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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열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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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노먼 쥬이슨이다. 영화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영화판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판 <신의 아그네스> 등을 연출했고, 잘 알려진 대로 바로 이 작품, 영화판(...은 아니고 원래부터 이건 타 영상 포맷보다 영화가 먼저임 - 물론 존 볼의 원작 소설이 있긴 했음) <인 더 히트 오브 더 나잇>을 감독했다. 역시 너무 잘 알려진 대로, 당대의 명우 시드니 포에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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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노먼 쥬이슨이다. 영화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영화판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판 <신의 아그네스> 등을 연출했고, 잘 알려진 대로 바로 이 작품, 영화판(...은 아니고 원래부터 이건 타 영상 포맷보다 영화가 먼저임 - 물론 존 볼의 원작 소설이 있긴 했음) <인 더 히트 오브 더 나잇>을 감독했다.

역시 너무 잘 알려진 대로, 당대의 명우 시드니 포에티어(푸아티에)와 로드 스타이거가 아주 안 어울릴 듯 의외로 훌륭한 호흡을 맞춰 이런 걸작을 하나 뽑아낸, 이상한 흑백 콤비가 나와 밀도 있는 드라마 겸 스릴러를 멋지게 이끈 모범적 예이기도 하다. 주제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위선 떠는 무리수가 적고 스릴러로서의 재미는 그것대로 잘 살린, 박력 있고 솔직하며 심지어 하드보일드하기까지 한 진행이다.

한국에선 이 고전을 보통 '밤의 열기 속에서'로 번역하는데 원제는 아까 말한 대로 'in the heat of the night'이다. '~ 열기 속으로'는 이거 말고 다른 (한국) 작품의 제목이다. '밤'과 '열기'가 영화 제목의 세계(?)에서는 꽤 잘 어울린다고 여겼는지 예를 들어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 같은 것도 있는데 이거는 (역시 잘 알려져 있지만) 'night fever'가 원 어구이다. 헌데, 'in the heat of the night'이라고 하면 그런 뜻이 아니고, '밤의 한복판', '한밤중' 같은 관용성구일 뿐이다. 이런 게 관용구일 뿐이며 정말 문자 그대로 '열기 어쩌구'의 뜻이 아님은, 영어를 자꾸 쓰다 보면 일일이 사전 따위를 안 찾아봐도 바로 감이 오게 되어 있다.

이 영화의 맥락까지 감안하면 '한밤의 수사진' 같은 뜻도 되는데, 흑백 듀오가 '밤'에 범죄 수사를 벌이는 장면은 실제론 별로 안 나온다. 물론 한밤중에 시드니 포에티어가 지역 경찰서에 검거되어 끌려오는 서두가 워낙 인상 깊기 때문에, '밤'과 영화의 내용을 대뜸 연결짓는 건 이 작품을 실제로 본 이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다. 참고로, 일본에서 개봉할 때 이 작품의 번역 제목은 '밤의 대수사선'이었다. 20년 전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은 물론 이 작품보다 30년이나 지난 후에 제작된 것이다. heat에 '수사진'이란 뜻이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꽤 적절한 번역이다.

네이버 네덜란드어 사전을 찾아 보면 'het holst van de nacht'가 '한밤중'을 뜻한다고 나와 있다(이 Db는 내가 개인적으로 도정제 직전에 싼 값으로 구매한, 외대 출판부 네덜란드어-한국어 사전과 내용이 같다). 하지만 '구멍'이란 뜻과 'heat' 사이에 어원상으로 (혹은, 이후 언중의 착오로 인한 과정으로도) 별 연관이 없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게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영화는 꽤 영리하게 관객의 시선을 모아간다. '스파르타'는 실제로 미시시피에 존재하는 촌락인데 존 볼의 원작에서와는 다르게 이곳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사정 때문에(꼭 주제와 포맷을 감안 않더라도), 한참 뒤에 나온 <미시시피 버닝>과 이 작품이 더 자주 함께 엮이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메시지 전달에 달뜬 <미시시피...>보다 지금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드는 편이다. 여튼 이 촌구석에서 살인 사건이 터져 마을의 유지(기존의 다른 유지와 세력권 확장을 놓고 은근 신경전을 벌이던)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경관은 역사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웬 낯선 흑인(이 동네에선 모든 흑인이 낯설 뿐)을 발견하고, 그저 신경 쓰인다는 이유만으로 연행을 해 온다. 연행에서 끝이 아니라 이 동네에서 흑인이 거동수상으로 일단 낙인 찍힌 후에는 무슨 극악범죄의 혐의를 쓸지 아무도 모르는(아니, 반대로 모두가 아는?) 것이다.

시드니 포에티어는 여러 작품들에서 '경찰' 역을 꽤 많이 맡은 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에휴 다른 세계에서라면 저리 힘없이 억울하게 끌려가진 않았을 텐데 같은 동정을 관객이 품을 만도 하다. 헌데 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용의자'의 신분은 자연스레 조회될 수밖에 없고, 놀랍게도 그는 '역시' 저 대도시(시카고. 단 원작소설에선 캘리포니아였음)의 경찰, 그것도 살인사건 분야 최고의 전문가라고 밝혀지는 것. 그렇다면 왜 연행과정에서 '이거 놔!' 등등 거친(또 당연한) 저항을 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지는데, 이 사람은 본래가 그런 스타일이었던 것. 확고한 자신감과 품위로 무장했기에 무지렁이 깔따구들의 같잖은 도발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밖에 해석 안 되고, 사실 길레스피 서장(로드 스타이거 扮)은 상대의 인격적 성숙과 침착성에 더 화가 치미는 것이다. 이런 깜둥이(더구다나 나이까지 젊은)가 자신보다 더 배웠고 더 유능하고 더 급료를 많이 받고 자존감이 더 확고한 기반을 갖췄다고 생각하니(사실이 그런데 지가 뭘 어쩌겠음?) 얼마나 열등감이 느껴지겠는가.

찐따가 열등감을 자극 받고, 그 경위야 뭐가 되었든 간에 권력까지 손에 넣은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이놈은 이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스크린 밖에서 보는 관객은 불안한 게 당연하다. 헌데 영화는 여기서도 절묘하게 방향을 예상 밖으로 선회하는데, 한편으로 는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촌구석에 처박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인격도 퇴행해가는 모지리들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전략이다. 길레스피 서장은 비뚤어진 에고를 만족시키며 거짓으로 점철된 비행을 저지르고 제 앞가림만 하기보다(그럴 거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이 젊은 흑인 형사 버질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고 동시에 자신의 낡은 관점을 바꿔 가기에 이른다. 처음에 길레스피 서장이 혼자 떠맡을 듯했던 '편견에 가득한 모자란 촌뜨기' 구실은 이후 하나둘 기어나오는 다른 '레드넥'들에게 옮겨지는데, 이 과정에서 흑백 듀오의 연대감이 점점 굳어지는 과정도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여기서 의외의 장면(이건 원작 소설에서도 그대로임)이라면, 길레스피 서장이 신원을 확인할 때 저쪽 서장(아마도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백인일)이, '그 친구가 최고이니 힘들면 지원을 요청하라'고 양인(길레스피와 버질 두 사람)에게 권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연방제이므로 이런 협조(호의)를 타지역의 경찰 간부가 베풀어야 할 이유는 없고, 심지어 버질도 '아니, 제가 돕고 아니고는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도윰을) 받겠습니까?'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흑백 차별이라는 거창한 메시지를 떠나 그저 미스테리물로 봐도, 진행이 요리저리 다양한 인물들에 의심의 시선을 주다가, 마지막에 전혀 의외의 지점에다 화살을 꽂기에 더욱 몰입감이 생긴다. 거듭 말하지만 아무리 고상하고 의로운 주제라도 이처럼 초연히 돌려가며 은근히 전달할 때 오히려 호소력이 더 커지는 법이다.

s****o 2023.08.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