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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는 차를 보면, 차가 그만 도로를 먹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을 위해 고르게 열어준 길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우느라 굉음을 내고야 마는 저 고약한 식성. 아스팔트 밑에서 숨죽이고 있을 땅의 육성은 목이 멨는지 들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목구멍을 부러 막아버린 건지도. 이렇듯 세상은 둘로 나뉜 것만 같았다. 목청을 높이는 자와 목청을 잃은 자. 당장 화려한 조명만 좇으며 야경을 주도하는 자와 광공해로 일그러진 별 그림자만 마음에 담는 자 말이다. 나는 이 가없는 간극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떠돌아다녔다. 양심의 별은 늘 하늘의 별을 향했지만, 눈부신 야경에 현혹되어 나는 나를 숨기곤 했다.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가 시작이었다. 모순된 세상의 양면을 인식하면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그 혼란을 감추기 위해 한쪽을 극단적으로 맹신하기도 했고, 다른 한쪽의 가치를 분쇄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육체노동에 비해 정신노동이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무슨 <시크릿가든>의 김주원처럼 머리가 나빠서 몸 쓰는 일을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가본 세상의 전부였고, 그 이상은 어떤 수사(修辭)를 붙여놓아도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의 비극은 우리 아버지도 몸 쓰는 일을 한다는 데서부터 생겼다. 학교에서 수위로 계시는 아버지는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을 잘 다루셨다. 언젠가는 내 방의 조명도 고장이 나서 직접 고쳐준 일이 있었다. 나는 돕지는 못할망정 꼴에 공부를 한다고 창으로 들어오는 저물녘의 음침한 채광에 기대서 영어책을 봤다. 아버지는 읽지도 못하는 그 꼬부랑글씨를 펼쳐놓고는 아버지가 조명에 잘 닿지도 않는 팔을 억지로 뻗어대는 모습을 슬쩍 곁눈질했다. 천장을 뜯어내고 형광등을 갈고 나사를 풀고 죄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나는 그 시절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때 들고 있던 영어책에 거창한 가치를 쏟아 붓고는 아버지의 땀방울을 하등하게 여기지는 않았던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전태일 평전」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을 접하고서 나는 내가 얼마나 역겨운 생각을 품고 살았는지 눈물겹게 깨달았다. 자수성가한 정치인들이 고향을 둘러볼 때 던지는 그 시선과 몹시도 닮아있었던 탓이다. 아들을 위해 묵묵히 일하실 적에 물 한 잔 떠다드리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그제야 일었다. 내가 대충 읽어내는 글 몇 자락이 저 손품 파는 막일보다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 차마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아무런 실천력이 없다고 참괴하면서도 잇대어 책을 들춰본 연유는 그저 관성이었을까. 오로지 책만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는 환상은 걷혔다. 그렇지만 책을, 또 시를 읽지 않고 살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식의 생각을 그대로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의 심장을 받았네」, 이 책은 내 마음에 소담한 파문(波紋)을 일으켰다. 중등 시절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긴 그 시선을 떠올릴 때면 늘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를 쓰다듬어준, 다사한 시집이었다. 끓는 물 속에 던져진 게가 있다 땡볕 속에서 일생을 보낸 어머니가 있다 (중략) 등딱지가 밥그릇으로 변하는 순간 등가죽이 검게 죽어버린 순간 게딱지 밥을 비벼 맛나게 퍼먹는다 나는 삭은 등골을 열심히 빼먹는다 ― 「식욕」 부분 위 시에서는 어머니의 희생을 게를 먹는 일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고약한 식성을 게를 먹는 일에 빗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나’로 인해 삭은 등골마저 내어주는 약자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일하시던 내 아버지를 닮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목청을 잃은 자다. 도로 위에 잘 빠진 차가 있다면, 그 밑에서 떠받쳐주는 한갓 흙 같은 존재다. 소외당한 이들의 목소리가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네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어느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다. 향기 없는 꽃들이 있어요 얇은 비닐로 시간을 막아놓고 생똥 같은 계절 피워대느라 그 집에는 하루 온종일 꽃들의 땀이 줄줄 흘러요 (중략) 갖가지 색으로 꽃이 피어도 어둡기만 한 집, (중략) 꽃들은 끝내 아름다울 거예요 ― 「비닐하우스」 부분 그도 그럴 것이 향기 없는 꽃처럼 보이는 세상도 온갖 빛깔들이 모여 있노라면, 작위적이나마 미감(美感)이 얹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애처로운 아름다움마저 깨금발로 유지하고 있는 게 요즘이다. 어린 시절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향하는 발걸음이 늘 느즈러지곤 했다. 봄 내음을 맡으며 화단에 심긴 꽃 한 송이와 벌레 한 마리에도 순간이 길어지던 날들이었다. 길 가다가 쓰레기를 줍기도 했고, 동네 할아버지들께 정답게 인사도 건넸다. 물론 지금은 쓰레기를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그 할아버지들을 봐도 모른 체하고 지나가버리기 일쑤다. 보폭도 그만큼 커지고 빨라졌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느슨해진 기억들마저 잠자코 나를 따르게끔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간 한없이 삭막해진 내 스스로를 돌이켜보기도 했다. 자동차나 고속철도 등 숱한 교통수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다. 빼곡한 길가에서 우리는 앞만 보고 돌진한다. 주변을 살필 여력도 없이 내비게이터가 부르는 대로 세차게 엑셀을 밟는다. 이건 중고교 시절 나를 휘어잡던 불안과 속도에 대한 강박이 길 위에 그대로 부려놓인 풍경이다. 물리적 편함이 도리어 심리적 불편함을 낳은 셈이다. 그렇다고 길상호 시인이 세상의 밝은 구석을 드러내서 부러 감동을 내오진 않는다. 외려 시인은 동그마니 찬 심장만 덤덤히 뭉쳐 내려놓는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모양들을 집요하게 붙잡으면서 쓸쓸한 표정만 띠운다. 나는 그 표정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오늘의 현실 앞에서 왜 시인은 절망도 구토도 큰 가여움도 없이 형상들을 쓸어내리고 있는가. 최근의 난해시들보다 차라리 시인의 그 표정이 더 낯설기까지 했다. 그해 처음으로 눈송이를 매만지는 느낌처럼 시들은 수줍어도 면밀하다. 눈[雪]에 눈[目]이라도 달린 것 마냥 어두운 곳을 촘촘히도 순방한다. 그곳에는 「외상」에서 자주 찾는 외상 손님을 보고 “외상사절”이라고 써놓는 점포 주인장이 있고, 「비의 손가락」에서 비를 따라 전화번호를 누르게 되는 ‘너’와 헤어진 ‘나’가 있다. 「쪽방의 여름」에서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팔열지옥으로” 떨어졌다고 믿으며 더위를 견디는 노인네까지. 「눈의 심장을 받았네」에는 아슴푸레한 비애의 결이 곳곳에 묻어나왔다. 시적 대상들은 힘겨운 삶의 무게를 불교적 상상력을 끌어와 버티고 있다. 마치 지문에 그렇게 적혀 있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지문이 다른 형세를 지닌 것같이 그네들의 사연도 각기 다르리라. 어디선가 눈송이의 문양도 제각각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의 의미가 조금 더 가깝게 실감된다. 지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자국임과 동시에 고단한 삶의 흔적일 터이다.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그 다소곳한 삶의 자세에서 나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게 크나큰 상흔이지 않을 수 없던 아버지에 대한 뿌리침 또한 종내는 거창한 사랑이란 자장 안에 머물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나를 대할 때나 아버지를 뵐 때나, 뭇사람들을 마주할 때나 그네들 삶의 지문을 속절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눈송이들이 쌓이면 처치 곤란한 눈더미가 되는 것처럼 한 장씩 넘어갈수록 더끔더끔 시집의 질량감도 묵직해졌다. 그 모든 번뇌와 방황도, 탈출코자 하는 ‘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기에 아래 시도 가슴을 친다.
가련한 존재의 움직임이 보였다. 정확하고 규격화된 삶에서 벗어나려 하는 몸부림이 스며 있다. 이렇듯 세상은 차고 잔혹한 눈뭉치 같은 것일지 모른다. 여전히 세상의 차들은 빠르게 달리고, 도시의 야경과는 상관없이 누전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이들도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수없이 흩날리는 진눈깨비 같은 삶들이 “차가운 바닥에 녹아버렸을”(110쪽, 「그 밤에 내린 눈은」)지라도 “그럴 때마다 / 가만히 쥐어오던 / 당신의 손”(20쪽, 「눈의 심장을 받았네」)이 다가와 어루만져줄 것이다. 손끝에 새기어진 그 지문들이 당신을, 또 나를 자꾸만 그쪽으로 이끌 것이다. 아버지의 뭉툭한 손이 끝내는 내 심장에 와 닿았던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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