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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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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주로 읽고 또 좋아하는 내가 선택한 책이 다산의 후반생이다 책을 선택할때만 해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는게 솔찍한 내 심정이다. 책을 읽자마다 오호 이런 정말 잘 선택했네 나도 이제 보는눈이 띄었구나 혼자 자화자찬했다. 저자인 차벽의 말을 빌려보자면 다산이 귀향살이를 했던 강진출생이로 다산이 머물렀던 곳을 자주 봐왔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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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주로 읽고 또 좋아하는 내가 선택한 책이 다산의 후반생이다 책을 선택할때만 해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는게 솔찍한 내 심정이다. 책을 읽자마다 오호 이런 정말 잘 선택했네 나도 이제 보는눈이 띄었구나 혼자 자화자찬했다. 저자인 차벽의 말을 빌려보자면 다산이 귀향살이를 했던 강진출생이로 다산이 머물렀던 곳을 자주 봐왔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삶이 힘들어지니 다산의 삶이 보였다고 말한다. 나또한 저자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내가하는 다산 정약용은 추상적이다. 그가 당쟁에 휘말려 귀향살이를 했고 그곳에서 실약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라는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정약용이다. 얼마전에 읽은 홍어장수 문순득을통해 정양용의 형인 정약전의 귀향살이를 엿보는 정도였다. 그때도 정약전 보다는 좋은 환경인 강진에서 귀향살이를 하니 정약용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날물렵 태어났고 정조가 정권을 잡았을때 등용되었고 정조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정적과 친구들에의해 귀향을 가게되었다는것 가장 친한 친구의 배신을 맛보며 형인 약전과 전라도로 귀향을가는 약용의 심정을 저가의 생각으로 풀어놓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전라도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인심이 사나와 지기까지 누구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다들 관심이 없는것 같다. 옛날로치면 나또한 민초의 한사람쯤에 해당될것이다. 이들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살아갈 뿐인데 외지인들 탐관오리와 나는세도 떨어트리는 세도를 부리다 정쟁에 밀려 귀향오는 인사들의 뒷치닦거리와 그들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어느구가 그들의 환대할것인가 환대를 기대한 그들이 내보기에 무지몽에한 아니 아전인수의 작태가 아닐까싶다. 전라도민심이 사나울수 밖에없는 그들의 고충을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관심밖이다. 이아니 억울할것인다. 어찌되었든 다산은 강진에서 귀향살이를 하는 초기부터 무척 고생이 많았다 그를 감시하는 인물과 천주학쟁이라고 멀리하는 지역민들 몸을 의탁할 방한칸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도 초로의 주막할멈의 도움으로 겨우 방한칸을 마련하고 드문불출하게 된다. 정약용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그의 학문에는 최고의 조건이 되었다. 그는 귀향살이 동안 600편의 책을 냈다고하니 젊은 나이에 출사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날개가 꺽인건 아타깝지만 우리나라 역사에는 길이 빛날 업적을 세운 것이다. 정약용, 약전 형제가 귀향살이동안 집대성한 수많은 책들은 지금후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약자 정약용은 말뿐인 양반이 아니였다. 귀향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와서 양반의로 체통을 지키기 보다는 가솔들을 돌보는데 힘을쓴다. 그가 채마밭을 가꾸는 정도에 머문게 아니라 인삼농사를 지어 가솔들의 먹여살리고 형편이 폈다고하니 실천하는 실학자가 바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아닐까 요즘도 이렇 학자를 보기는 쉽지 않다. 책상머리의 학자는 많아도 실천하는 학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울분을 자신을 망치는데 쓰지 않고 자신의 자질을 키우는데 힘쓴 위대한 학자를 쉽지 않게 풀어내 놓고 있다. 나같이 어려운 책을 싫어나는 독자들에게 적극 권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가볍다는게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 다산이 이랬을 것이라는 예를 들어 표현해 놓은 것들이 책의 딱딱함을 많이 희석시켜 주고 있어 독자의 한사람으로 흥미를 잃지않고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r*******5 2011.05.31.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다산의 후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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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달에 읽은 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사진과 글이 함께 있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생각보다는 마음에 드는 걸 별로 보지 못한 듯 싶다. 디지털 카메라의 급속한 확산과 DSLR을 보유하고 주말이면 출사 나가는 사람들도 많은 시점에서 굳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멋진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글의 경우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포토 에세이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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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달에 읽은 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사진과 글이 함께 있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생각보다는 마음에 드는 걸 별로 보지 못한 듯 싶다. 디지털 카메라의 급속한 확산과 DSLR을 보유하고 주말이면 출사 나가는 사람들도 많은 시점에서 굳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멋진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글의 경우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포토 에세이 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엔 제주도의 오름을 비롯하여 가슴에 와닿는 멋진 제주도의 풍경이 가득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였다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도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가족도 없이 혼자 여기 저기에 기거하며 때로는 지독하게 외로울지라도 그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뜨거운 열정, 가슴 속에 떠오른 장면을 찍겠다는 일념으로 같은 장소를 궂거나 맑거나 한 달동안 매일같이 가는 의지, 집념 등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몸이 굳어가는 루게릭병에 걸리면서까지도 사진을 놓지 않은 저자에게서 숭고함마저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전체 인생이 아닌,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성인이 되기 전에 왕위에 오름으로써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탄압을 받아 강진으로 유배간 시점부터 18년만에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와 죽기까지의 36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조의 총애 아래 화성 축조를 관여하고, 암행어사로도 활약한 시기보다 국가에 실질적인 도움은 줄 수 없었던 시기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긴 유배 생활에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고통과 원망을 극복하여 그 고뇌의 산물로써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600여권에 달하는 저작들이 탄생한 과정을 보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영광의 순간보다 가끔은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고결하고 빛나기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저자는 다산에 관련된 엄청난 분량의 참고문헌을 참조하고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떠나는 길부터 시작하여 36년의 후반생 동안 후반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며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총 15개의 큰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산을 못 죽여서 안달났던 반대파에 해당하는 현감 이안묵과 심재 서용보를 제외하면 모두 유배 생활에서의 빈곤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사람들과의 만남, 그 인연들이 중심에 있다. 어렸을 적 정약용에 대한 위인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지만 세월도 많이 흐른데다가, 박해를 받았지만 굳건하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항상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 지성인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위인전기의 특성상 초인적인 인물로 다뤄지기 때문에 결점 없이 완벽하게 그려져서 인간적인 매력은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었는데, 이 책을 통해 만난 다산은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깐깐하고 예민한 기질도 가지고 있었으며, 원망도 하고 실망도 하는 우리네가 통상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느끼는 인간적인 면모가 보여서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조 승하 직후, 노론 벽파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고(다산의 아우인 정약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반대파는 정약용을 유배 보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황사영 백서 사건(신유사옥 후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청원서가 발각된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황사영은 다산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다산을 다시 전라도 강진현으로 유배 보내 버린다. 형 정약전은 전라도 나주목 우이도로 보내졌는데, 다산이 가는 곳에 비해 약전의 유배지의 여건이 훨씬 열악하여 다산은 형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다산을 우이도(지금의 흑산도)가 아닌 강진현으로 보낸 이유가 천주인들이 많이 사는 강진으로 보내 모본을 보이려는 속셈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첫번째 등장하는 사진이 영암 쪽에서 본 월출산 누릿재의 모습이다. 영암과 강진의 북쪽 경계가 월출산과 그 능선이라고 한다. 예전에 월출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다산은 월출산을 보면서 양주의 도방산을 떠올렸다고 하는데, 잠깐 여행을 떠나도 고국이 그립고 고향이 그리운데 언제 돌아갈 지 모르는 귀양길이었으니 더욱 고향 생각이 간절하였을 것이다. 노론 벽파는 반대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남인으로서 한 때 친구였던 이들의 배신은 심적으로 다산을 무척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믿었던 사람이 돌아설 때가 더 무섭다고 하더니만 다산을 기필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권력과 부귀영화 앞에서는 우정도 의리도 부질없구나 라고 탄식했을 것이다.

 

다산이 도착한 강진에서는 다산을 천주교인이라 하여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았다. 세상 인심을 탓하려고 해봐도 한 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자도 순식간에 유배를 가는 판에 힘도 없고 연줄도 없는 일반 백성들이야 몸을 사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해한다고 해도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까지 없어지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동문 매반가 주모가 몸을 사리지 않고 방 한 칸을 내준 덕택에 그 곳에서 가장 먼저 거처하게 된다. 다산이 세번째로 유배된 강진은 그 전의 유배지들의 비교하여 대도시였고 환경이 열악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다산의 집필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저자는 사진뿐 아니라 사이 사이 당시 상황과 다산의 마음을 짐작케 해주는 시나 산문을 적절하게 집어 넣어 글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다산은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하였다는데, 그러한 다산의 면모를 듬뿍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수록된 시와 산문만 모아도 다산의 빼어난 문장과 남다른 감수성을 즐기기에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다산의 발길이 머물었던 곳들의 사진이 함께 하니 예전의 그림 대신 사진이 들어갔을 뿐이다.

 

유배를 가게 되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다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행동의 제약이 있는 대신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좀 달랐다. 다산은 그래서 채마밭을 가꾸고 싶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아전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다산은 동문 매반가에서 약 4년간을 지냈는데, 주모의 아들이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호남의 아전을 높는 서객(서기)인 관계로 목민심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데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얼마 전에 정선 목민심서를 읽어 보았는데, 1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6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의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저작이다. 민생을 위하여 목민관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잘못된 행정 관행에 맞서 해결하는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주고 있다. 지배층으로서의 경기 암행어사와 곡산 부사일 때 경험과 유배 생활 동안 지척에서 민의 생활상을 살펴 본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의 제자 중 황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세 가지 병폐에 대해 말하자 다산은 무디어도 구멍을 뚫으면 넓어지고 막혔어도 통하게 되면 흐름은 빨라지고 어근버근해도(답답해도) 꾸준히 문지르면 그 빛은 윤이 나게 된다면서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것이 삼근계이며, 마음에 간직함이 확고한 것(병심확秉心確)이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황상은 그 가르침을 평생동안 받들어 죽을 때까지 잊지않고 실천하였다고 하며, 이런 황상을 아들처럼 어여쁘게 본 것은 당연하리라. 황상은 다산이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가자 무척 허탈해하였는데, 괴이하게도 그 후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회혼례에 맞춰 한번 찾아온 것이 다산과 황상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다산은 회혼례를 사흘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황상이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산골에 틀어박혀 학문에 매진해서일까? 그 부분이 가장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꼭 만나야만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소식을 전하다 보면 가까이서 왕래하고픈 마음이 생길까봐서 일까?

 

다산에게는 강진에서 만난 표씨(홍임의 모)와 부인 홍씨 두 여인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부인 외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강진에서는 홍임 모녀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 걸 보면. 다산초당 당시 공부하는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살림을 다산이 하였을 리는 없기 때문에 홍임 모가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당시에는 첩을 두는 것이 흠이 되지 않았겠지만, 부인 홍씨 입장에서는 남편도 없이 18년이란 세월을 자신의 아이들뿐 아니라 큰집, 작은집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여염집 부녀자처럼 쉴틈없이 누에치기를 하면서 살림을 꾸려 나갔는데 해배 후 홍임 모녀가 마재까지 왔으니 야속하고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다산의 형수들이 주도가 되어 홍임 모녀는 쫓기듯이 다시 강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산, 부인 홍씨, 홍임 모 각자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면 제각기 다 이해가 되니 누구편을 들기도 뭣하다. 다산도 부인 홍씨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홍임 모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다시 불러들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다산이 좀 더 뻔뻔하게 나갔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저자가 남자이기 때문에 좀 더 다산쪽으로 기운 것을 보인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 한 분에 할머니 두 분이 같이 사는 모습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입자에서는 두 할머니 사이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 괜찮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고 했다. 속으로 삭혀서 그렇지 그동안 쌓인 게 왜 없겠는가. 기실 우리 할머니도 그런 고통을 당하셨는데,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어쨌거나 다산의 경우는 18년간이나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봐야 겠다.

 

다산은 5형제 중 넷째였는데 둘째 형과 셋째 형이 함께 해남 윤씨의 소생이었는데, 둘째 형 약전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기질은 달랐지만 추구하는 이상이나 개혁 정신은 비슷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산은 강진현감의 감시(죄인과 죄인간의 서신 왕래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먼 뱃길을 무릅쓰고 우이도로 유배간 약전과 서신과 저술 초고를 주고 받을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이 책에는 다산의 글뿐 아니라 다산과 교류한 황상, 약전, 혜장선사, 외심 윤영희 등 제자와 지기들의 글도 실려 있어 당시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짐작케 볼 수 있다. 아무튼 약전과 다산이 주고 받은 글들을 보면 깊은 형제애를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인물간의 가상 대화들이 표준어가 아닌 그 지방 언어로 되어 있어 좀 더 생생함을 느껴 볼 수가 있다.(처음에는 표준어가 아닌 것이 어색하였으나 적응이 되고 나니 정감도 있고 인물들이 내가 잘 아는 사람들 마냥 친근하게 느껴졌다)

 

다산이 백련사에 있는 혜장을 만나기 위해 다산 초당 동편의 동암을 지나 걸어가던 동백숲 사진이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호젓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다산은 이 오솔길을 혜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여겨 즐거운 마음으로 오고 갔으리라. 혜장도 마찬가지였을테고.

 

다산은 혜장을 통해 초의라는 시, 서, 화, 다에 능한 제자를 얻기도 하였는데, 다산의 가르침과 영향이 컸을 것이다. 초의에게 준 말을 찬찬히 들어다 보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의 미혹함도 깨치지 못하면서 하물며 남의 미혹함을 어찌 깨치겠냐고 하고 있다.

 

그리고 다산은 윤단 가족의 도움으로 드디어 다산 초당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거처를 가지게 된다. 강진으로 귀양 온 지 8년만의 일이었다. 윤단 가족은 다산을 서당 선생 이상으로 보았기에 식사 수발도 들어주고 함께 술도 마시면서 유랑도 떠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발벗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자리가 잡히면서 안정을 찾게 되자 마재에 있는 자식들까지 챙겨 준 고마운 벗 윤지범과 이학규에게 편지도 하고, 아들들에게도 훈계를 써 주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써 준 훈계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남들이 모르게 하려면 안 하는 것이 최고고 남들이 못 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와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 있어 주노니, 부지런한 근勤, 검소할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쓰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새겨둘 글들이다. 다산은 다산초당 당시 이재의가 찾아왔는데, 노론 가문의 이름난 선비인 이재의가 다산을 만나러 온 것은 다산의 실력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성 논쟁을 하고 시를 짓는 등 그들은 당파를 넘어 지기가 되었다. 당시는 당파를 넘어선 교류는 거의 없었던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 다산은 더군다나 죄인의 몸으로 유배 생활 중이었는데 그 먼 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산은 18년만에 드디어 해배되어 고향인 마재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결국 다시 조정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여러번 기회가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년간의 유배 생활동안의 공백기도 아까운데, 해배 후에는 조정에서 불러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망국으로 가는 길을 늦추거나 바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산을 쓰려고 했던 효명 세자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정조가 그리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단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안타깝다.

그러면서 저자는 심재 서용보가 해배 초기 다산의 안부를 두 번이나 물었던 것에서 혹시 심재 서용보가 다산에게 지난 일은 잊고 나라를 위해 일해보지 않겠냐는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정승의 신분으로 아직 사면되지 않은 다산에게 먼저 2번이나 안부를 물을 연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다산은 소극적이라서 그 화해의 손길을 몰라봤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서용보를 찾아가지 않았고 그 후로 서용보는 다산의 재임용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적극 반대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자료를 조사하면서 다산이 출사하기를 원했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공자처럼 출사하여 자신의 뜻을 펼쳐 안민부국에 이바지하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6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니 실제로 적용해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 후로는 점차 출사에 대한 희망을 접고 다산은 인삼을 가꾸어서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났고 지기들과 경학 논쟁을 주고 받기도 하고 시 모임(두릉시사)을 하기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다산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벗을 사귀었는데, 지기가 자신의 저작을 읽고난 뒤 해 주는 평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단점을 지적하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고칠 줄 알았다.

 

다산은 마지막으로 지은 회근시를 남겨 둔 채 1836년 회혼 잔치를 사흘 앞두고 75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다산의 삶은 끝을 맺었다. 마지막장은 다산이 강진에 있을 때 자주 찾았던 월고지 나루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의 모습인데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저자가 다산을 떠난 마음을 사진에 담은 듯 하다. 그 뒤에 참고문헌을 자세히 적어서 더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다산이 걸어왔던 길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어 끌리는 길을 다산을 생각하며 가 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취가 느껴지는 그 사진들의 풍광이 실제로 두 눈앞에 펼쳐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j*****9 2011.03.24.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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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강진 유배기와 해배 이후의 자취를 따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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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 탄생 250주년 기념 전시회나 학술토론회가 한창이다.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다산의 입문서로 차벽의 [다산의 후반생]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책제목처럼 다산의 일대기를 풀어낸 작품이 아니라 1801년 강진으로 유배간 시점부터 18년만에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와 죽기까지의 36년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일단 다산과 교류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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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 탄생 250주년 기념 전시회나 학술토론회가 한창이다.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다산의 입문서로 차벽의 [다산의 후반생]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책제목처럼 다산의 일대기를 풀어낸 작품이 아니라 1801년 강진으로 유배간 시점부터 18년만에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와 죽기까지의 36년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일단 다산과 교류한 주변 인물들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하고 있다. 개중에는 다산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강진현감 이안묵과 심재 서용보 같은 인물들도 있고 유배지에서 고생하고 있던 다산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네민 선량한 이웃들과 인척들도 있다. 사진작가 출신답게 저자 차벽은 다산이 걸었던 전라도 강진과 경기도 마재에서의 발자취를 90여 컷의 생생한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한시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시는 원문이 없으면 그 맛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

 

독자들은 태현 정약현과 손암 정약전, 홍씨 부인 등 다산의 가족들과 혜장선사, 초의선사, 이학래와 황상 같은 다산의 애제자들을 만날 수 있고, 동문 매반가 주모, 윤광택·윤서유 부자, 표씨 부녀, 윤단 가족들처럼 다산을 도와준 이들도 반갑게 마주할 수 있다.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는 훗날 다산의 맏사위가 되고, 표씨의 딸은 다산의 딸 홍임의 어미가 되고, 윤단은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유배시절 이전의 '죽란시사' 동료들과 해배 이후 '두릉시사'의 후학들에 대한 소개다. 죽란시사는 관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 외심 윤영희, 남고 윤지범, 금리 이유수, 무구 윤지눌 등 초계문신 출신자 15명을 중심으로 죽란서옥에서 결성한 모임이다. 죽란시사 모임이 가장 활발했던 때는 1796년이라고 한다. 이들은 다산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도 변치않고 우정을 지킨 진정한 벗들이다. 두릉시사는 해배 후 마재에 정착한 다산과 큰아들 정학연을 중심으로 결성된 모임으로 주로 두릉과 홍현주의 집, 수종사와 청량산방 등에서 시모임을 가졌다. 홍현주, 윤정진, 홍희인·홍성모 부자, 신위, 박영보, 박종림·박종유 형제, 이만용, 이재의, 김매순, 구행원, 초의 등이 참가했다. 

 

z***a 2012.07.2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