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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혁명가
나는 달리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반에서 제일 작은 키에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던 학창시절 운동회는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었다. 그러나 달리기는 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운동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14살부터 뒤처진 내 인생은 언제쯤 제자리를 찾게 될까. 앞서가는 이의 도움과 주변의 응원을 받지 않고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나의 레일을 달릴 수 있는 날을 위해서 나는 얼마만큼의 ‘고독’을 감내해야 할까.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재미있을지도 모르는 달리기가 내게는 트라우마인 것처럼, 사람들은 경험한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한다. 여기서 ‘경험’은 나의 감각에 기인하고, 감각은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활동을 수반한다. 그러나 종종 나의 감각은 오류를 범하고, 나의 의지는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다고 믿는 ‘삶’이라는 틀 속에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는 일종의 수면상태와 비슷한 ‘착각’ 상태로, 생각보다 견고해서 웬만한 충격으로는 쉬이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착각이 깨지는 순간을 늘 염원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스미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고독한 전사의 운명을 타고났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손버릇이 안 좋은 가난한 소년에 불과했다. 스미스는 사람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남의 것을 훔쳐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 없이 그저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삶으로도 괜찮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가 마주한 이 ‘충격’은 그에게 ‘착각’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친구와 함께 돈을 훔치고, 경찰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나중에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경찰의 죽음까지 원하게 된다. 대문자 어머니에 해당하는 스미스의 엄마는 불륜을 일삼고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다 그가 남긴 돈을 어떻게 쓸지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죄를 숨겨주는 대문자 어머니의 비도덕적인 가르침은 스미스로 하여금 끊임없이 타인의 기표를 욕망하여 도둑질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회질서와 법, 권력에 해당하는 대문자 아버지는 스미스에게는 힘도 없고 폭력만 일삼는 사람에 불과했고, 끊임없이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기에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경찰에게 거짓말 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즉,스미스는 대문자 어머니에게 품었어야 할 유토피아적인 삶에 대한 환상과, 대문자 아버지로부터 느꼈어야 할 사회화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울 전쟁터의 전사로 태어난 아이가 그저 그런 도둑질을 하는 것에 만족하는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은 예정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미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히 통제된 소년원에서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 받아 자신만의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간절히 원하는 게 없었던 그가 달리기를 통해 ‘도망’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염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스미스에게 달리기란 갑인 타인의 욕망을 위해 을인 자신이 언제든 성실히 수행해야만 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달리기를 하면서 그동안 겉만 번지르르한 기표들을 훔치기 일쑤였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이란 것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달리기의 주체였던 타인은 ‘닭대가리’라고 불리는 ‘죽어있는’감시자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새벽에 추위에 맞서 달리는 행위는 그를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최초의 인간으로 만들고, 달리면서 사유하는 행위는 그를 사고가 깨어있는 최후의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스미스는 소년원에서 최초인 동시에 최후에 유일하게 깨어있고 살아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처럼 제공되는 환경에 만족하고 현실에 적응하며 정신과 육체 모두 ‘잠자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면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추운 새벽에 빈속으로 5마일이나 달린 것은, 기득권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법과 권력에 순응하는 것처럼 속이면서 동시에 대항하는 행위였다. 스미스는 자신이 경주마가 아니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단순하지만 큰 깨달음을 통해, 빈민가 사람들을 제멋대로 주무르려 하는 기득권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고하게 마비되었던 착각, 즉 가난하면 1차원적인 욕구만 충족하고 만족하며 사는 인생에 머물러도 된다는 생각이 깨지자, 스미스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가진 고독한 싸움의 전사가 될 수 있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여겼을 스미스는 속은 텅 빈 권력자들의 허례허식 욕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회에서 돌연 달리기를 멈추었고, 소년원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승리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미스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그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반항이었지만, 동시에 아무도 그의 생각 따위에 관심 갖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당장 블루리본 하나쯤 얻지 못했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가 또 더 빠른 누군가를 주자로 뽑아 다시 대회를 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시자의 시각에서 스미스의 전쟁을 내려다보면 그의 달리기는 아무 소용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저 성실히 살면 잘 살 수 있는데 왜 나쁜 짓을 해서 소년원에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원장의 시각으로는 관심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책은 ‘당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며 독자들을 겨냥한 문장들이 있다. 이는 스미스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마무리 지을 이야기가 아니란 것이다. 스미스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의 저자에게 있어 독서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고, 이는 정신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교수나 학생들처럼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돈과 지식이라는 칼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휘두르고 있다. 배부른 돼지들은 온갖 기표들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물질을 탐하고 있으면서, 정작 대를 잇는 가난을 못 이겨 작은 도둑질로 연명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패악을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이권을 다투는 전쟁 통에서 왜 빈민들이 도둑질을 해야만 하는 지는 한낱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이 책을 세상에 냈다는 것은, 가난하지만 깨어있었던 한 소년의 거침없는 맨손 어퍼컷에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지식인들의 표정이 궁금해서가 아닐까 싶다. 작은 어린 아이가, 그것도 도둑질을 하다가 소년원에 들락거리던, 그리고 앞으로도 법의 그늘로 도망치며 살아가야 하는 한 사내의 눈에 비친 윗대가리들의 ‘성실’은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고독한 장거리 주자는 달리기를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훗날 미래의 독자들이 소년의 뜨거운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이 책을 덮을지, 아니면 차가운 실소를 내뱉으며 책을 던질지 정말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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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영국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나 14세 공장생활을 시작한 작가는 1959년 ‘장거리 주자의 고독’으로 호소덴 상을 수상했다. 戰後 영국 문단을 풍미한 ‘성난 젊은이들’ 그룹의 일원으로 소외받는 노동자와 반체제적인 청춘의 삶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62년 흑백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트로피와 배불뚝이 소년원장, 배불뚝이 관객들은 결승선 앞에서 환호한다. 소년이 1등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발짝만 내디디면 배불뚝이 소년원장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소년원 생활이 편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결승선 코 앞에서 멈춰서는 소년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기득권층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강력한 어퍼컷을 소년은 결승선 앞에서 침묵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저항이자 노동자 계급으로서 길들여지지 않는 ‘성실함’을 우승선 앞에서 증명한다. 사고 뭉치 노동자 아버지, 어머니, 청소년기의 반항하는 주인공은 그 당시 영국의 평범한 노동자 집안이다. 아버지가 죽자마자 엄마는 곧바로 딴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빵가게를 턴 것이 발각되어 소년원에 들어간다. 달리기에 있어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 그를 배불뚝이 소년원장은 바른 삶으로 만들기 위해 러너로 만들어 간다. 그러나, 배불뚝이 소년원장은 바른 소년을 만드는 것이 자신임을 주위에 자랑하고, 장거리 달리기에서 우승함으로써 소년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새벽에 혼자서 들판을 달리고, 누구보다도 빨리 달리는 그에게 우승은 따논 당상이다. 만약 그가 우승선을 지난다면 사람들로부터의 인기와 소년원에서 출소때까지 호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과감히 거부하고 남은 출소기간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기득권층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정신이 잘 표출된 작품이다. 현대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경쟁을 한다. 현실이라는 크로스 컨트리 달리기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주로를 벗어나는 반칙은 일쌍다반사다. 자본가 계급이 만들어 놓은 주로에서 노동자들은 서로 뺨때리기를 한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자본가의 눈에 들기를 원한다. 우승하면 트로피와 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거친 레이스에서 과감히 경쟁을 중단하고, 멈춰서서 저항하는 노동자는 자본주의 꿀맛에 길들여진 후에는 상당히 어렵다. 사회가 원하는 바른생활은 기득권층의 일탈을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종종 이용된다. 군사정권이 프로스포츠 경기를 통해 공정한 경기를 주문하는 것도, 강압으로 정권을 찬탈한 반칙을 희석시키는 수단이 된다. 노동자계급에겐 법과 원칙을 준수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기득권층에게 법과 원칙은 관대하고 철저히 A/S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형을 살아야 하지만, 자본가가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면 얼마안가 사면된다. 그런점에서 작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저항한다. 저항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가진 자들에게 어퍼컷을 날리기 위해 마지막 펀치를 가장 극적인 순간에 ‘뻥’하고 날려 버린다. 현실에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사회에 강력한 주먹을 날려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