자신들의 전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임자들을 능가하는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커다란 문제를 완화시켰을지라도 모든 것을 필연과 우연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스스로 보고도 못 본 체했다'고 기술했다. (인간에 의해 행해진 사건들은 단순한 필연이나 우연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결과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필연성(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곤 하는)을 전적으로 부인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필연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유의 가능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을 옹호하면서 어떤 유형의 엄격한 결정론을 반대했다. 엄격한 결정론의 수용은 결국 '인생의 무의미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생태학」 中에서.. <p146-148>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이 가지는 희망.. 그리고 자유의 관점을 높게 평가했다. 즉 스스로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생래적, 또는 필연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의미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단지 세상을 해석하는데 머물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보여준 '세상은 그렇다네..'라는 숙고와 판단의 차원을 넘어 자연과 사회, 인간과 물질.. 즉 세계의 혁명적 변화를 요구했다. '해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소외의 개념을 차용하다
우리가 일상적 용어로 흔히 사용하는 소외(疎外)라는 말을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헤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변증법의 정-반-합 논리는 소외라는 개념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철학적 관점의 소외란 어떤 생각이나 행위가 그 주체자를 떠나 객관화, 물화(현실화)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 경우 그 행위자는 객관화, 물화된 행위(그것이 노동이든 이념이든)로부터 '소외되었다'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소외는 단지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객체로부터 소외된 주체는 곧 자기완성의 과정을 거쳐 객체와 합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헤겔은 소외(Entfremdung)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복귀(Identische)라 불렀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논할 때 흔히 등장하는 노동의 소외는 헤겔의 소외개념을 크게 손보지 않고 그대로 차용해 적용시킨 것 같다. 헤겔이 변증법적인 인류의 진보를 확신한 것처럼, 마르크스 역시 청년시절 헤겔좌파의 주역으로서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켜 인간, 특히 민중의 힘으로 역사를 능동적으로 진보·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하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는 재통합(Reintergration)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철폐와 노동의 결과로부터 생산되는, 그리하여 노동을 소외시키는 재화의 사적소유의 적극적 지양을 통한 공산주의 세상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생태학자.. 마르크스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자연에 대한 관점은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데모크리투스의 결정론에 입각한 제약조건처럼 명시되시도 하고, 때로는 베이컨의 사상처럼 극복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처럼 언급되기도 한다. 저자는 마르크스 사상의 생태학적 관점을 비교적 명쾌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존경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에 주목한 이유는 진화론이 자신들의 이론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물질의 산물로 해석하고 그래서 사유가 현실의 물리적 조건 하에서 하부구조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기본적 생각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생명체가 외부환경 및 다른 생명체와의 물리적 관계 속에서 생존여부 및 그 기간이 결정되어지고 설계자의 목적의식 없이 우연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이론과 근저에서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생태학적 관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자연의 소외라는 개념하에 전개된 농업생산활동과 도시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관점이 더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하 산업생산할동이 증가함에 따라 도시로 집중된 인구는 엄청난 양의 생활쓰레기의 배출을 통해 도시와 그 인근을 오염시킨다. 반면, 농촌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유기비료의 부족으로 토지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마르크스는 산업화된 인구과잉의 대도시에서 양산되는 생활쓰레기 중 비료로 재활용이 가능한 부분이 농촌의 토지로 환원되어진다면, 도시와 농촌 모두가 겪는 어려움은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체제 하 단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결정이 만들어낸 환경오염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20세기말 이후 사회적 이슈가 되고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논리와도 닿아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생태학적 입장은 엥겔스의 자연세계와 인간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용문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단계마다 자연 밖에 존재하는 외계인처럼, 외국 사람들에 대한 정복자처럼 자연을 결코 지배할 수 없으나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우리가 자연에 속해 있고, 자연의 한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학습할 수 있고 자연의 법칙을 정확히 적용할 수 있는 다른 피조물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생태학」 中 「엥겔스와 자연의 정치학(Engels and Politics of Nature)」 인용문 <p497>
저자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마르크스사상은 환경문제를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혁명운동의 중요한 요인으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비록 자본주의 하 생태학적 모순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노동자 등 무산자 계급에게 미치는 해악을 염려하는 수준이었을 뿐, 사회주의 전환의 주요한 계기로 여기지는 않은 듯 싶다. 다윈의 진화론보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관점에 더 깊은 영향은 준 것은 '공진화(Coevolution)이론'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가진 환경파괴의 내재적 속성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과학의 공진화 개념을 빌어온다. 공진화란 생태계에서 한 개체의 진화가 그와 연관(또는 종속된)된 다른 개체의 진화를 자연스레 유도하게 된다는 개념이지만,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을 상호 영향을 주는 공진화의 개체로 치환했다. 즉 사회적 진화의 과정에 자연과 함께 진화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생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의 핵심이다. 유물론적 자연과 역사의 개념에 생태학이 중심적이라는 주장, 생태학에 있어서 유물론적 자연과 역사개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저자는 하고 싶었다.
최근의 생태학이 반개발, 반문명적 성격으로 교조화되고, 자본주의적 경제적 합리성이란 미명하에 베이컨식의 자연정복이 행해지는 양 극단으로 이원화된 생태이슈의 접근방식에 대하여 저자는 과거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투스와 플라톤 사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적 틀과 권위를 빌어 중용(?)의 생태학 관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관점의 기저에는 자연과 사회간 합리적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근대화도, 과학의 발달도, 유물론도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리뷰를 마치며..
철학에 대해,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무척이나 얄팍한 내가 이런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대학시절 학회활동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한 술자리 안주거리용 용어 몇개가 달랑인 일천한 사전지식으로 이 책을 읽어낸다는건 내겐 일종의 '수행' 같은 것이었다. 유물론과 생태학이라는 역사를 관통하는 두개의 어마어마한 축을 넘나드는 이 책의 전문적 서사방식과 원본의 뉘앙스와 분위기를 살려내려기 위해 최대한 자의성을 배제하려는 시도에 제약된 번역의 투박함과 현학적 모호성을 차치하더라도 책의 두께와 논의의 주제 자체가 내겐 부담스러움 그 자체였다.
비로 일천하지만, 독서를 하면서 책은 대체로 세가지 스타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낀다. 하나는 너무 재미가 있어 읽으면서 남은 페이지가 아쉬워지는 책.. 이런 책을 만난다는건 정말 행운이다. 세상엔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런 책을 만나는 경험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이 그렇게 느낀다고해서 꼭 내게도 그런것은 아니기에 더 그렇다. 두번째는 읽는 동안 몰입을 맛보면서 빨리 읽게되는 책이다. 꽤 많은 책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특히 목적의식이 배제된 '순수독서'를 목적으로 선택하는 많은 책들이 주로 그렇다. 마지막이 읽으면서는 지루하고, 짜증나고, 진도도 잘 안나가지만 다 읽고나면 뿌듯함이 오래 남는 책이다. 책안에 지식이나 정보가 주는 재미보다는 스스로에게 느끼는 대견함이나 성취감 같이 외부적인 요인이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지배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이 책은 마지막 부류에 해당한다. 저자의 현학적 논리를 쫒으며 수긍하고 깨달음을 얻기엔 너무 버거운 느낌이었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발견한 에피쿠로스나 노동, 사회,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인간소외를 발견한 헤겔이나, 여기에 리카르도의 경제학, 리비히의 화학, 다윈의 진화론을 가미해 혁명철학을 만들어낸 마르크스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헌을 한 대단한 사람들임에는 공감하지만, 어쩐지 그런 일련의 서술이 지적욕구의 충족 이상 실천강령이나 생활의 신조로서 와닿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담구어내기엔 내 이해의 바탕이 너무 얕아서인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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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에 몇 군데의 오역이 보입니다 http://cafe.naver.com/ahrae 참조하세요. 존 벨라미 포스터의 책을 세미나를 하면서 번역서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 번역서에서 오역을 위 카페에 오역을 찾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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