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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3일 리뷰 어느날 콱 죽게 된다면, 관속에 기르는 강아지와 이 책 풀세트는 꼭 넣어달라고 하겠다. 그만큼 좋아했던 책이고, 사랑했던 책이며..어지간하면 해마다 가을 즈음에...이 책을 보곤 했다.
나는 홍차를 마시지 않아도, 마들렌을 집어먹지 않아도 이 책속의 이야기들이 생생하다.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집중이 되지 않아 고생도 했지만, 처음 읽었을때, 그리고 또 그 다음 읽었을때, 또 그 다음 다음 읽었을때...내가 줄을 긋는 부분은 또 추가 되어 있고...또 추가 되어 또 하나의 기억을 남기고 추억을 만들었다.
이 번 가을엔..아직 시작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 또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다면... 이 책을 사랑했던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많이 좋아하고 사랑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사랑인지, 집착인지, 아니면...정말 다른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원인으로 좋아했던 건지 분명치 않기에...
마침내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니... 다시 그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써내고 싶은 화자처럼, 그 많은 기억과 그 기억속의 장소들이..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될 수도 있겠으나, 상실에 대한 그 고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지금의 이런 나날들도... 언젠가는 모두 잊혀져... 혹은 다른 기억속에 파묻힐지라도.
내 삶에...어떤 한 부분이였고, 소중했음을 되살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살짝 해보았다. 표지만 봐도 마음이 설레이는 책....
덧붙임. 이번 주는 회사 일도 바빴고, 그 와중에 헬스클럽은 꼬박 꼬박 가서 땀을 흘렸고, 돌아와선 늦은 밤까지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 써내느라 잠도모자르고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 이 책이나 좀 읽어봐야겠구나.
2010년 10월 18일의 리뷰
처음시작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마구 마구 읽어버리고 싶은 책을 작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4년전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난해하던 그 문장들이 의미들이 이젠 차곡 차곡 눈에 그려져서 이번의 독서는 더욱 뜻깊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볼펜으로 줄을 그으며, 더 몰입하며 읽었던 것 같다.
여전히 시점은 오락가락 하지만, 1편에 해당되는 '스완네 집 쪽으로'의 part1에 해당되는 이 1권의 내용은 콩브레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이야기. 엄마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잠자리에 든 에피소드와 레오니 고모, 하녀 프랑수아즈, 그리고...너무나 사랑스러운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조금 당황스러운 스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것도 살짝 집중이 되지 않는데, 슬그머니 꽤 길게 묘사 되어 있는 산책 코스(메제글리제 쪽:스완네집, 게르망트 쪽)와 거기에 나오는 마르탱빌과 비외비크의 세 종루는...이젠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뱅퇴유 아가씨의 동성애적인 이야기도 어쩌면, 이 소설이 갖고 있는 파격(?)이라면 파격일 수도 있겠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 편에서도 센세이셔널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극중 인물들의 다소 과장된 대화 내용이 어처구니 없게 하지만, 여러번 읽다보니, 거기에도 어떤 위트나 풍자 같은 것이 담겨져 있지 않나 한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라인보다 더 중요한건,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뭐랄까, 그의 기억이 끄집어낸...이미 망각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환생시키는 능력, 그리고, 그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는 인생, 삶...그런 것들.
앞서 이야기했지만, 마구 마구 걸레가 될 정도로 읽어서, 내 머리속에 꼭꼭 집어 넣어서, 먼 훗날...이렇게 길게 쓰진 못하겠지만, 나의 시간을 되돌려볼때, 이 책이 꼭 언급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시간을 되찾아 보게 된다면...아마 이 책 때문에 행복했었다,라고 기억될것이다.
29쪽. 우리 인간은, 물질적으로 구성된 전체, 누가 보든지 동일한, 다시 말해 시방서나 유서 같이 한 번 보고 금세 알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이라 남들의 생각이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을 본다'고 하는 단순한 행위마저, 일부는 지적행위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의 외모에, 그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관념을 채우고, 그리고 전체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보았을 때, 그 대부분은 역시 이러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66쪽. 홍차에 찍어먹은 마들렌 한 조각으로 되 살아난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 부분.
덧붙임.
다 받아 적기엔, 좋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2009.11월의 리뷰
다시 읽어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년 전의 리뷰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 새록 난다. 그런데,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땐 무슨 마음이였었는지...
이 책은 처음 한 번 읽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볼때마다 처음의 불편함은 없어진다. 이젠..이 책이 너무 좋고, 좋고, 좋아서 읽을때마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그때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책 속의 많은 문구들, 의미들이 새록 새록 다가온다. 내가 나이를 더 먹은 탓도 있겠지만... 그간 읽어왔던 독서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또 다시 11권까지의 여정을 시작할 생각인데, 이렇게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는 것에 어떤 비애감을 느낀다.
정말 좋은 책인데...
종종 권해줬다가, 읽지 못하는 사람을 볼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차 한잔과 마들렌의 향기로 인하여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는 부분이 여전히 좋았다. 이번에는 각 인물들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봤더니, 한결 이해하기가 편했다.(뭐, 암호문은 아니지만...--;;)
11권까지의 여정이 끝나면...나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2006년 3월의 리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1~4권까지 2002년 8월에 여기서 구매해 놓고, 1권만 읽어보는 것을 시도해 보길 여러번, 그리고..나는 깨끗이 접었었다. 이 책과는 도무지 인연이 아닌것 것같았다. 그리고...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다른 분들이 전권을 다 읽고 글을 남기셨는데, 난 이제 한권을 읽었다.
이런 저런 평들은 네이버 지식 검색을 이용하시길 바라며... 각설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이를 꽉 물고, 누가 이기나 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1권은 정말..독백으로 일관하는 이 주인공이 제정신인가 싶게 주저리 주저리 이어지는 문장에 정말 욕지기가 나올뻔 했다. 그리하여, 겨우 겨우 열흘 가까이 시간이 걸려서 1권을 다 읽었을때의 그 뿌듯함이란...
너무 장황하게 길게 쓴 문장과 뭔지도 모르는 풍경,성당 기타 등등에 대한 묘사는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나, 그렇게 되면, 집중하지 못한 부분부터 다시 돌아가서 읽었다. 그러다보니, 코메디처럼...이 책을 읽는게 익숙해졌고, 지금 2권을 읽고 있는데, 하루만에 거의 반틈을 다 읽어버렸다. 작가의 기나긴 문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면..너무 교만한 것일까? 여하튼...난 이 책이 살짝 좋아지려고 한다.
원래 처음에 읽기 어려웠던 책들 "백년 동안의 고독", " 장미의 이름", "달과 6펜스->이책도 도입부분은 좀 힘들었다 나에겐...^^;;" 여하튼, 이런 책들이 세월이 지나도 어떤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11권을 마친 어느 시점에, 나는 또 다른 여운을 갖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읽을때마다 후기를 올려 놓겠습니다.히히히 |
|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수많은 칭송과 칭찬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지...인간에 대한 작가의 놀라운 성찰과 날카로운 안목, 그리고 각계각층에 걸친 방대한 양의 지식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탑을 구성한 것이 이 책이다. 한참 읽고 있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이 단순한 과거의 재발견이 아니라 작가가 비록 배경은 과거라도 초월적인 아공간을 넘나들며 느끼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프루스트가 시간과 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르듯 묘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너무 길어서 지루할 수도 있고, 중간에 독서를 몇 번 멈출 수도 있지만(본인 역시 3번 정도 멈췄었다) 이 책을 읽어본다는 것은 문학을 단순히 재미로 읽는 수준이 아닌 어느 정도 진지한 독서를 하는 이들에겐 큰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 전체가 대충 윤곽이 잡히는 작품이고, 처음과 다음 읽음의 느낌의 차이가 큰 작품이다. 오히려 두 번째 읽었을 때 더욱 놀랍고 인상적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번역이다. 아무리 봐도 일본판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한 티가 나는 문장인데다, 번역의 미숙함이랄지 구식 번역이랄지 하여간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이상한 만연체가 되어 읽기가 너무나 힘들게 되어 있다. 특히 1권같은 경우는 안그래도 지루하고 단편적이다못해 어지럽기까지한 독백들의 나열인데 번역의 매끄럽지 못함이 이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참고 견뎌내면 2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이 이상한 문장과 단어사용 익숙해져 크게 문제없이 읽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아끼는 한 사람으로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순 없다. 현재 이 작품의 완역본이 이것 밖에 없어 불어를 모르는 독자들은 다른 선택의 기회가 없으나, 부디 언젠가는 제대로 된 한글 번역판이 나오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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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Marcel Proust란 글자가 완성되었다. 책꽂이에 11권의 책을 모두 세우면, 노랑부터 회색까지 무지개빛 책들의 아래쪽에는 아마도 그의 서명인듯한 Marcel Proust란 글자가 퍼즐처럼 완성된다. 장장 2년여가 넘는 기간동안에 걸쳐 완성한 퍼즐이다. 처음 이책의 1권(스완네 집 쪽으로 1)을 산것은 1999년 어느 서점에서였다. 이책은 아주 오래전에 한권으로 요약된 것을 읽은적이 있었다. 모든 요약본이 그렇듯이 책을 읽었으되 읽은것이 아니라서, 책의 진정한 참맛을 알지 못하고, 20세기 최대의 걸작중 하나라는 찬사가 다소 과장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한적이 있었다. 그런생각속에서 완역본을 만나게 되었고, 망설임끝에 첫권을 사게되었다. 예상했던대로 길고긴 여정의 시작은 지리하고 힘든일이었다. 99년 여름 한가운데서 처음 시작된 여행은 보름이 지나면서 길을 잃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같은해 가을 중반 세번째로 다시 시작하여 다음해(2000년) 1월 9일에서야 겨우 1권의 끝을 볼 수 있었다. 2권(스완네 집 쪽으로 2)은 5월이되어 구입해두고 보는둥 마는둥 치워두었다가, 금년(2001) 5월 "1년만에 다시한번..."이라는 글과함께 드디어 흥미를 느끼며 단 이틀만에 읽고야 말았다. "우리는 잘 안다. 겉은 무척이나 침울하지만 정독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힘찬 격려를 주는 이 책 속에서 정신의 양식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또한 이 마법의 세계, 인간 이상인 이 예지, 눈에 닿는 것은 모조리 걸작으로 만드는 이 눈길, 숭고하고도 친숙한 이 시정(詩情)을 영영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앙드레 모루아 [프루스트를 찾아서]) 이제서야 이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나머지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 이번가을 11권의 책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이책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보통 한문장의 길이가 10여줄이 넘다보니 '여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평균 400여 페이지(최대 570페이지)가 넘는 얇지 않은 책에 여백이 없이 쓰여져 분량도 다른책들의 족히 2배는 되려니와, 길고긴 문장을 읽어내느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수가 없어 늘 머리가 아프고 눈도 몹시 피로하다. 그리고 가야 할 길은 멀기만하다. 개인적으로, 줄거리가 전혀 없이 전개되는 프루스트식의 텍스트를 몹시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 즐겨읽는 책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 바로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병약한 프루스트가 38세 되던해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서 51세로 사망하기까지 기나긴 세월동안 이책에만 매달렸다는데 몇년간 책을 읽어주는게 뭐 그리 대수일까... 지금 나는 책의 중간쯤을 지나가고 있지만, 아마도 마지막권을 읽게될때쯤에는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쉬어 괴로워질 것 같다. 이제는 조바심 없이 다른책들과 함께 천천히 읽으련다. [인상깊은구절] 우리가 안 지 오래 된 곳들은 단지 공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편의상 공간의 세계에 배치할 따름이다. 그런 곳들은 그 당시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잇달린 인상 한가운데 있는 얇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형상에 대한 회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큰 거리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때의 탐구적인, 근심스러운, 요구 많은 태도, 내일의 상봉에 거는 희망을 채워 줄는지 또는 물리칠는지 그 고비가 되는 말에 대한 기대, 또 그말이 나올때까지 동시에 행하여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번갈아 일어나는 기쁨과 실망의 상상,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의 주의력을 사랑하는 이 앞에서 너무나 동요시키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력은 그 사람의 뚜렷한 모습을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눈에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있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것마저 알려고 드는, 그런 감각기능의 동시적인 활동은, 지금 눈앞에서 약동하는 사람의 천태만상, 온갖 모습, 갖가지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너그러워서,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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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번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학생 때 이미 독서리스트에는 올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요? 그저 막연하게 ‘어려울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새끼가 새끼를 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책읽기도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읽고 추천하는 경우, 혹은 읽은 책에서 느낌이 와서 등의 이유로 읽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오랫동안 새겨두고 있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당구로 치면 쓰리 쿠션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yes24.com/document/6415802>에서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yes24.com/document/6425077>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게 되셨다는 말씀에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게 되고, 그리고 프루스트를 꼭 읽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으니 말입니다.
조나 레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이 기억에 저장되는 기전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가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부분을 보면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 텍스트에서는 “옛 과거에서, 인간의 사망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69쪽)”로 옮기고 있어 손 끝에 잡히는 느낌이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각에 대한 기억을 논하면서 프루스트가 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기억도 있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집 가까이 있는 제과점에서 만드는 마들렌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자주 사곤했는데, 그 아이가 마들렌을 먹으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느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 두 모금째를 떠 마신다. 거기에는 첫 모금 속에 있던 것보다 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세 모금째는 두 모금째보다 다소 못한 것밖에는 가져다 주지 않는다.(66쪽)”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바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 스완네집쪽으로,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3. 게르망트쪽, 4. 소돔과 고모라, 5. 갇힌 여인, 6. 사라진 알베르틴, 7. 되찾은 시간 등 모두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는 이를 열한권으로 나누어 펴냈는데, 제1권 스완네 집쪽으로(1)에는 특히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번역하신 분이 정리한 글이 더해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을 먼저 읽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은 스완네집 쪽으로(1)입니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 있는 고모님 댁에서의 추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각오를 해야 할 점은 전체 이야기가 끊어짐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책읽기에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점일 듯합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책읽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싶습니다.
프루스트는 화자(話者)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고 시작한 글은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때로는 순간 몽롱한 상태로 추억의 영상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상태, 즉 기억에 흔들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 즉 기억을 정리해서 글로 남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도 주목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든 생각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이어서 다른 상황으로 넘어가는데 대부분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마을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를 묘사하듯 말입니다. “우리 앞에 한련꽃을 가장자리에 두른 오솔길이 햇볕을 가득히 받으며 성관 쪽으로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오른쪽 정원은 편편한 지면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둘레의 높다란 수목들의 그림자에 그늘지어, 스완의 선대가 파놓은 샘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가장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역시 자연을 바탕삼아 가공되어 있는 것이다.(195쪽).
“내가 독서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의 발견 쪽으로 부단한 운동을 행하고 있는 이 중심적인 신뢰감 다음에, 뒤이어 오는 것은 감동, 내가 참여하고 있는 행동이 내게 주는 여러 감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날의 오후는 일생에 흔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극적 사건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내가 읽고 있는 책 안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였다.(122쪽)”라고 적은 부분에서 독자를 위한 프루스트의 배려를 읽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첫발을 뗀 느낌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 '나'는 당황했다. 지리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전개. 한글로 써진 외국 소설을 읽는 듯한 낯선, 그리고 긴 문장. 발견되지 않는 글의 주제. 도대체 '나'는 이 책을 왜 읽고 있는가. 지금까지 '나'의 글읽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문사회교양서적을 읽음은 책이 전달코자 하는 메세지를 알고자함이었고, 문학을 읽음은 산문의 아름다움과 작가의 통찰을 발견하는 흥겨움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글은 '다른 것'을 위해 존재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서 나는 이러한 '성과'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글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의 사색은 굉장한 의미를 던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목적'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쓰여진 글이기에는 이 글은 밀도가 너무 높다.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글이 이렇게 밀도가 높을 수는 없다. (꼭, 프루스트의 글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작품,까뮈의 산문이나 헤세의 사색,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찰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단지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을 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도대체 이글을 왜 읽고 있는 것일까? 책을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책을 끝까지 읽어본 지금.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글을 읽는 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푸르스트의 글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언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위해 존재한다. 프루스트의 글을 읽는 '나'의 즐거움은 프루스트의 글을 읽는데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글을 읽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는 순간순간 모두가 말이다. (물론, 그의 글을 읽는 것은 힘겨운 일이기도 했다. 그의 언어는 너무 낯설었다.) 그의 글과 함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글을 위하여 쓰여진 글이기에 단 한구절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순간, 프루스트의 글은 나를 밀쳐냈으며 즐거움 역시 사라져버렸다. 그의 글은 너무나도 높은 밀도의 것이었으며, 그러기에 글을 읽는 나 역시 책을 펼침과 함께 책 안에 '완전히 빠져들'어야 했다. 구절 구절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 충분한 즐거움. 이런 것을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하나보다. p.s. 그와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에게 공감하고, 공감하는 '나'를 알게 되고, 그가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게 되고, 이에 공감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가 그리는 세계를 알게 되고 이에 공감하고, 나자신의 세계에 대해 사색하고 그리고, 그의 삶을 보면서 나자신의 삶을 통찰할 수 있었다. " 진정한 실재란,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실재인바, 그것은 또 순전히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11권.p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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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반환점이 멀리 보이는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읽은 것만으로 섣불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노라는 자부해서는 큰 잘 못이라라는 점을 옮긴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편의 ‘스완네집쪽으로’에서는 콩브레에 있는 고모네 집 동네의 아름다운 정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냈고, 2편의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서는 휴양지 발베크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설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앞으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심오한 탐구가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3편 ‘게르망트쪽’의 전반에서는 제목처럼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향하는 연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려는 ‘나’의 행보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2편 전반에서는 스완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다가 시나브로 사랑의 불꽃이 사위어들고, 후반에서는 발베크에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여인들, 특히 알베르틴과 그 동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등 ‘나’의 연애관이 상당히 부박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3편에서는 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갑작스럽게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집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잠시라도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 그녀의 산책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발베크에서 친분을 쌓은 로베르 생 루가 근무하고 있는 동시에르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작부인을 향하던 연심도 분명치 않은 이유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 여성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천주님께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최대의 행복은, 천주님께 부인에게 온갖 재앙을 내리시어, 망하게, 인망을 잃게, 나와 부인 사이를 떼어놓고 있는 모든 특권을 빼앗아, 거처하는 집도, 인사해 주는 사람도 없이 되어, 부인이 내 보호를 구하러 오게 하는데 있었다.(83쪽)”는 나의 사랑은 병적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은 1편 ‘스완네집쪽으로’에서 그려내고 있는 오데트에 대한 스완씨의 집요한 구애라던가 3편 ‘게르망트쪽’에서 ‘나’의 친구 생 루가 실상은 매춘부인 라셀 캉 뒤 세뇌르라는 연극배우에게 빠져드는 모습과는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게르망트 공작부인과의 친분을 얻어 ‘나’의 연심을 전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으로 사회가 양분되어 팽팽하게 맞섰던 것을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이 소개하는 드레퓌스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스파이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작성한 문건이 발각되면서 간첩으로 몰려 반역죄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에 유폐됩니다.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에스테라지가 간첩이며 드레퓌스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을 상부에 알렸지만 오히려 피카르 중령이 체포되고 범인은 또다시 빠져나가게 됩니다. 군부의 고급 장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하여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고 간 것이며,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언론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자리하고 있던 반유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역시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는데,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드레퓌스파는 프랑스 군부와 정부를 비판하였고, 결국 1898년 에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지만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었을 뿐 유죄가 번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면은 되었지만 복권은 되지 않은 드레퓌스는 1904년이 되어서 다시 청구된 재심을 통하여 1906년에 이르러서야 무죄가 선고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테오도르 헤르출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오니즘운동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이릅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통하여 프루스트는 사교계에서 그리고 병영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치고 대립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나’가 프루스트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시 프랑스 지성인 대부분이 속하던 드레퓌스파에 속한다고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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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에서 이벤트 문화버킷리스트를 시작하면서 과연 죽기 전에 보거나 듣고 싶은 책이나, 영화, 음악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절절한 문화상품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몇일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영화부문에서는 딱히나 집히는 것이 없었지만, 음악은 하나 있습니다. 학창시절 동아리에서 무대에 올렸던 손톤 와일드의 연극 <우리읍내>에 삽입곡으로 주인공의 장례식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같이 불렀던 죽음에 관한 무거운 노래입니다. 가사도 거의 잊었습니다만, “오너라 오려무나, 죽음이여~~~” 이런 가사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공연을 같이 했던 배우들을 만나면 들을 수 있겠지만, 극중에서 들어야 그 느낌이 그대로 살 듯 하여 아무래도 후배들이 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읍내>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사라진 알베르틴>편에서 다루고 있는 알베르틴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저자의 두려움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루스트가 젊어서부터 천식을 앓았는데, 천식의 증상인 기침은 발작이 일어나면 숨이 넘어갈 듯한 공포가 엄습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5편에 이를 때까지 할머니의 죽음이나 가깝게 지내던 스완씨의 죽음 등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간략하게 지나친 것은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놓치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저자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점이라 하겠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할 ‘죽음’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여 보려는 간절함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라진 알베르틴’편은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전편인 ‘갇힌 여인’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뿐만 아니라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을 고쳐보려는 주인공의 노력을 담고 있어서인지 ‘갇힌 여인’에는 ‘소돔과 고모라 III①’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사라진 알베르틴’에는 ‘소돔과 고모라 III②’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두고 있습니다.
갇힌 여인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인데, 사라진 알베르틴에 이르러서는 알베르틴에 대한 주인공의 변덕이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베르틴을 파리의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한 것은 사랑해서가 아니고 그녀의 동성애적 성향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다가도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식으로 엮어가던 ‘갇힌 여인’보다 더 극적이었던 것은 알베르틴이 집을 나가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는 주인공은 친구 생 루를 특사로 파견하는 한편, 알베르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녀를 밀어내려는 척하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들어 이를 곡해한 알베르틴도 버티는 소위 밀당이 진행되다가 느닷없이 그녀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요즈음 우리네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또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주인공은 당장 달려가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슬픔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발베크의 호텔 급사 에메를 보내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는 치졸함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탄에 빠진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야기만 해도 얼마나 되는지 인내심을 다시 시험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그리고서 알베르틴의 동성애 상대였던 앙드레를 끌어들여 관계를 맺거나 새로운 여성에 눈길을 돌리는 모습은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벗기고 벗겨도 새로 드러나는 양파껍질처럼 알베르틴의 동성애 취향에 연루된 사람들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도 요즈음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요소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샤를뤼스씨의 동성애 상대가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행적에 등장한다거나 생 루의 결혼생활을 파경으로 몰고가려 나선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전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책의 말미에 덧붙여 둔 ‘드레퓌스 사건’은 조지 D 페인터의 <마르셀 프루스트 전기>중의 제13장 ‘드레퓌스사건’을 옮겨둔 것이라고 하는데, 원전에 있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과정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은 프루스트의 전기에서 옮겨온 탓에 사건의 전말을 가감없이 요약한 것이라기보다는 드레퓌스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다보니 작가의 지병의 영향도 있는 듯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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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중요한 문화적 요소였던 살롱을 통하여 사교계 활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프루스트가 사교계를 통하여 얻은 다양한 경험들을 녹여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술을 파는 장소의 이름으로 왜곡되어 전해졌습니다만, 살롱은 프랑스 상류층이 명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여는 사교적 집회를 이릅니다. 조선시대 우리 사회에 널리 자리잡고 있던 사랑방이 이에 흡사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랑방에는 주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였지만, 지나는 과객에게까지도 열려있던 공간이었으나 살롱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참석할 수 없었던 폐쇄적 문화로서 살롱에 초대된 명사의 면면에 따라 살롱의 수준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명망있는 살롱에는 초대받기 위하여 연줄을 대려 기를 쓰기고 하였고, 수준이 낮은 살롱에는 초대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 것 같습니다.
왕족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더라도 그 신분의 고귀함 때문에 자질은 차치하고서라도 살롱에 초대하기 위한 섭외 영순위였던 것 같습니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집에 초대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지능과 매력의 필요계수는 낮아지고, 두각을 나타내는 왕족의 경우일 때는 영(제로)에 가까운데, 이와 거꾸로 왕족의 수준에서 내려가면 내려가는 만큼 계수는 높아진다.(178쪽)”
가벼운 다과를 놓고 그날의 화제를 교환하거나 혹은 만찬을 열기도 하는데 화제는 당시 사교계의 가십거리에서부터 공연, 미술, 음악, 문학 등과 같은 광범위한 예술분야에 대한 지식을 교환하기도 하고 정치 외교문제까지도 토론하기도 하여 유럽문화사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살롱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경비가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쿠르부아지에네 사람들이 경험 못 한 그 소문난 사치, 부유한 또는 반쯤 파산한 게르망트네 사람들이 마구 사용해 친지들을 즐겁게 하는데 뛰어난 그 사치는, 내가 생 루와 함께 여러 번 경험했던 바와 같이 물질적인 사치만이 아니라,…(3001쪽)”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서는 스완씨집에 출입하는 정도에 머물던 내가 ‘게르망트쪽’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살롱에 초대되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문학적 자질이 사교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게르망트쪽’이라는 제목처럼 게르망트 일가의 살롱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되는데는 부친의 명망과 게르망트 일족인 친구 생 루의 존재가 기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게르망트쪽’의 후편에서는 전편의 말미에 예고된 할머니의 병환이 더 나빠지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만하더라도 상류층 인사가 아프게 되면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의사를 불러 왕진을 받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양의학의 수준이라는 것이 특수한 의료장비가 개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관장이나 사혈을 처방하는 경우도 있으나, 진단에 따라 적절한 약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자가 극적으로 회복되는 경우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살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의사의 사회적 지위도 요즘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몰리에르 등의 희극에서는 의사를 희화적으로 그려 조롱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병환은 요독증이라는 진단으로 산소를 흡입하는 등의 처치를 받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나의 어머니의 간호에 대하여 할머니가 이유없이 화를 내는 장면이 여러 차례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는 치매를 앓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만해도 나이든 환자에서 나타나는 노망이 의학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터입니다만 요독증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시기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게르망트 공작댁의 살롱에 초대되면서 게르망트 부인과 만나게 되는데, 나는 이미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연심을 접게 된 시점으로 묘사되고 있어 전편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여성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구력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장편소설을 주인공 중심으로 끌고가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프루스트의 성격이 반영된 것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게르망트 공작댁의 살롱에서는 게르망트 일가에서 시작해서 당시 유럽 명문가의 족보를 따지는 장면도 나옵니다. 우리네 족보에서는 여성쪽의 계보는 간단하게 기록되는데 반하여 유럽 명문가들은 귀족의 칭호가 여성 쪽으로도 승계되고 여성 역시 일가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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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후편은 전편에 이어 발베크가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드렸던 살롱문화는 파리와 같은 대도시 말고도 시골에서도 그곳에서 사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는 살롱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파리의 살롱와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겠습니다. 발베크 부근에 사는 베르뒤렝씨와 그들이 세들고 있는 집의 주인인 캉부르메르씨의 살롱이 등장하는데, 주무대는 베르뒤렝씨댁이지만, 두 집안이 은근히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어 당시 유명 살롱들끼리 참석하는 인사들의 면면에 따라서 수준이 비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사들은 파리의 게르망트공작 살롱이나 스완씨의 살롱에서 이미 낯이 익은 분들이기도 합니다. 휴양지인 발베크로 쉬러온 파리의 인사들을 유치해서 살롱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 싶기도 합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는 몰리에르의 연극과 발자크의 문학세계가 화제에 많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17세기 중반 활동한 몰리에르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몰리에르는 전통적인 희극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대비시켜 이것들의 상호관계에서 희극적 요소를 추출해내는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대학연극반에서도 몰리에르의 <강제결혼>이 레파토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의사 망나니>에서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던지 화가 날 지경이었던 경험도 생각납니다. 몰리에르는 의사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자크는 19세기 초반에 명성을 얻은 소설가입니다. 따라서 프루스트가 사교계에 드나들 무렵 파리의 살롱가에서 화제에 많이 올랐던 것들을 기억하고서 소설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어, 하편에서는 주로 샤를뤼스씨와 모렐씨 사이의 관계를 주로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작은 할아버지댁에서 일했던 사람의 아들인 모렐은 자신의 내력을 감춰달라고 주인공에게 요청하면서도 요청을 승낙하자마자 태도가 일변하여 으스대는 꼴을 보이는데, 이런 자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작가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주인공과 알베르틴의 관계입니다. 전편에서는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과의 연애는 깊어져 혹시 결혼으로 이어질까 어머니가 걱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리고 성장기에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상황을 묘사하던 주인공이 청년이 되어 많은 여성들과의 사랑을 그려내면서부터는 이야기 가운데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별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발베크에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설명은 몇 줄 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틴이 등장한 이후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스케치를 다니는 알베르틴을 위하여 자동차를 세내어 편의를 봐준다든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동숙을 한다거나 하다가도 헤어질 결심을 한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편집광적인 성격을 드려냈던 스완씨와는 달리 주인공은 불안심리가 두드러지는 성격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전편에서보다 동성애자들의 심리나 행동양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제 마음에 드는 이들에겐 열렬히 친절한 만큼이나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이들을 멸시하는 게 성도착자들의 버릇이다.(53쪽)”라는 설명이나 게르망트 공작이 모렐을 꼬드겨서 홍등가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된 샤를뤼스씨가 파리에서 쥐피앙을 불러들어 잠복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자들보다 질투의 정도가 심하다고 들었는데, 새로 생긴 동성애 상대를 감시하기 위하여 옛날 동성애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곳곳에서 고유명사의 어원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숙한 외교관인 오르메송(Ormesson)의 이름에는 베르길리우스가 좋아한 울무스(ulmus, 느릅나무), 또는 울름(Ulm)이라는 도시 이름이 되기도 하는 오름(orme, 느릅나무)이 보입니다.(70쪽)” 아마도 이런 화제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1920년대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프루스트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예언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이 우리의 비잔틴 문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사회 풍조로 된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된 효력에 관해 엄숙하게 토론하다니, 착실한 프랑스 사람, 아니 착실한 유럽 사람이 할 짓이 못 됩니다.(1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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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꽃피는 아가씨들’이란 부제의 의미가 후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은 전편의 끝 장면으로부터 2년을 건너 뛰어, 아마도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이라 추측되는 시점에 노르망디 해안가에 있는 발베크로 떠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편에서는 질베르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마음 졸이다가 어느 순간 질베르트의 이질적인 면모에서 생긴 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는데, 아무리 연모하는 마음이 식었다고는 하지만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습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 이유를 기억의 일반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회상이라는 것도 기억의 일반적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기억의 일반적 법칙 자체가 습관의 보다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습관은 만사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망각했던 바로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가장 잘 생각나게 한다. (…) 우리의 눈물이 고갈되어 버린 듯할 때도 역시 울게 하는 것,....(8쪽)” 헤어진 여인을 잊으려 애를 쓰다가도 같이 즐겨 듣던 음악이 들려오면 불현 듯 눈물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경험을 한번쯤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독특한 것은 사랑을 정리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만나거나 아니면 술, 운동, 도박?과 같은 전혀 다른 힘을 빌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별한 무엇없이 마음고생을 다한 다음에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또 다른 사랑을 구하는 모습은 당시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발베크로 떠날 무렵 갑작스런 사정으로 어머니가 동행하지 못하게 되자 불안해진다거나, 발베크에 체류하면서 사귀게 된 생 루에게 할머니의 관심이 옮겨가는 듯하자 투정을 부리는 대목이 나오게 됩니다. “할머니가 내 방을 나가 버리자마자, 파리에서 집을 떠나는 순간에 괴로워했듯이, 나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46쪽)”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진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나 할머니의 애정을 붙들려는 주인공의 정신상태가 집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발베크로 향하는 노정에서 그리고 발베크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만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 기를 쓰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언제 그랬나 싶게 또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옮기는 주인공의 행동은 집착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 아닐 수 없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을 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능력입니다. 스치듯 지나친 여성도 마치 대면한 듯 그려내는 능력은 대단하다 싶습니다. “빌파리지 부인의 마차가 빨리 달린다. 이쪽으로 오는 계집애의 얼굴을 볼 틈이 있을까 말까 하게. 그렇지만-인간의 아름다움은 사물의 그것과는 달리, 의식과 의지를 가진 독특한 생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계집애의 개성....(103쪽)” 이하로 한 문장이지만 장문으로 글로 그녀에 대한 느낌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주인공의 관심은 스쳐지난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마차를 세우고 뒤쫓는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제하는 여성이 드물었다는 점은 주인공의 병적인 관심의 소산에 불과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이라는 부제는 발베크에서 만난 프티 부르주아 계층의 젊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산책을 하는 가운데 조우했던 이 여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해 애태우다가, 언젠가 스완이 말했던 화가 엘스티르의 화실을 찾아가면서 관계를 맺게 되는 실마리를 풀어내게 됩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곳곳에서 엮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엘스티르는 한때 베르뒤렝네 사교모임에서 비슈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사람이고 무명시절의 오데트, 즉 크레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새로운 관계를 내비치고 있어 다음에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기억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논리도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내가 가장 나중에 본 얼굴이, 어째서 나에게 상기되는 유일한 얼굴이 아니었나 하면, 어떤 사람에 관한 우리의 회상에서, 지성이, 우리의 일상의 관심사와 가까운 실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젖혀 버리기 때문이다. (…) 나의 첫인상은 모조리 멀리 멀리 가 버려, 나날이 그 모습이 변형되어 가는데, 그것에 대항하는 힘을 기억 속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424쪽)”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고사를 치루는 요령이라고 할 조언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문제가 나오면, (…) 흥분해 보리지 않고, 먼저 다른 종이에 내 초안을 차근차근 적어 놓지, 첫줄에 문제의 요지, 주제의 서술, 다음에 전개해 나갈 본문의 개요, 끝으로 감상, 문제, 결론. 이렇게 전체의 개요을 적어 두면 논지의 방향을 알게 되지.(375쪽)”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조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