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지금까지 서구사회가 이루어왔던 복지국가에 대한 재편의 시작에 불과했다. 생산성을 저하하고 결과적으로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복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거세어지고 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사민당 정권이 패배했으며 좌파가 집권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에서 역시 기존 복지제도에 수정을 가하고 있다. 작지만 강한 정부에 대한 열망은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아 국가에 의해 독점되었던 많은 분야들이 민영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을 긍정적으로만 평하긴 힘들다. 민영화된 서비스들의 대다수는 사용자에게 그 이용 비용이 전가되기 시작해 비용을 납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하지 못한 이들은 아예 서비스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재편은 세계화라는 흐름과 발맞추어 행해지고 있다. 무역에 있어서의 장벽을 철폐하고 세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들이려는 노력이 세계화라면, 그 세계화의 주체는 자본이요, 힘을 가진 주체인 듯하다. 세계 각국, 이왕이면 저임금의 노동을 관철시킬 수 있는 국가로 자본이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장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한된 노동력과 경직적인 임금을 타계하기 위한 대책이라고 할까나. 이는 성장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복지제도가 이야기되면서 시작된 복지국가의 해체와 맞물려 크나큰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 점차적으로 심화되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거기에 파괴되어가는 사회적 안전망까지. 우리의 삶은 실로 위태로운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국가 재정의 40-50%에 달하는 금액을 매년 복지에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진단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복지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복지 축소를 이야기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복지에 투입되는 비용을 증가시켜왔다. 정부 실패만큼이나 신자유주의 역시도 실패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나. 이 점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우리로서는 앞서 언급한 서구의 여러 국가들만큼 복지에 투입된 비용이 크지 못하니 말이다. 한국의 복지는 실로 열악했다. 정부는 성장 이데올로기로 복지에 대한 모든 요구를 묵살시켜버렸으며, 이에는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성이 적지 않게 기인했다. 복지에 대한 욕구를 표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 북한을 찬양하는 세력 등으로 매도되었으니 말이다. 복지가 하나의 담론으로 사회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이 문민 정부가 들어서던 시점이다. 즉, 사회의 민주화가 그 동안 억압되어 있던 복지에 대한 목소리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권위적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노동 운동은 사회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 서구의 몇몇 국가들은 사회의 비민주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온정적인 복지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무언가 혜택을 받는다는 것에 익숙지 않은, 오히려 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품고 있는 우리에게 이들 국가들에서 선보였던 온정적 모델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거기에 전통적인 혈연에 대한 집착은 한민족이라는 피상적인 이야기를 뛰어넘어 (복지국가를 이룩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연대감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적인 탈세 등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것을 자식들에게 되물림하는 속성(?)은 서구의 복지국가를 가능케 했던 강력한 누진세 등의 적용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에서 이야기되던 ‘생산적 복지’로 인해 복지 예산이 확충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우리 사회가 복지국가에 진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IMF 라는 외재적 요인에 의하여 그간 부재하던 사회복지 제도의 근간을 황급히 마련했다고 평하는 것이 더욱 옳을 듯 하다. 산업화의 정도나 경제 성장률에 있어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정부의 복지 지출 정도는 여전히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국가들보다도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와는 모든 면에서 다른 서구 복지국가의 시각에서 우리의 복지제도를 평하는, 과정에 대한 모든 고려를 뛰어넘은 처방이 아닐지 싶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는 여느 때보다도 복지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실업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정부는 실업자들의 구직활동을 위한, 기업의 고용증대를 위한 비용을 지출해야만 한다. 국가 경쟁력과도 직결되는 출산율 저하와 인구 노령화 문제는 또 어떠한가? 전통적인 대가족제도,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의 출산을 증진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육문제의 사회화, 결혼 및 출산 후 여성의 직업 활동 보장, 노령 인구의 노동 시장 진출 유도 등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지 않을지. 기존의 선별적인 복지제도들을 아동 수당 혹은 가족 수당 등의 보편적 복지제도로 변화시키고, 연금제도를 확충하는 등 현존하고 있는 문제의 실질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좌파도 우파도 확실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지 못한 한국 사회이다. 이제 막 정치의 전면에 나선 좌파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약하기 그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껏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세력이 건전한 우파도 아닌 듯 하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민주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정부의 복지 재정 확충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그것도 수익을 전혀 보장해주지 않는 복지 프로그램에 쏟아붓는 민간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 허황된 꿈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 우리가 납부한 세금이 어떠한 부분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가 원하는 때에 우리 자신에게 제공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투명성, 의사소통의 민주화가 전제된 복지국가의 건설이야 말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