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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을 넘어서” <콩깍지 사랑>, 자연을 닮아 순박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엮은 책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진로가 아직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던 대학 시절까지, 장차 자신이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당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일정 부분 방향을 수정했다손 치더라도, 미래의 삶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자신의 현재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는 데에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삶의 모습이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을 하여 사회인으로서 본격적인 삶의 현장에 뛰어들면, 자신의 앞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쉽게 예측되곤 한다. 간혹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진정 자신이 원하던 또 다른 삶을 위하여 과감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선택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아마도 부러움과 우려가 반쯤 섞인 눈길로 바라보기가 십상이다. 부러움은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연유할 터이고, 우려라는 것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왜 험한 모험의 길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선택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삶에 적응하는 과정이기에, 대체로 얼마쯤의 모험이 수반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획기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선택한 삶을 바꾸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은 노릇이다. 또 그러한 삶의 전환이 언제나 성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며, 의도했던 바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절망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현재 삶에 적응하면서, 마음 속으로만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둘란의 <콩깍지 사랑>은 ‘평범한’ 직장인이 ‘특별한’ 부모가 되어 겪게되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자신이 선택했지만, 원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삶이 눈앞의 ‘현실’로 되었던 것을 겪어야만 했던 저자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왔다. 또한 서로 넘나들이 하면서 살고 있는 저자의 마을 이야기를 통해서, 자연을 닮아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여 서울을 떠나 작은 소도시에 5년째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대도시의 생활 습관을 채 떨쳐버리지 못한 나의 인식을 교정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운 천사와 울보 엄마의 시골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다운증후군으론 인한 정신지체를 겪는 아들을 둔 한 어머니의 생활의 기록이다. 도시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던 저자가 우연히 찾은 자그마한 마을에서 현재의 남편을 만나고, 다시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들을 낳으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접하면서, 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심정에서 저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곤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아들인 민서와 비슷한 또래인 5살박이 내 아들 가은이를 겹쳐서 생각하곤 했다. 우리 사회가 장애우들을 보다 더 배려하는 여건이 빨리 성숙되기를 바라며, ‘민서’가 지금처럼 밝게 클 수 있기를 빌기도 했다.
실제 아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뱃속의 아이에 대한 주위의 반응에 걱정을 하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만약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저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겨나갔을 터이지만, 장애우에게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복지에 대한 열악한 인식의 수준을 새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늘 비교의 대상을 나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육신은 멀쩡하지만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는 '정상인'들의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고 있다. 어쩌면 몸이 불편한 것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장애는 극복하기가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를 위해서 도시의 생활을 포기하고,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뜻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박실(朴實)’이라는 단어였다. ‘순박하면서도 진실되다’라는 정도의 의미일텐데, 충청도의 시골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저자의 삶의 모습과 글의 분위기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마치 앞에서 말을 건네는 것과 같은 어투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해당 지역의 생활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시골살이가 늘 평화롭고 즐겁지만은 않을 터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금새라도 넉넉한 시골의 인심에 푹 싸여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을 표현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리라.
세 해 남짓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을 다시 묶어 펴낸 이 책을 통해서, 저자의 꾸밈없는 생활의 모습은 물론 다운증후군인 아들을 키우며 세상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변해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선천적인 질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서 누구라도 장애를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온천에서 ‘자신있게’ 아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모습에서, 저자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오히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기는 ‘민서’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몸은 멀쩡하나 정신이 병들었을지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저자가 소중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라고 느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른 사람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그 느낌을 떠올리지 못하며, 그러한 삶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어쩌면 편안함에 길든 현대인들의 조급증이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아들 민서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작고 발육이 더딜지라도, ‘다른 아이들이 좀 급하게 자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의 힘은 저자의 삶을 튼실하게 지탱해주는 근거일 것이다. 장애를 지닌 아들을 보면서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주신다’는 저자의 인식 또한, 삶에 순응하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고 하겠다.
저자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라면 이 책의 제목을 ‘천천히 자라는 아이’로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자라는 것은 ‘늦게’ 자란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늦게’ 자란다는 것은 늘 누군가 비교의 대상을 상정해야 한다. 그러한 비교의 관점이 바로 장애우들을 ‘비정상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태도인 것이다. 따라서 다운증후군의 민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결코 ‘늦게’ 자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모습이 똑같지 않듯, 단지 자라는 모습이 조금 다르게 ‘천천히’ 나타날 뿐이다.
‘천천히’ 자라는 민서의 모습은 수많은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발육의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장애우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은 민서의 ‘평범한’ 모습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여기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편견이야말로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자식을 키우면서 누구나 느꼈을 평범한 경험이, 그리하여 저자로 하여금 ‘특별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상의 시선을 넉넉한 생각으로 감싸 안는 저자에게도 간혹 견디기 힘든 상황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특별함’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저자는 ‘다운 학교’의 건설을 꿈꾸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출판 과정에 나는 독자 기획위원이라는 명칭으로 참여를 했다.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라는 인터넷 북 커뮤니티에서, 이 책의 원고를 읽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부탁하여 기꺼이 이에 응했던 것이다. 책의 앞머리에는 이 과정에 참여한 71명의 독자 기획위원의 이름이 적혀 있고, 책의 뒷표지에는 이중에서 나를 포함한 6사람의 짧은 소감이 소개되어 있다. 출판의 과정에 참여하여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글의 내용을 주변에 권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였다. 편안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저자의 문체는 물론이고, 가족의 의미와 삶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게 해주는 힘을 느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원고를 읽을 당시, 개인적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단지 그동안 내가 보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은 내내 그렇게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며 그렇게 그곳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 그동안 보이지 않던 부분까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만났던 아이들은 자신의 탓이 아닌 부모 등의 책임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소외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이웃의 다정한 손길이 참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이러한 이웃들에게도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이지 절망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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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금 딱딱하고 우울한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을 추스리려고 골라 읽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만 작가님의 따뜻한 전해와 아껴 읽지 못하고 순식간에 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책 보는 중간 중간 아껴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들도 작가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시가 되나 봅니다.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 환경에서 어쩌면 그리도 따뜻한 마음이 우러 나오는지... 작가님을 본받고 싶어 지네요.
다훈 증후군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시골 아낙으로 삶에 녹아들어서 어느덧 그들과 따뜻한 시선을 주고 받는 모습에서 작가님이 도라지꽃을 닮았음을 보았습니다.
돌맹이 풀한포기에도 아련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고, 담장 너머 이웃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풋풋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으며, 도시 사람들 숨 넘어가게 하는 시골버스 시간에도 작가만의 정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따뜻한 시각을 눈뜨게 하고 누구나 공감하게 하는 마력으로 글을 풀어내어 나도 모르게 작가가 사는 동네 아낙으로 들어가 작가와 함께 동거동락하는 것같은 착각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도시 사람들도 부러할 만한 우리 마을 자랑거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버스입니다. 도시에서 버스도 타보고 지하철도 타 본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빠르고 자주 있다는 이유로 기껏 달려 온 사람의 얼굴 바로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문을 닫아버리는 지하철이나, 차도까지 달려 나가 간신히 타야 하는 버스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버스이지요. 소박한 끼니, 몇 벌 안 되는 옷가지, 밑반찬이며 주전부리를 빼면 크게 인심 쓸 일도 없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해주는 버스, 시간이야 조금 늦어져도 '지 맘대로'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인심 좋은 버스가 우리 마을에는 있습니다. 사람 자격으로 떳떳하게 타고 다닐 수 잇는 그런 버스 말입니다. |
| 추둘란의『콩깍지 사랑』은 한편의 수채화와 같은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충남 홍성의 한 시골에서 다운증후군인 귀여운 아들 민서와 함께 소박하게 살면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의 편린들을 투명하면서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하겠다. 먼저 저자가 전해주고 있는 정겨운 자연의 모습은 도심 생활에 찌든 우리네 마음에 싱그런 쉼과 여유로움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특히 그 다감한 감수성으로 시골의 솔숲 속을 거닐면서 자연을 통해 삶의 교훈을 되새기는 저자의 순수한 마음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의 숲은 제게 많은 위로를 줍니다. 한때 저는 사람의 숲에서, 일의 숲에서, 글자의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고 들여다보니 제 속엔 상처만 남아 있었습니다." 즉 인위적인 숲에서 자아중심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녀는 "함께 어울려 정다운 듯, 혹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외로운 듯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사람 사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이제는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콩깍지 사랑으로 아들을 키우면서 발견하게 된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녀는 절망을 안고 온줄 알았던 민서가 사실은 희망과 축복을 안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방긋방긋 웃는 민서의 얼굴에서 참된 기쁨과 희망의 세계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민서가 늦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만 천천히 자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서가 빨리, 또는 크게 자라지 않는다하더라도, 민서만의 속도대로 자라나, 이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소중하게 살아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하나님께서 다운증후군 아이를 맡아 길러 줄 부모를 고르고 골랐을진대 자신과 같은 사람을 골랐다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며, 딱 한번 뿐인 자신의 생애에 장애아를 기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며, 지금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이 사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민서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위한 중등과정의 대안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때를 허락하시면, 이 예쁜 천사들과 꽃이 만발한 동산에서 함께 뒹굴고 크나큰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함께 노래할게요. 그런 날을 꿈꿀 수 있게 민서를 우리 가정에 보내주시고, 이 세상에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결국 저자는 자신이 처한 아픔을 진정한 사랑과 소망으로 승화시키면서 지극히 아름다운 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의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저자의 삶을 통해 사회적인 명성이나 도회적인 성공이 아닌, 다른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진실되게 실천하면서 그 생의 소임을 다하는 그곳에 참된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과 자연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고난까지도 감사하면서 삶이야말로 성숙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정감어린 삶의 고백들을 통해 사랑하는 삶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과 삶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를 우리 모두가 함께 느껴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 콩깍지사랑에 대한 리뷰를 지금에서야 쓴다. 누구보다도 먼저 이 책을 읽은 사람이였으면서도(출판되기전 기획단계에 참여했던 독자중 한사람이였다~) 다른책들처럼 쉽사리 쓰지못한건 책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였는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책속에 내 이름 세글자가 들어있다는것. 아는 사람만 알고있는 그 일이 내겐 너무나 대단한 일이였으니깐 말이다. 암튼 컴퓨터로 초고를 읽을때 그 느낌보단 역시 종이책과의 만남이 더 좋았다. 조금 더 천천히 크는 아이 민서와 따스한 마을사람들.. 딴나라 이야기같기도하고, 꿈같은 이야기같기도하다. 우리사회에서 장애우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조금이나마 알고있으니깐 말이다. 한가지 예로 얼마전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손님으로 오시는 분중에 민서와 같은 다운증후군이신 손님이 계신다.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성인인데 단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해서 무시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어찌나 속이상한지.. 그런데 그런걸 보면서 나서서 그건 아니라고 말못하는 내 태도가 더 속상해진다. 그저 그 사람들이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뿐 적극적이지 못한 내 태도가 말이다. 이 책을 읽기전부터 난 장애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특수교육과로 편입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는다. 나처럼 방관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더 힘겹게 살아가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런점에서 민서는 얼마나 행복한 아이일까 생각해봤다. 조금 천천히 자란다는 의미는 비단 민서에게만 국한되는 말은 아닐것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이 민서보다 더 늦게 자라는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지런히 생각을 길러서 쑥쑥자라게 노력해보아야할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다 동등한 입장일테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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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 사랑’은 서울에서 처녀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충청도의 어느 시골에서 남편과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들 민서와 유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추둘란 씨의 산문집이다. 저자는 서울에서 살았을 때는 나이도 젊었거니와 대도시의 정서도 그러해서 나름대로 성공도 꿈꿔가며 치열하게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고 고백을 한다. 건조한 대인관계와 따지고 보면 길고도 긴 인생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회적 일상들의 무상함을 깨달은 건 결국 모든 욕심들을 버리고 귀농을 한 이후란다.
저자는, 귀농을 한 이래로 보기만 해도 정겨운 이웃들 그리고 외따로 안겨도 포근하기 만한 대자연과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전한다. 도시생활이었다면 밀물처럼 밀려오고도 남았을 법한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을 필요도 없고, 스트레스를 얼마간 받았다손 치더라도 기분 좋게 치고 받아가며 해소할 이웃과 자연이 있으니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단다. 게다가 적적한 시골생활에 이내 식상해할 무수한 몽상적 귀농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진심으로 그녀를 둘러 싼 그녀의 이웃들과 환경을 사랑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일는지?
사회적 약자라고 일컬어지는 소외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미덕이다. 이 책은 다운증후군에 걸린 저자의 아들 민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장애우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내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 장애우들도 결국은 귀중한 하나의 인격이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시종일관 평온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그리고, 책의 어느 곳엔가에서 마침내 그녀 부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민서, 이 놈이 어떤 때는 장애아인지 정상아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간다니까!’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세상이 점차 첨단화 되어 가면서 이제는 경로효친사상의 미덕도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물론 위계질서 상의 상하분리구조는 사라져야 마땅하겠지만, 적어도 선험자들의 깊이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일구어 우리에게 제공한 지금의 환경들을 감사하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조차도 기능적 가치로 평가되는 이 시점에서 못 배우고 못 가진 이 땅의 어르신들이 그들의 공덕에 대한 존중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효도라고 하지만 더디고 촌스럽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가 십상인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이웃이자 우리의 선배들이기도 한 여러 노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소박하지만 그만큼 넉넉하기도 하다. 소녀처럼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야학장에서 열심히 글을 배우고 있기도 하고, 더불어 사는 이웃이라 하여 없는 살림에 저자의 가족에게 음식이며 살림살이들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고도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그 살가운 모습이라니. 우리는 더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어르신들의 태도에 대해서 논리적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의 내리사랑만큼은 감당할 수가 없지 않던가?
저자의 필력은 그녀가 전문적인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전문작가의 것이지만 게으른 글쓰기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에 비하자면 훨씬 더 수준급이다. 게다가 사람과 자연에 부대껴 가며 직접 체득한 삶에 대한 성찰들에서 적지 않은 공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언뜻 보면 흔한 글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글을 살피다보면 분명히 글들 간에 비슷한 정서가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글 속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의 깊이를 미루어, 어쩌면 그런 와중에 자신의 눈에 눈물이 살짝 글썽이더라도 창피해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당신의 정서는 지극히 정상적이니까. [인상깊은구절] 할머니의 죽음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에 온 삶을 쏟아 버리지만,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도 온 삶을 기울여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요. 저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저의 죽음을 꿈꾸었습니다. 저렇게 할머니처럼 조용하게 준비해 놓고 죽을 수 있기를, 죽기 전에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후회 없이 다 베풀기를 소망했습니다. |
| 이 책의 저자인 추둘란씨의 아이, ‘민서’는 21번 염색체가 하나 더 많은 다운증후군의 아기입니다. 소위 ‘장애인’ 아이를 낳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충분히 저자의 고통이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보는 엄마의 눈이란 사랑으로 ‘콩깍지’가 씌운 눈이 아니던가요. 엄마, 추둘란씨는 사랑스런 ‘민서’를 봅니다. “낯선 사람 빤히 쳐다보기, 아는 사람 보고 웃거나 손 흔들기, 손 박수 발 박수 동시에 하기, 잽싸게 엄마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드러누운 자세에서 머리를 중심으로 360도 돌기, 자기 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하기...” 등등. 사실 이런 행동들이야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콩깍지’가 씌운 엄마의 눈에는 평범해보일 리가 없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합니다. 객관성을 잃은 시선이 콩깍지가 씌운 눈이니까요. 냉정하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 소위 과학의 정신, 근대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얼음의 심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존재입니다. 그 욕망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욕망이 있어 우리는 한 개의 사과를 더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름다움이란 콩깍지가 씌운 시선의 산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욕망 없이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요. 더구나 자식이라는 생명붙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냉정한 기계의 시선을 닮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민서를 바라보는 추둘란씨의 시선이 정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정확함 때문에 도리어 그녀의 시선은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요. 그녀의 시선으로 본 민서는 장애인이 아니라 조금 ‘천천히 자라는 아이’일 따름입니다. 그 시선 속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의식의 퇴화가 아니라 성장으로 보여집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던 노처녀가 홍성 환경교육관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 농사를 지으며 이웃사람들과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는 분명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의 입가에 슬몃 웃음이 번지지요.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을 읽을 때처럼 충청도 사투리의 육질을 씹는 맛도 그만입니다. 우리에게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한 미각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도 추둘란씨의 주위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 촌로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할머니들을 모아 가르치는 ‘밀알한글학교’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사투리는 얼마나 멋들어진 해학을 간직하고 있는지, 일요일밤의 ‘개그콘서트가’ 무색해질 판입니다. 왁자한 웃음이 아니라 배시시 입가에 번지는 웃음, 이 책은 콩깍지처럼 연한 그 미소의 색깔을 닮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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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먹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걸 뭐허러 나누남."(31쪽)
이 말이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라는 것을, 글쓴이가 설명을 덧붙이기 전에 난 알지 못했다.
"애기 엄마는 어디 가유? 난 은하 가는디……. 차가 언제 올라나."(191쪽)
그리고, 이것이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은하 가는 버스가 오면 알려달라고 건네는 말이라는 것을, 역시 알 수 없었다.
삶의 방식뿐 아니라 말하기 방식도 조금은 다른 곳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내가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나와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 도시를 특히 도심을 좋아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그러면서 절대 감상적이 되지 않으리, 싸구려 감수성을 자극하는 일에는 절대 동요되지 않으리라는 결심도 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의 빗장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경계심을 품었던 것은, '다운천사와 울보엄마의 시골이야기'라는 말을 표지에서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의 눈물겨운 수기쯤으로 이 글을 오해하는 마음도 있었나 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나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글쓴이의 아들이 장애아라는 사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나 특별한 일이지, 정작 글쓴이에게는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들일 뿐이었다.
글쓴이는 시골(좀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좋겠는데) 생활에서 겪게 되는 매우 사소한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솔직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예민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결코 읽는 이에게 감동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섣불리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시골에서 살면서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장애아를 키우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이야기, 서른을 넘기면서 이십대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 이야기, 도시에서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익혀가면서 달라져 가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머릿속을 떠다니던 말은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은 뭘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하는 것이었다. 글쓴이야말로 정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신었던 양말들이 밀려난 것처럼,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웠던 삶의 방식들도 하나씩 밀려나, 이제 저는 좀더 편안하고 느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뜻으로 그 일을 받아들입니다.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자책하던 것을 '왜 그렇게 얽매여 살았던가?'하고 어리기만 했던 저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97~99쪽에서 발췌)
글쓴이는 도시 생활에서는 깨닫지 못했지만 시골에서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나 시골(정치적으로 좀더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없을까)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글쓴이와 같은 깨달음이나 삶의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글쓴이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시골에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시골에 가서 살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글쓴이처럼 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바로 지금 내 자리에서 말이다. 의미도 없이 쫓기거나 휘둘리지 않고, 정말 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나도 이 도시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본다.
도시에서 종종거리며 살면서도 어쩌면은 글쓴이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여유로움과 느슨함을 흉내낼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연과 가까이 살고, 또 그곳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글쓴이의 이런 감수성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다.
"소나무의 굴곡이 여느 때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편안히 이야기할 때 이쪽저쪽 모로 눕는 할배들처럼, 어떤 날은 늙은 소나무 할배들이 정말 몸을 뒤척이거나 모로 돌아눕기라도 한 것 같답니다. …… 그러고 보니 소나무 할배들은 솔숲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을에는 옛날 한옥을 새로 고친 집이 몇 있는데, 대개 들보 같은 뼈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현대식으로 고친 집에 살림살이도 다 현대식, 그런데도 옛것 그대로인 굵직한 소나무 들보를 보고 있노라면 묘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소나무 곁에 살던 사람들은 죽어 소나무 아래 묻히고, 사람 곁에 살던 소나무는 죽어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자자손손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106쪽)
그리고, 이런 감수성과 더불어 곳곳에 나타나는, 그렇지만 결코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예민함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소소한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들꽃 하나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담담하게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 이 두 가지가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게 만든 것 같다.
아이랑 씨름하고 있는 언니를 보면서, 그 동안 잘못 산 것 같다는 친구의 푸념을 들으면서 불쑥불쑥 이 책 생각이 났던 걸 보면 나는 이 책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처음에 가졌던 경계심 없이 마음을 열고 다시 읽는다면, 더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왜 중요한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다가 예닐곱 해를 더 산 다음에, 시골의 한 장날,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아주 편안한 얼굴로 앉아있는 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 헛헛함.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아서 느껴야 했던 그 막연한 헛헛함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 장날 버스 정류장을 두고서 이 땅에서의 삶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니 고마운 일입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이라도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살다가 묻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