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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표지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그냥 단 한권의 책일뿐 그러나 작가의 이력을 보고 나서 좀 놀라웠다 그리고 왜 제목이 검정도 색깔이다 인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그리젤리디스 레알 그녀는 제네바의 왕립묘지에 유일하게 묻혀있는 화가 이자 작가이며 창녀이다 마지막 창녀라는 단어에 어째서 그녀가 왕립묘지에 묻히게 되었는지는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읽었다면 알 수 있다
레알은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취리히 장식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녀는 네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로 이주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곳이 없는 그곳 독일 뉘르베르크에서 빌이라는 흑인남자와 네 아이와 살았지만 먹고 살일이 막막해 그녀는 매춘업을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매춘업을 시작하면서 1974년에 검정도 색깔이다라는 책을 출간했고 그녀가 그동안 살았던 인생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적이며 슬프고 애뜻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이고 경쾌하며 심지어는 유머러스한 면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놓인 이 운명들을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살기 위해 맞서 나간 것이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 책을 보면 그녀의 삶은 맹렬적이다 그래서 그녀의 삶에 감동받았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2차 대전후 미국 흑인들로 가득찬 독일의 도시 뮌헨의 상황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거기서 매춘업을 하면서 여러 흑인 군인들과 만나고 사랑하고 심지어는 청혼까지 받는 그녀는 로날드 로드웰에 대한 이야기와 매춘업을 같이 한 빅마마 셰익스피어 절대로 잊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레알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절대로 비관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인 창녀를 당당하게 말했다 66세라는 나이에 매춘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레알은 여성의 선택권을 주장했고 전 생애 동안 매춘인들이 존엄을 갖고 자신들의 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싸웠다 게다가 책을 출판하고 그리고 매춘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혁명을 외침으로써 혁명가로서도 이름을 날리게 된다
레알의 삶 자체가 감동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 자체를 충실히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함께 분노하고 아파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 여자의 인생을 남의 고단한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녀는 혁명을 꿈꾸고 이루었으며 마지막 매춘을 그만두고 매춘인을 위해 함께 열심히 싸운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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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젤리디스 레알. 그녀의 삶에 토달거나 침뱉기에 나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아비 없는 자식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 선택한 삶의 수단이 창녀였지만 그것만으로 평가하기엔 그녀의 삶은 엄청 드라마틱하고 다채롭다. 현대사회에서도 아이 딸린 여자 혼자 살아가기가 만만찮은데, 그녀가 살던 시대는 더 벅찼을 것이다. 소설 <검정도 색깔이다>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의 꿈틀거림을 형상화한 제목인 동시에 불의에 항거하고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찾기 위해 혁명적 창녀 역할을 했다는 작가의 자전적 삶의 기록물이다. 묘비에 쓰여 있다는 그녀의 직업 <작가, 화가, 창녀>가 문학적 색채와 사회비판적 성향이 동시에 드러나는 작품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동시에 그녀에 대해서도. 아무래도 소설과 작가의 삶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우러러보거나 응원할 정도까진 아니라도 타인이 걷지 않은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내고 묵묵히 걸었던 그녀의 삶에 경의를 보낸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고수하는 바를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지. 여자에게는 아이들과 정신병력을 가진 흑인 애인이 있었기에 더 고달팠을 수도, 더 힘이 됐을 수도 있지만 국경을 넘어 독일로 넘어오면서 더 심해진 정상적 인생에서의 엇갈림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 여러 명의 아이들을 여자 혼자 힘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애인을 버릴 수 없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주는 버거움은 그녀 혼자 또는 스스로 감당하기에 한도를 넘는 것이었을 것이다. 멀쩡한 일자리를 구하고도 뻗쳐오는 어둠의 그림자와 한 번 타협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는 인생.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타락을 타락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나는 창녀. 당신은 고귀한 열매가 되어 나의 두 손 안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그렇다. 우리는 창녀들이다. 우리의 육체는 당신의 악기이다. 성기란 경이로운 기관이다. 그것은 자연과 일치되어 살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정신적으로 억압되고 무모한 자들이 문명이란 걸 이루면서 세상에 병, 독, 악, 집착이 생겨났다. (p.432)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고도 그 길을 늘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그녀의 선택과 열정은 현명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로소 자각한다. '이해'와 '받아들임'은 다른 의미인가 보다. 평소 생각도 자존도 없는 여자들이 여성성을 최대 무기로 삼아 하는 부도덕한 짓이라 비난 일색이던 나조차 그녀의 삶에 동조되기 시작한 걸 보면. 나는 여전히 그녀가 여성성을 내세워 타락해간 게 아니라 여성성을 무기로 본래 가져야 했던 삶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미래를 찾으려 애썼다는 걸 믿고 싶다. 버려도 아무 상관 없었을 흑인 애인을 달고 다니며 무한한 책임과 애증을 저울질하며 갈등했을 그녀를 그저그런 창녀로 인식하기엔 내가 너무 감성적인 걸지도.
어쨌거나 독자로서의 난 그녀의 삶을 충실히 따라갔다고 믿는다.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아파할 정도는 아니라도 이 여자의 고단한 인생을 남의 일로만 치부하는 철없는 나이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일생은 이미 마감. 마침표를 찍어버린 페이지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인정될 리 없지만, 어떤 일이 있을 경우 방관하는 고상한 여자가 될 것인지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나아가는 혁명적 여자가 될 것인지 진지하게 인생을 고찰해볼 문제다. 무언가를 바꾸기에 여전히 나는 너무 용기가 없긴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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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제목 속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엄청나게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을 제목. 하지만 이 제목조차 그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편집자의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쿨하게 웃었다던 작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자신으로 세상을 향해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저돌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했다는 그녀의 이름은 그리젤리디스 레알이라고 한다.
화가로서, 작가로서 인생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삶을 내려놓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묘비 위에서도 정작 집착스러우리만치 놓지 않았다던 창녀라는 이름을 들고 삶을 마무리한 이 책의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변한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을 일을 자신의 평생이라 주장하는 여자. 모두가 잊어버리거나 외면하기를 바랄것 같은 일을 그녀 자신이라 말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검정도 색깔이다는,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 책 속에 글자로 담겨져 있는 그녀의 인생은 거칠었다. 그리고 그 거칠은 인생을 표현해낸 문장과 단어, 글자의 획 하나하나까지도 거칠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꾸미거나 다듬고자 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저 그녀가 경험했던 것들 그대로, 그 순간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대로를 곱씹으로 적어내려간 듯한 느낌이 더욱 강했을 뿐이다. 지독한 가난과,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도망과 도망, 그리고 또 도망.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감정을 다듬어낼 힘이나 시간따윈 없었던 그녀의 삶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는 그렇게 거칠고도 거칠은, 그래서 그 잔인함이 더욱 처절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 책속에 담담히 전하고 있었다.
매춘을 일러, 인류 최초의 직업이라고도 하고, 바퀴벌레처럼 세상이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모습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춘을 가장 본능적인 행위로 보지 않는다. 그저 경멸가득한 시선을 담아 인생의 가장 나락에서야 피할 수 없이 맞딱드려야 하는 생존의 본능 정도로 밖에 치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경멸하고 무시하며 눈 아래로 바라볼 뿐이다.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겨우겨우 연명해온 그녀의 인생을 담은 글이기에 이 글은 절대로 아름답게 치장될 수 없었으리라. ![]() 그녀는 분명, 일생의 어느 한 조각에서 남들이 모두 멸시하는 일을 하며 생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화가로서, 또는 작가로서의 삶 역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작가, 화가, 창녀... 창녀라는 단어를 그녀의 인생에서 조금 가장자리로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왜 그 이름을 묘지까지 끌어안고 갔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인생전체가 창녀로서 살아야 했던 인생의 한 토막에 의해 가장 크게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창녀로 살았고, 창녀로서의 글을 써내려갔다. 창녀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들의 권리와 희망을 부르짖었고,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창녀로 대중앞에 내세우며 창녀로 살았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창녀들을 위해 살았으니, 비록 그녀가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을 창녀로 지냈다고 해도, 그녀는 온전히 온 인생을 창녀로 살았음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그리고 바로 그런 그녀의 인생이 바로 이 책을 채워나가고 있다. 어떤 색을 덧칠해도 그냥 그대로 검정으로 남는 검정색깔처럼. 진하고 강하게, 그리고 지울수도 없게 말이다. ![]()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분명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직업에 귀천을 묻는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눈 아래로 보는 아랫등급의 직업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작가 그리젤리디스 레알은 분명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장 밑바닥이라 멸시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바닥으로 바닥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그 아래로 숨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자신들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외치며 생을 보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한 없이 부끄러워하거나 경멸을 보낼 자신의 삶을 어떠한 꾸밈도 없이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처럼 혁명적인 사고를 하는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하는 그녀들을 향한 손가락질 사이에 몰래 숨어 나 역시도 그녀들을 향해 존중이 아닌 무시와 멸시를 보내는 쪽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주장하는 만큼 매춘이 혁명적이고 예술적인 행위라는 생각도 단 한번 해본적이 없다. 찬성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본다. 세상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세상을 향해 처절하게 외치고 절규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가 살아숨쉬는 인간임을 놓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그렇게 처절하게 외침이, 그녀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렇게 고통속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울부짖음을 했던 것이라고..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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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은 아무래도 좀 어두운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흰색은 모든 것을 다 반사하기 때문에 흰색이지만, 검정색은 모든 색을 다 받아들여야만 가질 수 있는 색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편견들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요. 그 중에 하나도 바로 검정이라는 색에 관련되어 가지고 있는 편견도 있죠. 검정색은 빛도 없고 아무 색도 없을거라는 생각 말이죠. 하지만 블랙홀 조차도 빛을 모조리 흡수한다는 것을, 그리고 색칠놀이를 해봐서 알겠지만 모든 색을 다 합치면 검정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 우리들은 검정은 색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곤 하죠.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는 것처럼 우리들은 옷이나 색을 통해서 자신을 대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책에서는 검정에 비유되는 사람을 창녀라고 불리는 몸을 파는 여자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여기에서도 우리들의 편견이 또 한 번 나타날 것 같아요. 사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여자들. 그리고 그들이 왜 창녀가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매춘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지탄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더구나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또한 성을 사기도 하는데 말이죠.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위선일까요? 어쩌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거나 나쁜 일을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들의 삶이 매춘이나 마약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검정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말이죠. 사실 우리들은 그들의 생활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작가 스스로가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매춘을 하고 그가 살아왔던 삶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놓은 이 자서전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매춘을 혁명적 행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거에요. 특히나 사후에 왕립묘지에 묻히기도 한 그녀의 인생을 정말 파란만장한 것 같아요. 회색이 아닌 검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우리들의 삶이 그들의 삶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검정이라는 색에 대한 오래된 오해와 검정이라는 굴레를 써야했던 그녀들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도덕이라는 잣대와 위선에 가득찬 사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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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화가이며 창녀라는 직업을 가진 여인, 그리젤리디스 레알 ㅡ.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은 창녀라는 직업이다. 그것도 단순한 창녀가 아닌 ‘혁명적 창녀’.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그녀의 묘지가 제네바의 왕립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녀는 다른 이름도 아닌 ‘혁명적 창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무엇이 그녀를 그런 놀라운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을까. 이미 그녀의 직접에 창녀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창녀라는 직업에 대한 어떤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그런 선입견이 그녀와 그녀의 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검정도 색깔이다』는 앞서 말했듯이 작가이자 화가이며 창녀라는 직업을 가진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이다. 생(生)을 유지하기위한 힘겨운 삶에서 그녀가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특별한 고저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이 쭈~욱 나열되는 느낌이랄까. 그녀 삶 자체가 많은 굴곡이 있기에 특별한 장치도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거처를 비롯해 거쳐 간 남자들,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사랑들을 마치 기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드문드문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속에 그녀의 깊은 신념(?!)을 담아낸다. 흑인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이라든지, 흑인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라든지 하는…. 그녀의 그런 무한한 사랑에 쉽게 공감되지는 않으나 그녀의 삶, 그 시대의 상황을 조합해보면 뜬금없는 사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 담긴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나에게는 그랬다. 머리로는 받아들여지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사실이 말이다.
진실로 사랑해보지 않은 자는 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길. 책은 그런 사람의 손 안에서보다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좀 더 따스하게 머물 테니까. - P282
특히, 이런 부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당당하고, 심지어 오만하고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일까?! 물론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떤 행동-쉽게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을 하더라도 빠지지 않는 뜨거운 열정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삶과 사랑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내가 못했어!”를 “내가 안했어!”로 바꾸는 말장난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합리화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런 모습, 그런 느낌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어쩌면 나 역시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그 어쩔 수 없는 상황마저도 사실은 어쩔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행한 행동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그래서 결국엔 자신의 초라하거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싶은 욕망들이 글이라는 통로로 발산되기도 하고, 글이라는 갑옷으로 둘러쳐지는 것이 아닐까. 글이라는 상위적 가치-그렇지 않더라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를 통해 그 자신마저도 상위의 가치를 지닌 인간이 되고자하는 생각이랄까. 물론 나의 생각과 시선이 너무 삐딱하게만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기에 사회의 위선을 비난하는 행위인 레알의 침 뱉기에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레알, 그녀의 삶이 예술이니 혁명적 행위이니 하는 말에 대해서 감히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앞서 살짝 말했지만, 레알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옮긴이의 말에서는 그것을 남김없이 퍼주는 그녀의 삶과 사랑에 대한 과도한 사랑때문이라 말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그 열정이나 사랑에 있어서는 감히 그녀에게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그녀의 열정과 사랑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느낌… 나의 뭔가에 고정이 되어버린 듯 한 머리와 가슴을 탓해야만 하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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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력을 소상히 들여다본다. 약 30여 년간 매춘부로 살았으며, 작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매춘부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앞장서 '혁명적 창녀'로 불린 여인. 성노동자 뿐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혁명에 앞장서 사후에는 제네바 왕립묘지에 매장된 '작가, 화자, 창녀'였던 여인. 생전에도, 사후에도 저 밑바닥에서 생존과 존엄 사이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렸던 여인임은 틀림없는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은, 읽기 전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해 오히려 파격의 수위에 대해 단단히 경고를 받은 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어 있던 흑인 애인 빌과 두 아이를 데리고 불법체류하게 된 독일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도, 오래 갈 수도 없었다. 숙식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조차 어렵고, 빌과의 사이가 벌어지자 그녀가 택한 일은 몸을 파는 일이었고, 이 은밀한 직업은 쫓기고, 추방당하는 일을 반복하는 내내, 그녀의 여생의 대부분을 몸담는 직업이 된다. 빌에서 로버트 벤슨, 로이 블레인, 그리고 로드웰로 바뀌는 흑인 애인들과의 변절과 마리화나에 찌든 연애사는 그녀의 삶을 한층 고단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녀를 지탱시키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소설의 방대한 분량은 매춘의 방대한 기록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은 자신과 관계한 이들의 이니셜과 특징들을 나열한 『고급 매춘부의 무도 카드』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첫 소설에서도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다. 변태성욕자들의 음험한 욕망, 애정과 폭력이 공존하는 애인들과의 치정, 하룻밤을 위한 위험한 호객행위에서 매음굴의 일원이 되고, 매춘만이 아닌 마리화나 중개에서 직접 밀반입해서 파는 위험천만한 일까지, 일기나 다름없는 은밀한 기록들이 숨 돌릴 겨를도 주지 않고 끝도 없이 펼쳐진다. 매춘부의 자전적 소설은 꼭 이래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회환과 처절함으로 가득 차야할 것만 같고, 밑바닥 인생의 추레함을 신파적으로 풀어낼 법도 하고, 그네들도 결국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역설하며 끝맺으면 어색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일반론도 무엇도 아니다. 『검정도 색깔이다』의 그녀, 그리젤리디스 레알이 근근이 먹고 살아야했던 생존을 위협받는 시간은 분명 추레했지만, 매춘에 대한 태도는 부끄러운 것도, 저급한 삶의 방식 또한 아니다. 애인과의 관계가 자꾸만 뒤틀리는 것 또한 매춘의 탓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아무도 포용해주지 않는 남자들의 욕망마저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구원자임을 자처한다. 소설 자체보다 저자의 이력이 혁명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본문보다 '혁명적 창녀'라는 설을 널리 퍼지게 한 부록이 훨씬 투쟁적이다. 이 소설을 시초로 자신의 삶, 동료 매춘부들의 인권, 자신들의 몸을 한껏 이용하면서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에 앞서 가감 없이 삶을 돌아보는 위선도, 위악도 없는 자세가 한껏 분출되는 격렬함이야말로 이 소설의 파격이다. 매춘부로서의 삶을 낮추지도,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을 저열한 존재로 치부하는 시선들을 마음껏 조소하는 통렬함이 넘쳐난다. 검정도 색깔이듯, 그네들의 존재가 불편하다고 해서 불쾌하게 취급해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그 선언은 여전히 문제적 울림을 안고 진행 중인 것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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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를 깨는 적나라함 매춘이나 마약에 대한 얘기는 픽션에서도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런데 논픽션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 더구나 본인의 체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여간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그리젤리디스 레알은 이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다. 붉은 색 대저택 거리의 여인이 되어 뭇 사내들을 상대한 일에서부터 아프리카 모로코에 가서 직접 구입해 온 마약을 밀거래로 유통시킨 것은 물론 직접 복용한 사실까지 가식 없이 생생하게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대담하다 못해 치기 어린 것처럼 보여 뜨악한 감을 지울 수 없게끔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얘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조금씩 그녀의 삶에 공감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유별난 괴물이 아니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 같이 사랑하고 고민하고 연민에 빠지곤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매춘이나 마약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죽지 못해 겨우겨우 연명하는 구차한 인간들이란 선입견을 갖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곳은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생존을 위한 동물적인 본능만 남아있는 곳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곳에도 인간, 우리와 똑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검정도 색깔이다]는 이런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매춘굴에 있는 여인들 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하고 그들도 사내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특히 집시 집단 거주촌에서 타타와 니나, 소냐 등과 나눈 아름다운 우정은 가족애랄 정도로 뭉클하게 만들었다. 진실한 사랑이 있었네 생존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매춘녀는 대가 없이는 사랑을 나누지 않는 프로이다. 그러나 [검정도 색깔이다]에는 그들에게도 가슴 울렁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존재함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드웰과의 아릿한 얘기는 정말 설레게 만드는 대목이다. 표범의 얼굴, 풀잎처럼 매끄러운 이마, 나무껍질처럼 자글자글 갈라진 두툼한 입술의 로날드 로드웰이여. 당신 눈동자의 보랏빛 홍채는 깊고 신비로운 우물입니다. 나의 밤, 나의 술, 나의 마약입니다. 당신의 페니스에서 솟구치던 유황과 암모니아 맛의 액체를 마셨었지. 당신 복부에 고인 짜디짠 샘의 가슴 위에 구슬 지어 흘러내리던 푸른빛 포도송이들에 축축하게 젖어가며.(281쪽) 진실로 사랑해보지 않은 자는 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라는 작가의 일갈은 인생의 의미를 달관한 이의 솔직한 선언이라 하겠다. 영원히...듣고 있니, 로드웰. 난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지하 독방에서 20년 동안 철창신세를 지는 것도 행복일 거야.(373쪽) 한 고귀한 영혼의 자존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의 영혼을 지닌 그녀를 향해 창녀라고 침 뱉을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거울에 비친 우리가 오히려 때 묻고 속은 좁아 터진 모습이니 말이다. 그녀에게선 혁명가의 자부심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우리에게로 오는 성경에서 말하듯 피곤하고 지친 모든 자들, 즉 우리가 자살과 고독에서 구해내는 자들, 우리의 유방과 질 속에서 스스로를 되찾는 자들, 가벼워진 고환과 뜨겁게 달궈진 심장으로 가정에 되돌아가는 바로 그자들이 우릴 괴롭히고, 비난하고, 부정하고, 세금을 매기고, 바가지를 씌우고, 억누르고, 맘대로 우리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집어넣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자들을 감금하는 짓거리를 그만두도록...(433쪽) 진솔하면서도 진부하거나 추하지 않고 인간 본연의 정서, 고귀한 영혼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는 선언이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존감 넘치는, 스스로 혁명가임을 자처하는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씁쓸한 패배자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여인의 담대한 자기 규정, 세상을 향한 자존감 어린 목소리가 바로 [검정도 색깔이다]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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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이 혁명적 행위라고? 인류 최초의 직업으로도 불리는 매춘을 혁명적 행위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젤리디스 레알, 직업은 창녀다. 또 다른 직업은 작가와 화가다. 이 세 직업은 그녀의 묘지에 적힌 것들이다. 그리고 그녀의 무덤은 놀랍게도 제네바의 왕립묘지에 신교개혁자 장 칼뱅과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업적이 어느 정도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이 부분은 작가 소개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다. 어떻게 그녀가 창녀가 되었는지, 창녀가 된 후의 삶은 어떤 것인지, 흑인에 대한 그녀의 예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사실 처음에 건조한 문체와 자유로운 구성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적응하고 난 후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문체가 가끔 집중력을 깨트리기도 하지만 삶의 자유와 더불어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한 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지만 그 삶이 아직도 윤리와 도덕이란 두툼한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나에게 버겁기만 하다. 한때 결혼과 매춘의 차이가 무얼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런 고민은 내밀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느 부분에선 윤리와 도덕이란 허울이 더 강해지기도 했다.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그것도 잃지 않기 위해 보수적으로 조금씩 변한다. 이런 변화가 그녀의 행동과 삶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았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보여준다. 쾌락을 위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거나 마리화나를 파는 행위는 비록 과거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의지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것은 섹스나 매춘이 아니다. 바로 자유다. 소설 중간에 그녀는 부자 인디언 흑인을 만나 삶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그 삶은 여자를 집에 가두어두고 가사 일에 전념하는 것을 넘어 억압하고 노예처럼 만드는 일이다. 그녀가 왜 그 남자의 아내가 도망쳤는지 깨달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편안한 일을 위해 힘든 일을 포기하고 달아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매춘 등을 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이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매춘으로 발을 돌리게 될 때까지의 삶과 본격적으로 매춘을 할 때와 매춘과 마리화나 판매를 동시에 할 때다. 처음 하나의 직업으로 그녀가 매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다만 또 다른 삶의 한 면을 본다는 느낌이 오히려 더 강했다. 그녀를 찾는 수많은 남자들의 성적 취향과 변명과 넋두리가 더 흥미로웠다. 욕구불만을 창녀를 통해 풀어내는 수많은 남자들의 행진은 지금도 변함없다. 특히 그녀가 그렇게 흑인 예찬을 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데 잠깐 잠깐 나오는 감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 또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검정은 많은 뜻을 품고 있다. 먼저 그녀가 사랑했던 흑인의 색깔이다. 밀입국자로서 매춘녀로 살면서 그녀가 겪게 되는 삶의 어둠이기도 하다. 이것을 좀더 확대하면 매춘여성문제로 이어진다. 여기에 이 소설 속에서 그녀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인 집시들의 어둡고 아픈 과거가 담겨 있다. 아마도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검은 색의 의미가 거의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가볍게 읽기에, 매춘에 대한 흥미로 읽기에, 단순히 한 여성의 삶의 질곡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도덕과 윤리라는 두 시선을 벗어던져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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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435p의 책장을 덮는 것과 한숨이 내쉬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것은 비로소 이 책을 다 끝냈다는, 그리고 더 이상은 그녀의 삶과 내 삶을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한숨인 셈이었다. 내가 이 책을 얼마나 붙잡고 있었을까, 손가락을 하나, 둘 세어 따져보니 족히 열흘은 붙잡고 있었지않나 싶다. 그것은 나의 구미를 잡아당기지 않는 이 책의 한계,라고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10월 끝무렵부터 한 장, 두 장 읽어가 11월, 열흘동안 50p도 못나가리 만큼 지루하여 하품을 자아내는, 그러다 끝내 잠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그녀의 삶을 이제는 끝내야했다. 물이 없는 우물 속의 두레박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내는 딱딱,거리는 소리는 두레박이 내는 것이 아닌 내 마음 속의 자명종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아챈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갈증이 전혀 나지 않는 상태에서 물을 들이키는 것은 차오르는 배를 바라보며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데, 내게 있어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치졸함과 추악함이 맛깔나는 잼으로 변모하여 빵 속에 들어가 그녀의 생을 눅눅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 ‘검정도 색깔이다’ 그녀는 검둥이 애인 빌을 정신병원에서 탈출시키고 그를 48시간 내에 이 땅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엄명을 받게 되어 그와 두 아이와 함께 독일로 이주하여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일, 매춘으로서 돈을 얻게 된다. 책 전체가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서른 두 살 이후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있기에 줄거리에 대해 나의 어쭙잖은 말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대한 평점을 이렇게밖에 줄 수 없는 이유가 프랑스 소설이어서, - 실은 그 까닭에 마음이 무거워진 탓도 있었으나, 비단 그것만으로 이 책을 거부하였더라면, 난 이 책 자체를 읽지 않았으리라. 게다가 그 까닭으로 읽는 것에 부담을 느꼈더라면 전에 읽었던 기욤 뮈소의 작품도 하나의 작품만 읽고 안녕,해버렸을 것이 분명한데, 나는 그의 책을 꼬박꼬박 읽어왔었다. 프랑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 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도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매춘부에 대한 거부감 역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가파른 언덕을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이 숨차게 올라가는 나에게서 일말의 미소라도 원했던 것이라면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나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거부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책으로 다가왔는데, 그 까닭을 구태여 찾자면 문장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내게 있어 위장을 헤집는 것과 같은 불쾌함을 동반한 졸렬함이었고, 그것은 음식물을 섭취한 후에 이 책을 손에 집는다는 것은 내게는 무척이나 고역과 다름없는 역겨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사랑의 결정체라고 불리우는 섹스라는 것이 그녀에게는 사고 파는 것으로 간주된 그 순간부터 경계했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시대상황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다고 줄곧 생각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몇 번의 노동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침으로써 매춘부라는 것은 오롯이 자유의지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말고는 다른 것에 대한 열정은 보이지 않았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열정조차도 내 검은 눈동자에 만큼은 비치지 못했으니까. 세상이 그녀를 병들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병들게 했다.
게다가 “진실로 사랑해보지 않은 자는 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길. 책은 그런 사람의 손 안에서보다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좀 더 따스하게 머물 테니까.”이런 오만한 그녀의 글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어 내리기에 내 심장은 그렇게 말랑말랑한 상태가 아니었음이 애석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래. 그녀에게 있어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녀가 끄트머리에 진정으로 사랑했다던 로드웰, 그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쓰여졌다던 그 역시 내 눈엔 다른 자들과 같은 사람들처럼 보였음에 왜? 라는 말을 반문해야했는데, 남이 보기에 자질구레한 사랑도 자신에게는 영속할 줄 알았던 그녀의 사랑이 가엾기까지 하다. 부록에 ‘매춘은 혁명적인 행위이다.’라고 쓰여져 있고, 그곳엔 그녀가 제네바의 길거리를 걸으며 써내렸던 글이 있다. 오만함의 극치는 어디까지인가, 나의 한숨은 얼마나 더 깊어갈 것인가. 그녀의 글은 오만하고, 그런 그녀의 글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뿐이다. 장하다. 이 책을 끝까지 정독하여서. 나는 남의 인생을 내것인 양 가타부타하기는 싫지만, 내 한참 모자란 서평이 그녀의 생에 어디까지 참견하려 손을 뻗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한 벌로 몸은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입 주변에 꽃봉오리들을 피울것이다. 얼룩덜룩한 그 꽃봉오리 속에는 독을 품을테지. 그것의 이름은 ‘매독’······. 아, 도저히 안되겠다. 마음 속을 정화하고자 나는 다른 프랑스 소설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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