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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데우스가 나오는 시대에 너무 옛날 이야기 같긴하지만...
계급, 역사, 상하 등이 무의미해지고, 지식 축적의 의미도 바뀌어지며 칲하나에 모든 정보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된다고 하여도, 사람됨의 근본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잘못된 판단과, 결정하나로 다수가 큰 피해를 볼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조심스레 되돌아 보기로 합니다. 모든 것이 형태만 바뀐 신제국주의가 될 가능성과 더 큰 악과의 소리없는전쟁이 될수 도 있는것에 주의 합시다. 역사를 못해서 역사책을 보게되었는데, 보다보니 흥미롭고 깊이와 깨달음이 있습니다. 단국부터 원효 의상 김유신 , 율곡이이, 전쟁치유로서 발전하게된 의학의 완성자 허준, 중립외교의 강홍립, 시대를 앞선 생태지리학자 이중환,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국학자, 영,정조 연간 실시된 탕평정국의 큰 기둥을 받치 남인 관료 정치가 채제공 사림개혁의 이상 조광조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우수한 과학기술 인제 우장춘 기독교적 개혁정신가 서재필, 중간길을 택한 문필가 홍명희 , 절대적 자유를 꿈꾼 혁명가이자 교육자 신채호, 민족주의자 남궁억 등등 외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는지 알게 되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각인물들의 태생과 사회적 배경, 성장과정과 사상의 흐름 시대가운데에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행보등을 연유해 나가다 보니, 원인-결과가 잘 이해되고, 역경속에서도 대의를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모습과 안타까운 처형등을 잘 알수 있게 됩니다. 또한 관점에 따라 긍적적,혹은 부정적으로 인식될수있고 사실과 업적이 뒤바뀔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논문을 많이 참고하여 정설이겠지만, 역사의 그늘에서 많이 연구되지 않았던 인물들도 실려 있습니다.
감명이 되었던 부분은 일제강점기와 상당한 관직과 국왕의 측근에 있었던 남궁억이 1931년 연희 전문학교 졸업식에 축사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 놀미재 설령을 넘어 걸어서 상경한 일화는 유명한데, "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이 옮기려는 발기의 방향이 어디입니까? 교육의 혜택도 문화의 혜택도 없으며 , 대부분이 결식 상태에서 빼빼 마르고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한 그들이 목자 없이 방황하고 있는데, 이들을 구하러 내 고장 농촌으로 달려가지 않으렵니까? 오히려 우리는 강자를 도와서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해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어 같이 강해지는 것이 우리의 할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에게 간절한 부탁은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눈을 뚫고 원 길은 찾아서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라고 당부했다 또한 일제 강점을 전후한 무렵에는 민족주의 을 확고히 하며, 대한협회와 대한 자강회 등의 계몽운동단체에서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명했는데, " 우리 대한이 얼만큼 있다 할지는 알 수 없다. 능력이 있으면 부패한 습관을 하루아침에 개량하며 비열한 정치를 하루저녁에 혁신해 4천년 우리 나라의 문명의 꽃이 활짝 피며 삼천리 구역에 자유의 등불이 환하게 비추어 한 번의 손짓 발짓에 대비약 대진취를 증것이 얻으려니와와 만일 능력이 부족하면 그 마음과 혀만 헛수고 헛고생을 하리니 어찌 두려워 할 바가 아니며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겠는가. 슬프다. 우리 오늘날에 잠을 잊고 식사를 폐하고 능력을 기를 것이며 지혜를 짜내고 생각을 다하여 이 능력을 만들지어다." 하면서, 사싱의 실천을 강조하며 상업을 진흥할 사상으로 실천하며 만반의 사업에 정진하라고 민족의 흥기를 고취했다. 민족해방운동에 힘썼던 신채호도 조선혁명선언, 의열단 등에 동조하며, 민중의 직접 테러적 행동을 제기하며 민중속에서 강도일본의 통치를 타도해야 한다던 그가, [신교육과 애국] 에서 " 미국의 부와 독일의 강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외국 문명을 숭배하여 수입하게 할 뿐 국강가에 대한 애정을 기르지는 못하며, 루소의 민약론과 다윈의 물경론을 따르자고 하는 것은 사회의 불평에 대한 파괴성을 격발케하는 수단에 불과 하다" 며 서구 자본본주의 국가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의 자주성을 보장해 주는 길을 추구하자고 강조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힘의 논리를 부정했다. 1921년 아나키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면서부터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 연맹 창립대회 연설문에서는 정부란 지배 계급이 무산 민중에게서 약탈한 "소득을 분배하려는 인육분장소"에 불과하며, 경찰, 군대,황실,은행,회사 등과 같은 지배계급의 지지배도구인 정부를 파괴하고, "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사회"를 건설하자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유신통치 압제의 의문사의 비운으로 알려진, 1943년 학도 지원병제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군대에 불려간 장준하는 중경 임시정부를 향해 나갔는데, 경교장에서 김구의 비서로 일하다가 이범석이 만든 조선민족 청년당 교무처장 직을을 맡기도 하였다. 사상계를 간행하여 민족을 바로잡고 계몽하고, 수구파의 비판을서슴지 않으며, 지도자의 자정작용에 일념했다. 박정희의 모든것을 비판했지만, 72년 7.4남북 공동성명만을 이루어 감격으로 맞이 하여 지지했지만, 이것이 유신 독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만적인 술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나자, 7.4남북 공동성명이 한장의 휴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또한 4.19 묘역을 돌아보며, "185위의 묘중 어찌 단 하나의 어른 묘도 없이 한결같이 모두 젊은 학생들의 묘뿐인인가 하는것", 소위 나라를 사랑한다는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왜 하나도 없는지에 대해 통절하게 묻고 있었다 민족 통일에 한 생각을 거침없게 쏟아내며, 모든것을 바쳐 도전한 지식인으로 자기혁신을 이끌어 냈던 모범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갑작스러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이런 희생으로 우리가 살 수 있었는데, 지금 시대에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희생되는 분들을볼때 너무 안타깝다. 또한 명성황후를 시해한 역적의 아버지의 아들로 일본에서 연구할 수 밖에 없었던, 육종학자 우장춘. 겹꽃이론과 페츄니아겹꽃의 상품화 식물게놈을 연구해 많은 다수확물을 연구해 ,일본에서 농장장으로 활약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도 따뜻히 맞아주었던 덕분에 사단법인 한국 농업과학협회를 창립하여 진도에서 원종 대량생산 사업을 지원하고 , 식량사정이 좋지않던 한국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교육이 무엇인 몸소 실천하고, 민족의 슬픔을 외면치 않은 통절한 지도자, 우수한 과학기술자등등. 파란한 역사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고, 소신을 지켜나갔던 흐름을 보며 일부 자부심도 느껴지며 지금의 한국이 그냥 있는게 아닌것이며, 우리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느끼며, 감동으로 읽어 나갔다. 작금의 초분 단위로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때에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버려야 할지 깨닫게 해주는 이정표가 되었다고나 할까? 문체도 어렵지는 않고 고전투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