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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해방 50주년 기념을 위한 장편소설 공모에서 권현숙의 『인샬라』가 당선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996년 한겨레문학상이 공식 제정되었다. 제정 첫해엔 수상작이 없었고, 5회 역시 수상작이 없었던 것을 제외하고 2회부터 차례대로 수상자들을 열거하면 김연, 한창훈, 김곰치, 박정애, 심윤경, 박민규, 권리, 조두진, 조영아, 서진, 윤고은, 주원규, 최진영이다. 이 작품집에 단편소설을 수록한 작가들은 이렇게 열 세명이고(이 작품집은 2010년에 출간되었다.), 2011년 16회에는 장강명이 17회인 올해엔 강태식이 수상하였다. 『끝까지 이럴래 』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집으로서 60년대생 작가부터 80년대생 작가까지 포진하고 있다. 출생연도는 다르지만, 동일한 연대에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모색이자 실험’, 이 작품집은 한 마디로 이렇게 압축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OO상 수상 작품집이 그렇듯 이 작품집 역시 여성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특히 80년대생 작가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을 들자면 소재의 다양성이 있겠다. 사회의 다른 곳에서 여초 현상이 두드러진 것처럼 소설가 집단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들, 딸 구별 않고 하나만 낳은 부모 세대에서 자녀들이 어느 직업군에서건 50:50의 비율을 유지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거니깐.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새로운 게 없다. 이젠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조차 식상한 것이 되어버렸으니깐. 궁극의 상상력을 발휘하든, 일상을 현미경처럼 쪼개보든, 그 자체로 어떤 ‘신선함’이나 ‘독특함’이 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주원규의 위악은 이미 김사과에서 보았던 것인데 위악의 측면에선 김사과가 훨씬 우위다. 최진영의 경우도 윤이형이나 기존의 7, 80년대생 여성 작가들의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윤고은은 2011년 이효석 문학상까지 수상하며 발군하고 있는데, 그럴만한 작가며 작품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심지어) 서진이나 주원규는 80년대생도 아니고 70년대생이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혹은 마이너리티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두 작가 중 한 명을 선택하라면 나는 서진의 컬트적 상상력(p.378)의 손을 들어주겠다. 평론가 이명원은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에서 반인간주의와 반미학적인 태도 역시 서사적 진정성 추구의 일환(p. 376)이라고 옹호하면서 이를 ‘포스트 진정성’[ii]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포스트모던에 대한 피곤증이랄까? 이젠 ‘포스트’라는 말만 들어도 지친다. 이 역시 이젠 식상하다 못해 질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다시 원전으로 회귀해야 하는 걸까? 이명원의 표현대로라면 인문주의적 진정성의 세계를 지나 포스트 진정성의 세계로 전이한 거라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성’ 앞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암튼 ‘소설’ 넓게 보아 ‘문학’이 제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자명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심윤경, 박민규, 권리가 야구로 치자면 3, 4, 5번의 중심타선이라 볼 수 있을 듯하다. 세 타자 모두 타석에서 홈런을 날리면서 지지부진한 1, 2번 타선과 애매모호하고 긴가민가한 하위 타선을 살려주면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심윤경의 「가을볕」은 단편소설의 미덕을 오롯이 보여주는 작품이고, 권리의 「그녀의 콧수염」은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만큼이나 경쾌하고도 공포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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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끝까지 이럴래?
얼마전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작품은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 최진영이라는 이름은 그래도 낯설다. 공감하고 나누고 싶은 그 알싸한 기분이 날아가버릴까봐 잡아두는 심정으로 리뷰라는 이름으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영향으로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끝까지 이럴래?>를 펼쳤다.
<끝까지 이럴래?> 무슨 제목이 이래? 적어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들인데 제목에서 영 땡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잡은 것은 아마도 작가 최진영의 작품에 경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내가 소설에 대해서, 또는 다른 글이나 책에 대해서 논평같은 것을 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제대로 할 줄도 모르지만 한쪽 끄터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 정도는 내 자신의 재미로 삼을 수 있어 좋다.
내 생각에 빠져사는 어른들의 아이사랑법
그 가운데 한창훈의 <그 아이>라는 글은 읽으면서 쏙 빠져드는 느낌이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섬사람들이 화산활동으로 인해 뭍으로 나와서 살게 된다. 그중의 한 아이는 우연히 피아노를 발견하게 되고 절대음감으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피아노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가르치는대로 연주하라고 한다. “서로 좋아하는 것들이 흩어져 있어요” “잔잔한 바다에 오리가 힘이 빠진 채 둥둥 떠 있다” “새가 가지에 내려앉아 깃을 다듬는것 같잖아요. 부리로 하나하나 다듬을 때는 아주 천천히 그것을 하거든요.” 이 모두 소리에 대한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 아이의 이러한 감각들은 어른들은 무시하고, 특히 선생님은 회초리로 다스리면서 가르친대로 연주하라고 한다. 그래야만 상을 받을 수 있다고. 그 아이는 피아노 연주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한다.
착한여자의 우발적 남편살인?
박정애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읽다보면 지금이야 그렇겠냐마는 경찰서를 어떤 이유로든 한 번이라도 다녀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는 경찰들의 더러운(?)성질들을 슬쩍 슬쩍 엿볼 수 있다. 형사 최평서의 삐딱한 시선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등 등장인물들 하나 하나에 생명을 느낄 수 있고, 피의자 신문조서의 내용을 통해 ‘착한여자의 나쁜 남편에 대한 우발적 살인’을 알 수 있는 것에서 형사의 시선으로 남다른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그동안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13명의 단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모든 작품들이 모두 감동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몇몇 글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기도 하겠거니와 속된말로 ‘똘아이 아냐?’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글쓰기, 글쓰기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거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글로 옮겨놓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의 일들에 대한 기록들은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은 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데는 여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글로 옮기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 연습이 쌓이다보면 나중에 글쓰기를 잘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최면이기도 하다.
베르베르식의 글쓰기
우리에게 <개미>로 잘 알려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이디어와 글쓰기에 극찬을 한다. 아직 <개미>나 <신> 등의 작품들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식의 글쓰기는 그의 작품 <나무>를 보면 잘 알 수 있고, 그 글을 읽고나면 글쓰기에 희망이 생겨 ‘나도 해 볼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기에 <나무>를 펼친적이 있다. 단편모음으로 쉽게 읽혀진다. 또 그 주제와 소재가 너무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있지만 누구나 눈감고 꿈꾸면서 겪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집 <끝까지 이럴래?>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보는 듯하다.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너무 쉽게 이렇게 말하면 작가들이 글쓰기의 소재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는 것을 저평가하는 것일까? 하지만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상의 삶과 생각들, 그리고 경험들을 글로 옮겨놓거나 정리하고 공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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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차고 건강한 발걸음이 담긴, 마치 전통있는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건각들을 보는 것 같다. 좀 성근 것도 있고 꽉 짜여진 것도 있고 골라먹는 재미도 있다. 한겨레 문학상 응모준비 하는 사람들이 볼 건 아니다. 이곳엔 같은 행보는 거의 없다. 같은 목표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건 진정성 가득한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단독자들의 진정성'이라는 이명원 평론가님의 말처럼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과 작가들에게서는 어떤 경향성이나 연결고리가 크지 않다. 문단의 취향과 평판에서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솔직한 작품들이 당선되어오지 않았나 한다.
그러고보니 당선작은 <삼미슈퍼스타즈의마지막팬클럽><웰컴투더언더그라운드><열외인종잔혹사> 정도밖에 안 읽어봤고, 모두 남자작가들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작가들의 냄새를 맡볼 수 있었고, 흥미로웠다.
특히 박정애의 <피의자 심문조서> 심윤경의 <가을볕>, 서진의 <홈, 플러스>, 윤고은의 <1/4>이 좋았다. 이들의 작품을 좀 더 찾아 읽어봐야지(물론 서진 작가의 것은 더 찾아볼 것이 없다). 작가들의 소설집 모음을 읽어보는 재미는 이렇게 새 작가를 알아가는 것에 있지 아니한가.
가출을 한 사람은 납치를 당한 사람보다 찾아내기 힘들다. 맘 내키는 대로 숨을 수 있다. 경찰도 잘 도와주지 않는다. 동규는 운이 좋았다.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비록 가끔씩 자신을 학대하긴 하지만. 어차피, 가족은 서로 학대하기 마련이다. 요령껏 살아남아야 한다. 극복할 수 없다. 견뎌야 한다. 견딜 수 없다면 죽여버리거나. -서진 <홈, 플러스> 中
혼자 먹는 것은 익숙했다. 네 식구가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은 기억은 까마득했다. 우리의 식탁은 단두대 같았다. 아빠는 분위기를 깨는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쉽게 말하면 망언을 일삼는 스타일이었고, 엄마는 그런 아빠의 농담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스타일이었다. 식탁 위에 난무하는 아빠의 실없는 농담이 엄마를 톡, 건드리면 그때부터는 아빠의 농담이 더 이상 연료 역할을 하지 않아도 엄마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엄마는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화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 아빠의 실언이 훅처럼 지나가면, 엄마는 계속해서 잽을 날렸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지속되면 아빠는 쾅, 어퍼컷을 날렸다. 주로 식탁이나 벽과 같은 딱딱한 것이 희생양이 되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작고 부드러운 것들로 변해갔다. 쿠션이나 플라스틱 쟁반 같은 것이 희생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그저 허공만 쪼개지곤 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는다고 해서,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깨진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윤고은 <1/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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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몇몇 작가들의 글이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구입을 했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학상 전집(?)이라는 책들을 보면 맘에 드는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들도 있게 마련. '끝까지 이럴래?'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작가들의 글들은 그나마 좀 괜찮았지만, 도대체 뭔지 잘 모르겠는 글들도 없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익숙치 못한 형식의 글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나는 늘 식구들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나 그리움과 연락의 빈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p300, 1/4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