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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家)는 사사로운 가(家)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
"명문가(家)는 사사로운 가(家)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 내용보기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웬만한 집은 3대 이상이 모여 살았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구성이 기본이었다. 그러다 산업화와 함께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대세가 되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가족구성이 변하여 핵가족시대가 되었다고 배웠지만 막상 결혼을 했을 때는 3대가 모여 살았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의 삶은 이
"명문가(家)는 사사로운 가(家)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 내용보기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웬만한 집은 3대 이상이 모여 살았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구성이 기본이었다. 그러다 산업화와 함께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대세가 되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가족구성이 변하여 핵가족시대가 되었다고 배웠지만 막상 결혼을 했을 때는 3대가 모여 살았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의 삶은 이런 핵가족마저도 무너지고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가족마저도 주류가 아닌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안이나, 가문(家門)이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는 아직도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관념이 유전자처럼 남아있다. 조상들의 공동제사인 시제에 참석하고 때가 되면 족보를 개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이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고, 아직도 우리는 유교의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비록 혼자 사는 것이 대세를 이룬다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 [조선시대 가문의 탄생]은 이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옹기처럼 박혀있는 집안 혹은 가문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 혈연적 유대를 강조하고 중요시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나, 지역 혹은 문화에 따라 그 형태는 달랐겠지만 말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권에서는 유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보듯 유교는 가()를 기본으로 했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는 가()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이는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 보듯 가()의 범위를 시간적으로 확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 역시 효의 대상이 가()에서 국가로 바뀐 것으로 보았고, 이는 가()의 범위를 공간적으로도 확대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가() 혹은 가문(家門)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고려시대 성씨제도가 일반화 되면서였다. 고려시대 정치사회적인 특징인 음서제와 과거제는 권세와 명망이 있는 문벌귀족들이 출현하고 세습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과 함께 음서제의 대폭 축소와 과거제의 철저한 시행은 세습적 성격의 귀족사회를 능력이 보다 중시되는 양반사회로 변모시켰다. 이는 조선시대에 명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를 이어 과거급제 자를 배출해야 함을 의미했다. 개인은 물론 가문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유력가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교문화에서의 가문(家門)은 혈연을 바탕으로 혈연이 계승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명망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하고, 또 그를 중심으로 후손들의 강한 계승의식이 뒷받침 되어야만 했다. 조선시대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는 종가가 중심이 되고, 가문의 역사인 족보를 편찬하고, 가훈과 가풍을 중요시 했던 이유가, 이것들이 모두 한 가문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가 이런 가문의 형성에 철학적, 종교적 배경이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가문(家門)이 있었다. 단지 권세만으로 이룬 가문도 많았지만, 멸사봉공의 정신아래 국가의 위난 때 살신성인한 가문, 문자향이나 예술혼이 깃든 가문,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앞장 선 가문도 있었다. 이들이 명문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가문내의 노력도 필요했지만, 향촌과 지역에서의 역할을 다해야 했으며, 다른 가문과의 연대도 중요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한 가()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명문가는 오로지 가() 중심적이지 않았으며, ()로부터 시작하되 항상 사사로운 가()를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

 

  현재에도 자칭,타칭 명문가들이 많다. 그들은 과연 금력이나 권력으로 가문(家門)을 일으켜 세우고 또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역과 향촌은 나 몰라라 하고 사사로운 가()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선의 명문가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k*****1 2016.11.16. 신고 공감 7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