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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한 권의 소설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선포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을 긋거나 소리를 높여 강조할 필요도 있을 테고 말이다. 스토리도 목차도 없는 소설이 그 자체로서 소설의 절대성이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것은 '배수아'라는 소설가에 대한 의구심인 동시에 의식의 흐름에 대한 자유분방한 기술 또는 가늠하기 힘든 생각의 방향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면밀한 탐구쯤으로 정의하기로 하자. 일단은.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p.69)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M을 사랑했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한다. 성탄절 전날에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방문하거나 연말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은 소설의 어떤 사건이나 결말을 구성하기 위한 전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스쳐갈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일상의 소일거리 속에서 문득문득 M에 대한 기억들이 개입한다. M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가 글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작가는 M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의 줄기로 삼아 음악이나 언어 또는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고야 만다.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다루는 듯하던 이야기는 일상 속으로 용해되고 M과 '나'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적 주제들에 대한 견해나 관점이 글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p.144)
배수아의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 하나, 의식과 의식 저편의 경계에서 소설이 펼쳐지고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냉랭한 현실의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큼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지만 배수아는 이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여놓아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그것은 때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동반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했던 독자라면 그녀의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p.174)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콤하다. 그러나 단맛은 언제나 순간적인 감각일 뿐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악은 언어가 탐구하지 못한 인간 신체의 다름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의 서툰 연주가 가을의 햇살 속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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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했다.(144쪽)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性)은 중요하지 않다. 그(그녀)가 걷고 있는 거리가 어디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그녀)가 혼자라는 것. 또한 그 홀로-되기가 자발적이라는 사실이다. 홀로 남은 그(그녀)는 낯선 거리를 떠돌며 무료한 일상 속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종종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못한다. 타인과 그(그녀)는 단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재차 확인하게 되는 것은 타인은 위안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사실이다. 타인과 그(그녀) 사이에는 소통이란 부재하므로.
이 소통부재의 시공간 속에서 그(그녀)는 사람들을 피해서 활자-음표(책과 음악)속으로 도피한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것은 근대적 양식의 서사가 존재하는 소설이 되지 못한다. 그 글들은 서사가 무뎌진 채 관념적이며 개인적인 것, 즉 에세이나 편지, 혹은 책과 음악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review)가 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타자와의 연대나 어우러짐이 극도로 배제된 상태에서 개인적인 체험과 내면적 울림(책, 음악, 기억)만이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므로.
2.
배수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위에 묘사한 바와 같다. 이렇듯 건조한 인물들이 기대는 곳은 오직 예술이다. 낯선 곳(아마도 작가 배수아가 체류하는 독일의 어느 소도시이리라)에서 은둔하는 내면적인 인간이 기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책과 음악, 그리고 기억이다. 이 세 가지는 예측불가능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소설은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건조한 인물의 관념과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과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열되는 지극히 '재미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간간히 독백하듯이 서술하는 주인공의 관념적 서술을 통해 어렴풋이 건조함 너머에 억눌려 있는 어떤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그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113쪽)"
3.
건조한 주인공은 M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기억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위의 인용구와 같이 어떤 이미지와 풍경만으로 제시된다. 그(그녀)는 더더욱 내면으로 침잠한다. 다음과 같은 독백들을 남긴 채.
성장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사고(소통이 아니라)의 명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7쪽)
그 시절 내가 읽은 것들은 진정 내가 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불안이 읽은 것에 불과했다. (101쪽)
과거나 혹은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지나간 오류나 다가올 망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16쪽)
4.
그(그녀)는 아픈 기억을 음악과 책으로 달래다가 얇은 소설이 끝나기 전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과 M의 사랑에 관한 일기이면서 소설인, 독백이면서도 외침인, 에세이 같은 글을.
내가 M에게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166쪽)
5.
루카치가 소설의 양식을 말할 때 언급한,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문제적 개인'이 이 작품에는 미약하게 드러날 뿐이다. 오직 실날같은 희망이나 대안은 소설의 마지막에 언급한 '이제 나는 M에게 무엇인가를 쓸 것' 이라는 다짐 뿐이다.
쓰는 것이 희망이라면, 배수아는 왜 그토록 비대중적이며 까칠한 글쓰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이 소설의 후속작인 '당나귀들'이나 '훌' 같은 소설들도 이 소설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애의 몸짓'이 아닐까. 자의식과잉이며 소통능력 부재인 주인공들의 읊조림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은 천천히 읽어나가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당신들이 보기에 흥미진진한 줄거리를 지니지 못한 추억들도 그(그녀)에게는 쉽게 고백하기 어려운 것임을 힘겹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을 즐기는 인간의 심리를 '관음증'으로 봤을 때, 배수아의 소설들은 상당부분 인간의 그러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빈약한 줄거리를 지닌 과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기억 속의 아픔으로 힘들었던 누군가라면 배수아의 소설을 읽고 아주 오랫동안 깊은 공명을 느낄 수 있으리라.
6.
...내가 군대에서 부치지 못한 수백통의 편지를 떠올린다. 그 편지들은 지금도 서랍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고, 그것이 당사자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제로다. 만약 타인들이 그것들을 본다면 별 생각없이 읽어내려가다가 하품을 할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타인에게는 별볼일 없는 추억과 이야기들이 그 시절의 나에게는 삶을 버티게 해주었다는 사실.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을까.
추운 겨울날 혹한기 훈련이 한창이었던 갈대밭의 매섭게 추운 참호 안. 그 속에서 흐릿한 랜턴에 의존하여 참호벽에 대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필사적으로 편지를 썼던 기억.
배수아의 주인공이, "내가 M에게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였다고 서술했듯이,
그 시절, 내게는 얼어붙은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며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던 동계훈련장의 참호 속이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였음을, 고백한다. 모든 글쓰기는, 구애의 몸짓이 아니었던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소설을 보면서 뜬금없이 가슴이 아려오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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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었을 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보인다. 어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사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쯤은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극복될 수 없는 죽음도 보인다. 죽음은 언제나 전능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몇 번을 더 곱씹다 보면 그제서야 무능한 언어가 보인다. 우리가 언어 앞에서 무력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 앞에서 무력한 것이라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점이 존재하고, 어떤 언어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끝내 비정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렇게 사랑과 죽음과 언어 때문에 이 소설 속 세계는 폐허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받고자 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는 한 '에세이스트'가 있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가 ‘순수 예술’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유명하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 이 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필요가 있다면(물론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발레리의 저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언어들은 음악이 되기를 바랐으나 끝내 음악이 되지 못한, 일종의 잔해에 불과한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든 문학이 음악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일이 되므로 위험하다. 이 소설은 왜 「작곡가의 책상」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책상」인지를 해명하는 과정 속에 해답이 있을 텐데, 내가 이해한 바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는 글쓰기의 결과물로써 ‘글’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글을 쓴다는 행위, 혹은 글을 쓰는 순간으로서의 ‘글쓰기’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쓰는지는 관심이 없고 오직 쓴다는 행위만을 위해서 쓴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언어는 소통 수단으로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고, 사유의 한 방식으로서도 존재한다. 따라서 불완전한 언어를 매개로 해서는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위의 인용문은 전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갑자기 치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사랑을 할 때다. 한국인인 ‘나’와 독일인인 ‘M’ 사이에서 이와 같은 언어의 장벽은 추상적인 한계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불가능으로 빚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내가 M과 서로 다른 자국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87면) 이들은 언어의 불가능 때문에 사랑의 불가능에 부딪혔으나, 그것은 단순히 소통의 불가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교감의 불가능이자 이해의 불가능이고, 더 나아가 존재론적인 불가능이었다. 이들 사이에 '언어'가 아니라 '음악'이 매개가 되어 주었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것은 또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죽음인데, 위의 인용문이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처음으로 들어보았던 성악 교향곡을 인상적으로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훗날 나는 그것들의 테마가 단지 하나, 죽음, 그것의 전능을 인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0면)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 같다. "죽음, 그것의 전능을 인정함"이라니. 죽음이 전능하다면 죽음 앞에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이렇게 소설은 우리를 세 가지 불가능 앞에 데려다 놓는다. 사랑의 불가능과 죽음의 불가능과 언어의 불가능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사랑과 죽음과 언어에 있어 모두 무능한 '나'가 택한 길은 다음과 같다.
무엇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다. 이들에게 '음악'은 하나의 언어, 그것도 아주 절대적인 언어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이에게 '음악'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음악만이 글을 쓰는 작가(에세이스트)에게는 궁극의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처럼 M과 '나'가 '언어'가 아니라 '음악'으로 대화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희망이다. 사랑과 죽음과 언어는 모두 하나의 지점, 바로 '불가능'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만나며, 그 불가능의 다른 이름이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위 인용문은 소설의 핵심을 안고 있다. 이 에세이스트는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쓴다. 방점은 반드시 '쓰다'라는 동사에 찍혀야만 한다. 끝내 불가능에 봉착한다고 해도, 그 불가능을 향해 가는 과정만큼은 불가능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알쏭달쏭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해도 좋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코기토는, 세상의 모든 '에세이스트'들에게 이렇게 변형되어 말해질 것이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소설은,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확인받는, 바로 저 '작가적 코기토'의 소유자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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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마음에 든 작가의 책은 한번에 계속해서 읽어버리려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왔다. 집착.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딱 이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이 책은 소설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에세이같기도 하다. (제목에 '에세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그런가.) 작가의 모습과 이 소설의 주인공 '나' 가 일치되는 모습으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쩌면 정말 화자가 사랑한 M도.. 실제의 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붉은손클럽>을 읽은 뒤 다시 접한 그녀의 책이라 그런지 '집착' 과 '사랑의 아픔' 이라는 소재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요하임과 파티에 갔을 때, 주인공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적극적인 사교성, 그 자체가 하나의 미덕이 되는 소란스러운 소사이어티말이다. 다지 소모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고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 말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나또한 화자처럼 사람 만나는 일에 서툴고 그런 자리가 정말 싫다. 그리고 그녀가 학교에서의 복종의 시간을 싫어했듯이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난 주인공처럼 아주 어릴 적부터 학교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런 점에서 아마 주인공은 어릴적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동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책이 더 술술 읽히고,..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읽고싶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유욕과 질투.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 아마 내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해가 안 가고 다소 화가 나는 부분도 있었다. 뒤에 수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읽고 내 머릿속은 엄청나게 복잡해 졌다. "수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수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식이건 스타일이건 수미는 환경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학교나 단체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중략... 엄밀하게 말하자면 각종 미디어에서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수미는 그린피스,야생동물보호,반전평화운동,채식주의,...사형제도폐지나 레즈비언어머니들을 위한 모임까지... 관심을 가졌다고 나왔다. 이 부분을 읽고 나도 어쩌면 내가 여태껏 믿고 따르고 관심을 가졌던 모든 것이 학교나 미디어로부터 단지 무분별하게 흡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나도 결국은 일반 군중들속에 일원이었던 거나 다름없다. 겉으로는 난 달라.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나도 똑같이 무비판적 수용을 해왔던 거였다. 머릿속에서 천둥이 콰광! 멍한 느낌이 들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며칠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겠다. 더 많은 음악. - 이게 소설의 첫문장이다. M은 음악을 들을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화자는 음악적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비평가들의 수많은 비판, 그리고 오만을 비꼬았다. 하긴.. 나도 가끔은 외국CD를 사면 그 앨범과 뮤지션에 대한 비평을 써 놓은 종이가 딸려올 때가 있는데 그 것을 읽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먼저 듣고 싶다. 음악이나 책의 의미는 그런 점에서 볼때, 모두 청자,독자따라 달리 생각되고 의미가 부여된다는 점이 비슷한 것 같다. 이 책은 다른 배수아의 책과는 좀 다르게.. 나에겐 좀 충격이었다. M이 여자라는 점도 그렇고.. 내 정곡을 콕 찔르는 말을 읽어서 그런거 같다. 붉은손클럽> |
| 환절기다. 아침과 점심의 기온 차이가 크게 난다고 한다. 그건 축소된 겨울과 봄이 하루 동안에 구현되느라 발생하는 증상일 따름이다. 환절기는 계절의 차이를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완충장치 같은 지점이다, 라고 혼자 읇조리면서 견디고 있는 중이다. 배수아의 글은 이런 환절기에 읽기에 적당해 보인다. 과거의 배수아 소설이 지글지글한 여름 한낮에 어울렸다면 지금의 배수아 소설은 이런 환절기에 적합하다. 어딘지 낭창하고 흐물거리던 배수아는 ‘어떤 침잠’으로 진지해졌다. 소설은 독일에서 내가 겪은 M이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나는 M을 처음 만났고, M을 알지 못했고, M의 발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 첫인상의 느낌을 채 정돈하기도 전에, M은 심지어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한 권의 책을 건네면서도 단어를 몰라도 상관없으니 발음의 규칙에 따라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했다...” M은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현재의 M이 아닌 과거의 M이다. 게다가 나는 여자인데 나와 사랑한 M도 여자이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M의 성별을 알아맞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을 전공한 M은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내적으로 강인해 보인다.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나는 독일어 개인강습을 받기 위해 M을 만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M에게 포섭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다. 딱히 소설 속에 에세이스트가 등장하지 않으니 제목에서 밝힌 에세이스트는 아마 작가 자신일 것이다. 배수아는 소설에 에세이의 양식을 심란하게 끌어들였다. 혹은 에세이를 소설의 등에 심란하게 업고 있다. 그러니까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배수아라는 작가가 에세이스트라는 설정하에 그녀의 책상 위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암시일 터. 하지만 간간히 길어지는 상념들 속에서도 소설이 가져야 할 근간은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은 에세이이면서 소설이다. 환절기에 읽기 좋은,,, ps. 배수아의 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그가 뿜어내는 몇몇 문장들은 너무 신랄하게 나에게 맞닿아 있어 낯익은 불안감을 조장하고는 했다. 아래의 문장들은 그렇게 내 촉수를 건드린 문장들이다. “... 그 시절 내가 읽은 것들은 진정 내가 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불안이 읽은 것에 불과하다...” - 아으, 아롱다리, 아직도 난 불안하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낯선 사람조차 될 수 없었다...” - 이런 관계에 대해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수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수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식이건 스타일이건 수미는 환경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학교나 단체나 집회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미는 건강하고 확고하며 공명정대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수미가 사랑하는 것은 비극적이로 이타적으로 보이는 종류의 화제 그 자체였다. 수미는 인간이 가장 비속하게 오감에 충실할 때 사랑하게 되는 것들을 스타일리시하게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지나치다 싶은 해석과 변명과 명분과 휴머니즘과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미는 그런 식으로 그 안에서 마음껏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로 명명될 수 있었다...” - 음... 이 문장을 읽고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소설 속의 내가 M과 헤어져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사귀었다는 여자 수미. 그를 평하는 나의 생각을 읽고 있으려니, 마치 날 평가하는 배수아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만 같아 흠칫 놀라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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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세이스트 수필글에는 대체로 무난한 글들이 많았다. 지난호에는 너무 가슴 아프고 애잔한 글들이 많아서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었는데 이번호는 다행히 그런 글들은 적었다. 아마도 계절 탓인것 같다. 지난호는 격월로 나오는 수필집이다 보니 계절적으로 가을이어서 그랬던 것 같고 이번호는 그런 시기를 지나서 나온 글들이어서 그렇지 않나 싶다.
부모를 그리며 생각하는 글도 눈에 띄었고 자식을 그리는 부모의 심정을 표현한 글도 읽으며 자식이 커서 부모 나이쯤 되어야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알았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가고 살기가 힘들어 지면서 거리로 나앉게 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람의 형편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아침마다 세타악~ 소리를 외치며 아파트를 도는 세탁소 아저씨의 소리가 겨울보다 여름엔 더 뜸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형편을 고려해 일부러 목을 내밀어 기다렸다가 세탁물을 모아서 준다는 향아님의 글. 연말연시 남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싸여 주위를 돌아 볼 여유가 없을 때 서울역 근처 어느 순댓국밥집에서 버킷리스트 파티를 하며 외롭고 그늘진 사람들을 돌보려는 마음을 유쾌하게 가졌던 소연님의 글들에서 아직은 우리 사회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살만하고 훈훈한 정이 남아 있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나 같은 죄인에게'란 글을 읽으며 장애를 가진 엄마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장애아 뿐만이 아니라 그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심정이 얼마나 죄인된 심정으로 하루 하루 숨을 죽이며 살았는지를 보았다. 자식보다 더한 아픔으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으면서까지 자식의 홀로 서기를 위해 애썼던 엄마. 결국 아들을 선교지로 보내며 아들은 제 갈길을 찾아 선교사로 헌신하고 엄마는 직장을 다니며 서로의 살길을 찾게 되면서 이들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이 났다.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간이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생각한다.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 더 높은 곳으로 눈을 향할 때 비로소 자신을 향했던 아픔은 물러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을 상하게 하니까 저절로 단절이 되고 단절은 외로움을 부르게 되니까 그렇다. '갇히다'란 글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어서 갇힘에 대해서 단절과 외로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글이다.
고독의 판타지아에서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여유를 남겨 두었다. '우리가 가끔 타인의 힘듦을 자신의 창으로만 해석한다" '그것은 오류를 동반하는데도 자신있게 확신하며 당당하게 표현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악행인지 모를 때가 많다.' 항상 오류는 타인의 상황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나오게 된다. 자신의 창으로 들여다 보는 오류, 자신의 창으로 해석하는 오류 타인의 힘듦이나 슬픔은 그 안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된다.
울음이나 슬픔이나 고독은 무조건 한 짝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들은 별개의 짝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채색 만큼이나 소소(炤炤)한 빛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은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펼쳐 갈 수 있는 곳이다. 가진것이 없을수록 더 큰 꿈을 꾸어야 한다. '상어 같은 사람' -부레가 없는 상어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헤엄을 쳐서 바다의 최강자가 되었다면 우린 누구나 이런 상어를 꿈꿀 수 있다. 이 꿈은 비단 가시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형의 것일 수도 있고 태도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것이 되었든지 간에 올 한해의 벽두에서 우리 모두 상어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소망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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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마치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시청의 사건과 같다. 실체는 없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다. 충실해야 하는 것은 역할이다. 그것이 조직 인간이다.” -“징계위원회” 중- 1990년대에 난 배수아를 읽지 않았다. 그녀가, 당시 문단을 휩쓸던 인기여류작가들의 아류라고 생각해서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배수아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배수아의 직업은 두 가지였다. 주중엔 공무원 생활을 했고, 주말엔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난 그저 궁금했다. 관료주의의 표상과도 같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기 안의 예술적 기질은 어떻게 다스리는지, 알고 싶었다. 주말을 맞아 찾아간 모교 도서관에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단편소설 “징계위원회”, 구체적으로 위에 인용한 저 문장들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조직의 쓴맛’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 안에 자리잡은 모호하고 흐릿한 스케치를 배수아가 특유의 정직하고 건조한 언어로 색을 입힌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배수아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여행용 가방을 버스 정류장에 놓아둔 채,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붕괴된다, 우리들 인생이. 그 순간이 조금 이르게 찾아오거나 조금 늦게 찾아올 뿐이다. 그렇게 우리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붕괴된다.” -“은둔하는 北의 사람” 중- 그러던 중 어느 날 십여 년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고 배수아는 독일에 갔다. 유럽의 아무 나라나 택했다는데, 그게 독일이었다. 그녀의 초기작들에서 나타난 관료주의와 조직을 향한 건조한 시선, 불행과 죽음의 은유와 서사, 스스로 택한 고독과 고통과 가난에 대한 강한 자부심 등은 여전히 유효하나, 독일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많이 변형되었다. 전엔 주로 황폐하고 불온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했지만, 독일 체류 후 배수아는 관념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한 글쓰기를 시도한다. 여기, 이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러한 시도의 정점에 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는 한때 ‘나’의 개인 독일어 교사였던 M과 사랑을 했다. M은 “모든 언어는 궁극적으로 문학일 뿐이며, 가장 궁극적인 것, 즉 문학에서 시작해서 문법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믿는” 특이한 수업방식을 고수한 사람이었다. 순수의지로 극단적 고립의 상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만이 갖게 되는 금욕적인 식물성을 가진, 책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 M에게 ‘나’는 이끌리게 되나, 사소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관계는 깨지게 된다. 소설은 M과 사랑했던 시절과 현재 ‘나’의 일상이 겹쳐지며 진행된다. 그렇다고 M과의 시시콜콜한 연애담을 ‘추억하는’ 것은 아니다. M과 함께 들었던 쇼스타코비치를 위시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감동.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 같이 읽었던, 혹은 혼자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독후감이 소설 전반에 펼쳐져 있다.
배수아는 “작가의 말” 에서 이것이 소설이라고 불리든 에세이라고 불리든 개의치 않는다고 썼다. 다만, 그녀는 ‘예술을 위한 예술’ 만을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어 자살하고 싶다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못을 먹어요” 라는 편지를 써보냈던 (배수아, 중편소설 “철수” 중) 불온한 ‘여자 아이’는, 이제 이국의 땅에서 이국의 언어를 배우며 해질녘이면 어김없이 ‘예술가의 책상’에 앉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예술의 세계, “인간의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각자 고독하게 늙어갔으며 차가운 천성 때문에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남겨두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지금 각자 혼자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들, 우리들 세 사람 중의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노래하고 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으며 중요하지 않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어 있는 빵 바구니와 바람의 영혼 뿐이다.” -“회색 時” 중- 그리하여, 나는 배수아를 읽는다. 배수아를 읽는다는 것은 일상의 나를 지우는 작업이다. “실체는 없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것이든 개의치 않는다. 지금 이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 년 후면 사라질 고독한 영혼과 겨울바람의 메아리 뿐이기 때문이다. 배수아 식으로 말하자면.
2007년 01월 28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