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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제목에 끌리고, 둘째로 저자가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는 동질감에 관심이 생긴 책이다. 문학하는 소설가의 눈에 비친 삶의 모습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도 한 몫을 했다. 새삼스럽게 아름다운 생의 순간들로 다가오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일까? 그는 이 책에서 부모님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 이야기, 문학가로서의 삶, 그리고 소설가인 그에게 영향을 미친 책들을 이야기한다.
저자처럼 비슷한 시기에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의 삶을 돌아보면 딱히 그렇게 극적인 순간이라고 할 만한 기억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과연 그의 삶에는 어떤 극적인 순간이 있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어디서도 극적인 순간이라 할 만한 것이 그에게도 없었다. 함께 있으면 뭔가 불편하고 긴장되는 아버지의 존재, 좋아하는 여자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던 그 시절, 되돌아보면 부모에 대한 불효의 순간들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는 나의 성장기... 모든 것들이 쉽게 공감되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이었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다 오십보백보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이야말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삶의 현장이야말로 '눈부신 일상'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저자도 정작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일상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평범한 일상을 극적인 순간으로 바꿀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삶의 방식과 생각의 편린에서 배워보자.
먼저 세상을 보는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소개된 저자의 삶은 외견상으로 아름답다기보다는 고통과 안타까움의 모습에 가깝다. 문학소년으로서 방황하는 모습, 아버지와의 어색한 관계, 괴롭고도 외로운 글쓰기의 순간들... 이런 이야기들이 주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러한 추억들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운 극적인 순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데에는 이러한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 깃들어 있는 온갖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도 깨달음과 감각이 함께 할 때 더욱 간절해지고 애틋한 생의 순간들로 승화되는가 보다. 이 책에는 "서둘러 말하고 한줄의 글을 쓰는 일보다 스스로 세상의 섭리를 터득하고 무릎꿇고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이가 느껴지는 글들로 가득하다.
둘째는 절제의 미학이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불가에서 말하는 법연사계(法演四戒)를 삶의 지침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세력을 다 쓰지 말라, 복을 다 받지 말라. 법을 다 행하지 말라.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말라는 불가의 4가지 가르침은 나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 남겨주는 넉넉함을 느끼게 만든다. 현재의 부족함과 미진함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훌륭한 투자라는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일상으로 부닥치는 일들을 보다 긍정적이고 밝게 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것 같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꼼꼼하게 정독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독서가의 모습이다. 절기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고 어떤 친구와는 다음 입춘에 만나자고 약속한다. 정말 다음 입춘때에는 이것을 사람과의 인연의 끈으로 발전시킨다. 등산하다 못 박힌 나무를 발견하고는 끝내 이것이 안타까와 다음 등산때 연장을 가지고 가서 뽑아준다. 세월이 가져다 주는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지혜롭게 나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산문집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싶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소설도 작가의 삶의 일부를 허물어 만들어낸 공간이겠지만 산문집이야말로 저자의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그의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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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움과 그리움, 또 낯섦과 연민이 교차했던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대학시절 문학사에서 민족문학을 넘어 포스트 모더니즘을 논할때 항상 등장했던 작가가 바로 신경숙과 윤대녕이다. 그의 문제작 '은어낚시 통신'이 서점의 취미란에 꽂혀있더라는 우스개 소리가 돌던 그때. 윤대녕은 내게 소설의 참맛을 일깨워준 존재였다.
그런 그를 까마득히 잊고 지낸 지가 10여 년. 어느날 불쑥 '대설주의보'가 나오더니,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란 인간 윤대녕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는 산문집이 나왔다. 첫사랑을 만난듯 설렘을 안고 단숨에 주문한 이 책. 그동안 윤대녕은 '신비주의' 전략을 쓰듯, 우리에게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비밀을 간직한 수줍은 소년처럼, 때론 고독한 사색가의 모습으로 비춰지곤 했었다.
난 이 책이 참 고맙다. 윤대녕의 소설 대부분을 읽은 독자로서, 한번쯤은 온전히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사람 혹은 대상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또 그가 주로 읽는 책들은 어떤 것들인지... 뚫어지게 목차를 들여다보고, 허겁지겁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곤 작가로서, 생활자로서의 윤대녕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거기다 주옥같은 독서일기까지 들어있다니... 고맙고, 또 고마운 책이다.
어느 정도 내 예상이 맞았다. 그는 문청이었으며, 역마살이 끼어 수시로 훌쩍 여행(혹은 가출)을 떠나고, 홀로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 작업실 이사도 여러번 했고, 도시의 소음이 싫어 고전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불교에 심취해 있으며, 지천명을 1년 앞둔 마흔 아홉살이 되어서야 '인간이 빛'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특히 불교의 '법연사계(法連四戒)'를 마음에 새기며 사람과 만나는 법을 얘기하는 부분은 윤대녕 특유의 '관계 맺음'을 잘 보여준다.
세력을 다 쓰지 마라. 복을 다 받지 마라. 법을 다 행하지 마라.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마라.
매사에 여지를 남겨두라는 말. 그는 절대 상대에게 자신을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24절기마다 만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그는 한번 사놓은 물건은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봄을 심하게 타며, 홀로 등산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나만의 장소(여행지) 10곳을 가슴에 품고 있는 철학자다. 일출이 장려한 3곳을 수시로 떠나는 여행자다. 스스로 사람과의 '관계 맺음'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어떤 인연이든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 진중한 사람이다.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과 함께 했던 추억에 젖어드는 낭만주의자다. 어머니의 성함은 서란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의 여전히 화해하기 어려운 아들이다. 매년 사나흘은 지독한 몸살을 앓는 약골이며, '몸살님이 찾아와 몸과 마음에 쌓인 독을 가져다주는' 거라 믿게 된 낙천주의자다. 카뮈가 여인을 두고 '하나의 쓰라린 조국'이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말하는 늦된 아들이다.
이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된 윤대녕의 면모다. 물 흐르듯 유려한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농익은 시선이 내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사실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삶의 비의'가 느껴진다. '인생 뭐있나요? 그냥 사는 거지요'라고 말하는 박민규와는 작가로서의 태도나 작품이 판이하게 다르다. 알 듯 모를 듯, 주인공들은 어떠한 숙명처럼 '그곳'(고향, 사연을 담은 공간)을 떠나고,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한다. 일면 답답한 구석도 있다. '왜 주인공들은 그리도 고독한걸까? 왜 삶의 결락을 애써 마음에 담는가?'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윤대녕이 뒤늦게 깨달은 그 무엇은 바로 '사람'이었다. 우리네 삶의 매순간은 극적인 우연과 운명의 연속이며, 그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겨우내 시련을 감내한 소나무의 풀빛이며, 지리산 세석평전을 뒤덮은 '철쭉'이다. 그가 써내려간 산문들은 하나같이 삶의 경이를 돋울새김한 따뜻한 발자국이다. 나도 그가 새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잠시 일상의 여유를, 일탈을, 자유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참 고마운 사람.
윤대녕의 독서일기 역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이어가는 따뜻한 산문이다. 비평가들의 날선 비판도, 아마추어 블로거(나같은)의 설익은 감상도, 학자들이 열거하는 문학의 관념도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롯이 그의 삶 속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던 작품들로 가득하다. 소개된 작품들은 그에게 일상의 활력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작가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때론 작가로서의 자괴와 부끄러움을 전하기도 한다.
소개된 책들을 모조리 리스트에 담았다. 서른 권이 족히 넘는 이 책들을 그대로 따라가보고 싶다.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책읽기가 아니라, 윤대녕이 경험했던 환희의 순간을 고루 맛보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가" 감히 외쳐보고 싶다. 삶은 아름답다고, 그 삶의 주인인 우리 또한 소중한 존재라고... 고맙고, 또 고마운 사람. 윤대녕.
PS) 그럼에도 조금 아쉬운 부분은 오타가 제법 된다는 것. 특히 김선우 시인이 이 책을 안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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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니 윤대녕이란 작가를 감싸고 있는 베일을 한 꺼풀 벗겨낸 듯한 기분이 든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고 한창훈작가가 옆집 아저씨쯤 되는 친숙한 사람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번 산문 또한 작가에게 한걸음 다가가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란 느낌을 가졌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를 읽고 생생하고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관심작가로까지 등록해 놓았었는데, 특히나 베일에 쌓여있는 듯한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작가에 관심이 더욱 생겼었다.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처럼 친근함이나 털털함과는 다른, 왠지 엄청 도도하고 까칠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손에 들고 첫 페이지를 넘길 땐 누나 모르게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나이가 들어가면 사물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차를 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리고 걸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 본다와 겪다의 차이를 알아가는 것, 늘 우리와 함께하는 빛이 머리가 아닌 가슴을 통해 보여지는 것들. 한낱 딱따구리의 소리를 통해 되살아나는 옛 추억들까지,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윤대녕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비록 나이가 들어가면 이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오랜 기간 세상을 문학적, 시적 측면으로 바라보며 축적된 감수성의 렌즈가 ICL 삽입술처럼 그의 눈에 삽입된 것 일지도 모른다.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내게도 그런 렌즈가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절실해 진다.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일테니까. 또한 그는 지금도 어색한 사이를 유지하는 아버지와의 사이를 아쉬워하며, 이런저런 병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가슴 아파한다. 부모님의 옛날을 회상하고 회한에 잠기며 그리움을 표현한다. 지극히 편승적인 이야기지만 윤대녕이 가진 아버지 콤플렉스는 나 또한 가지고 있기에 공감하는 면이 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엄하게 다스린 지라 지금도 아버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 지난한 삶 속 자식을 보는 눈초리 조차 원망을 담았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던 작가완 다르게 우리 아버지는 한 없는 사랑을 주셨다. 다만 지나치게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셨던 터라 내 주장을 입밖에 내지 못했고, 한때 힘도 꽤나 쓰셨기에 그 기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계신 듯 하다. 가부장적인 면이 좀 답답할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 가족에 불만을 가지고 사는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게지.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이란 제목의 글을 읽노라면 작가는 정말 극적인 만남들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기마다 만나는 사람을 정해놓는다던가, 신호등 앞에서 인연을 맺게 된 시인도 있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알고 보니 8년 같은 자리를 지나친 사람이기도 했다. 내게 이렇게 천문학적인 함수 관계의 작용이 필요할 만큼 극적인 만남이란 것이 있었을까? 극적인 허구를 만들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삶 또한 극적인 만남이 이어지는 걸까? 이실직고 하자면 내게도 미친듯한 극적임이 있었다. 18살 때 만난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있었다. 우린 마음이 동해 연인의 연을 맺었고 특별하게 큰 싸움 없이 3년을 지냈다. 불 같은 사랑이 점차 스러지고, 불씨만이 남았을 즈음 나는 밥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본래 불씨는 작지만 촉매제가 있으면 언제든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법. 바람에 절친이라는 촉매제까지 더해져 내 마음은 쑥대밭이 됐고 다시는 회생하지 못할 것 같이 황폐화 되 버렸다. 그로부터 3년 후쯤? 뒤늦게 군입대를 위해 친구들과 의정부로 향했다. 어색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구들과 마지막 시간을 가지던 중 저 멀리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옛 애인과 절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입대. 게다가 일반적인 나이도 아닌 24살의 나이까지.. 또한 울며불며 팔에 매달리는 옛 애인의 모습까지 겹쳐 입대라는 우울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그저 멍 한 상태로 입소했다. 이렇게 옛 여자친구와 조우할 확률은 얼만큼이나 될까. 윤대녕 작가가 겪었다는 기가 막힌 확률의 극적인 순간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지 않은가? 물론 이제야 아무렇지 않게 우스개 소리로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상태가 됐지만, 이런 천문학적 확률의 극적임이 왜 내겐 불행한 일이었을까. 그러한 확률로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났더라면.. 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런 극적인 확률을 통해 이루어 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약간은 쓰라린 기억을 되세기게 하는 특별 보너스까지 덤으로 주셨다. 고맙다고 해야할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부분은 작가로서 느끼는 창조의 고통을 이야기 한다. 번번히 작업실을 옮기며, 방랑자처럼 전국을 떠돌기도 하고, 절에 의탁해 몇 달을 지내기도 한다. 신경성 위염이란 글복통까지 달고 살며, 똑똑한 글 한 줄 써내지 못할 땐 정신적 자학까지 하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계란 장수를 하면 어떻고 수레를 끌고 다니며 채소 장사를 하면 어때. 그저 잘살면 그만이지.” –p158 육체적 노동이나 전문지식을 가진,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기술로 살아가는 직업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새로운것을 창조해 내야하는 작가.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가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p161 라고 말한다. 시를 쓰고 싶어 몸살을 앓고 소설을 쓰고 싶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사람이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으면 무었을 했을까. 윤대녕 작가는 애초에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다. 윤대녕 작가의 이번 산문을 통해 좀더 가까워 진 느낌을 받는다. 도도하고 권위적으로 보였던 사진 때문이었는지 거리감을 느꼈었는데 옆집 아저씨같은 한창훈작가 만큼이나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의 진솔함이 담긴 글들이 한몫 했다는 데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눈물 젖은 두부 두루치기나, 가슴 아픈 옛 사랑이야기들. 난 왜 그를 권위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의구심 마저 든다. 사람은 누구나 ‘제대로’알기 전까진 나름대로의 추측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형상화 시킨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여러 직소퍼즐 조각들이 그 형상화의 재료로 사용되겠지만 말이다. 특히나 나는 사람의 겉모습으로 모든면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딱히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진 한장으로 도도하다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대로 굳혀버렸으니 내 잘못이 크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이제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적어도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그와 교감했다고 생각 되어지니 말이다. 윤대녕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씩 읽어봤음 한다.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좀 더 인간적인 교감을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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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윤대녕이란 작가를 만난것은 꽤 오래전이다. 누가 샀는지, 아님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책장에 [천지간]이란 소설집이 꽂혀있었다. 199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 쓰여있는 그소설집에서 [천지간]이란 중편소설로 윤대녕을 만난것이 아마 오륙년전은 아닐까싶다. 그이후 윤대녕의 작품을 찾아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마음을먹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하나도 읽지못하고 이산문집을 먼저접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는 산문집을 접하면 마음이 조금은 심난스러워진다. 산문집 이라는 것이 그저 작가의 일상생활을 적어놓은 것이 분명할진대, 내가 그것을 읽고서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지, 혹은 얼마나 감동을 느낄 수 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이해라도 할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문집과 이별을 못하는 것을 보면 가끔은 전혀 부담 없이 책을 읽고 싶고, 또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볼 때 윤대녕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의 순간들]은 나에게 참 편하게 다가온다. 그가 동년배이어서, 그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조부와 함께 생활하여서,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그와 내가 공유하는 것들이 낯선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난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나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랬듯이 나에게도 아버지는 매번 낯선 느낌을 준다. 나 역시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만나면 괜시리 불편해지고 긴장을 하게 되며, 가능하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 역시 이제는 아버지가 되었지만,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연민을 자아내고 가슴을 아프게 찔러오지만, 그래도 눈을 맞추기는 지금도 어렵다. 작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나도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여인, 그것은 하나의 쓰라린 조국’이라는 까뮈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조국은 그리 쉽게 배반할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여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는 그의 말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 역시 시린 가슴을 안고 많은 세월을 견디어 왔을 텐데, 이제는 가슴을 내보여도 될 만큼 무디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다고 하는데 이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삶은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만남 또한 그러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이 만남이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모든 만남은 전부 극적인 순간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극적이라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불교의 법연사계(法演四戒)를 이야기 한다. 세력을 다 쓰지 마라, 복을 다 받지 마라, 법을 다 행하지 마라,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마라, 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인간관계나 세상살이나 필연적으로 화를 자초하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극적인 만남일지라도 나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은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말마냥 ‘누군가 외롭고 괴로울 때, 그 사람의 어두운 이마에 다시 빛을 밝혀줄 수 있게 되길’ 바래본다. 저자는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주변과 일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담담하게 쓰고 있다. 가족이야기, 주변사람 이야기,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도 내 주변의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끝으로 저자는 윤대녕의 독서일기라 하여 그 동안 자신이 읽어온 책 중에서 29권을 뽑아 소개하고 있다.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29권의 책 중 내가 읽어본 책은 단 한권도 없다. 아마 그와 나는 공유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또 많이 다른 것 같다. 마음에 드는 3권의 책을 뽑아 주문을 하는데, 그나마 한 권은 품절이란다.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와 샨사의 [바둑두는 여자]를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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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작가의 신간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주문했다. 1판 1쇄, 흐믓하다. 아, 그런데 이 가을에 그의 책을 손에 잡는 것이 아니었다. 읽자마자 금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연례 행사를 치르기 시작한다. 울면서 눈 덮인 들판을 시린 맨발로 건너가는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두 손에는 하얀 이(齒)를 움켜 쥔 채. 이는 윤작가의 <눈의 여행자>를 읽고 난 후, 겨울마다 시달리는 꿈이다. 그런 꿈을 꾼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이 퉁퉁 부은 눈 가에 말라붙어 있어 찬 물로 세수하며 내 서러움에 또 한 번 울게 된다. 그래서, 내게 겨울은 윤작가 덕에, 늘 잔인한 계절이다. 그럼 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겨울마다 이런 악몽을 꾸게 만드는, 나의 윤대녕 작가홀릭의 시원부터 이야기해 보련다.
16년 전이던 1994년, 당시 대학생이던 내게 윤작가의 첫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은 감성의 충격, 그 자체였다. 삼중당 문고 시리즈로 일제시대 소설들이나 읽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김승옥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 받은 느낌과 더불어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이었다. 이후 나는 윤작가의 책은 다 읽어 왔다. 특히 <천지간>과 <상춘곡>은 그 문장 하나 하나가 다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올라 주체하지 못해 방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읽었다. 게다가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공간을 문학기행하듯 따라 다니기도 했다. (그래요, 저 스토커 기질 있는 여자에요!) <신라의 푸른 길>을 읽고 7번 국도를 여행했으며, 그의 표현처럼 프라하의 붉은 지붕 위를 맨발로 너울너울 춤추고파 프라하에 갔으며, 베티와 뚜생과 함께하던 동숭동의 술집 베티 블루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사랑했던 여인의 실종 소식을 전하던 스튜어디스를 만나던 종로 탑 클라우드에 가서 윤작가가 즐기던 하이네켄을 마시기도 했다. 급기야 작년에는 블로거 친구를 선동, 머나먼 제주도 일출봉 아래 경미 휴게소까지 작가가 소개한 문어 라면을 찾아 가기도 했다. 국화 향기에 홀리기도, 말발굽 소리를 듣기도, 커피에 아스피린을 타 마시기도 했으니,,, 이거 애독자가 아니라 광독자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윤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단순한 감성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문체에는 그 연배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근대 이전 한학자, 한시 짓던 사대부들의 품위가 있다. 소설 읽은 사람이면 짐작할 수 있듯, 이는 조부의 영향인 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산문에는 산문이라기엔 시에 가까운, 깔끔한 오언절구 같은 한자어 형용사, 관형사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산해경>에 등장하는 동양 신화와 전설의 이미지도 등장한다. 이런 동양적, 한학적 이미지는 묘하게 도시적, 서구적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곤 한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광고계, 마케팅 계에 종사하는 남성 화자들은 자본주의 문화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승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부분에서, 서구 문학과 사상에 대한 영향은 막내 숙부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데 이번 수필집에서 조부와 부친, 숙부의 영향을 윤작가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어 그 동안의 궁금증이 풀렸다. <제비를 기르다>를 읽고 상상했던 것과, 작가의 어머님은 다르셨지만. 아마, 이렇게 작중 인물의 캐릭터 안에 숨어 있던 좋아하는 저자의 육성과 자연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독자들은 소설가의 수필집을 읽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 뒤의 독서노트 부분은 조금 아쉽기는 했다. 독서일기를 통한 간접적인 저자의 이야기를 접하기보다, 직접적 저자의 생활을 엿보고 싶은 애독자의 심리 때문이리라. 하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공간예찬>을 저자가 읽고 쓴 부분에 대해서는 혼자 미친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수필집을 읽기전에, 이미 나는 윤작가의 문체에서, 간결하고 그윽한 문체로 전통미의식을 잘 묘사해내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내 20, 30대의 정서를 지배했던 윤작가 글의 분위기가 변했음을 느끼게 된다.
이제부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살고 싶다. 자기 자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가끔은 누군가 찾아와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변하더라도 속마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그루 나무처럼 말이다. - 본문 22쪽, '한 그루 나무처럼' 중에서
이럴 수가! 그는 늘 '존재의 시원'을 찾아, 혹은 실종된 옛 사랑 여성을 찾아 '은어'처럼 시간을 거스르는 여행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뿌리를 내리는 삶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혼자 음악을 듣는 일이 전처럼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음악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띄였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아내가 설거지하는 소리, 물기가 마른 그릇을 찬장 속에 하나씩 쌓아놓는 소리, 베란다에서 빨래의 주름을 펴기 위해 옷을 터는 소리, 그 때 그녀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며 조용히 웃는 소리, 밤이면 아이에게 다분다분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온몸에 따뜻하게 깃들곤 한다. 그것은 혼자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자아도취적 감정에 빠져 있을 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평화이다. - 본문 25쪽, '사람의 소리' 중에서
내가 막돼먹은 독자여서 그런 걸까, 위의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나는 지난 십 오년 여, 그의 글을 읽으면서 몇 배로 예민해져서 아파하며 맨발로 눈길을 걷는 20대와 30대를 거쳐 나이들어 왔는데, 딱 나보다 10년 여 연상인 그의 지난 행적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 그는 오십에 이르러 이런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니! 윤작가님, 저에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저는 아직도 힘들다고요!
그것은 곧 마음을 다시 여는 일이었다. 더불어 마음이 열러야만 귀가 열리는 법이었다. - 본문 25쪽, '사람의 소리' 중에서
그러나 그런 나의 배신감은 곧 질투였을 것이다. 어찌 어리석은 내가 그 동안 쌓으신 작가의 경험과 사유의 시간과 깊이를 감히 뛰어 넘으리. 이번에는 그의 글에 드러난 '마음을 다시 여는 일'을 흉내내는 편이 바람직한 애독자의 길일 것이니, 유치한 배신감 토로는 이제 그만 하련다. 그리고 10년 후, 내가 지금 이 수필집을 내신 현재 윤작가의 나이가 되어 이 수필집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은 깨닫지 못한 것, 보지 못한 것들을 다 볼 만큼 내 눈이 밝아지기를, 나는 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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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을 때는 대단한 감동이나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하고 읽진 않는다. 주로 어떤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팬이 되면서 이 작가에 대한 것을 알고 싶어지면 에세이를 찾게 된다. 흡사 tv에서 소녀시대의 무대를 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거나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예능에서 나왔을 때 보게 되는 것 처럼 말이다. 그 사람이 가장 잘 하는 것을 보고 팬이 되고 다른 것들도 보고 싶어지고 흡사 다른 것들이 기대만큼 잘 하지 않아도 이미 호감이라는 콩깍지에 씌여 잘해보이고 옹호하게 된다. 이 작품도 어느 정도 콩깍지를 씌우고 본 것이지만 생각보다 만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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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특히 한국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난 해이기도 했지만 박완서, 장영희, 신달자등 좋아하는 작가들의 에세이집이 많이 나온 해이기도 했다. 그런데다 올초 출간된 대설주의보를 일찌감치 사두었음에도 그의 소설을 여행하면서 읽던 버릇탓에 여직 미루고 있었는데도 이 해의 끄트머리 즈음하여 또 다시 작가 윤대녕의 에세이집 소식을 접하자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의 새 책은 여행의 조급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자리에 붙박혀 오래오래 읽히는 글이었다.
우연히 보고 알게 되어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먼저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작가인지라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내에 대한 가족이야기, 일상의 이야기, 작가로써의 문학 이야기등,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들은 윤대녕 작가의 일생의 내밀한 부분을 보는 즐거움이 앞섰으나 점차 한 작가만의 이야기가 아닌 공명되는 시대적인 회상으로 다가왔다.
요즘에야 굳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달력이야 어디선가 들어오게 되어있고 예쁘고 멋진 달력쯤이야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는데도 어머니께서는 연말이 되면 달력을 일찌감치 챙기시곤 한다. 작가의 어머니이야기 속에 달력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처럼 일 년 열두 달 여름의 계절인 달력을 집에서 보았던 기억은 없으나 달력에 인쇄된 활자로 인해 번듯함의 척도가 달라 보이기도 하던 기억은 내게도 얼핏 스치는 기억이었다. 또 그렇게 작가의 고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보았다.
작가의 아버지와의 거리감과 그에 기인한 외로움을 보면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요즘 아버지들과는 달리 십여 년 전의 아버지세대만 해도 아이들에게 잔정을 주는 아버지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런 아버지들 중에서도 유독 괴팍하셨던 아버지는 내게 존재의 부정(不正)을 각인시키시는 부정(父精)의 부재(不在)로 멀었던 분이셨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단순히 들고 나는 사람의 부재(不在)가 아닌 정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었구나. 새삼 나의 외로움의 근원을 파헤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그 사실이 내게 씁쓸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肯定)의 개운함을 주는 것이었다. 정리하는 과정의 계기가 되는 것이 서러운 감정이거나 억울한 감정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되돌아 보는 것일때는 이렇듯 마음이 평화롭다는 것을 처음 안 것만 같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렇다할만한 추억이 없음에도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니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게 되는 그 모습이 어린시절의 향수를 쫓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이렇다 할만한 추억이 없는데도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그렇게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보며 비단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만이 아니라 딸도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을 볼 때가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단상과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들이 나를 이끌어 그 위에 내 지난날들이나 생각들을 얹어 보게 된다. 비단 그것은 굳이 내가 작가와 동일한 경험을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알게 해 주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삶이란 소소하면서도 그 어느것보다 큰 군락을 이루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이 모두와 함께할 수 없어서 만든 것이 어머니다' 라는 말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작가도 그런 존재인 것만 같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하는 사람들이 각 분야별로 헤아릴 수 없음에야 그 누구인들 신을 대신하는 사람이지 않겠는가마는 정제된 글을 통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들을 이끌어내 주거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존재가 필요하기에 작가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에겐 누구나 극적인 순간들이 찾아온다. 극적이라 함은 뭔가 거창한 느낌을 주지만 쳇바퀴 돌아가는 듯하는 우리의 삶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극적인 순간들이다. 아침에 1분의 시간이 타야할 차를 놓치게 하거나해서 조급함을 만들어 내거나 반대로 사고를 큰 사고를 피해가게 한다거나 누군가와의 우연을 만들어 내거나 하는 순간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 본다면 어린 시절에서부터 우리네 삶의 그 어느 부분이 극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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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컴퓨터 모니터를 보다가 눈이 침침할 때가 있다.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그 횟수가 잦아지거나 그 느낌의 터울이 좁혀지다보면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젊은 날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쿠, 내게 벌써 이런 노화현상이 오는가 하는 급작스러운 황당함이 왕년의 내 눈은 정말 좋았는데 하는 잠시 나를 왕년타령이나 하는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다가 이는 더 겸허하고 세밀하게 현재의 일상을 대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생각으로 바뀌는데 아직은 스스로도 현실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터이다. 그런 일상의 생각이 들 때면 잔잔하고 편안하게 읽히는 산문집이 좋다. 그런데도 소설쓰는 작가의 산문집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데 이는 질팍한 삶의 냄새보다는 상상력의 발원을 끄집어내는 억지스러운 느낌을 애써 감추려는 흔적이 나름 들어서이다. 내 안에 소설가의 산문집을 대하는 별로 안좋은 편견이 감추어져 있음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신변잡기에 해당하는 미셀러니는 주변에서 수시로 느끼고 체험한 내용을 수선을 떨며 쓰지 않아도 좋고 일기처럼 나날이 메모하고 정리해두고 그 때의 심정이나 상황을 떠올리며 추억처럼 그리움처럼 그려나가는 면이 무엇보다 읽는 사람에게 단박한 느낌을 준다. 나는 보통의 에세이라고 이름짓는 산문집에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의 기준선을 보아왔고 읽는 순간 참으로 담담하고 편안하지만 다 읽어갈 즈음 마지막 책장을 몇장 남겨두고 참 잘 읽어왔다 보다는 그래서...말이지..어쩌라는거야..하는,의구심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고 그냥 저냥 사람들 사는 모습이란, 그 머리속에 담긴 기억이란 남다를 거 없구나하는 생각만 들어차게 된다. 그런 글도 소설가가 쓰면 산문집이 되는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가늠할 길없이 재빠르게 돌아가는 속에서 일상의 숨쉴 틈이 필요하기에 잠시나마 내 정신의 숨구멍을 찾아 몰입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편안한 휴식같은 글, 삶이 매몰차게 스스로를 내몰아도 단 한 줄의 문구가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순진하고도 나약하지만 그에 의존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본질적으로 눈물겹다. 봄날의 묘한 인연을 그렸던 <상춘곡>의 아스라함이나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에서 만난 인간의 허탈한 모습, 제목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웠던 <천지간>의 이미지는 일상과 상상력에 갇힌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 소설이었다. 실제를 근거로 한 허구는 독자에게 묘한 감흥을 던져주고 마지막 문장에 찍힌 마침표까지 읽고 나면 내 안의 나를 끄집어내는 일을 당연시하게 된다. 소설이 주는 힘이랄까. 작가를 대하는 방식이 소설처럼 다가오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도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나보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나는 이 산문집에서 단 하나의 문구로 위로를 받는다. 삶은 그렇다. C'est la vie.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삶속에 희로애락의 아주 인간스러운 감정이 묻어나고 하늘과 땅과 바람과 한 줄의 범우주적인 글귀가 나의 일상을 사로잡는다.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현재형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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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보다 수필을 더 좋아한다. 수필을 읽다보면 상대방을 통해 삶을 배우고 인생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가들이 쓴 수필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 작가들의 삶은 자신의 글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이 무척 궁금해졌다. 내가 직접 만나지 않고 그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일상적 삶이 담긴 수필집 밖에는 없었다. 특별히 나는 뒤가 남는 소설을 읽었을 경우 그 저자가 더 궁금하다. 어떤 삶의 배경을 가졌기에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윤대녕이 그랬다. 그의 단편집 ‘대설주의보’를 읽고 난 뒤, 한참동안 소설 속 내용이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며 떠나질 않고 날 괴롭혔다. 소설 내용이 대부분 불륜으로 뒤덮혀서다. 난 불륜과 외도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로 인해 끔찍하게 고통 받는 사람을 주변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 그 결과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알았다. 난 사람을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특히 인간의 말초신경을 톡톡 자극해 중독성을 끌어올리는 이런 글을 무척 경멸한다. 내 교만한 마음이 뭇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었을 때 자제력 없이 빠져든다고 생각해서인지 글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두려웠다. 그의 글은 세련되게 잘 포장된 불륜과 외도의 선물세트 같아 보였다. 극단적으로 그의 책을 다 읽자마자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마치 못 볼꼴을 본 듯 두 번 다시 그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아름다운 향수 냄새보다 지독히 더러운 냄새를 잘 기억하는 것처럼 글 역시 그런 글이 기억에 더 남는다.
이런 마음 때문에 그의 수필을 처음 접했을 때, 약간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경계하는 마음으로 방어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곧바로 경계태세가 풀어졌다. 그 사람의 삶은 환경과 배경이 확연이 다를지언정 내 유년시절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과거의 아픈 내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나 어색하고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평소 아버지에게 칭찬은커녕 악담 비스무리한 말들을 듣고 자라왔다. 정말 괴롭고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후에 아버지에게 칭찬 한 번 받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나를 칭찬한 적이 없다. 커 가며 나이가 먹고 자연스레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아직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껄끄럽다. 내 몸 속 세포 어딘가 그런 의식이 스며들 듯 박혀 때가 되면 한 번쯤 자제력을 잃고 튀어나온다. 원망은 하지 않지만 못내 서운한 것은 감출 수가 없나보다. 이처럼 사춘기는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그것에 아버지는 너무 큰 몫을 했다. 저자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부분에 과거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타나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아버지 연배 사람들을 어려워한다는 그의 얘기에 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남다른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그의 그런 경험과 기억이 어쩌면 기존 틀에서 벗어난 풍의 글을 쓰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싶다.
방황하며 헤매던 저자의 젊은 시절은 얼마 전 이십대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열아홉 살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고3 겨울 집을 나왔다. 저자의 아버지가 그가 소설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처럼 내 아버지는 내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심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욱하는 마음에 집을 나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내 삶의 목적과 가치관에 대해 고민했다. 스무 살, 이제 그 고민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도망치다시피 간 군대 그리고 신앙의 회심, 대학에 들어가 부정과 싸운 기억, 졸업 후 또 다시 늦은 방황과 갈등. 한참을 그렇게 살았다. 누구나 쉽게 적응하고 순응하는 세상에 나는 머릿속 판단에 쉽사리 무릎 꿇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언가가 되어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회의감이 극에 다달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삶의 존재 가치를 잃어 버렸다. 나 하나 없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세상이었다. 그 시절 죽음을 심각히 생각했다. 하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신앙 때문에 자살을 선택할 수 없었다. 방법을 바꿨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를 빨리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분은 아직까지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지 목숨을 붙여 놓고 있다. 다시 생각을 전환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자.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자는 그런 탈출구를 글로써 해결하고자 했다면 난 이렇게 종교적 사명감으로 풀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동조할 수 없었다. 병적 거부감에서 나오는 반발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수필집을 읽으며 일상 속 그렇게 가슴 저미고 따뜻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일들도 많은데, 그것을 바탕으로 희망어리고 기대감 있는 이야기를 쓰면 안 되나 하는 원망 아닌 원망이 들었다. 소설을 통해 꼭 세상을 삐뚤게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마음 자체로도 많이 힘들 텐데. 수필과 소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로 그를 말하고 있는지 헷갈려 머리가 아팠다. 아니다. 이런 이분법적 생각이 내 어리석음이다. 세상에 극단적으로 나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사물은 떨어질 수 없는 역학적 관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모르는 척 하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나는 나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내 안에는 이미 희망을 포기하고 있으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 마음이 들킬까봐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언젠가 글을 써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생각하는 주제는 다 불온한 것들이지 않는가. 나는 그러더라도 다른 이는 그러지 않는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어쩌면 쉽게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라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근교 도시로 3학년 때 전학 간 후 한동안 말수가 적어지고 친구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은 농사 때문에 집에 계신 적이 없었다. 버스로 왕복 4시간에 걸치는 통학 거리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늘 피곤에 쩔어 있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공부고 뭐고 금방 골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공포가 항상 나를 짓눌렀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 긴장되고 무서웠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집에서 아버지와 갈등은 극단에 치달았다. 아무 곳에도 이런 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부모님께 학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밖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 산다는 것을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생각이 들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늘 감추고 살아야했다. 나를 숨기고 스스로 극복해야했다. 그 후 그런 과정 속에 강해지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그 결과 자신을 잘 드러내 놓는 성격이지만 남을 잘 믿는 성격은 아니게 되었다. 물론 한 번 믿는 사람은 끝까지 믿지만, 그런 내 불신이 다른 이를 못 믿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회 현상이 내 그런 의식을 더 부채질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외로움 때문에 그렇다. 난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탄다. 항상 기댈 곳을 찾아 살아왔다. 어렸을 적 겪어온 경험 때문인지, 난 애정결핍 비슷한 게 있다. 살면서 등대처럼 쉬고 싶은 사람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가 다였다. 다들 내게 의지하려 했다. 내게는 특별히 기대고 싶은 뭔가가 풍기나 보다.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웠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점점 지쳐갔다. 그래서 결국 내가 견디지 못하고 끝을 맺은 경우가 많았다. 뒤돌아 사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상대방이 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책은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발 내 사람은 이 책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속 좁은 생각이 내 시야를 넓게 보지 못하게 했다.
'대설주의보' 버릴 수가 없었다. 억지스레 서평을 쓰고 난 후 몇 번을 더 읽었다. 그리고 멍 때린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마음의 불안함과 초조함을 더 키워 나를 학대시켰다. 그런 감정은 날 희망 없게 만들고 절망에 빠져 들게 한다. 본래 내 성격 자체가 비관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평소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 내 그런 노력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무너져 버린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세상을 무의미하게 바라보고 마음을 닫으려 한다. 산다는 것, 부질없는 짓. 결국 다들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 사랑이든 돈이든 뭐든 찾아다니며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들. 그런 대열에 합류해 동일한 발걸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빨리 삶이라는 것을 마무리 맺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이런 번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오히려 자제력이 없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나와 동일시 여기며 착각하고 못 미더워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순진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바로 나다.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난 이겨내야 한다. 그의 글을 통해 거울 같은 내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 도망치듯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아니면 난 계속해서 위선적이고 거짓된 삶을 살지 모르니까.
그래, 사실 우린 비슷한 사람이다. 단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수필에 나와 있는 그의 삶을 통해 나를 읽는 계기가 됐다. 저자의 지적 능력, 경험의 범위를 떠나 그는 나와 참 많이 닮아 있다. 그의 자유스러움,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심하게 공감한다는 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나그네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유인 또 누군가는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새 같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내 삶은 늘 그랬다. 한곳에 머물 줄 모르고 마치 철새처럼 때가 되면 떠나고는 했다. 저자의 일상 속 일탈이 그런 나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한 가지에 집착하는 면 역시 비슷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는 그, 나 역시 그렇다. 내 주변에는 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으면서 버리지 않은 물건이 태반이다. 뭐라 모를 애착감이 있다. 내가 여기저기 배회하며 돌아다니다 다시 왔을 때 예전 그 물건이 그대로 있을 때의 반가움과 안정감 때문인 것 같다. 아마 저자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런 사람, 글에서 만나면 정말 멋지고 흠모할만한데 실제로 만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잘 어울리다가도 어느 순간 곁에 없어져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특히 교제하는 사이라면 더 힘들다. 바람처럼 언제 떠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걸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글 읽는 즐거움을 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미워할 수가 없다. 나 역시 저자의 글이 그렇다. 소설을 보고 난 후 한참동안 찝찝함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수필을 보며 마음이 다스려지고 이해가 되는 걸 보면 그의 인간미적 매력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역시 작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그의 책을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는데,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다시 한 편을 봐야겠다. 내 안에 그의 작품에 대해 충분히 면역력이 생기고 소화될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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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부러운 사람 중의 하나가 글을 잘 쓰는 사람 우리가 '작가'라 이름붙여준 그들이다. 어쩐지 그네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것만 같고, 굳이 없애려고 애를 쓰지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역마살 혹은 방랑벽을 갖고 있는 특수 집단이라 생각되는 그들. 작가가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련만 어쩐지 그럴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윤대녕이란 작가는 그런 못된 일반화 속에 제대로 들어맞는 작가라는 생각을 이전에도 이 책을 다 덮고 난 지금에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이러한 성급한 일반화는 내가 현실에도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속으로 그를 부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대학 동기 녀석이 있었다. 학과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평범한 녀석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친구와 1-2년을 친하게 지내다 녀석이 낚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태공이 아니라 '박태공'이라 부르며 놀림조로 부르곤 했는데 이 윤대녕이란 작가를 보면 박태공이라 놀렸던 친구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낚시를 소재로 한 작품 때문에 언젠가 나는 관심도 없는 케이블의 낚시 채널을 넋 놓고 본 기억이 있다. 그렇게 잡기 어렵다는 '감성돔'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잡기 어려운 만큼 맛은 좋을지 상상하며 말이다. 작가라는 큰 짐을 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가 겪어온 길이 어떠한 것인지 일부러 찾아가보려 하지 않았다. 그냥 글에서만 보는 그걸로 나름 만족을 하며 살았지만 이번 산문집을 보면 어쩐지 자꾸만 공감대로 엮어지는 이 작가와 어쩌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오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나도 내 안의 기억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낸다. 아버지와 서먹한 사이를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유지하면서도 결국은 자신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나무에 나이테가 만들어지듯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과 외할머니께 전해내려온 비법으로 만든 두부 두루치기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먹으며 음식 맛과 더불어 삶의 맛을 음미하는 모습들... 어릴 적 나 역시 똑같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기억들을 꺼내며 추억에 잠긴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던 적이 있다. 아버지 앞에서 울어서도 안되고, 떼를 써서는 더더욱 안되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세가 드시고, 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듯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들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셨다는 마음이 무서움보다 마음에 더 크게 자리잡았으니 그걸로 나는 만족한다. 부모란 특히 아버지란 자식들에게 일정 부분 그런 존재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역마살,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그 방랑벽을 실은 나랑 함께 살고 있는 사람도 매해 매달고 다니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그 고단한 삶과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 무에 다를까 싶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당신도 역마살이 낀 거 아냐?" 그랬더니 역마살이란 단어에 금새 파르르 떤다. 꼭 내가 금기어라도 꺼낸 느낌에 출장을 자주 다니는 당신의 모습이 꼭 그런 거 아니냐고 했더니 주춤한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여기 저길 많이 다니니 좋지 않냐는 의견이 많다. 비록 일 때문에 떠나는 것이긴 하지만 집에 붙박이로 있는 나와는 다르지 않냐고들 나를 비롯 주위에서 많이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디가 되었던 그가 몸담는 곳에서 난 그가 매사 허투루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농으로 역마살 운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안쓰럽기만 할 뿐이다. 작가 역시 사찰의 암자며 원주의 토지문학관, 왜목마을의 어딘가, 낚시를 소일삼아 보내는 어느 바닷가에서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자신의 그림자를 쉽게 떼어놓을 순 없을 것이다.
남편이 갖고 다니는 가방이 두어 개가 있다. 천덕꾸러기 같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난 이 가방을 버리라고 종용하곤 한다. 그러고보니 작가가 버리지 못하고 소장하고 있는 타자기, 노트북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형태는 다를지언정 다른 형태로 이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즉 생계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나보다 더 남편 옆에서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는 가방을 버리라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곳곳에서 편린들을 주워담는 그릇 같은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내 주변에 흩어진 삶의 편린들을 하나씩 주워담아 본다. 살면서 매우 극적(드라마틱)이고, 가슴 저린 일들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에 자극을 준 요소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이 책을 덮으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어본다. 살면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모두 내가 다 껴안아야 할 소중한 순간들이니 한 번 가보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