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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라고 하면 "암행어사"로서의 활약이 어린 독자들에게까지 장잘 알려진 위인입니다. 사실 그의 행적이라면서 널리 퍼진 일화들 중에는 과장된 것, 윤색된 것, 와전된 것이 엄청 많이 섞여 있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와 가까운 시기), 또 현재의 민중이 여전히 성원을 보내는 이유는, 지존의 군주가 직파한 정의의 손길이 현실의 악을 혁파하는 그 과정의 통쾌함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학자의 집안에서 학자가 난다." 우리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결코 그의 출신이나 집안, 가풍을 소홀히하지 않는 이유는, 환경의 영향 변수가 사람됨을 결정하는 데 거의 결정적이다 할 만큼의 비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과 지혜의 터득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녀들을 훈육하는 가풍에서 위대한 관료, 선비, 학자가 출현할 수 있음은 당연하고, 반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이 어떤 태생의 열등감만을 달래려 최적화한 인간에게 어떤 각성이나 발전, 도약 같은 게 있을 수 없음도 지극히 당연합니다. 무지렁이의 집안에서 무지렁이가 나오는 건 천연의 철칙입니다.
"불쌍한 어린 백성을 위하여". 여기서 "어린"이라 함은 유소(幼少)하다는 뜻이 아니라(뭐 아주 크게 보면 뜻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나랏말쌈이 듕귁에 달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할 배 있어도... " 할 때의 그런 "어림"입니다. 독서를 하고 배움을 가까이하는 건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함인데, 사실 어리석음이 도가 지나치면 그건 곧 사악함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무지와 몽매 속에서도 순수함을 지키려 드는 백성에게서야 비로소 박문수 같은 엘리트가 일종의 "연민"을 느낄 수 있었음도 당연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한말의 민영익(우리가 충정공으로 잘 아는 그분)에게 탐관오리의 두 얼굴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 목숨도 초개같이 버리는 충절지사로서의 면모와 상충되는 셈입니다. 일단 두 사료 중 어느 하나의 오류를 추정하는 게 상식이며, 다른 하나는 정말로 민간에서 "탈세"의 어리석은 시도가 있었기에 법질서를 추상 같이 집행하려 했던 그의 의도에까지도 우리는 좀 상상(어디까지나)의 나래를 펼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어린 백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선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고부 군수 아무개처럼 누가 봐도 명백한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겠고 말이죠.
이 책을 보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그의 행적도 소개됩니다. 어떤 이들은 "희대의 패륜 군주를 징치하러 분연히 일어선, 그저 현실에서 실패했을 뿐인" 혁명가로서 이인좌를 평가하려 들기도 하는데, 관점이나 연구의 방향은 자유이겠으나 정체 불명의 당위에 집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적어도, 이인좌를 혁명가로 평가하는 그 순간, "그를 평정"한 정권의 앞잡이(?)에게서 어떤 애민 정신의 화체는 즉각 폐기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주장의 폭주라는 게, 할 때는 기분이 좋겠으나 스스로 일관성을 무너뜨려 자기 발등을 찍은 우스운 꼴이 될 수 있음을 나이 들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이런 알찬 어린이책을 읽고서 좀 초심(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으로 돌아가 줄 것을 권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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