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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행복한 죽음' 출간에 맞춰...
"'윤회와 행복한 죽음' 출간에 맞춰..." 내용보기
방배동 소재 제따와나선원의 대표이신 일묵스님. 서울대학교 수학과 박사과정 중 출가하신 분으로 상당히 지적이시고 명민해 보이시는 분이다. 어떤 한문을 쓰시는지 모르지만 一黙이라 쓰시지 않을까 싶다. 2009년 여름 윤종국교수의 ‘시공간 속의 생멸과 현대물리학' 강연회때 잠깐 옆에서 뵈었을 뿐이다. 교원대학교 교수이며 일묵스님의 후배인 윤종국교수가 시공간 속의 생멸과
"'윤회와 행복한 죽음' 출간에 맞춰..." 내용보기

방배동 소재 제따와나선원의 대표이신 일묵스님. 서울대학교 수학과 박사과정 중 출가하신 분으로 상당히 지적이시고 명민해 보이시는 분이다. 어떤 한문을 쓰시는지 모르지만 一黙이라 쓰시지 않을까 싶다. 2009년 여름 윤종국교수의 ‘시공간 속의 생멸과 현대물리학' 강연회때 잠깐 옆에서 뵈었을 뿐이다. 교원대학교 교수이며 일묵스님의 후배인 윤종국교수가 시공간 속의 생멸과 현대물리학이란 강의를 하신 데에는 수학과 학생이셨던 일묵스님의 요청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현재로서는 시공간 속의 생멸과 현대물리학 같은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강의가 일회로 끝나 아쉽다.

 

일묵스님이 최근 <윤회와 행복한 죽음>이란 책을 쓰셨다. 나는 불교를 오강남교수의 말씀대로 이웃 종교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이웃 종교란 말은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종교학자이자 철학박사인 하비 콕스(Harvey Cox)는 최근작인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란 부제가 붙은 <종교의 미래>에서 신앙(faith)과 믿음(belief)을 구별해 썼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내면의 확신을 뜻하는 말이고 믿음은 견해를 뜻하는 말이다. 그 분의 용법을 참고하자면 나는 불교에 대해 신앙이 아닌 믿음 즉 내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불교 단체에 적(籍)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후에 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더라도 나는 그 종교에 대해 믿음 이상을 갖지는 못할 것 같다.

 

불교의 윤회(輪廻)와 무아설(無我說)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무아를 주장하시는 분 가운데 대표적인 초불(初佛)의 각묵스님 같은 분은 한국 불교가 참나, 진아, 불성 등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배경에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영원한 실체에 대한 상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게 영원한 실체에 대한 상정을 지양(止揚)할 것을 주장하시는 각묵스님 같은 분도 윤회를 주장하신다. 물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초기 불교는 깨달음을 이루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같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면 제한적 횟수의 윤회를 한 후 멸(滅)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衆生)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일묵스님은 여러 초기 경전들과 주석서(註釋書)인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바탕을 두어 윤회(輪廻)와 업(業)과 연기(緣起)에 대해 설명했다는 입장을 밝히셨다. 그런데 아직 책을 읽지 못해 단언(斷言)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참고할 만한 사항을 이야기 하고 싶다. 진주 경상대학교의 권오민교수 같은 분은 일본 불교계에서는 붓다가 깨달은 것이 4성제가 아니라 연기라 주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일묵스님이 윤회와 업과 연기를 키워드로 삼으신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윤회와 연기는 따로 나누어 취급할 수 없는 한 쌍의 개념어이다.

 

이제 충북대 철학과의 정세근교수의 <윤회와 반윤회>를 이야기 해야겠다.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윤회와 반윤회>는 불교에 스며든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지적한 책이다. 불교의 주요 개념어인 윤회 역시 힌두교적 요소에 의해 채색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술했듯 일묵스님이 윤회를 주장할 때 근거를 둔 것은 초기 경전과 아미담마, 청정도론 등이다. 불교에는 방편(方便)이라는 것이 있다.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도 하는 방편은 듣는 이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법 내용을 달리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과 함께 중요한 개념어이다. 초기 경전에서 윤회를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방편에 따라 설파(說破)된 차제설법일 수 있다.

 

<여성성불의 이해>라는 책에서 저자 구자상은 붓다가 여성을 차별했다는 세평을 염두에 두고 쓴 이 책에서 “여성의 성불을 설함에 있어서도 대기설법”을 한 것이 차별로 보였을 뿐이라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차제설법으로 보아야 하고 어떤 것을 차제설법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다. 또한 호교(護敎)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그것은 차제설법 차원에서 설해진 말씀일 뿐이라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차제설법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자신의 주장을 무리하게 펼치기 위해 차제설법이라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의도를 배제한다 해도 우리가 차제설법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붓다 뉴스’를 통해 행한 대중강좌에서 황순일교수는 붓다께서 ‘바라나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온 야사’에게 “다른 사람을 돕고, 계율을 지키면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등의 차제설법을 함으로써 야사로 하여금 ‘생성되는 모든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라는 맑은 직관을 얻고 붓다의 제자가 되게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강남교수는 ‘종교의 표층과 심층‘이라는 글에서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문자를 통해 문자가 가리키는 그 너머의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을 심층 차원의 종교라 주장했다. 오강남교수도 예를 들은 것처럼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온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표층 종교관의 일종이다. 반면 ”가족 뿐 아니라 온 동네 및 나라와 사회에서 불우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산타 이야기의 정신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심층적 종교관의 하나이다.

 

붓다가 야사에게 차제설법을 통해 극락을 언급했다 하니 하는 말인데 죽은 뒤에 가는 극락은 있는 것일까? 지난 해 나온 금강경 해설서인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에서 신용산님은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불교의 27천(27天: 욕계 6천, 색계 17천, 무색계 4천 등)이 죽음 후에 가는 지옥과 인간, 그리고 천상의 어딘가에 있는 세계 등으로 뒤바뀌었다.“는 주장을 펼쳤다.(60페이지, 171 페이지, 212 페이지) 이는 마음이 평온한 것이 곧 극락 세계라는 의미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어 ”환생이나 윤회는 그것이 자아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업(業)을 전달할 매개체가 있어야 가능한데 붓다는 그런 매개체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주장도 함께 했다. (71 페이지)

 

윤회를 인정하는 분이나 인정하지 않는 분이나 모두 나름의 근거 하에 주장을 펼치는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그런 상반되는 주장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앞서 차제설법과 방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고구정녕히 설하고 계신 가르침"이라 설하신 각묵스님의 주장으로 인해서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도처라는 단어 때문이다.

 

윤회설이 방편이 아니기에 도처에서 설해진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신용산님의 주장을 접하고 놀랄 필요는 없다. 윤회와, 사후 심판에 의한 극락과 지옥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선하고 올바르게 살면 될 것이다. 신용산님 같은 분의 주장이 불교의 근간(根幹)을 뒤흔든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전의 행위에 대한 심판에 따라 극락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이 없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아무렇게나 막 살 작정이 아니라면 놀라지 말아야 옳다.

 

하비 콕스의 분류법을 따라 신앙이 아니라 믿음 차원에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 또는 극락과 지옥이 있든 없든 성실하고 선하게 살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회와 반윤회>도 <윤회와 행복한 죽음>도 다 같이 소중한 책이다. 불교가 힌두교에 의해 오염되었다면 바로 잡되 극락과 지옥이 있다고 염두에 두고 살면 될 것이다. 사실 영원한 복락, 영원한 생명을 지향(指向)하는 것만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것도 없다.

 

홍정수교수는 <베짜는 하느님>이란 책에서 ”하나님을 사실상 더 이상 믿지 않는 현대인들은 하나님 없는 삶이 無보다 더욱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바르트는 부활이란 바로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생의 완성을 뜻한다고 과감하게 말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는 칼 바르트의 부활관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다만 그의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볼 뿐이다.)

 

이어 그는 ”이같은 부활 이해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줄 것은 뻔하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 (임마누엘)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자기 육체의 만수무강과 불로장생'일 뿐이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준다 해도 굳이 (하나님은 없어도 좋으니) '불로 장생'이나 달라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위에서 ”천국과 지옥 또는 극락과 지옥이 있든 없든 성실하고 선하게 살 것.“이라는 말을 했다. ‘성실하고 선하게’란 이 세계를 있게 한 신묘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성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포함하는 말이다.

 

<윤회와 행복한 죽음>의 저자 일묵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법화경>에 삼계화택(三界火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삼계가 다 불타는 집과 같다는 뜻입니다. 욕계·색계·무색계가 즐거움이나 고통이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이 셋 모두 중생이 사는 세상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업을 완전히 소멸해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삼계를 끊임없이 떠돌게 됩니다....이 삼계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입니다....”

 

아라한이 되어서야 윤회를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앞서 내가 말한 바와 일치한다. 경위야 어떻든 불교에서 말하는 3계설의 구성력은 잘 지어진 건축물처럼 정교한 데다가 지적 흥미를 돋우기까지 한다. <윤회와 행복한 죽음>보다 윤회를 전면적으로 다룬 책이 있을까 싶다. 스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19272

 
종교의 표층과 심층
m******1 2011.11.06.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