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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 제게 주었던 충격, 선(善)이 자신의 존재함을 위해 악(惡)의 부재(不在)를 용인하지 않는다란 설정을 --- 이 작품 「2084 : 세상의 종말」의 작가 부알렘 상살은, 완벽하게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악의 행사를 이제는 멈추게 해달라는 「예수복음」 속 악마의 간절한 청에도, 신께서 끝내 단호한 거부를 거두지 않으셨던 이유는 한 마디로, '악이 없어지면 선의 존재도 필요하지 않게되기 때문'이었었지요. 그리하여 어쨌든 신은 (악마와 더불어!) 명성과 존재를 이어가게 됩니다만, 이 작품 속의 신(神), 욜라1는 - 실제 주체는 욜라를 믿는 종교의 지도자들 - 정반대로 상대 (즉, 모든 사상)의 존재를 아예 허용하지 않음으로 자신이 선(善)임까지도 포기한, 그러나 그렇기에 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되어버려, 여타의 판단가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소설 속 지리적 배경인 아비스탄 제국은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3이며, 그 지배는 "우리는 욜라의 것이며, 우리는 아비4에게 순종해야 한다"(p46)라는 (일종의 당위적) 규율을 강제함으로, 민중들 마음 속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이내 그 믿음이 '순종'으로 이어지게 된5 '길러진 신자(信者)',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절대적 구속의 지배구조6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고픈, 자신만의 할 말이 있겠듯, 이같은 완벽한 통제에 대해, 아비스탄 제국의 지배자,
즉 성직자8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싶었을 꺼라, 결코 풍족하지 못한 아비스탄의 상황9하에서, 아비스탄의 민중들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들려줄 수 있는 말이라곤 여하하여도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10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노라고 항변하고 싶지 않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희망은 (여러분 다들 미루어 짐작 가능하겠듯) 웃기는 소리일 뿐이고, --- 1인칭과 2인칭만이 존재하도록 허용된, 3인칭은 아예 상상 속에조차 존재하지 못하며, 여기에 세뇌된 믿음11과, 그로부터 연유된 맹목적 무지12와 무기력한 안주(安住)13(혹은 포기(?))까지가 더해졌기에, '민중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란 그들의 항변은, 그들이 속으로 원하였던 바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올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 ·
그들의 항변이 터무니없다라는 것이, 작가의 전지적 시점을 통해 독자에게 말해지고 있듯이, 뭐 꼭 굳이 그런 전지적 시점의 도움까지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고 2017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정상적 사고(思考)의 소유자라면 스스로 깨쳐낼 수 있겠듯, --- 이런 형식의 종교적 지배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으며, 어디서 어떻게 그 믿음에의 균열이 시작되는가를, 작가 부알렘 상살은 주인공 아티에게 다음에서 처럼, 뭔가 '보리수 아래에서의 그것'을 떠올려주는 듯한 방식의 깨달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아티를 내리쳤던 깨달음의 궁극은, 그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너무도 허무한 것일 수도 있을14, 허나 가장 기본적이며, 그러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현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는 아니었다."(p166) 란 의문이었었지요. · · · "인간은 종교 없이 살 수 있으며, 성직자의 도움이 없이도 삶을 마감할 수 있다." (p145) 다분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기독교 신자인 제가 이런 문장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라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혼'나야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만,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가 없었던 아티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종교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닌, "아티가 마음 속으로 거부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었다." (p100) 또한 이 때의 '억압'이란 것이, 삶에 가해지는 개별적·단속(斷續)적 억압(이라기보단 일종의 '제약')의 수준을 뛰어 넘어,
이미 완벽하게 고착화 되어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란 제사장의 말들이 오히려 깨뜨려질 수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어버린 이런 정도의 억압이라면, 이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가 어떠한 종교의 신자(信者)인가하는 여부마저 가리지 않고도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말을 작가가 전하고 있다고, 심지어 --- "견제가 없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란 노명우 교수의 일갈15 속 '상식'의 자리를 '종교'가 대신한다 하여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라는 걸, 이 소설이 또한 보여주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혹은 더 좁게/다른 방향으로 보아, 이 억압의 주체를 '종교의 외투를 쓴 인간'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라면, 혹은 뭐, "신정국가, 종교적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p355)이란 역자의 단언처럼 굳이 현재의 이슬람권을 빗댄 소설이라 한정지어야겠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메시지16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암튼, --- 여기까지 뭐라 제가 지껄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내용일지라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있을/있다고 믿어지는 메시지의 내용이, 혹여 느껴지는 무거움이 여하히 당신에게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 · ·
(대개의 신문사 서평을 쓰는 방식과는 다르게) 아마도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본 듯한 이윤주 기자의 위 기사는, (그나마 '유익'과 '교훈'으로 포장된) '재미를 볼 수 있다'란 출판사를 위한 일종의 lip-service용 문구를 제외한다면17, 전적으로 솔직하게 쓰여진, '길고 지루한 독서를 감당하기 어렵다'란 핵심적 구절에서 보여지듯, 이건 저도 또한 이 작품을 읽어가며 가졌었었던, '이 덥디 더운 여름 날, 에어컨/선풍기/맥주 등의 부대적 지출과 더불어, 그야말로 황금같은 주말의 시간을 투자해, 굳이 내가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란 의문을 단 한 시도 지워내지 못한 채, 그러나 결국엔 다 읽어내고만 제가 그러했었듯, 뭔가 마음 속 억울함 같은 걸 담고 있는, 그런 감상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역자나, 심지어 출판사조차도 --- 이 소설을 번역하고 출간한 것이 영리의 추구라는 상업적 이유에서가 아닌, 어쩌면 '외국 문학상 수상작 번역/출간'이라는 하나의 reference 를 쌓기 위함만이 아니었을까,하는, 매우 대담한 추측까지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레 해보게도 됩니다. 뭐 그만큼, 담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과는 별개로, 읽어내기엔 완벽하게 재미 없는 소설이란 말이지요. 혹여, 저의 정신적·지적 수준 및 상태가 이 작품을 읽고 이해해내는 것에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신다해도 괜찮으며, 실제로도 그런거라 할지라도 별 달라지는 것 없이 부디, 이 작품을 읽느니, 다음의 소설들 모두 혹은 한두 권이라도 읽는 것이 최소한! 천번 만번 쯤은 더 낫다라는 저의 조언에 당신이 동의해 주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정신 건강과 아까운 시간 및 기타 등등등,을 요딴 소설 읽는 것에 낭비하지 않아주길, 당신과 아무런 혈연 관계도 아닌, 또한 당신과 그 어떠한 금전적 거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 바라(願)봅니다. ※ "밝지 않은 미래" (모두 강추!) : 「혹성탈출」, 「1984년」, 「어떤 소송」, 「백년법」,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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