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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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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은 유년의 내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또깍또깍 시계 초침 사이로 침입자의 발소리가 들렸고, 목제가구의 뒤틀림 소리는 상상 속에서 침입자의 문 뜯는 도끼질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듯 피로한 몸을 잠에 맡겨버렸고,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아아, 몹쓸 어둠아. 새벽의 푸른 빛 아래 어서 무릎을 꿇어라. 더디게 도착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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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은 유년의 내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또깍또깍 시계 초침 사이로 침입자의 발소리가 들렸고, 목제가구의 뒤틀림 소리는 상상 속에서 침입자의 문 뜯는 도끼질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듯 피로한 몸을 잠에 맡겨버렸고,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아아, 몹쓸 어둠아. 새벽의 푸른 빛 아래 어서 무릎을 꿇어라. 더디게 도착한 아침이 어둠과 더불어 침입자를 몰아내었지만,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다시금 밤은 되풀이되었다. 공포는 그때마다 새로웠다. 그래, 생각해 보면 우리 유년 혹은 소년기의 나날들이 그리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 희망, 뿌듯함 보다 두려움, 심심함, 질투, 꾸중...... 이런 낮은음자리의 어휘들이 옥죄고 있었던 시절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어째서 우리는 그 시절의 추억을 아름다웠던 부분만 편집해서 회상하는 것인지. 혹여 지금 여기가, 이 시간이 고달프기 때문에 생긴 의식의 왜곡은 아닐는지. 세월은 과거완료의 먼 추억까지도 다시금 바꾸어버린다. 추억을 곱씹는 인간의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간헐적으로 리메이크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화의 첫 번째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 在細雨中呼喊』은 우리가 돌이키는 유·소년이 결코 즐거운 시절만은 아니었다고 예증한다. 지금 겪고 있는 두려움과 고독의 발원지가 바로 그곳이었음을 더듬어 찾아내는 소설이다. 거기에는 마을 처녀총각들의 스캔들이 있고, 자신의 2차 성징을 처음 발견하던 떨림이 있고, 주어진 강제로부터의 일탈이 있고, 지인(知人)들의 죽음이 있다. 또한 그 죽음을 빌미삼아 이득을 꾀하려는 어른들의 얄팍함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유(소)년의 시선으로부터 평생을 거추장스럽게 옭아맬 자의식(自意識)은 비롯된다. 국내에서는 먼저 출간된 후속작 『허삼관 매혈기 許三觀買血記』나 『살아간다는 것 活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관조와 여유를 이 소설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초기의 단편을 모은 『내게는 이름이 없다 我沒有自己的名字』에서 볼 수 있는 살이[生]의 두려움, 주위 사람들과 합류하기 어려운 자의 외로움이 더 짙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온전히 무거운 어조로 일관하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인물의 단순화·희화화, 노골적인 혹은 은근짜한 음담 등 후일 위화 소설을 구축하는 특성들을 충분히 담지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후속작들이 주로 배경 ―예를 들면, 가난과 같은―과 인물 사이의 갈등인데 비해, 이 소설은 형과 나, 형과 아버지, 아버지와 나, 동생과 나,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 인물 대 인물 간의 알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손광림이라는 주인공의 유년·청소년기의 기억 편린들을 열 여섯 개의 독립된, 그러나 하나의 흐름으로 관통될 수 있는 일화들로 모아 놓았다. 세월의 흐름대로 배열했다면 김원일의 『노을』 혹은 『마당 깊은 집』과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 되었을 터이다. 근데 이 일련의 이야기들을 위화는 왜 뒤죽박죽 헝클어 놓았을까? 위화의 친구이자 이 책의 번역자인 최용만은 그 까닭을 '그 상처가(위화의 유년을 지칭하는 듯) 아직 아물지 않았고 아마도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해설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위화는 책머리에 '내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지만'이라고 토를 달고 있지만, 어쩜 그 토를 달았다는 자체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반증일거라 짐작된다. 얼크러진 흐름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토로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삶 전체를 한 가지 색깔로만 표현할 수 없듯, 위화에게도 유(소)년의 기억은 희비가 분별없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또한, 충만으로써의 유(소)년이 아니라, 어떤 결핍으로써 설명되는 유(소)년. 위화는 그것을 까발리고 싶었던 같기도 하다. 모든 재산과 가족을 차례차례 잃고도 미소를 지으며 밭갈이하는 복귀 노인(『살아간다는 것』)이나, 피를 팔아 처자식을 근근이 연명하고 끝내 웃으며 한 잔 술을 들이키는 허삼관 노인(『허삼관 매혈기』)...... 그들을 유년, 소년, 청년기의 결핍을 건너 도달하고픈 위화의 이상향(理想鄕)이라 일컫는다면 작가에게 욕은 되지 않을는지.
s********2 2004.01.26. 신고 공감 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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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在細田呼喊 (1993)] - 위화 저 / 최용만 옮김
"가랑비 속의 외침 [在細田呼喊 (1993)] - 위화 저 / 최용만 옮김" 내용보기
1. 3월의 책 선정의 변리스트에 오른 책 가운데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북살림의 3월의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제7일>을 읽은 경험1 덕분에 위화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는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운이 충만한 휴머니즘 문학이라고 평가해왔었다. 가장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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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의 책 선정의 변


리스트에 오른 책 가운데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북살림의 3월의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제7일>을 읽은 경험1 덕분에 위화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는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운이 충만한 휴머니즘 문학이라고 평가해왔었다. 가장 최근의 작품이었던 <제7일>에 도달해서야 작가는 죽음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가랑비 속의 외침>은 2월의 책이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핵심주제인 로고테라피에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던져줄 만한 작품일 것으로 기대했다.


2.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죽음


13. 기억 속의 일이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날려버린 채 껍데기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느낌은 그 안의 것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 아마도 기억이란 속세의 은혜와 원한을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인듯싶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는 설명만 듣고 선택한 이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니 충만한 삶의 기운을 내포한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가랑비 속의 외침>의 배경인 1960년대의 중국. 이곳은 가난에 수반하는 고생스러움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고 성적 욕구를 푸는 것정신적인 만족과 가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삶은 점점 더 팍팍해져만가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빠 여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도무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공생을 바라기보다 홀로 몸뚱아리에 의존한 채, 경험 하나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327. 어른들의 권력이 아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들과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오랜 역사의 산물인 공맹과 노장의 정신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규범은 무너졌으며, 사회안전망은 부재했다. 사회는 점차 부패해져만 가고, 손광림의 주위에는 불온한 영혼의 소유자들만 가득했다. 이런 세상에서 유년기를 보낸 손광림은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함께 이겨낼 사람들을 물색하고 접촉하지만, 그 누구와도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손광림을 떠나갔다. 이들은 현재의 손광림의 의식 속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니 살아가기 벅찬 순간의 손광림의 무의식이 그들을 정중히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이 죽음이 완결이 아닌 연속이라는 점이다. 만남과 죽음의 기억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무한루프처럼 이어진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가랑비 속의 슬픈 외침이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진다. 손광림 홀로 그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위화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작품은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웠다. 내가 그에 대해서 평가해왔던 기본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32.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시종일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비한 호흡과 현실적 존재가 섞여 있어서 나는 그의 진정한 사인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마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할아버지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아침.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나서 바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겁과 쥐새끼 같은 생활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소설의 형태가 삶을 갈구하는 것에서 죽음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변했으나 그것을 그려내는 그의 개성있는 문장은 그대로였다. 이야기의 힘이 센 특유의 문장으로 시점이 흔들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숨은 타고난 해학적 문체로 그들이 겪을 비극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느꼈던 위화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3.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록


위화작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과거의 슬픈 기억을.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일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의 명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손광림의 기억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광림이 살아있는 한 그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46. 산 자가 망자를 땅에 묻고 나면 망자는 영원히 그곳에 누워 있게 되고 산 자는 계속 살아 숨쉰다.


48. 계속 살아갈 자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오직 죽음을 앞둔 자의 눈만이 햇발을 뚫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음으로써 그 공간의 사람들을 불온하게 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테다. 평범한 사람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비극을 수차례 경험한 손광림이 그곳에서 정체되지 않고, 아픔을 딛고, 북경으로 주거지를 옮겨갔다는 점은 단순히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초월한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당신을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미 비극인 것이다.


30. 내가 남문을 멀리 떠난 후부터 남문은 내게 고향으로서의 친근함을 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난 이 생각을 고수했다. 옛일을 회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착함을 잃게 되면서 짐짓 평온을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고, 설령 그것이 감상적인 상황과 함께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31. 기억 속의 저수지는 내게 늘 따뜻함을 전해주는 곳이었으나, 내 앞에 나타난 현실 속의 저수지는 내 과거를 일깨웠다. 수면에 부유하는 더러운 쓰레기들은 저수지가 날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과거의 한 기표로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문에 남아서 나에게 영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45. 시간은 투명한 어둠을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은 감춰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아니다. 논밭, 거리, 강, 집은 모두 사실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 함께하는 동반자들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앞으로 혹은 뒤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225. 나의 기억이 맹렬한 속도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질병과 노쇠함이 그의 과거를 무정하게 갉아먹어 들어갔다. 그는 그 자신이 가장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었고, 나와 마주치면서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무 판자를 만난 것처럼 남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k*******7 2016.03.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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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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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몇 곳에서 위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중국의 제3세대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이끌림이었을까? 왠지 중국하면 한자가 섞여있어 내가 읽어내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먼저 안겨주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비슷한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늘상 보아오던 우리 소설류와 달리 주인공인 나 손광림은 물론이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니 우리가 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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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몇 곳에서 위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중국의 제3세대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이끌림이었을까? 왠지 중국하면 한자가 섞여있어 내가 읽어내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먼저 안겨주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비슷한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늘상 보아오던 우리 소설류와 달리 주인공인 나 손광림은 물론이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니 우리가 살던 방식에서 벗어난 호칭 문제에서 문이 한번 닫히는 듯 했다. 여러차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가며 간신히 책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위화의 다른 소설들이 먼저 번역되고 많이들 읽혔는가본데 난 처음으로 이 책을 접했고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며 다른 소설들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니 오히려 정석대로 가는 거겠지만 다른 책은 이것보다는 좀 더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보다는 우리네 60년대처럼 먹고살기는 힘들고 뭔가 사회적 분위기는 술렁이는데 그 속에서 소년의 눈으로 보이는 삶의 다양한 형태와 이야기들이 전개되어었는 것이다. 그것도 시간 순으로가 아니라 뒤죽박죽인 것처럼 앞뒤로 왔다갔다한다. 그러나 뒷부분에 가서야 앞에서 언급하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는 맛이 책을 지루하지않게 읽을 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이 소년시절의 이야기는 약간 우울함이 스며있다. 거의 일관된 톤으로 상처받은 이야기들이 진행되는데 그러면서도 한쪽 뺨을 찡그리며 웃지않을 수 없는 묘한 내용의 이야기들. 아니 그걸 표현해낸 작가의 능력이겠지만.. 그래서 나도 내 유년시절을 자꾸 더듬어보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그 사건이 주는 의미도 파악해보려해가면서.   가랑비 속의 외침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힘없이 가냘픈 항변쯤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빗속에 묻혀지겠지만 그래도 외치고 있잖은가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k********i 2006.03.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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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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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에서 시작해서 남문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 시작과 끝이 같은 때라고 할 수 있다. 한 집안의 이야기이며 한 사람 손광림이 겪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손광재, 할아버지는 손유원이라 말하는데 마치 모르는 사람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외에도 형, 동생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시간의 흐름대로 써나가지 않았다. 옛날을 회상하 듯 뭔가 하나가 떠오르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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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에서 시작해서 남문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 시작과 끝이 같은 때라고 할 수 있다. 한 집안의 이야기이며 한 사람 손광림이 겪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손광재, 할아버지는 손유원이라 말하는데 마치 모르는 사람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외에도 형, 동생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

시간의 흐름대로 써나가지 않았다. 옛날을 회상하 듯 뭔가 하나가 떠오르면 그것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장마다 다른 이야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장편이라기보다 단편이 모아져 있는 느낌 말이다. 어느 한 사람의 소설을 보면 단편 하나 하나가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연관성이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

위화가 쓴 첫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세번째로 보았다. <허삼관 매혈기>, <살아간다는 것> 다음으로. 두 소설과 많이 다른 느낌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좋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느낌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조금 이상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책을 보다 보면 허삼관이나 복귀 노인이 보이기도 한다. 복귀 노인은 할아버지 손유원 같기도 하고, 허삼관은 겉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류소청의 형이 간염으로 죽는데 형이 나중에는 허삼관 아들 일락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랑비 속의 외침> 을 가장 처음 봤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텐데…….

일인칭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삼인칭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가 말하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써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어렵게 생각하는 것인데, 몇번 더 보면 조금 배울 수 있을까? 말하는 사람이 '나'일 때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위화 글을 좋아한다면 이것도 한번 보기를 바란다.



희선


이달의 사락 n***8 2005.03.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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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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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유년시절에 관한 소설을 찾다보면 왜 이리도 우울한지 읽고 나면 무척이나 울적해진다. ' 가랑비 속의 외침'도 마찬가지로 세상사는게 결코 쉽지많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파렴치한 아버지와 난폭한 형 때문인지 자폐아적인 성격을 가진 손광림이 바라보는 세상은 무척이나 가혹하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동생... 그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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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유년시절에 관한 소설을 찾다보면 왜 이리도 우울한지 읽고 나면 무척이나 울적해진다. ' 가랑비 속의 외침'도 마찬가지로 세상사는게 결코 쉽지많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파렴치한 아버지와 난폭한 형 때문인지 자폐아적인 성격을 가진 손광림이 바라보는 세상은 무척이나 가혹하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동생... 그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영웅'이라는 호칭에 급급해하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가랑비 속의 외침'을 별 셋을 선택한건 무척이나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탓이 아닐까 싶다.
b*****e 2005.11.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