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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했다. 여기에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즉각적인 반격이다. 그리고 그 즉각적 반격은 실효성이 충분해서 남한이 마음씨가 좋긴 하지만 무자비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천안함 침몰 사건이 북한이 한 일이라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것도 마찬가지다. 확증할 만한 증거를 민간과 세계에 보여준 다음에 천안함과 비슷하거나 더 큰 배를 침몰시키면 된다.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지상포격을 통하여 보복하면 된다. 천안함 장병의 목숨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들을 전사자로 예우하고 서둘러 봉합하기보다는 보다 철저한 준비를 통하여 북한에게 보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 어느 과학자도 반박 못할 증거를 들이대고 그 증거를 북한이 인정하자마자 보복공격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증거는 부실했고 온갖 반론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반박도 못했으며 이 보복을 유엔으로 끌고 가서 북한에 제대로 된 복수도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제적 ‘호구’가 되었다. 1999년과 2002년에 연이어 북한과 서해상에서 교전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북한을 응징했으나 햇볕정책의 뒤안길에서 군인들은 소모품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남한의 국민들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했다. 반대로 2008년에 소모품 취급을 당하던 군인들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따뜻하게 위로받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남북한의 전쟁 위험은 날로 커져갔으며 그 해 이후로는 금강산 관광도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핵에 대한 이야기는 1993년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북한에 핵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만 안 됐을 뿐 이미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근 20년에 가까운 핵의 위협이 불과 며칠 만에 새로운 사실인 것처럼 과장되어 신문과 방송에 나타났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우리 정부는 미국과 일본에 보조를 맞추며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고 나서 북한의 포탄은 우리의 앞마당에 떨어졌다. 위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한이나 북한이나 모두 마음씨 좋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웃 중에 ‘양아치’가 한 명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양아치의 허풍과 방종 등의 양아치 짓거리에 대응하는 가장 올바른 방책은 무엇일까? 난동을 부리는 양아치에 대해 술 한 잔 사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결국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나쁜 방책은 무엇일까? 그 양아치에게 양아치 짓거리를 그만 둔다면 내가 술 한 잔 사준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양아치가 양아치 짓거리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직접 그 이유를 비하하거나 끼어들어 고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마음씨 좋은 이웃이다. 이 마음씨 좋은 이웃 정책이 바로 햇볕 정책이며 이 정책의 수혜자는 모두였다. 그러나 자기 가족들에게는 고기 한 점 안 사주면서 옆 집 양아치에게는 비싼 회와 술을 사준다면 그 자식들이나 아내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김대중과 노무현이 그렇게나 보수 우익에게 욕을 먹은 이유였다. 그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연평의 전사자들을 감싸 안지 못한 것은 마음씨 좋은 이웃이 되려는 노력이었고 그렇기에 욕을 먹어도 변명을 하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 어느 누가 자기 가족보다 이웃집 양아치를 더 아끼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씨 좋은 이웃이 되어야만 하는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 이론적 근거는 역설적이게도 냉전을 만들어냈던 게임이론이다. 게임이론은 일반적으로 죄수의 딜레마로 알려져 있다. 죄수가 공범에 대해 배신할 수도 있고 협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수는 다른 방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공범의 상태에 대해 전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배신을 택하는 행위가 최적의 선택이 된다. 그것이 바로 냉전의 논리이고 핵 경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뢰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즉 이 죄수의 딜레마를 반복의 카드게임으로 바꾸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기적 유전자’의 12장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에서 보면 협력하는 것이 게임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야기한다. 물론 한 번의 배신은 상대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는 대신 자신은 최선의 이익을 얻긴 하지만 그 이후에 겪을 배신의 고통은 상당히 크다. 그래서 당하기 전까지는 마음씨 좋은 놈이 되고 당하면 보복하는 전략을 쓰는 쪽이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온다. 이는 상대편에서 어떤 전략을 쓰더라도 동일한 결과를 야기하는데 이는 선진국들이 선전포고를 헌법으로 금지한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효율적인 전략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즉 평소에는 마음씨 좋은 전략을 통하여 먼저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시키고 만약 공격당한다면 무자비한 반격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인내력과 용기 둘 다 필요한 전략이다. ‘손자병법’에서 손무는 합려에게 자신의 전략전술이 비단 책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천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직접 군대를 통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래 훈련된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쉽다고 생각하여 시범을 보인 군대는 다름 아닌 합려의 후궁들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그녀들을 이끌고 열병식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이끈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녀들에게 아주 상세하고 알아듣기 쉽게 규칙을 설명한다. 이 때 모르는 것이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다시 설명한다. 여기서는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장난하는 후궁들에게 끝까지 진지한 자세로 쉬운 말로 알아듣게 설명한다. 두 번째는 그 이후에 그녀들이 보인 행동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 것이다. 합려의 총애를 받는 후궁 둘의 목을 군령에 따라 벰으로써 이제 다른 후궁들은 완벽하게 손무의 통솔을 따른다. 당연히 이 때 손무는 자신의 목숨도 걸었다. 이 부분에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원래 손무는 노자의 영향을 받아서 여성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여성도 환경과 의지에 따라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씨 좋은 놈이란 진정한 뜻은 충분히 베풀고 자신의 뜻을 알리되 그에 어긋나는 상대방의 배신행위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는 기존의 남북관계에서 합의했던 모든 내용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비하고 싶어 했다. 당연히 게임의 규칙은 바뀌었고 이제 냉전시대의 게임이론으로 회귀했다. 바로 배신과 응징이라는 카드로... 그러나 이 정부는 인내력도 없었고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용기도 없었다. 결국 세계가 인정하듯 우리에게는 실제로 아무런 카드도 없다. ‘이단자’에서 알리는 네덜란드에서 소말리아 인들에 대한 통역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립하게 된다. 소말리아 출신의 아이들이 네덜란드 아이들을 선제공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네덜란드의 교사는 소말리아 출신의 엄마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소말리아의 전통에서는 만약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약한 존재로 인식되며 약한 존재로 인식되는 순간부터 그 존재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이런 선제공격의 성향을 가진 족속은 배신도 먼저 하기 마련이며 이런 전통을 가진 혹은 이런 유전자를 가진 종족은 결국 절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족이나 국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인가? 게다가 이들의 종교나 부족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신분제의 폐지, 남녀평등,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거부한다. 유엔은 이들의 정부에 개입해서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통치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모가디슈에는 블랙 호크를 띄워야 할까? 아니면 게임이론에 따라 배신하고 선제공격하는 유전자를 가진 족속이니 스스로 절멸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소말리아 내전의 난민들은 속속 유럽에 유입되고 근본주의에 경도된 오스만 마하무드 가문의 청년은 미국에 폭탄테러를 기도하다 FBI의 함정수사에 걸려 종신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제 소말리아나 근처의 유목적 전통을 가진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시술되던 여성할례는 유럽의 이슬람 공동체 내의 가정 식탁 위에서 아프리카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이런 행위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나 존 롤스 같은 자유주의 철학자들에게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현대사회가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다원적 가치와 종교에 대해 간섭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이론은 보편적 가치를 서로 인정하는 선진국들과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는 통용될 수 있으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국가들에는 적용할 수 없는 이론이다. 좌파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들은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사회적 약자, 혹은 전지구적 약자인 후진국에 대해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면서 방치하거나 심지어 보조금을 통해 잔학한 행위를 조장한다. 알리가 배교자가 된 것은 이슬람 세계에 있으면서 느낀 종교적 회의에 근거하고 있긴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네덜란드에 와서 보고 배운 자유주의와 복지체계 그리고 유럽인들의 관용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유주의와 약자들에 대한 좌파의 호의, 그리고 관용은 유럽 내의 이슬람 공동체의 반인륜적 행위와 이슬람 국가들의 국수주의에 대해 대처할 수 없는 약점이 된다. 이제 알리는 선택해야 한다. 유럽인으로서 자신의 조국과 가족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주위의 모든 것과 투쟁하느냐... 그러나 또한 유럽도 선택해야 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통합을 위해 이슬람 교도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에게 유럽의 언어와 가치를 그들에게 주입시킬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관용정책을 유지할 것인가... 이 문제는 테오 반 고흐가 죽기 전까지는 급박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가 죽는 순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1960년대의 유럽과 아프리카 이민자의 문제는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처럼 이성적으로는 자신들의 우생학에 기초한 인종주의를 폐지하고 아프리카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모순된 감정이 존재한다. 그래서 파스빈더는 분리된 공간에 대한 미장센을 사용하여 이러한 정신적 분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유럽은 보다 복잡한 세계가 되었다. 유럽의 이민자들은 더 이상 선진국에 통합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더욱 근본적으로 변해 가고 북유럽을 포함하여 독일, 네덜란드 사회에 해방구를 건설했다. 여기에 테오 반 고흐의 ‘복종’이 있다. 그들의 가치가 얼마나 인류보편적 가치에 반하고 특히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그리고 테오는 죽는다. 중세의 이슬람 세계는 이성의 산실이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최대 전문가는 아베로에스였으며 그 아베로에스를 통해 유럽의 스콜라철학은 발전했다. 지금 서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현대종교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이슬람에서는 아베로에스만 이야기한다. 즉 아직도 이슬람은 중세다. 꾸란을 은유로 해석할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꾸란은 해석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슬람은 맹신의 종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이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제 알리는 미국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소말리아나 이슬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나서 해결책이 떠오르기는커녕 의문만 더해진다. 게다가 네덜란드 우파는 볼테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우리나라의 우파는 정치인 사찰에 대포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고 여기에 대해 국민들의 다음 대선의 선택지 또한 불분명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기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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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얀 히르시 마간’ 그리고 ‘아얀 히르시 알리’ 두 여자의 이야기가 쓰여있다. 같은듯 하면서도 다르고, 다른듯 하면서도 같을 수밖에 없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얀 히르시 마간’으로 살아온 22년 동안의 이슬람 여인 이야기와 ‘아얀 히르시 알리’로 살아온 14년 동안의 활동가이자 배교자의 이야기로 나뉘어 쓰여있다. 지금은 미국에 머무르고 있다는 저자 아얀, 그녀는 아직도 유럽내 이슬람 여성들의 가족내 폭력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이슬람을 지구상에 남아있는 종교중에서 가장 순결한 종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9.11테러를 어느종교, 어느조직 에서나 있음직한 교조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은 서구 패권국가들의 시각으로 본, 지극히도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을 보는 것 이라고 믿고있다. 그러나 아얀의 회고록을 읽고 난 지금, 적어도 이슬람은 모든이에게 평화와 관용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의 이슬람은 순결했을지 몰라도, 아얀의 글을 통해 알게된 이슬람은 이제는 그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재단된, 여느 종교와 다를바 없는 하나의 권력임을 알게 된다. 특히나 종교이기에 앞서 생활일수 밖에 없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있어 이슬람은 바로 천형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1970년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 아얀이 어렸을 때 자라면서 외할머니한테서 귀에 못이 밝히도록 들은 이야기는 모든 여자는 가문의 규율에 복종해야 하며,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말 이었다. 아얀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죽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이혼후 쿠웨이트에서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그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좀더 자유로웠던 소말리아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주던 히르시 마간에게 끌려 결혼을 하였다. 결혼후 그들은 아얀의 오빠 마하드와 아얀과, 여동생 하웨야를 차례로 낳았고, 히르시 마간은 군사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시아드 바레 군사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아얀이 2살 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후 가문사람들의 도움으로 감옥을 탈옥한 히르시 마간은 에티오피아로 가 소말리아 해방 민주전선을 조직하여 소말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 아얀은 어머니와 함께 모가디슈 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5살이 되던 해 그녀의 외할머니에 의해 강제로 할레를 받는다. 소말리아의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피난길에 오른 아얀 가족은 아버지를 만나 사우디와 에티오피아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정착한다. 아얀은 그곳에서 이슬람여자중학교를 다니면서 이슬람원리주의에 가까워지게 된다. 11살이 되던해, 엄마와 의견대립이 심하던 아빠가 그들을 떠나 새로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때부터 그녀는 엄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하구한날 얻어터지며 자란다. 동생 하웨야와 함께 상업학교를 졸업한 아얀은, 20살이 되던 해 고국인 소말리아로 돌아온다. 모가디슈에서 일을 하며 지내던 아얀은 군인이었던 사촌 마무드를 만나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마무드가 러시아로 떠나자 다시 케냐로 돌아온다. 케냐의 집에 머무르면서 이슬람청년운동에 빠져보지만, 이슬람 원리에 빠지면 빠질수록 아얀의 마음엔 의심이 스며든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는 일방적으로 결혼상대를 정하여 아얀에게 통보한다. 양쪽가문이 서로를 비교했을 때, 전혀 손해볼것이 없는 두가문의 결합이었다. 신랑은 캐나다에 살고 있었으며, 아얀은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했고, 전혀 본적도 없는 사람과의 결혼식에 대해 저항을 해보지만, 그녀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결혼식은 치루어지고 신랑은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행 비자를 수월하게 받기 위해 아얀은 독일로 보내졌다. 독일 친척집에서 지내던 중,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아얀은 1992년 6월, 22살의 나이로 홀란트행 열차에 몸을 실는다. 바로 이날이 ‘아얀 히르시 마간’이라는 한 여성이 스스로를 죽이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수 있는 한 인격체로서의 새로운 여성 ‘아얀 히르시 알리’로 태어나는 날 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믿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과 인연을 맺지 않을 자유,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자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유, 선택을 존중해주는 자유,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자유, (네덜란드 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을 권리다. 아얀은 가문과 이슬람 공동체의 추적을 두려워하여 이름과 생년월일을 바꾸어 네덜란드에 난민신청을 한다. 그녀의 가족들이 독일로 와서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난민신분을 인정받게 된다.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 생활을 하면서 아얀은 하루빨리 자립을 하기 위하여 직업학교를 다녔다. 1994년 하웨야가 네덜란드로 와서 난민신청을 했다. 하웨야를 돌보면서 소말리아 통역관 일을 하던 아얀은 1995년 대학교 입학자격인 프로파되제를 취득했다. 소말리아와 네덜란드를 비교하면서 아얀은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무엇이 이들 국가를 이렇게 다르게 만드는지를 알고 싶었다. 레이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하나하나 지식이 쌓여갈수록 그것들은 아얀의 머리속에 이미 들어와 있던 이슬람 신앙과 충돌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는 한편, 통역일을 하면서 여성의 쉼터에 있는 이슬람 여성들의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수 있었다. 그러던중 하웨야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다가 결국 케냐로 돌아갔다. 1997년 아얀은 난민신분을 인정받은지 5년이 되어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1998년 케냐에서 동생 하웨야가 죽었다. 2000년 9월 마침내 아얀은 30살의 나이로 레이덴대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아얀은 제약회사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정부기관에 일자리를 구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고 관둔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다가 노동당 연구기관에 취직을 하게된 아얀은 그곳에서 이민온 사람들과 그들의 통합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자 서구사회는 이슬람에대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슬람과 서구에대한 토론이 빈번한가운데, 아얀은 테러범들이 평범한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사회에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한편, 이슬람 신앙에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기 시작한다. 이슬람에대한 신문기고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아얀은, TV토론회나 토크쇼에서 이슬람을 주제로한 방송에 빈번하게 초청되어 이슬람여성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이미 알라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아얀은 배교자로 이슬람에게있어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협박이 빗발치는 가운데 경호를 받으며 생활하던 아얀은 2002년 마침내 미국으로 피신한다. 그해 하원선거가 다가오자 자유민주당의 지도자 넬리 크뢰스는 아얀에게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하원의원 출마를 권유한다. 망설이던 아얀은 비이슬람권 문화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는 오해를 풀어주는 한편, 네덜란드 이슬람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박해와 폭행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출마를 결심한다. 노동당에서 자유민주당으로 당적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얀은 무난하게 당선되어, 이슬람여성의 해방과 이민자 통합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원으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2004년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와 함께 이슬람여성들의 인권에 관한 영화 <복종>을 만들고, 이것이 방송을 타면서 그녀는 이슬람으로부터 악마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녀가 시나리오를 쓰고, 테오가 제작한 영화 <복종>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맞는 여성 지긋지긋하게 싫은 남자와 결혼한 여성 일상적으로 폭행 당하는 여성 삼촌에게 강간당하고 집에 갇혀 외출하지 못하는 여성, 이렇게 4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피부에 꾸란 구절을 새겨놓고, 꾸란에는 매질 같은 처벌이 명문화 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없고, 공동체의 비난을 받는 일은 더욱더 없었다. 그해 11월 테오가 괴한에게 대낮에 총격을받고 사망한다. 이후 아얀은 무장경호원에 둘러싸여 그녀도 알지못하는 곳으로 이동하며 생활을 하게된다. 협박범들을피해 미국과 독일과 네덜란드를 떠돌던 아얀은 2006년 보수적인 이슬람과 극우정치인들에의해 난민신청 당시의 거짓말이 빌미가되어 시민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산되어 시민권을 유지하나,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이민을간다. ‘아얀 히르시 알리’의 회고록은 여기까지 이다. 공동체와 가족에게서 쫒겨난 그녀는 여전히 협박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종교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항해서 싸우는 그녀, 어느 것이 선인지를 떠나서 서구적인 가치와 자신이 거쳐왔던 공동체의 가치를 놓고 싸우는 그녀, 온갖 위험을 무릅쓴 사회적 약자를 향한 그녀의 투쟁은 눈물겹기만 하다. 아니 어찌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녀가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비록 서구에 이주해온 이슬람공동체의 새장속에 갇혀있는 이슬람여성들이라 해도, 그녀의 투쟁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는 아리송해진다. 그녀가 투쟁하고 있는 서구사회는 그녀가 의원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당시에도 협박범 들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신분을 핍박하기에 이를 정도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결속되어 있다. 그런데 서구가 아니라 이슬람국가에 살고 있는 아얀 그녀의 엄마, 자매 그리고 딸들은 어찌해야 할지.. 오히려 그녀의 회고록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고나니 더 답답해진다. 우리가 그녀들을 위해서 해줄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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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부터 꺼내야할까. 한숨이 났다. 먼저 나의 무지함에 실망하고, 몰라도 한참 모르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댔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슬람교는 먼 종교였다. 세계 4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낯선 종교였다. 한국인 중 이슬람교를 가진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이슬람 자체에 대해 논쟁 하는 것을 매체를 통해서라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아랍인이 주로 믿는 종교이지’, ‘유대교와 태생은 같지만 만날 싸우는 종교이지’ 하는 중얼거림 정도였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이집트를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어렴풋이 더 알게 되었다. 여행자가 유의해야할 점들을 강조하는 경험자들의 말을 새기면서 이것이 곧 이슬람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특히 여성 여행자는 복장부터 신경 써야 했었는데 반바지나 노출이 심한 복장은 자제해야한다는 것, 현지인에게 술을 권하면 안된다는 것 등 이었다. 북부아프리카에 속하는 이집트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행여나 하지 않을까 조심하며 여행기간을 보냈다. 사회문화 시간에 배운 대로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했고 감히 그 나라 종교에 대해 ‘왜 이리 불편하게 살까’, ‘남자보다 여자에게 규제가 이렇게 많은데도 왜 여자들은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까?’ 따위의 질문을 입 밖에선 차마 내뱉지 않았을 뿐아니라 마음속에서 조차 던지지 않았다. 자칭 문화인으로서 그들 문화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 것이지 감히 비난의 대상도, 비판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된다 생각하며 그와 관련된 생각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이제는 꼭꼭 닫혀있던 그 머릿속 문이 열리고 있다. 최근에 종교에 관한 수업을 준비하면서 우리 주변에 흔한 크리스트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종교의 탄생부터 현재의 종교 갈등까지 제법 세세하게 총론 수준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이슬람의 본래 의미 수준에서 그들의 문화양식을 이해하는 정도였다. 이슬람권 사람들의 삶이 불편하던 답답해 보이던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엔 불편한 것들을 정작 본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감내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뀔 것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중립적은 지식 전달을 하는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은 피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2주 전의 내가 아니다. 이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막연한 다문화 수용주의,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다. 저자 아얀 히르시 알리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방관하면 안된다는 깊은 울림이 내 온몸을 떨리게 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부터 상반신까지 나온 사진을 책표지로 과감하게 실었는데 그녀의 굳건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책 제목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기까지 했다. 그녀를 호시탐탐노리는 이슬람세력들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표지이다. 지금의 그녀 처지를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얀 히르시 알리(이하 아얀)은 소말리아 태생의 비교적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의 여성으로서 40여년 생의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이야기를 600페이지 넘게 해주고 있다. 우리가 정말 접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과 이슬람교의 실생활을 너무도 벌거벗기 듯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읽는 내내 불편함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렇게 두꺼운 책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단자’이다. 더 정확히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쳐 죽어야할 ‘배교자’1)이다. 30년 넘게 알라신에 매인(이런 표현이 절로 나온다) 삶을 살아 온 그녀가 어느 날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거기까지 그녀가 달려온 인생은 역전드라마다. 어렸을 때부터 이슬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지만 해답은 찾지 못했다. 질문을 했다간 꾸란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기에 언제부턴가 금기의 질문사항은 머리 한 켠에 꼭꼭 숨겨 저장해두고 함부로 꺼내지 않게 된다. 대신 오히려 더 알라를 찾게 되고 매달리며 꾸란에 복종하려고 달려든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의문은 더 커져만 갔다.
아얀이 이슬람교의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융통성 없이 꾸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꾸란이 쓰여진 시대는 마호메트가 죽은 후 150년이 지나서 쓰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만들어진 문구 그대로 현대에도 적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사회와 모순이 많았다. 그 중 여성 억압적인 내용들에 그녀는 가장 분노하며 나중 이슬람 사회를 빠져나와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면서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을 가장 많이 한다. 이슬람 자체를 들여다보기를 바라며 이슬람에 정면 도전한다. 어린 소녀에게 가해지는 할례, 혼외 임신을 하면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고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하며 여자 혼자 외출할 수 없고 되도록 여자의 몸은 가려야 안전하며 얼굴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해야하는 등, 도대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이슬람교도들이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도 막 결혼한 남편에게 가는 길에 도망쳐 나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슬람교를 단순히 하나의 종교로, 하나의 문화로 바라만 보고 방치할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이 사회가 귀 기울이기를 바랐다. 그녀는 베일에 싸인 이슬람의 행태를 여성의 눈으로 철저히 까발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네덜란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적 활동의 영역까지 넓히게 된다. 영화 감독 테오의 제안으로 이슬람 여성을 그린 <복종>이 제작되어 발표되었으나 그 이 후 그녀와 테오는 무수한 살해 협박과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테오의 비참한 죽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네덜란드 경호원의 호위 속에서 사생활의 노출을 최대한 줄이며 한동안 지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경호의 방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만 어차피 이슬람의 변화를 한꺼번에 이루어 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자신이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이슬람에 변화의 물꼬가 트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 용기를 가세하여 이 책까지 출판하게 된 것이다.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화자가 ‘나’인 소설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그녀의 인생이 썩어 들어가는 헌 줄을 버리고 혼자서도 굳건히, 당당히 설 수 있는 새(新) 줄로 갈아타자 그녀는 이제 진정한 개인 주체로서의 ‘나’, 아얀 히르시 알리로 태어난다. 그것은 네덜란드 시민권을 획득하고 머리 한 켠에 꼭꼭 싸서 저장해두었던 금기의 질문들을 쏟아내면서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슬람에 대한 수업을 하면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아이들 과 “종교분쟁”을 주제로 모둠수업을 진행하였는데 6가지 종교분쟁 중 5개의 주제가 이슬람교와 타종교 간의 충돌이었다. 그때 아이들에게 ‘역시 테러는 이슬람교다’하는 명제가 더 각인되는 것 같아 이슬람교에 미안해진 내가 곁들인 설명이었었다. 오늘날 이슬람이 많이 비판받고 있고 테러와 함께 떠올려지는 종교이지만 원래는 평화와 평등을 상징하는 종교라고. 단지 오늘 날에 맞게 재해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현대 이념인 민주주의에 맞추어 재적응하지 못해서인 것 같다고. 민주주의에서 지향하는 가치와 이슬람에서 요구하는 생활양식이 충돌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 에둘러서 아이들에게 설명하며 약간의 사견을 달아 수업을 마무리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 이슬람교의 현실이과 사실이니까. 비록 오사마 빈 라덴이 먼저 떠오르는 폭력적인 종교라고 이미지가 박혀있지만 그것을 내가 이슬람교를 보호한답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얀이 이야기 하는 이슬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이것이 이슬람 전체로 일반화해서는 안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되면 그 생각은 바뀌리라. 그 누구보다 이슬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 온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에 제 3자에 불과한 우리가 감히 그런 평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지금 그녀는 네덜란드를 떠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더 넓은 세상, 자신이 네덜란드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세상이 미국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떠나왔다. 조금이라도 이슬람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나름의 고심이 많다. 시대에 맞게 영화, 책, 방송 등을 통해 이슬람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러한 그녀의 의지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로서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까지 매우 솔직하게 모두 써놓았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삶을 담보로 이슬람의 본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건투를 빌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슬람교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 현실적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더 해줄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이 책을 읽게 해 준 알마 출판사에게 감사드린다. 금기의 주제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당긴 아얀에게도 감사드린다. 너무도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읽는 내내 ‘이렇게 문장을 잘 정리하다니’라는 감탄을 쏟게 한 번역자에게도 감사드린다. 마치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것 같지만 진심을 전하고 싶다.
1) 이슬람교에서는 배교자와 불신자는 상종도 못할 종으로 분류하고 특히 배교자는 죽여도 괜찮다고 말한다.
☆★옥의 티>>>오 타 발 견 ★☆
(1) 228p 밑에서 8번째 줄 : 살 수가 없없다 ---> 살 수가 없었다
(2) 517p 위에서 7번째 줄 : 암상 ---> 암살
오타만 아니었으면 편집/구성도 별 5개 줬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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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을 보면서> 까만 피부와 까만 색이 먼저 들어옴은 강인한 인상때문이었는지, 까만색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단자'라는 제목때문이었나. 이슬람 여성에 관하여 라는 내용때문이었나 보다. 방대한 부피(624페이지)도 한몫했지 싶다. 두께있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몹시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댓글 서평단 당첨도서이다. 알마출판사와 첫 인연이다.
<이 저자는> 저자소개---발췌하다 아얀 히르시 알리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이슬람교도로 교육받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프리카(소말리아, 케냐, 에티오피아)에서 보낸 히르시 알리는 1992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먼 사촌과의 강요된 결혼을 피해 난민 신분으로 네덜란드에 왔다.
그곳 홀란트에서 아얀은 임신중절수술센터와 매맞는여성을위한쉼터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네덜란드 노동당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네덜란드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9.11사태를 계기로 이슬람을 떠났으며, 지금은 유럽 내 이슬람 여성들의 여성 할례와 가족들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권리 쟁취, 서구 사회의 안전확보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책내용 맛보기> 책소개---발췌하다 아얀 히르시 알리가 회고록 『이단자』를 통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들려준다. 소말리아 내전을 피해 난민이 된 끔찍한 삶과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에티오피아의 이슬람 전통 속에서 교육받았던 유년 시절, 난민 신분으로 네덜란드로 가서 지성에 눈뜨고 활동가로 거듭난 일을 비롯해 네덜란드 하원의원이라는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행보를 솔직하고 담대하게 기술해나간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 유린 현장을 고발한다. 그는 겨우 다섯 살에 외할머니의 강압으로 여성 할례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소말리아에서도 어린 소녀들이 할례를 받는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할례로 인해 사망하거나, 살아남더라도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거나 평생동안 고통 받는다.
저자는 할례처럼 문화적 특수성에 기인한 악습과 폐단을 고발한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에 관한 영화 〈복종〉을 테오 반 고흐와 함께 만들었다. 이후 테오 반 고흐는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히르시 알리는 협박과 무장경호 속에서 살고 있다. 히르시 알리는 『이단자』에서 날카로운 시선과 정확하면서도 때로는 모순된 문장으로 자신이 가졌던 신념, 강철같이 굳은 의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평등과 싸우겠다는 결의의 과정을 되새긴다. 보수적인 이슬람과 극우 정치인들에게는 ‘악마’라는 낙인이 찍혔고, 가족과 가문으로부터 쫓겨난 알리는 여전히 위협에 시달리고 있지만 침묵하기를 거부한다.
<책읽은 소감> 내가 이슬람 문화에 대해 알게 된 건 와리스 디리의 <사막의 꽃>을 만나고였다. 할례라는 의식을 처음 알게 되었을때 경악 그 자체였으며 아직도 지구 한 켠에서 이런 삶을 사는 여성들이 있음에 가슴 아팠고 상대적 행복감을 조금은 느꼈었다. 그후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접하며 한층 더 알아졌다. [이단자]는 회고록이었다. 담담히, 지극히 사실적인 토대 위에 기술하였음을 밝힌다. 그녀가 태생적으로 갖힌 세상에서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긴 고통의 여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다. 그건 너무나 큰 공포요 절망감이기도 했다. 처절하게 깨달은 삶이기에 그 기쁨은 더 컸고 자신안에서만 국한되는 기회는 과감히 버렸다.
나는 이 책을 대하며 이슬람 여성들이 왜 저항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걸까?를 한참 생각했다. 그건 아얀과 함께 고민하였다. 아울러 북한의 주민들과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다를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폐쇄적으로 갇힌 공간에서의 삶은 경직된 사고와 한정된 공간에서의 삶밖엔 허용되지 않으니 모든건 그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통제하기가 쉽다는 것. 알라의 뜻 안에서 꾸란의 지침대로만 행하여야만 하는 이슬람 문화는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편리한 지침서였다.
수많은 가르침이 오로지 여자는 복종하여야 하는 대상일뿐더러 순결한 자체를 원하는 대상으로 할례의식이 필요하고, 그 순결함을 깰 수 있는 대상은 남자뿐이다. 대등한 위치가 되어야 부당함을 주장할 수 있는데 애당초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오랜 관습 대대로의 전통은 여자는 오로지 남자의 부속품일 뿐이다. 필요하면 둘이건 셋이건 새로이 맞아들일 수 있는 여자. 그 여자는 질투하면 안되고...가문을 중시하기에 근친상간이 당연히 가능한 곳. 가문을 중시하기에 연락망이 닿아서 어딜가든 가문사람들이 보살펴 주고 아울러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곳. 태생적으로 그런 환경과 조건에서 태어나 오로지 그렇게 습관화되고 생활화되니 '저항'이란 단어는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이다.
새장 안의 새는 새장 안이 세상이라고 여기며 산다. 그 안을 벗어난다는 건 죽음일 뿐이다.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이라야만 베필이 될 수 있고 그건 좋은 가문이라야만 가능하다. 나이차이가 아주 많아도 상관없으며, 몇번 째 부인인지는 사치다. 그외의 혼외정사나 연애결혼, 강간을 당해서 아이를 출산해도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된다. 가문에 누가 되면 언제든 명예로운 죽임을 당한다. 가문에서 내쳐진 여자는 창녀나 다름없고 그렇게 삶을 마감해야한다.
『나는 이슬람이 정신을 가두는 새장과 같다고 대답했다. 처음 새장 문을 열면 안에 있던 새는 나오지 않는다. 갇힌 상태가 내면화된 새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처음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차음 시간이 흐르면 새장 안의 새는 밖으로 나가게 되고 한번 밖으로 나간 새는 문을 열어놓아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507 페이지
난민출신 하원의원이 되어 아얀 히르시 마간이 아닌 아얀 히르시 알리로서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실상을 알린다. 서구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소말리아 여성들의 삶이 바뀌길 염원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알지만 자신이 새장 안의 새였다가 맛본 새장 밖 세상을 알게함에 주저함없이 나선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경호원들의 보호아래 수도없이 거처를 옮기는 삶을 영위한다. 악몽을 꾸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살해위협에 맞선다. 그럼에도 신념은 굽힐 수가 없다.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오해하고 있다. 꾸란에는 매질같은 처벌이 명문화되어 있다. 꾸란은 학대가 적법한 행위라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랍게 여기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공동체의 비난을 받는 일은 더더욱 없다. 비이슬람 문화권에 사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는 생각을 바꿔놓고 싶었다.』---546페이지
『이슬람에서 신과 개인의 관계는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관계, 즉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알라에 대한 경배란 알라의 규율에 철저히 복종하고 꾸란을 통해 알라가 금지하고 있는 사고나 행동을 피하는 것이다. 이슬람을 근대화하고 현대적 이상에 맞게 적응시키려면 알라의 규율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알라와 대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알라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알라와 동등해지려고 하는 행위로 치부해 오만한 행동이라고 결론지었다 』-----555페이지
아직도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렇지만 아얀 히르시 알리는 멈추지 않을걸 안다. 자신의 일신상만을 위한 투쟁이자 연설이 아닌 자신의 삶 그 자체가 산증인이기에 더많은 소말리아 여성들이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길 바란다. 그런 염원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여질지언정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가족들과도 단절된 삶이 되었고 너무큰 고통이지만 어쩔 수 없다. 비합리적인 알라를 경배하며 더이상 지옥불에 떨어져 죽는다는 주문은 통하지 않음을 안다. 태어나서부터 온갖 하지 말아야할 것들은 다 여자에게만 해당되고, 그걸 어길시 늘 지옥불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목을 옥죄는 칼날이었다. 어떤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해놓고는 두려움에 떨어본 아얀은 이젠 허상이었음을 깨달았기에 도도히 외친다. 피터지는 절규를 한다. 큰댐이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듯, 작은 외침이 나아가 큰 변화를 가져오기를 너무나 갈망한다. 그럼에도 알라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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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창에 ‘소말리아’라고 적은 뒤 엔터키를 눌렀다. 내가 갖고 있는 소말리아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무시무시한 소말리아 해적과 몇 년 전 〈사막의 꽃〉을 읽으면서 알게 된 종교와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고통 받는 여성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전으로 어지러운 국가라는 사실도 소말리아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하고 모가디슈가 수도이며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 소말리아는 그렇게 위험하고 무질서한 나라라는 인상이 깊게 각인되었다. 《이단자 아얀 히르시 알리(2010.10.7. 알마)》는 「타임」이 2005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한 정치인 ‘아얀 히르시 알리’의 자서전이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케냐, 에티오피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도로 성장한 히르시 알리는 먼 사촌과의 강제 결혼을 피해 난민 신분으로 네덜란드로 건너온다. 처음 히르시 알리는 독일, 네덜란드에서 직접 체험한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인 이슬람과의 괴리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과 가문을 위해 자신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한다. 학교에서 정치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정계에 입문해서 네덜란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9.11 사태 이후 이슬람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소말리아 사람들의 편협함과 이슬람의 이중성, 오만함을 고발한다.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을 다룬 단편독립영화 〔복종〕을 만든 후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는 이슬람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히르시 알리 역시 살해협박에 시달리게 된다. 히르시 알리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녀는 이슬람교도들의 협박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조국이며 정신적 뿌리인 소말리아와 이슬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슬람 여성을 억압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리고 문화적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다. 정의롭고 용감하다. 이슬람 사회의 오랜 악습인 여성 인권 유린 문제를 고발하는 책과의 만남은 유쾌하지 않다. 같은 여성으로 그들의 아픔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스러운 현실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신념을 가진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고 자랑스럽다. 털어놓기 힘들었을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히르시 알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계몽과 개혁의 중심에서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가고자하는 길을 계속 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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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국적은 선택할 수 있다. 하여 원하는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원정 출산을 떠나는 이도 많다.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조국을 떠나 이방인이 되고자 타국을 선택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민이나 망명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단자란 꼬리표가 붙은 <이단자, 아얀 히르시 알리>의 저자 아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가문과 가족을 떠나야 하는 절박한 사정은 무엇일까.
‘이 책은 내 삶의 기록이다. 내가 목격하고 경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고 내가 지금의 나로 살게 된 사연에 대한 기록이다.’ p. 9
아얀 히르시 알리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내전으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에디오피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해 난민 자격으로 네덜란드로 망명해 하원의원까지 지낸 여성이다. 화려하고 독특한 이력을 지닌 여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이얀이 선택한 삶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게 된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여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기에 아얀이 경험한 것들을 그저 읽어내는 것뿐인데도 힘이 들었다. 같은 여자여서 더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할례를 시작으로 모든 남성들에게 복종해야 했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으니 성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못하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슬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할례는 정말 충격적이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문화와 풍습이라는 이유로 여자들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인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슬람을 믿고 꾸란의 실천만 내세울 뿐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이슬람을 주입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공권력은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았고 폭동과 혼란만 이어졌다.
‘모가디슈의 경찰국가는 식량을 배급하면서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고 폭력을 동원해 그들을 억압하고 복종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법으로 자국민을 반쯤은 동물 취급했다. 국민의 권리나 개인의 의지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여자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피난처가 필요할 때 서로 도와주는 가문 중심의 옛날식 소말리아 통치 체계는 의혹, 음모, 복수로 얼룩져 무너지기 쉬웠다.’ p.105~106
‘나는 소말리아 여자였다. 소말리아 여자의 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가족의 주인, 그러니까 아빠나 삼촌들이 소유했다. 결혼할 때까지 처녀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은 절대 진리였다.’ p. 127
아얀은 가문에서 정해준 사촌과 결혼을 피하기 위해 난민 신분으로 네널란드로 떠난다. 네덜란드에서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었고 경찰이나 정부는 친절했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소말리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고 배우고 싶은 게 많아졌다.
9 ·11 테러는 아얀에게 이슬람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세상에 진짜 이슬람을 알려야 했다. 얼마나 잔혹한 종교인지, 이슬람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냈다. 노동당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글과 강연으로 알리고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이슬람 여성들의 안전과 인권을 위해 일했다.
아얀은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와 함께 이슬람 여인을 다룬 단편독립영화<복종>이라는 영화를 찍는다.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얀은 실감하지 못했다. 소말리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네덜란드이지 않은가. 누가 자신을 위협하고 협박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테오는 살해당하고 어디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아얀은 거처를 옮기고 미국으로 도피한다.
2005년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아얀, 그녀의 삶에는 차별 그 이상의 차별이 있었고 고통 그 이상의 참혹함이 있었다. 아얀의 기록을 통해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만날 수 있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통해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과정과 이슬람 종교에 대한 사고 변화도 알 수 있다. 이슬람형제단의 열풍으로 젊은 사람들이 이슬람교에 대해 토론하고 좀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책을 통해 정착된 관습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확인한다.
한 권의 책으로 그녀의 삶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 아얀의 노력으로 이슬람 여성 인권이 얼마만큼 보호받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그들을 위해 반드시 나서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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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에 따른 관습에 의하거나 혹은 법률이나 규칙으로 정한 것이 극히 불합리 하여 일반 대다수의 인권을 억압하거나 불이익을 초래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이런 근거로 비윤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가 아무런 제재 없이 버젓이 자행되는 현실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감수하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그 누구라도 이를 기꺼이 수긍하며 자신을 맡기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조선 왕조가 몰락하고 전제정치의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엄연한 계급제도가 존재하여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여하나 의지에 상관없이 인권의 침해는 물론 신분제한이라는 어두운 굴레가 존재해있어 인간은 어떤 특별한 근거나 사유 없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오늘날의 인권의 시각에 비추어 크게 벗어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정의와 개개인의 인권 평등이 우선시 되는 오늘날의 시대에 아직까지도 일부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념이라는 이유로 혹은 오랜 관습에서 이어져 온 하나의 암묵적 약속이라는 것으로 평생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구태의연한 행태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있음을 볼 때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국가든 단체든 그것이 공공적인 이익이나 보편적 타당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 강제하거나 강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한번 쯤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일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강요된 종교적 가르침과 부모나 남편에 의해 일생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구속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불의에 맞서 과감하게 떨쳐 일어선 한 여성의 회고록을 담은 것으로, 아직까지도 어두운 그늘에 가려 모진 멸시와 인권을 유린당하는 많은 여성들이 존재 하고 있다는 불합리한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책은 아닌가 싶어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아얀 히르시 알리는 어려서부터 가정폭력과 가부장적이고도 남녀 차별적인 전통적 악습에 억눌려 살아오다가, 어느 날 낮선 사촌과의 강제적인 결혼을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난민 자격으로 홀로 정착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나라에서는 알 수 없었던 서구의 합리화된 여러 방식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삶이 잘못 되어 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여권 신장가로서 정치적인 행로를 걷게 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나라를 부정하고 이슬람의 정신을 훼손시킨다는 일부 이슬람권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목숨을 보장 받지 못하는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게 되지만, 결코 이에 굴하지 않고 할례를 통한 육체적 고통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남녀 간의 불평등 그리고 전통적 악습에 핍박 받는 수많은 이슬람 여성들의 여권 신장을 위해 오늘도 험난한 길을 홀로 걸어가며 외로운 투쟁 하고 있다. 사실 이슬람 여성들의 차별적인 불평등 문제와 그리고 비윤리적인 종교적 관행들은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왔었다. 하지만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도 국가적 간섭 또는 종교 탄압이라는 논리에 맞물려 현재까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마저 시원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 할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 생활에 비추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많은 여성들을 위해 그녀의 굳은 신념에 의한 그녀의 외로운 투쟁이 결코 허물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적 특수성에 의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문화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나쁘다 혹은 잘못 되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객관적 논리에 어긋나거나 이를 넘어서 한 개인의 미래까지를 심히 구속하게 된다면 이는 분명 시정 되어야 하고 바람직한 일로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도 자신의 신념에 따른 자발적인 것이어야지 국가나 가족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거나 강제되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잘못 된 것이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또한 생각해 볼 것은 자신과 관여된 일이 아니라 해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도 어찌 보면 도덕적 양심을 거스르는 일종의 죄악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는 일반인들이 상상 할 수 없는 가족들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폭력은 물론 목숨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실상들이 낱낱이 고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제껏 지켜왔던 관습과 종교의 이름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 되어온 그러한 행위에 대해 묵인 한다는 것은 이를 인정해도 좋다는 잠재적 동의와도 같은 것이기에 어떤 형태든 올바른 해법을 찾는데 앞으로도 많은 노력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슬람 여성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 하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있기를 바라며 그녀가 바라는 작은 소망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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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청 댓글에서 비슷하게나마 이 책의 무게를 어림짐작했지만 그것은 턱없이 모자란 지레짐작이었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한 마디로 경이로운 이야기이다. 한 개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끔찍한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표출된 신앙과 신념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결코 한 개인의 이야기로 그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작게는 한 사회의, 크게는 전인류가 고개숙여 숙고해보아야할 필수과제가 되어야할 내용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척박한 땅 아프리카 한 구석의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터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오며, 그 중에서 더욱 차별 받는 어린이와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 온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이며, 이 책 전체에 걸쳐 주인공이 반발하며 키워 온 불합리하고 잔인한 꾸란에 대한 저항 정신의 근원을 캐어내는 이야기이다. 아프리카의 빈곤한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이 있을 자리는, 어릴 때는 어른들의 힘에 강제로 눌린 채 마취도 없이 성기를 도려내는 할례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던 낡은 침대위였고, 좀 더 커서 소녀가 되면 알지도 못하는 먼 친척의 나이 많은 남자와 강제로 결혼을 하여야 하는 부조리한 사회의 한쪽 조그마한 구석이었다. 또한 이들 역시 남자들과 똑같이 교리에 따라야 하고 알라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도록 강요받으면서도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불평등한 현실에 처해 있고, 이들 역시 신실한 이슬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알라의 가르침을 기록한 꾸란의 어느 귀퉁이에도 여성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구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얀 히르시 알리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내전을 피해서 케냐로 넘어갔고, 반정부활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생활하였지만, 주로 생활을 많이 한 곳은 케냐에서였다. 소말리아보다 다소 살기가 나았던 케냐는 이슬람국가가 아니라 기독교 국가였다. 주변 아프리카의 이슬람국가들보다 경직성이 덜 하였던 케냐에서 학교에 다니며 글을 익히고 서구 작가와 사상가들의 작품을 읽게 되면서 이성(理性)에 눈을 뜨게 됨으로써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꾸란 속의 불합리성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궁극에는 이슬람에서의 탈출을 생각하게 되고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게 된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의 강제결혼이 탈출을 실천에 옮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 계기 역시 자신이 생각해온 이슬람 전통의 불합리적 관행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의 장은 마침내 이슬람의 세계에서 벗어나 살게 된 네덜란드에서의 삶에 관한 내용이며, 여기서 자아를 찾게 되고 진정한 이성에 눈을 뜨고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실현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망명신청자센터 직원들의 친절함에 어리둥절해 한다. 차별과 멸시만 받아오던 주인공 아얀이 맨 처음 겪게 된 다른 세상에서 기대한 것은 최소한 이런 뜻밖의 친절함과 관심은 아니었다. 따뜻한 친절과 관심. 주인공으로 하여금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살게한 것은 바로 이 따뜻한 배려의 힘이었다. 이것은 주인공의 행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기에도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종교적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극대화한 나라이며, 인종적 편견 등 그 어떠한 차별도 가장 적은 나라이다.
난민지위를 인정 받은 주인공은 집을 얻고 공부를 하며 마침내 네덜란드의 시민권을 얻게 되고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주인공의 열망이다. 자신이 살던 빈곤하고 참담한 아프리카와는 너무나 다르게 개인적 풍요과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이 세계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을까하는 이성적 열망이 솟아 오른 탓이다. 철저하게 신을 의지하며 신에게 오로지 복종만 하는 이슬람의 세계에서 과연 신은 그들을 왜 보호하지 못한 채 고통만 안겨주는 것이며, 종교로부터 자유롭고 심지어는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상존하는 이 서방세계는 어찌하여 이런 자유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고 유럽의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며 지식과 이성의 힘과 가치를 깨닫고, 신앙보다는 이성이 인간의 참된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신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네덜란드 내 이슬람 이민자들의 폐쇄된 공동체사회에서, 네덜란드의 전통적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한 무관심으로 인해 이슬람 여성들이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에서와 똑같은 차별과 멸시 그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를 선택한다. 정치가가 되어 이러한 피해를 받는 이슬람 여성들을 구원하고, 네덜란드의 자유주의 정신의 폐해를 바로잡아 네덜란드 내 이슬람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잔혹행위를 근절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진솔한 주인공의 글이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드디어 정치에 입문한다. 가난한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주인공이 불과 몇 년만에 네덜란드의 정치가가 되었다. 이슬람의 부조리한 전통 속에 자란 소녀가 이슬람 세계를 탈출하여 자유주의 나라 네덜란드에 와서 이슬람의 부조리를 고발할 사명의식을 지닌 채 네덜란드의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TV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는 네덜란드 내의 이스람 공동사회의 공분을 자아냈고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까지도 서슴치 않는 격분을 불러 일으켰다. 안전을 위해 미국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등 이슬람교도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이러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적 의지를 보여주며 끝내는 네덜란드 내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잔혹한 이슬람 전통에 대하여 네덜란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슬람 교리인 꾸란의 근원적 불합리함과 부조리에 따른 이슬람 세계의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완전히 근절하기는 어렵겠지만 교육과 계몽을 통해 언젠가는 뿌리 뽑을 수 있음을 주인공은 확신하고 있다. 이 책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전통적 아프리카 신앙과 혼합되어 나타난 정체성 없는 관행들이 맹목적인 이슬람교도들에게 얼마나 큰 폭력성과 잔혹성을 심어주며 이러한 폭력에 의해서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이 야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외부세계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 이슬람 세계의 폭력성이 결코 그들의 교리가 아니며 이슬람교는 평화와 자비의 종교라고 인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제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 출신인 주인공은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는 실제로 불합리한 조항과 여성에 대한 차별과 멸시에 관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오랜 학대와 차별과 멸시에 순종해버린 아프리카 이슬람 여성들이 이제는 새장 밖으로 날아가 그들의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 주인공이 그 새장 문을 열었다. 천시과 고통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슬람 여성들이 처음에는 열려 있는 새장문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하겠지만 교육과 계몽을 통해 차츰 새장 밖으로 나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찾아 날아갈 것임을 주인공은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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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을 읽자마자 <복종>이라는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이 책 <이단자 아얀 히르시 알리>는 아얀 히르시 알리의 자서전이다.
이 책은 아얀 히르시 마간이라는 여성의 삶을 통해 그리고, 아얀 히르시 알리라는 같지만 다른 삶을 사는 여성을 통해 이슬람 여성들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같은 여성으로 이러한 책을 접할때마다 너무나 불편하고, 너무나 분노하고,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안쓰럽고, 너무나 안도감들며, 너무나 미안하다. 어른들 말씀에 아프면 소문을 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얀 히르시 알리의 건강과 죽은 <복종>의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