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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든지 자신들만의 신화(神話)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적어도 그것을 공유하는 전승 집단의 구성원들에게는 신화의 내용이 진실하고 신성하다고 믿어진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체적으로 신화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도깨비나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의심하지 않고 믿었듯이, 신화의 내용과 의미는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신화는 전승 과정에서 각종 의식을 동반하면서, 그 신성화의 면모가 강화된다. 따라서 전승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내용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정신을 통해서 신화의 존재 의미를 찾게 된다. 우리의 경우를 돌아보더라도 <단군신화(檀君神話)>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신화 속에 담긴 정신을 더 중시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신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신화를 접할 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여 신화가 가진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합리성’의 측면에서만 따진다면, 신화가 ‘신성하다’고 느낄 요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천상과 지상을 넘나들고, 자칫 황당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갖가지 환상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신화의 내용은 ‘현실성’을 벗어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갖가지 요소들은 당대 사람들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 냄으로써 우리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나 로마 민족에게는 신성한 이야기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오늘날 민족을 달리 하는 우리들이 흥미로운 이야기쯤으로 여기는 것은, 신화가 그것을 공유하는 민족과의 연관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신화 역시 그것을 공유하는 민족의 성쇠(盛衰)와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에서 살아남은 민족의 신화는 지배적인 문화가 되어, 지속적으로 ‘신성한 이야기’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게 된다. 하지만 다른 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게된 민족의 신화는 더 이상 ‘신화’의 위치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단지 사회 일부 성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향유되면서, 전설이나 민담과 같은 ‘민속’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애초 수많은 신화들이 각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아주 사라지거나 그 일부의 흔적만을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여러 민족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민속(folklore)에서도, 신화(myth)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논할 크리스 월더(Kris Waldherr)의 <내 안에 여신 만들기(Embracing the Goddess Within)>는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와 민속에 등장하는 여신(女神)들을 다룬 책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흔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남성 뒤에 가려진 존재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신화의 세계에서도 주인공은 언제나 ‘남성’이고, ‘여성’은 늘 그에 부수되는 존재쯤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남성과 여성의 ‘투쟁(?)’에서 남성이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하는 신화 속에는 다양한 여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 속에 잔존하고 있는 여신들의 흔적을 더듬어 봄으로써, 그들이 신화 세계의 주변으로 밀려나기 이전의 모습을 재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신화의 이면(裏面)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는 다양한 ‘여신’들과 그들의 ‘신성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신화와 민간 전승 이야기에 매우 관심이 많은’ 저자 크리스 월더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다양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의 성격에 주목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신화 속에 존재하는 여신의 속성을 통해서, 인류가 여성에게 부여했던 ‘신성한 자질’을 확인하고자 한다. 저자의 서문에 의하면 ‘여신에 관한 신화와 의식은 그것을 만든 인간의 믿음을 담고 있’으며, 때문에 ‘여신과 그들의 속성은 원형 또는 우리의 정신 깊은 곳에 내재한 원시 상징물이라’ 부를 수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신화 속에 존재하는 여신의 이러한 원형(archetype)은 바로 ‘여성의 힘과 재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여성을 위한 창조적인 지침서(A Creative Guide for Women)’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각 여신의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해당 여신의 ‘숭배 의식’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숭배 의식들은 각 민족의 민속에 남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저자가 해당 여신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자료를 참조하여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독자들이 직접 따라 행하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실제로 소개된 여신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독자들이 이 책에 기술된 모든 의식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숭배 의식의 설명을 통하여 해당 여신들의 성격을 보다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에서는 여신의 성격에 따라, 모두 6개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여신을 배치하고 있다. ‘탄생’ ‘사랑’ ‘모성’ ‘창조성’ ‘힘’ ‘변화’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항목의 의미는 아마도 저자가 신화를 통해서 추출한 ‘여성성’의 징표라고 여겨진다. 물론 동일한 항목 속에 배열된 여신들일지라도, 신화의 내용에 따라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오늘날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여성성’이라는 관념도 실상은 문화적 관습 속에서 일방적으로 부여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동적인 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어, 각 여신들이 지닌 성격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투사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여신들을 소개하면서, 해당 항목의 뒷부분에 ‘그밖의 여신들’이라는 난을 두어 그 여신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다른 민족의 여신들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여신들에 대해서 간략한 서술에 그친 점이 다소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이 책에 소개된 여신들의 수효는 결코 적지 않다.
먼저 저자가 분류한 ‘탄생’의 항목은 여성이 생명의 창조자란 점에 착안하여, 각 신화 속에 등장하는 천지창조의 주체로서의 여신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을 낳았다는 ‘가이아(Gaia)’나, 아메리카의 푸에블로 인디언의 신화에서 생명의 그물을 짜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거미 여인(Spider Woman)’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지상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노르웨이 신화 속의 여신 ’에르다(Erda)’나, 창조물들에게 우유를 주는 천상의 암소로 묘사되는 이집트의 여신 ‘하토르(Hathor)’도 같은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의 속성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저자는 각각의 특성에 따라 적절하게 분류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열렬한 애정의 주체로서의 여신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는 ‘사랑’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Hera)'를 비롯한 여러 여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나타나기 마련인 ‘월경’의 의미에 주목하고, 수많은 열매가 하나에 담겨있어 다산성(多産性) 혹은 생명력의 상징으로서의 석류 열매가 지닌 문화적 의미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항목에는 이웃 일본의 여신인 ‘벤자이-텐(Benzai-Ten)’이 소개되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진홍색 실로 묶어 인연을 맺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이는 흔히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민속에서 혼인의 매개인으로 알려진 ‘월하노인(月下老人)’ 또는 ‘월하빙인(月下氷人)’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월하노인’ 역시 부부가 될 남녀의 다리를 붉은 실로 묶어 인연을 맺어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일본의 ‘벤자이텐’ 여신은 이러한 문화의 전승 속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자식을 길러주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속성에 주목한 ‘모성’의 항목에서는 새 생명의 탄생과 양육에 관계된 여러 여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분류 체계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겠지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데메테르(Demeter)’와 ‘페르세포네(Persephone)’ 모녀가 각각 ‘모성’과 ‘사랑’이라는 다른 항목에 분류되어 있다. 딸인 페르세포네가 지옥의 왕인 ‘플루토’에게 끌려가 결혼을 하게 되고, 어머니인 데메테르는 딸을 잃은 슬픔에 잠겨 대지를 돌보지 않아 황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하 세계에서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는 그곳을 완전히 떠날 수 없어, 1년 중 6개월은 지상에서 나머지는 지하에서 보내게 된다. 딸을 다시 만난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는 이에 다시 지상의 곡식을 돌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페르세포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일부 여성들이 성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 겪는 우울한 심리상태를 상징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동일한 신화의 내용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여신들의 성격도 조금씩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창조 정신이 본원적으로 여성의 속성임을 지적한 ‘창조성’의 내용이나, 살아가면서 마음 속의 그늘과 슬픔을 극복해 가는 힘을 강조한 ‘힘’의 내용도 또한 신화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여성성’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여성이 폐경기를 맞으면서 늙어가지만, 인생을 겪으면서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혜를 발휘하는 여신들의 속성을 ‘변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crone)라는 말은 왕관(crow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여신들이 ‘존엄성과 원숙한 지혜, 그리고 신성함의 영예를 지녔’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 각 나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특징을 논하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상징어 사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상 우리의 민속에서도 다양한 ‘여신’들이 등장한다. <단군신화>의 ‘웅녀(熊女)’나 <주몽신화>의 ‘유화(柳花)’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과 ‘주몽’의 어머니이면서, 그들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이승에서의 온갖 고난을 이겨내어 결국 죽은 이의 혼령을 편안하게 이끄는 무신(巫神)으로 모셔진 ‘바리데기’도 있다. 또한 어린아이를 점지해 주신다는 ‘삼신 할미’의 존재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기도 했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도 이처럼 다양한 여신들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어머니’나 혹은 ‘모성’이라는 이미지를 금방 떠올리듯이, 우리의 문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들은 생명의 창조와 무한한 포용력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하여 다른 민족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문화에 내재해 있는 여신을 떠올리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기회에 여성은 단지 남성들에 의한 보호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삶의 동반자로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였으면 한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