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006년에 사망했다고 책 표지에 적혀 있는 걸 보면 이 책이 신간 목록에 들어 있는 게 의아스럽다. 이 책이 쓰여진 것은 1986년 4월이다. 시대를 건너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 곳에 사는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했던 저자의 문장들은 감동적이다. 50살에 한글을 공부했다고 하니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고 외국어도 마찬가지로(사실 일본어를 제 2외국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가까운 지리적 요건인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저자의 한글공부는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의 풍경들이 책 곳곳에서 감수성 있는 문체로 빛을 발하고 있다. 작은 것 하나에도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어서 마치 저자와 마주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한국을 편견없이 바라 보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동화되어간다. 행간의 곳곳에서 읽혀지는 그러한 문장들은 이 책이 단순한 <한글 이야기>를 벗어나서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다른 민족과 언어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견지하는 자세를 보게 된다. 마지막 장에 수록되어 있는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와 그의 형 윤일주 씨를 만난 일화는 뼈저리게 마음이 짠해지고 그 시대의 무거운 기운과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체감하게 된다. 저자는 현해탄을 건너는 배 안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수년 전, 나는 배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현해탄을 건넌 적이 있다. (중략) 거칠기로 유명한 현해탄도 그날만은 평온한 물결을 유지했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색과 석양,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밤바다의 어둠에 한동안 취해 있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초가을의 별자리, 보석처럼 반짝이던 오징어잡이 배등 아득한 풍경에 한밤중까지 갑판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때 갑판 위에 자욱이 내려앉은 그 농밀한 공기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픈 기운이 느껴졌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의 비수(悲愁)라고나 할까. 고대부터 지금까지 현해탄을 오고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그 발길에 묻어 함께 이 바다를 건넜을 숱한 심정들을 그려 보았다. 파도 위에서도 파도 아래에서도 짙게 떠도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농밀한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중략)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윤동주의 아버지는 납골 단지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아들의 뼛가루를 현해탄에 뿌렸다고 한다.> 저자는 한국인의 내밀한 정서와 한의 정서, 詩나 도자기, 문화와 한글의 다의적인 뜻과 속담에도 해박하고 곳곳에 애정과 사려 깊은 관심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참 이상한 일은 이 책을 읽기 초반에는 무척 유쾌하고 즐거워 웃기도 많이 했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글은 더 차분해지고 조용하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을 쓰는데만 4년여의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혹독하게 저자는 아팠었나 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렇게 나와 동시간을 공유하며 생각을 나눌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나는 그래서 최근에 읽은 장정일의 이 문장을 꼭 인용하고 싶다. “베스트셀러는 2류다. 그건 누대에 쌓은 문학사를 봐도 알 수 있고, 현재도 그렇다.” - 빌린 책, 산 책, 버린 冊 중 P.285-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확고해진 생각은 언어는 그 사람의 품성이 깃들어 있고 글에는 그러한 면면들이 저절로 녹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앞으로 많은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알려고 하는 이의 글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기에....
![]() |
|
이웃나라 일본의 시인인 이바라기 노리코 씨가 나이 오십에 한글을 배우면서 생각하고 보고 겪은 내용을 80년대에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잔잔한 문체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은근 빠져들게 만드는 수필집이어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으면서도 주위 소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솔직히 내가 원했던 내용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공통점, 차이점 등은 거의 상식적인 수준의 사실을 나열하거나 피상적 감상 위주였고, 한일 양국의 문화 차이는 일반론적 이야기였다. 그리고 역사도 깊이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전문가 아닌 일반인 시각으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 근거한 소소한 이야기를 조분조분 풀어나가는 '경수필 읽는 맛'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수필들이 그렇듯, 독자의 체험이나 추억과 관련된 부분에 더 깊이 빠지게 된다.
내 경우는 이랬다. 나의 큰고모님은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신다. 1940년대 갓 결혼한 새색시였던 큰고모님은 돌 지난 아기인 막내동생(나의 아버지)을 포함한 친정식구들과 헤어져 나이 많은 재일교포 신랑을 따라 현해탄을 건넜다. 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기, 큰고모님의 고국 친정나들이는 늘 미뤄졌으며, 이따금 큰아버님만 오사카에 방문하는 가운데 오십여년이 흘렀다. 90년대 초반, 드디어 큰고모님은 고국을 방문하셨는데, 아기로 기억하던 막내동생은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 있어 큰고모님은 막내동생인 나의 아버지 대신 오빠랑 내 손을 잡고 우셨다. 그리고,,, 띄엄 띄엄 50년만에 쓰는 모국어로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놀랍게도 큰고모님의 한국어는 1940년대 전라도 방언이셨다. 당시 나는 <태백산맥>을 읽고 있었기에 더욱 놀랐다. 그 소설 갈피에서 막 튀어나오는듯한, 반세기전의 순천방언의 정감이라니! 큰고모님의 모국어는 내가 쓰는 90년대 서울지방의 표준어가 아니셨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 기억이 떠올라 개인사, 민족, 언어, 시대, 핏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하고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가 방문한 한국은 70년대의 한국이고 저자의 한일 관련 경험도 지금 시대랑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읽은 <재일 김상중>이 생각나기도 했다.
인상깊은 부분은, 일본에서 70년대 당시 한국어 공부하려는 사람은 일본 고전문학, 역사서 읽으려 하는 의도에서 였다는 부분이었다. 일본 고문헌도 우리 나라의 향찰의 경우와 같이 한자를 빌려서 음독, 훈독을 섞어 표기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의 영향으로 그 당시 한자 읽는법을 알려면 한국어를 알아야한다는 내용을 다른 책에서 언뜻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니 일본 지식인 사회 내에서는 일본 고문헌을 공부하려는 이유로 한국어 배우는 것이 당연한 사실인가보다.
그리고 저자가 시를 일역한 인연으로 알게된 윤동주 시인의 동생되시는 윤일주 씨가 전하는 후일담을 잊을 수 없다. 윤동주 시인의 유골 일부는 현해탄에 뿌려졌다는,,, |
|
왜 하필 한국어야? 저자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왜 하필 한국어냐고. 질문을 받은 때 저자가 딱히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고. 한두 가지가 아닌 복합적인 동기에서였기 때문이기에 요즘에는 이렇게 답한단다. “이웃나라 말이잖아요.” 그런데 답을 들은 대다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니 그들에겐 아직도 우리가 참으로 먼 나라이기만 한가보다.
한글이 있어 행복한 일본인 작가,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으며 그 입지를 굳건히 한 여류시인 이바라기. 약학부를 졸업한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연극을 보고 문학의 길을 걸었다는 것도 참 이색적이다. 아마도 저자에게 있어 문학은 그녀 자신의 운명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한국어, 한글에 관심의 싹이 튼 것은 참으로 오래전 일이라고 한다. 아마도 열다섯 쯤?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74년. NHK 국제국 아나운서이자 재일 한국인 김유홍 선생이 가르치는 야학에서라고 한다. 대학원 교육도 아니고 야학에서 조선어 강좌를 가르치는 이에게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면 저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내게도 이런 스승이 있었다면 외국어 하나쯤은 정말 잘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김유홍 선생을 만나 한글을 배운 이후로도 10여년의 시간동안 한글을 공부했다면 얼마나 깊이 한글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저자가 행복해했을 그 심정이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감동할 지경으로.
우리말을 배워줘서 고마워요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인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마주친 한국인 아주머니가 저자가 한국어를 배운다는 걸 알고 그녀에게 한 말이다. 그 아주머니의 마음에 공감 한 표를 던진다. 나 또한 한국어를 잘 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마냥 기특(?)하고 흐뭇해서 고맙다고 말하고픈 심정이니까.
뜨개질처럼 재미있고 따뜻한 말, 한글 저자와 함께 한글을 배우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글을 마치 편물(뜨개질)기호 같은 문자야.” 코 늘림, 코 줄임, 교차뜨기 등 뜨개질처럼 한글도 모음에 막대기가 하나인가 둘인가, 왼쪽을 보는가, 오른쪽을 보는가에 따라 전혀 뜻이 달라지기도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갑자기 가요의 노래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참 센스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한국의 우리, 정이라는 말은 독특한 의미라고 했다. 물론 외국에도 our가 있고, 정은 한자로 情이지만 그 뉘앙스는 외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라고 하니 한국, 한글만의 정서가 담겨서이지 않을까.
우리가 더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말, 한글 한국 사람들은 외국어에 참 열정적으로 시간과 노력, 자금을 들여 투자한다. 특히 영어를. 그 다음으로는 중국어, 일본어가 주 대세를 이룬다. 나 또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하필 일본어냐고. 아니 요즘 일본어를 배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고 일본어 학원은 북새통을 이루며, 일본어 교재는 불티난 듯 팔린다. 씁쓸하다. 어디 일본어뿐이랴.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 사이에는 각종 어학원 전단지가 가득 끼워져 있다. 성인은 물론 유아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학원까지. 한글은 등한시 된 지 오래다. 얼마 전 버스에 함께 탄 학생들의 입에선 욕지거리와 함께 외계어, 신조어가 난무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글을 제대로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요즘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일본인 작가마저도 사랑한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짓밟히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호기심에 의해 오랜 시간 한글을 배운 것이 아니다. 한글은 우리 한국이라는 그릇에 담긴 우리 고유의 것이며, 그 얼이 담긴 한글을 그리고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자숙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개인적으로 한글을 참 좋아하고 나름대로 한글을 제대로 알기 위해 사전까지 찾아가며 열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처럼 열심이었냐고 물으면 머뭇거려진다. 이제 이바라기 노리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언어, 한글을 더 깊이 그리고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겠다. 나도 이 가을 한글로의 여행을 떠난다. |
|
출산 준비를 하는 사이 훌쩍 한 주가 지나가고 리뷰 마감일이 지났는지도 모른체 오늘이 되었다. 이놈의 정신머리.. 오렌지 회원이 되겠구낭...쩝..
처음 이 책을 신청할 때는 제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책을 받고 보니 '한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많았다. 쓰고 있고,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늘 만나는 것이 한글이고 한국어지만 배우는 타국의 사람 입장에서는 한국어라 할 지, 남한어라 할 지, 조선어라 할 지.. 여러모로 고민이 되겠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노리코 여사의 유쾌한 한글 습득기이다. 본인이 한글을 배워가면서 느꼈던 어려움, 한국어의 아름다움, 그와 더불어 각 언어가 태어나 사용되고 있는 땅의 문화 비교까지. 단숨에 읽히는 200여 페이지에 의외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발달되어 있다는 널리 알려진 특질 말고도, 스스로 직접 한국의 시를 번역하면서 느낀 점들이 잘 드러나 있다.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울림의 아름다움은 정말 우리 말을 꼭꼭 씹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터. 책 한 권에서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후반부 쪽은 한국의 멋, 한국의 문화에 대한 여러가지 단상들을 닮고 있다. 식습관과 음식 문화, 무궁화와 까치, 민화.. 그리고 윤동주까지.
특히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 중 일본인 시인과 비교하는 부분은 역시 일본인이 아니면 어려웠을 일이 아닌가 싶다. 일제의 저항 시인 중 때로는 소극적이고 유약한 문체의 시를 쓴 것처럼 평가되는 그의 내면의 순수함과 청년 정신을 읽어내는 일본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무엇보다 거리에 비례해 심적으로 항상 멀게만 느껴지는 일본땅의 누군가가 내가 내는 소리를 기꺼워하고, 그 소리로 쓰여진 글을 반가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지닌 말은 프랑스어와 한국어이다."
정말 책 속의 누군가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말이 지닌 그 멋이 유난히 뿌듯한 날이다. |
|
늘 말하고, 읽고, 쓰고..그러면서도 당연하게만 여길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지내곤 하는 '한글'. 우리 문화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거늘 마치 가족처럼 늘 당연하다 여기기에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날이 허다하다. 아마 대부분일듯. 그러다 한글날이 되어서야 조금은 한글의 의미를 되새겨볼까? 것도 한글날이 공휴일이었을 때까지가 아닐까 싶지만.
일본인 이바라기 노리코씨는 한글의 매력에 빠져서 스스로 한글을 공부하기 시작한 분이다. 이 책은 그런 노리코씨의 마음 혹은 즐거움을 풀어 쓴 책이다. 그녀가 어째서 영어, 불어도 아닌 한글을 택했는지, 그리고 그 배움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배움 이후엔 어떤 즐거움을 얻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녀가 일본 사람이기 때문일까? 혹은 한국이 세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일까? 그녀가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상대방의 반응은 하나 같이 "하필 왜??"한다고 한다. 더욱이 그녀는 일본인이고 한글은 한국의 문자이니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일들은 생각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그저 영어와 같은 언어를 공부하는 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를테니까. 더욱이 그녀가 한국어를 공부했던 시기는 지금과는 좀 달랐다. 지금과 같이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려 하는 사람들보다는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과정이 조금 어렵긴 했어도 즐거워 했다. 더욱이 한국의 문화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 후에 한국의 문학이나 문화를 일본에 많이 전하기까지 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일본인이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우리 한국, 그리고 한국의 문화는 어떠할까하는 궁금증을 가졌었다. 내심 좋게 봐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좋았다. 노리코씨께서 우리의 문화를 너무나도 좋게 봐주셔서. 우리의 도자기, 문학, 그리고..한글까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이렇게 좋은 우리 것을 나는 왜이리도 몰랐을까 싶어서. 특히 아픔의 역사를 대변하는 우리의 도자기는 정말이지 마음이 아팠다.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약하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지켜냈을 수 있었을 것을 그렇게 잃어버렸구나 싶어서.
처음 기대를 했던 내용과는 살짝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이 우리의 문화를 본다고 하면 유적이나 유물들을 볼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더 일상적인 것을 본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의 무궁화라든지, 까치와 같은. 우리의 문화들 중에 정말 대단한 것들이 많은데 왜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만 다루었는지 처음엔 좀 실망스러웠지만 다 읽고나니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그간 생각지도 않았던 우리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점에서 참 고마운 책이었다. 윤동주님의 시를 좋아한다는 것도 그렇고.
참 소박하신 일본분의 우리 문화 탐방기! 본인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진실하게 써내려가신 멋진 이야기였다. |
|
저자 이바라기 노리코씨는 고인이 되었지만 책 속의 그녀는 왠지 소녀같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향한 조선의 한글.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읽자니 역시 나도 부끄러워진다.
이 책은 그녀가 아사히신문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어렸을 적 김소운 씨의 '조선민요선'에 반해버린 노리코씨. (나는 김소운씨를 모른다.)
아.. 그녀는 시인이였다. |
|
"부여는 참새마저 다르구나......" 부여를 찾아가 백제의 옛 석불과 석탑을 둘러보던 노리코씨는 와르르 활기찬 참새떼를 보며 중얼거린다. 동행한 친구가 웃으며 대꾸한다. "얘, 그런 걸 두고, '오버'라고 하는 거야." 오버라. 그래 오버 맞다. 오죽 한국에 푹 빠져있었으면 참새마저 다르다고 했을까?
이바라기 노리코가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추려 엮었다. 거의 '한글예찬론'이라 하겠다. 어쩌다 그렇게 한글에 매료되었을까 싶기도 한데, 본인 스스로도 콕 집어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나. 결국 주변인물을 납득시킬 수 없었던 그녀,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이웃 나라 말이잖아요." 저자가 한국어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때가 70년대이니,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법도 하다. 한국이 지금같은 경제대국도 아니었고 한류라는 말은 생기기도 전이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엔 어떤 매력이 있는가보다. 그녀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모두 '대단하다' 싶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성장한 과거의 인연에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인이나 본인의 흥미로 인해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도 여럿 되었다.
글은 단순한 한글예찬론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두번째장에선 한글과 일본어를 비교해가며 설명하고 있다. 양국 언어의 특성과 미묘한 어감상의 차이 등은 무척 흥미롭다. 한글의 풍성한 의성어와 의태어에 감탄하는가 하면, 일본어의 다양한 명사에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예로 '비(雨)'에 대한 일본어 표현을 드는데 기노메오코시(새싹이 나오는 봄에 처음으로 내리는 비), 나가아메(오랫동안 내리는 비), 무라사메(심하게 퍼붓다가 그치고는, 또다시 내리는 비) 등 12가지 표현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여우비, 소나기, 장대비, 봄/여름/가을/겨울비 등의 표현이 있긴 하지만 한글표현보다 좀더 시적인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정리한 일본 사투리와 한글의 유사성은 흥미롭다. 일부 지역에선 아가, 아빠, 아내가 거의 유사한 형태로 사용되고 '~니까?', '~냐?', '~지.' 등의 어미도 동일한 형태로 남아있다. 그 외에도 고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의 유사성도 제시하고 있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원래 한민족과 일본의 문화적 교류는 먼 옛날부터 이어져 왔었고, 백제 멸망 후 수많은 유민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흔적이 언어에 생생히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노리코씨의 한글사랑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끌었다. 한국 방문. 그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적어내려간 여행기는 푸근한 픙경으로 가득하다. 고속버스 안에서 만난 붙임성 많은 한 군. 엉뚱한 버스 앞에서 당황한 그녀를 부여행 버스까지 안내해 주고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내린 어느 학생, 미국에서 왔느냐며 천진난만하게 묻던 꼬마아이, 장터의 물건값 흥정하는 모습. 우리네도 인상을 찡그릴 음식점과 술집의 시끌벅적함도 그녀는 싫지 않은 모습이다. 읽다보면 그녀가 한국에 흠뻑 취했구나 싶다.
마지막엔 한국의 문화와 아픈 과거를 적어나갔다. 무궁화, 칠석의 '까치', 멋, 그리고 8.15와 6.25.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들의 과오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 부분은 아픔을 쓰다듬는 글이었다.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통감하고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공감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런 일본인도 있다는 것을, 우리의 아픔이 외면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야기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본인의 새로운 모습을 들려주었다. 조선의 녹화 사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조선을 사랑하게 된 사람. 일본인조차 조선인으로 오해할만큼 스스로 조선인이 되어간 일본인. 그가 죽어서는 수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길에 나섰다고 한다. 노리코씨의 성묘길을 안내해준 영감님도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고 있었다. 끝으로 그녀는 윤동주 시인을 노래한다. 윤동주의 맑고 아름다운 시에 대한 찬사와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 노리코 씨는 윤동주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하려고 했을만큼 그의 시를 좋아했다. 그녀보다 한발 앞서 번역시집을 낸 이취향 씨의 노력에 감사해 하면서, 결국은 밝히지 못한 윤동주 옥사의 비밀에 안타까워 한다. (다행히도 윤동주 죽음의 비밀은 국내 정규채널의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서 밝혀졌다. 전쟁 중 부상자들을 위한 혈액이 부족해지자, 바닷물을 대체혈액으로 이용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됐다. 윤동주는 생체실험 중 사망했다.)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고 하던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너무도 다른, 우리 민족의 역사에 아픔을 남겨준 그들이었기에 일본인이 적어내려간 한글 이야기는 묘한 감동을 안겨주는 지도 모른다. 한일간의 문화 교류가 시작된지 만 7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많은 문확적 벽이 허물어졌고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거부감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아픔은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현재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노리코 씨가 한글을 사랑하던 마음으로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잊고 지내던 한국의 풍경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해준, 지금은 고인이 된 이바라기 노리코 씨에게 감사를 표한다. |
|
제목부터가 조금은 의아했다. 누가봐도 이바라기 노리코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한글을 배우나? 하는....선입견이 너무나 들어간...나의 잘못되 느낌에서 이 책으로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들 중 영어를 배우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서 등등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지배했었던 일본인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많은 노력과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오해이자 고정관념이었다. 이 틀을 벗어나게 해준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을 배우는 과정과 세세한 노력과 관심들이 나를 부끄럽게까지 했다.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정말 세세하고 꼼꼼하게, 속담이나 속뜻까지 공부하는 모습에 한편으로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책은 한 일본인이 늦은 나이에 한글이라는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우면서 더불어 역사까지도 이웃나라 사람의 생각까지도 닮으려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처 생각지 못한 제 3자의 입장에서의 한글의 모습과 뜻까지 알게 해주는 작은 깨달음과 감탄을 서슴지 않게 하는 그런 여자다운 섬세함이 보이는 글이었다.
맨처음 한글을 배우게 된 배경부터 시작되는데...그부분은 스토리가 있어서 흥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조금씩 지루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내가 다 아는 당연한 부분들을 일본인이 느끼는 부분인데..당연히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지..하면서도..조금은 딱딱한 부분이 있지 않나...그래서 읽어내려가기가 점점 힘들어 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거의 일본과 얽힌 그 역사의 굴레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지금 어떤 한 사람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공부하는 과정만 보고 싶다. 우리나라사람들이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고 영어권나라에 유학을 가고 공부를 해대는 이 현실이 그 목적이 물론 다양하고 쓸모야 있겠지만..참 안타깝기도 하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우리 한글을 좀더 공부하고 배경과 역사를 공부하면 더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언어를 사랑할 수 있을텐데... 지금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국어보다도 다른 제 2,3의 언어만을 추구 하고 있으니...안타깝다.
나조차도 기를 쓰고 영어는 공부해왔으나 국어는 기본만 하고 넘어가고 신경도 안썼으니....우리 언어를 배우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에게 한 마디를 해준다면 우리 한글을 참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존중해 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찬찬히 다른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언어를 새로 배운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외국인에게 한글이 어떻게 보이고 들리는지. 우리가 영어를 볼 때의 느낌과 같을지 다를지 말이다. '한류'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요즘 같은 시기에 이 책은 적절한 해답을 얻게 해 주었다. 아니, 사실은 아주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었다. 이 책의 작가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 일본에서 태어나 작가로 활동했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의욕적으로 배웠는지 당시 일본인에게는 반감마저 있던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등 아주 고무적인 활동을 한 모양이다. 한국의 명시를 번역하여 출간해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고, 관동대지진의 한국인 살해사건을 다룬 작품을 쓰고, 일본의 우경화와 반민주적 현실을 비판한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단지 한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책은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체가 왠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주는 듯 편하고 구어체에 가깝다. 또한 한글에 대한 이해 수준이 대단이 깊고 해박하여 국어를 전공한 내가 읽어도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고 상세히 설명해 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아마 단순히 지식 전달 차원에서 쓴 글이었다면 이렇게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단순히 관심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의욕적으로 나서서 문화를 이해하려 애쓴 흔적이 바로 이 책이다. 작가는 한국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을 회고하며 인생 최고의 스승이었던 김유홍 선생님의 열정에 감탄하여 한국어를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도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김유홍 선생님의 교수법과 열정을 눈여겨 볼 부분이 많다. '가르치는 일에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고 학생에게 잠재된 가능성의 싹을 밝은 쪽으로 이끌어내려는 힘, 또 그 싹이 아주 조금 자란 것을 무상의 기쁨으로 아는 교사로서의 특출한 자질'이라는 부분이나,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고 나서 가끔은 허무함을 느낀다는 김유홍 선생님의 말에 '연소와 허무는 분명 등을 맞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부분은 정말 공감이 갔다. 내 일상과도 맞닿아 있고, 나도 김유홍 선생님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통찰력 있게 이해하고 편하게 풀어쓴 작가도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1980년대이면 아직 외국인과 외국어에 대한 경계가 확실할 때인 데다가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운다는 건 역사적인 과거 탓에 좀 껄끄럽게 느껴지는 일인데도 작가가 서술한 내용을 보면 그 행간에 국경과 민족을 넘어서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존중, 배움에 대한 진정한 열정이 엿보인다. 예전에 어디선가 우리 나라 사람은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만 서툴게 말할 줄 알아도 기특하고 고맙게 여기고 금방 마음의 벽을 허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과 다른 나라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출신 국가가 아니라 '우리 말/글을 할 줄 아는가'라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재외동포이거나 해서 한국어를 못 하면 외국인처럼 받아들이고, 반대로 외국인이면서도 한국어를 사랑하여 말할 줄 알면(유창하든 서툴든 그건 의외로 중요하지 않다) 얼굴만 다른 한국인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정말 공감이 되는 것이, 나부터도 생전 이름조차 듣지 못한 작가가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한국에 대해 깊이 이해하여 널리 알리려는 노력이 고맙게 느껴지고 2006년 타계한 것에 뒤늦은 안타까움마저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다행히도 외국 학계나 연예계에서 한글의 매력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는 듯하다. 한글이 삽입된 유명 가수의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되기도 하고, 한글을 디자인화하여 여러 종류의 상품으로 전파하기도 하고, 몇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선가 우리 한글을 수입해서 자신들의 문자로 채택하기도 했다. 최근 스마트폰에서도 편리하게 활용될 수 있어 더욱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기사도 기억난다.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한글을 정작 주인인 우리가 함부로 쓰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점이 아쉽고 부끄러울 뿐이다. 내게 주어진 여러 기회와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하여 나도 한글전도사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한글의 제자원리를 가르치면서 짜릿하게 느껴지던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하여 10년 전에 내가 꿈꾸던 '한글의 세계공용화'를 언젠가는 이룰 수 있기를! |
|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읽기 전에는, 과연 이 지한파 여성의 시선은 한국의 어떤 모습을 포착하게 될까하는 긴장감과 한국의 어떤 모습에 관심을 가지게 될까하는 궁금함이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을 들키고야 말 것이라는 긴장감과 낯선 외국인에게 비칠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하는 궁금증이 함께 했었다.
화두의 중심은 한글이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저자의 한국문화알기 도전기인 셈인데, 일본의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지한파로 유명하기에 이런 칼럼을 연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한글을 배우면서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함께 동문수학(?)한 이들의 한글배우기 사연을 재미있게 소개하였다. 저자에게는 너무나 완벽한 선생님 롤모델이었으며 한글 선생님이었던 김유홍씨, 의대생 이마이씨, 그냥 중년 남성인 다카하시씨, 그외 재일교포 2,3세도 있다. 특히 김유홍 선생님을 이야기를 할 때는 '좋은 선생님이란' 하고 칼날 같은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요즘 우리들도 잘 알지 못하는 한글의 창제 과정에 대해서도 간략하나마 소개하고 있고 한글의 장단점도 명쾌하게 꿰뚫고 있다. 특히 자국어인 일본어와의 비교을 통해 한글의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다. 일본어는 이러이러한데 한글은 저러하다는 식이다.지한파이다보니 한글에 대한 찬사가 좀 많은 편인데, 한글을 쓰는 우리로서는 간과하게 되는 점이 많았다.
한글에 대한 긍정적인 면의 영향일까. 한국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도 친한국적인 경향이 강하다.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초중반인 듯하다. 정확한 시기는 나중에 가서 저자후기를 쓴 날짜에 밝혀져 있지만, 책을 읽는 내내는 언제적 이야기일까하고 궁금해지는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책 내용에 시대적 배경이 되는 힌트들이 숨어 있다. 그로부터 지금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사회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면 다소 의아스러운 점이 있기도 하는데, 그래도 저자의 시선은 너무 따뜻하다.
이러한 따뜻한 시선은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도 일관된다. 일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단어 '멋'을 저자는 한국사람들의 저변에 깔려있는 심정적 핵심이자 미의식이라고 이해한다. 명쾌하지 않은가. 한국 사람이라면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와 같은 단어 '멋에 대한 정의'를 저자는 외국인의 눈으로 이렇게 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한편 저자의 친한적인 눈은 해방후 월북한 춤꾼 최승희를 일제시대 레지스탕스 예술가로로서 일제에 저항한 반일 예술가로 정체성을 똑바로 돌려놓는다. 대개의 한국인들이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는 대신에 말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또 한 명의 예술가. 시인 윤동주. 한국의 문학을 일본에 번역 소개하는 저자에게도 시인 윤동주는 각별하다. 한국과 한글에 관심이 지대한 저자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국의 서정시인 윤동주의 죽음을 둘러싼 타살 음모에 저자는 격분의 감정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만나 오래된 이야기를 듣고, 이것도 한글을 배워가는 길이라고 되뇌이며 책을 마감한다.
처음에는 한글에 대한 관심으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한국의 예술가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면서 점점 더 한국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저자의 어쩔 수 없는 '한국과 한글사랑'을 담은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