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를로-퐁티라는 사람의 사상을 다룬 책은 처음이다. 내가 어떤 경로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는지 생각이 안난다. yes24 북카트에 골라놓았던 것을 구입한 것뿐인데... 하여간, 책을 고를때 아마 메를로-퐁티란 인물의 저작이 아니라 해설서이기 때문에 골랐지 싶다. 메를로-퐁티... 이름이 가장 재밌게 발음되는 사람인것 같다. ^^ ... 농담은 대충 접고, 이 인물이 언급되는 것은 정말 여러번 봤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소위 프랑스의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에는 꼭 언급이 되는 사람이다. 싸르트르가 그랬고, 레비스트로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개념이 없었던 사람이다. 싸르트르는 실존주의자 빨갱이라고 알고 있었고, 소설도 읽어봤으며,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을 접하다보면 당연히 막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며, 또한 구조주의의 초기인물식으로 그려지니깐 말이다. 이런 얘기는 푸코의 자서전에서도 그렇고, 크리스테바의 무사들(사무라이)이란 소설이나, 저자는 까먹었지만 '악마의 창녀'라는 68세대의 지식인들을 다룬 소설에서도 그렇게 그려진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그정도의 언급으론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던 인물이다. (이름 사이에 왜 하이픈을 꼭 넣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들었던 생각, '윽~ 현상학이다'. 뭐 현상학을 잘 아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의 저자인 헤겔에 대한 중압감이나, 예전에 리오타른가가 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얇은 소책자를 읽으며, 후설의 현상학이 뭔지 끝까지 짐작도 못하던 생각이 났다. 하여간 현상학이란다... 그러면서 계속 읽어나갈때마다 들던 생각... 아주 잡다했다. 책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일부 내용에서부터 당연히 몸이라는 개념을 주로 하다보니, 푸코의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의 배경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고, 당사자들은 별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하여간 부르디외의 장이나 아비튀스,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상호주관성... 뭐 그런 이야기들의 배경에 대해서도 조금 짐작이 되더라. 막바지에 가면, 저자도 그렇게 말을 했지만 하비나 르페브르의 공간개념이라는 것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를 이자의 논리를 빌어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라는 테제를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지각 현상학)으로 접근하면 꽤 유용할 수 있겠거니하는 생각마져 들었다. 하물며... 보네거트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시간대를 동시에 인식한다는 트랄화마도르 인의 인식방식의 나름대로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랙 이건의 쿼런틴이란 SF 작품의 양자역학적 세계관에서의 인식의 상대성에 대한 것도 근거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용이 꽤나 모호하다보니 진짜 잡생각을 많이하면서 읽게 된 책이었다. 예전에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의미를 접하면서, 꽤나 감탄을 했던 적이 있다. 끝까지 회의를 하다 남은 것 하나로부터, 자기 존재의 근거를 삼는 그 치밀성에 반했던 것 같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를 싫어한다. 아니 아래처럼 부정을 한다. ".... 사유의 체계와 정은 '나는 생각한다'로서,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한다'[자체]와는 그 어떤 결합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코기토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교설은 논리적으로 정신의 비시간성을 확정하고 영원성을 띈 의식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회의하는 자기존재에 대한 확실성은 실존이 아니라 비시간적인 어떤 이데아적인 존재의 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실제-몸의 현상을 강조하는 메를로-퐁티의 탁월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은 한마디로 "영혼과 몸의 통일은 [서로] 외적인 두 항, 즉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자의적으로 질서 잡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운동에서 매 순간 이루어진다."라는 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아주 거칠게 말해서, 유물론과 후설의 현상학이 생물학적으로 만나 시공간을 초월하지 않고 자기 근거를 갖출 수 있는 체계를 성립시키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얘기가 가능해진다. "... 나의 사유들은 절대적으로 획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사유를 하는 매 순간마다 성숙하게 된다. .... 하나의 사유는 그것 자체가 자신의 상황을 인수할 때에 한에서만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의식의 본질은 하나 혹은 여러 세계를 받는 것이다. ..." 난해하다. 저자인 조광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메를로-퐁티는 구체적인 주체성과 구체적인 대상성이 동시에 솟아오르는 근원적인 장을 찾으러 한 것이고, 그것이 현상의 장이라는 것이지요. ... 내부와 외부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를 상호 규정하는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몸철학...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김용옥이나 이정우의 몸철학/기철학론이 왜 어설픈지 메를로-퐁티를 보고 나서 좀 알게 되었다. 다시 인용을 하자면 "몸의 통일성은 항상 함축적이고 어렴풋하다. ... 타인의 몸이 문제가 되건 나 자신의 몸이 문제가 되건 간에, 내가 인간 몸의 인식하려 할 때 그 몸의 사는 vivre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즉 그 인간 몸을 관통하는 드라마를 내 쪽으로 받아들여 나를 그 드라마에 넣어 용해하는 외에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따라서 적어도 내가 획득된 부분을 갖는 정도에 따라 나는 내 몸이다." 매우 추상적이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러한 현상학적인 비전이 우리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광제가 인용하는 메를로-퐁티는 지속적으로 지성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을 지적하고, 각각의 문제를 논파한다. 사실, 내가 무슨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차원의 문제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칸트적 선험을 가정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문제점에서 이미 유효성을 잃었고, 경험주의... 혹은 극단적인 유물주의식으로 정보의 전자적 전달과정이 의식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확실이 개념적인 도약이 결여되어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인용문에서와 같이 몸이 만들어가는 혹은 살아가는 과정을 인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럴듯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그 시간적 지평은... "... 내 몸은 사건들이 서로를 밀쳐내지 않고 현재의 주위에 과거와 미래의 이중적인 지평을 처음으로 투사하는 자연의 장소가 된다.... 내 몸은 시간을 소유한다. 내 몸은 현재에 대해 과거와 미래를 존재하도록 한다. 내 몸은 사물이 아니다. 내 몸은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든다. (분비한다)"는 식이다 보니... 세계는 주체와 함께 탄생해서 공존하다가 같이 소멸하는 것이라는, 신비주의적 철학의 이미지가 좀 있긴 하지만, 오히려 매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메를로-퐁티라는 철학자를 접할때의 2차문헌으로 나름대로 괜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식과 성숙, 발전과 진화가 무엇인지라는 기초적인 생각을 하는 기반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