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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유동성은 유연한 대응을 가능하다고 해석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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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단 <모두스 비벤디>는 <Modus Vivendi : Inferno e Utopia del Mondo Liquido>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 판의 제목을  번역한 것으로서 번역의 저본이 되었던 영어판 제목은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유동하는 시간: 불확실성 시대의 삶>이었다고 하니 책제목의 의미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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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단 <모두스 비벤디>는 <Modus Vivendi : Inferno e Utopia del Mondo Liquido>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 판의 제목을  번역한 것으로서 번역의 저본이 되었던 영어판 제목은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유동하는 시간: 불확실성 시대의 삶>이었다고 하니 책제목의 의미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낯설어 보이는 제목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라틴어인데, 영어로는 삶의 양식(mode of life)으로 번역된다고 하니 라틴어의 의미를 제대로 영어로 옮긴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받아든 책이 얇다는데서 뜻 모를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새겨가면서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사회적 형태가 근대에 이르러서 구성원들 간의 유대가 느슨해지기 시작해졌고, 현대에 들어서면서는 국가간의 거리가 좁아지고, 구성원들의 유대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졌을 때 공동체가 보호해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어 개인들의 불안과 공포가 증대되고 있고,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집단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신대륙 등 미지의 세계에 찾아들어 삶의 터전을 다시 가꿀 수 있었던 상황과는 달리,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들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의 한계 때문에 난민문제에 인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통박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난민이 발생하는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삶의 방식이 확산되면서 시장중심경제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을 잉여인간, 불필요한 사람, 심지어는 인간쓰레기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쏟아 넣을 배출구, 즉 ‘임자 없는 땅’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선진국 인력시장을 넘겨보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습니다. 저자는 그들이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실 지구상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은 아프리카, 동유럽 일부국가, 아시아 일부국가, 남미지역 등일 것 같습니다. 과거 캄보디아나 베트남 등지에서 전쟁이 끝난 직후에 보트피플이 대거 발생한 바 있습니다. 페르시아전쟁 때도 이라크에 거주하는 쿠루드인들이 터키 등 인접국가로 피난 한 적도 있습니다. 즉, 전쟁으로 피폐해지거나 국내에서 핍박을 받게 된 사람들이 난민이 된 사례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복잡한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던 유럽 국가들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종족 구성등과 같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지도 상의 위도나 경도로 국경을 그어버린 후유증으로 종족간의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난민이 발생하게 되고, 이들을 수용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인근국가에 난민수용소를 건설하는 정도의 국제적 대응이 있었음은 소위 선진국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난민 문제에 대하여 미온적 대응을 하였다고 하는 저자의 주장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체코로 탈출한 동독인들을 서독정부가 모두 수용한 사례가 있고, 에티오피아 내전을 피해 인접국가로 피난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이 공수하여 이주시킨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2006년판임에도 저자는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들과 이들을 북한에 되돌려보내고 있는 중국정부의 행태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사회가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를 신뢰할 것 같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사회는 이제 통제할 수도 없고 다시 붙잡아 복종하게 만들 희망이나 생각조차 품을 수 없는 세력들의 탐욕에 노출되어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즉 세계는 가진자들에 의하여 구분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시지역에 건설된 콘도나 아파트 작은 집단거주지역이 가진 자를 위하여 사회로부터 담장을 쌓아 격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사회적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며, ‘우리’는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일종의 정신적인 안정성을 약속해주기 때문에 아치와 더불어 사는데 요구되는 이해와 협상, 타협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줌으로써 함께 지내는 것을 더 감당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동일성의 공동체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세상에서 일상의 삶에 가득한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증서와 같은 매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유토피아는 실체가 아나톨 프랑스가 제시하는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거의 유토피아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벌거벗은 채 동굴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최초로 도시의 윤곽을 그려 낸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 더 나은 현실은 많은 꿈의 산물이다.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노력이다.”

하지만 매트 리들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인류가 동굴을 떠나게 된 것은 분업과 유통의 개념을 깨닫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서 한발 한발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과거 저개발국에 물질적인 지원을 쏟아붓는 식의 원조는 식량을 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즉,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사업이나 경제발전 모델은 이들 국가에 좋은 교과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동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제목에서 우리 몸에 있는 세포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과정에 생각났습니다. 세포의 표면에는 외부의 단백질과 결합하는 수용체가 있습니다만, 이들 수용체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 세포의 표면에 떠있기 때문에 단백질이 세포와 접촉하는 방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유동성을 불확실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y*****2 2010.11.14. 신고 공감 8 댓글 10
리뷰 총점 종이책
Liquid Modernity에 대한 접근 (모두스 비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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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된 느낌이다. 가로13cm, 세로18.7cm 작은 사이즈에 192쪽 (후기 빼고 175쪽) 밖에 안되는 책 하나를 잡고 거의 10여일을 끙끙거리고 있으니 나의 지적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이름은 지난 30년 동안 사회학과 현대철학의 키워드의 하나인 모더니티와 관련하여 기든스, 하비, 래쉬 등의 학자들과 함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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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된 느낌이다. 가로13cm, 세로18.7cm 작은 사이즈에 192쪽 (후기 빼고 175쪽) 밖에 안되는 책 하나를 잡고 거의 10여일을 끙끙거리고 있으니 나의 지적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이름은 지난 30년 동안 사회학과 현대철학의 키워드의 하나인 모더니티와 관련하여 기든스, 하비, 래쉬 등의 학자들과 함께 이름을 더날리고 있으니 별로 설명할 일도 없겠지만, 문맥의 연결이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짧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원서를 읽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될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모더니티를 역사나 철학적 개념으로 '근대성'이나 '현대성'이라고 사전적 번역을 할 수도 있겠지만, 책의 핵심인 'Liquid Modernity'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번역해 사용하다보니 포괄적 개념으로 넓게 봐야 할 'Liquid'와 'Modernity'의 의미가 의외로 좁은 관념으로 정형화 되고만다. 번역이 서투르다는 말이 아니라 바우만의 화려한 수사력을 한정된 사전적 의미로 파악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의 제목은 보통 전체의 내용을 아우르는 의미가 되는데 <모두스 비벤디 modus vivendi>의 뜻이 얼른 잡히지가 않는다. 이탈리아판 부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와 영어판 부제 '불확실성 시대의 삶'을 비교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이방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도시주민의 삶의 양식, 전지구적 엘리트들과 지역적 주민들이 불안하게 공존하면서 만들어 가는 삶의 양식, 난민과 도시민, 인간쓰레기가 뒤엉켜 만들어내는 삶의 양식 등 서로 갈등하는 이들 사이의 '일시적이고도 잠정적인' 공존을 모두스 비벤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80쪽의 '옮긴이 후기' 참조). 이것도 어렵다. 바우만이 바라보는 세계관이 우선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작금의 신자유주의와 인터넷으로 정보가 open된 시대에 글로벌 엘리트들에게는 유토피아같이 살만한 세상이겠지만, 나머지 우리같은 인간에게는 매일매일이 힘들고 때론 고통스러움만이 존재하는 지옥같은 삶이 이어진다. 이런 세상에서 잉여인간은 자칫 용어도 섬찟한 인간쓰레기(인간성을 무시한 너무 심한 표현같지만 현실을 직시한 단어다.)로 전락해 폐기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러하니 자연스레 우리시대 삶의 조건은 보수적 의미의 solid modernity(단단하고 안정적이고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며, 정치와 권력이 함께하는 고정적 모더니티)에서 진보적 의미의 liquid modernity(가볍고 불안정하고 통제가 불가능하며 국가초월적 권력으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유동적 모더니티)로 변화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은 무얼까? 바우만은 이 책에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스 비벤디'란 단어에는 '타협안'이란 의미가 숨어있음을 생각한다면 저자의 생각 한자락을 잡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않을까?

 

사실 책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데는 문장적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바우만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는 머리말에서 '과감히 불확실성의 온상 속으로' 뛰어들어 그 원인과 방해요인 및 도전의 걸림돌을 조명하고자 의도를 밝히며, 1장에서 '유동하는 근대의 삶과 그 공포'가 무엇인지를 조명한다. 그는 "열린 사회란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로 부정적 지구화(무역과자본, 감시와 정보, 폭력과 무기, 범죄와 테러. 그냥 글로벌화로 번역하는게 더 이해가 빠르다)가 강요하는 왜곡된 '개방성' 자체가 불의의 주요원인이며, 갈등과 폭력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개인주의의 등장과 인간적 유대의 소멸, 연대의 약화가 동전의 한 면이라면, 이 '부정적 지구화'가 다른 면을 차지함으로써 일반 대중은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공포감을 주는 대상에 대항하는 수단을 지구화 과정에서 모두 빼았겼다는 것이다(43쪽). 공포는 우리 시대의 열린 사회에 깃든 가장 사악한 괴물임은 틀림없다. 이런 공포를 부화시키고 키우는 것은 바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며 이는 어떻게 대응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도구를 찾아내야(만들어내야)만 한다. 


2장 '이동 중인 인류' 편은 흥미로운 관점을 발견한다.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49쪽)."며 자본주의는 자산탈취(Asset Stripping)를 통해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유지한다는 자본주의 운명 진단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은 필연적으로 자산을 탈취 당하고 쫒겨나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인간쓰레기(human waste)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데 이들에 대한 자연적 배출구가 마땅찮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앞선 국가에서는 글로벌 차원에서 해결을 모색하지만 "후발주자들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를 지역적 차원에서 해결(58쪽)"해야 한다. 자발적이든 강요된 것이든 후발주자들은 전지구적 압력에 굴복해 자본과 상품이 거침없이 유통되도록 영토를 개방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한채 '경제적 이주자'를 양산하기에 이르게된다. 하지만 기득권자들은 이런 아웃사이드의 유입에 위협을 느끼고 보호막을 치기에 이들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종점'에는 이르지 못한 채 경계의 문턱에서 난민으로 표류하게 되고 결국 '불행을 예고하는 사람'으로 취급 당하게 된다.

 

3장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공포 관리' 편은 우리의 공포에 얽힌 불안을 이야기 한다. "근대국가가 개발 목표로 내세우면서 끈질기게 추구한 '사회국가'의 핵심은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보호였다. 탈규제, 개인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보호막이 느슨해지자 일시적으로 사회에 재편성 되지못한 잉여 인구인 '위험계급'이 나타나는데, 실직을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 찍는 듯한 모습에선 우리의 현실이 디졸브(dissolve) 되어진다. 이들을 최하층 계급과 동일시하여 법을 준수하는 공동체에서 격리되어야 할 사람으로 간주하는 대목에선 몸이 오싹해진다.

 

4장 '생활공간의 분리'에서 오늘날 도시의 모습을 엿본다. 위험을 막아주던 피난처에서 도처에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위험의 주요 근원으로 변해가는 오늘의 도시. 이런 근대의 도시는 글로벌 권력들과 지역적인 '의미와 정체성'을 놓고 부딪히고 싸우면서 공존을 모색하는 무대나 전투장인 것이다. 불확실한 유동의 삶은 도시의 외지인에 대한 이질 공포증(mixophobia)으로 다양성과 차별성의 바다 한 가운데서 유사성과 동일성을 지향(140쪽)하는 분리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와 동시에 도시가 크고 이질적일수록 인프라의 매력으로 이질 애착증(mixophilia)을 유발하는 양면성이 도시의 본질임을 잘 알수가 있다. 즉 이질공포증이 절망적인 노력의 표현이라면 이질 애착증은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하겠다. "칸트가 말하는 인류의 보편적 통합의 필요조건인 가다머의 '지평의 융합'은 당연히 도시라는 무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148쪽)."는 말에 밑줄을 그어본다.

 

5장 '불확실성 시대의 유토피아'에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 다시 '돛을 올리는' 이유가 "앞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꿈의 유혹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는 말이 재미있다. 또한 근대 이전의 세계를 '사냥터지기', 근대의 세계관과 관행을 '정원사의 마음가짐', 오늘날은 '사냥꾼의 자세'로 풀이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전근대 사회는 '자연의 균형' 보존하는 것이 신념이었다면, 근대는 '정원사'처럼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해야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별없이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사냥꾼의 시대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당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사냥꾼 대열에서 추방되거나 사냥감으로 전락되어진다는데 있다. 즉, 과거의 유토피아는 요원하지만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목표였지만, 현대인의 꿈을 보면 '진보'는 개선의 결과를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을 이야기 하는 담론으로 변한 것 같다(164쪽). 오늘날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 다른 형태의 유토피아라면 이는 과거와는 달리 끝이 없는 기괴하고 낯선 유토피아가 된다. 물론 사냥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지옥에서 지내는 것처럼 느껴지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바우만은 이 책의 마지막에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이라며 지옥을 거부하고 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참 어렵다. 이 시대를 유동적인 불확실성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할까? 포스트모던의 또다른 개념인 유동적 모더니티를 좀 더 정리하여 나의 느낌을 적을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는데 너무 지쳤다. 그냥 바우만이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인용한 문장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쳐야겠다. 읽어낼 수만 있다면(중요하다) 참 괜찮은 사상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174쪽)."



e***i 2010.11.26. 신고 공감 7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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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가 낳은 공포의 실체와 ‘지평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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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 진리의 혼돈, 철썩처럼 믿었던 진실의 흔들림으로‘가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것이었다. 지구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마구 뒤섞인 문화와 가치의 충돌과 융합, 그리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과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 눈을 파는 순간 낙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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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 진리의 혼돈, 철썩처럼 믿었던 진실의 흔들림으로‘가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것이었다. 지구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마구 뒤섞인 문화와 가치의 충돌과 융합, 그리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과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 눈을 파는 순간 낙오하고 도태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파고(波高)는 경제 권력의 지구화를 촉진하고, 미처 지구화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지구화된 세계 권력의 방호막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기탁하고 의지할 가치의 기준도 상실한 채, 더구나 보호막이 걷힌 벌판에서 스스로 야수에 대적하고 생존해야 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지닌 이 저술『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이와같은 바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공포, 불확실성의 원인과 이의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기획이다.

저자는 지금의 지구화는‘부정적으로 지구화된 세상’, 즉 인류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파편화시키며, 집단적 방어장치들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개인을 무력화하는, 그래서 두려움의 공포로 자신의 안전에 전전긍긍하는 문제만을 노정시키는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가 지향하는 약육강식의 시장경제 압력은 규제의 철폐를 강요하고, 약자들의 집단적 연대를 해체하며, 따라서 개인을 보호하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점점 와해시킨다. 이로인해 의지할, 보호할 안전지대와 장치들을 잃어버린 개인들은 스스로의 안전벽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국 국가나 집단의 안전보호 책임이‘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근대성의 치명적 결과로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쓰레기(Wasted Human)' 를 처리할 배출구의 차단과 공급 불능성의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지구화가 만들어낸 인간적 유대의 소멸, 연대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로 잉여인구를 급격하게 양산하고 있으나, 역으로 전지구화된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배출지, 배출구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버려 이미 지구의 관리 능력을 초과하고 있음에도 해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하려는 사이비 해결방책이란 것으로 난민수용소와 같은 격리공간으로 대처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근원적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밖에 인종청소와 같은 부족간 전쟁과 학살, 상호조직의 살해 등으로 잉여 인구를 흡수하는 참혹한 해결이 그나마 현실로 자행되고 있을 뿐인 것이 오늘 인류의 실상이다. 즉 지구화된 문제를 이러한 모순적인 지역의 해결이 아니라 지구화의 문제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선두주자들인 선진국, 지역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권력이 후발주자, 약자를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닌 공존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불가결의 대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잉여인력, 불필요해진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쓰레기 인간의 판정 기준은 갈수록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오늘의 정상이 내일의 비정상이 되는 잠재적인 인간-쓰레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가 될 개연성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는‘일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게임 참가들을 속박하는 규칙을 만드는‘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지 않으면, 이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일신의 권리마저 확보키 어려운 것이기에 일신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는 필연적으로 공히 확보되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이와 더불어 생존의 유지를 위한 실천적 권리인‘사회적 권리’가 없이는 정치적 권리 또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 세 개의 권리는 시민들을 위한 필수적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급하지만 이쯤에서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를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예전의 성벽과 해자와 작은 탑, 총안(銃眼)을 기술적으로 갱신해 놓은”것의 다름 아닌 현대의 구분하고, 격리하며 배제하는 도시 공간의 모습은 곧 지금까지의 한계에 봉착한 쓰레기 처리와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짜증나고 혼란스러우며 비위에 거슬리는 낯 선 감정은 특권층에게 분리주의적 충동을 자극하고, 함께 지내는 것의 위험을 단절하기 위해 선을 긋고 자신들만의 유배지, 섬을 지향하게 하지만, 이는 생활세계에서 두 범주의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단절하게하고 오히려 적대감으로 광범위한 긴장관계를 강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는 공간 분리는 거주자들의 차이에 대한 내성을 오히려 약화시켜 더욱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근대의 관리하고 보호하는‘정원사’의 마음가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자루를 채워줄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일인‘사냥꾼’의 자세에 밀려나, 모든 사람들이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결코 이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소통이 단절되고 입구를 차단하며 서로를 분리하는 것, 사냥꾼으로 영원히 대열을 지켜야 하는 것, 점점 부정적인 지구화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소비자향의 시장경제 사회가 유토피아인가? 사람들은 이제 유토피아는 몰락했고,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예전의 미래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예상만큼 좋지 않은 현재의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는 것, 즉 실패한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기에 급급한 것,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의 뒤를 쫒기에 바쁜 것이라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로 지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므로 파도의 흐름을 타라! 가라앉기 싫은가? 그러면 파도를 타라!” 이 무참한 사냥꾼의 논리가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지역의 그 참혹한 사이비 해결책에, 적대감으로 부글거리는 그 위험천만한 공포와 죽음의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슬아슬한 잠정적 협정의 세상에서 개인의 확고한 안전과 자유를 확보키 위해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향한 외침은 더욱 더 크게 외치고 유대와 결속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온통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이미 무력한 사회로 접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바우만’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유동하는 오늘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문제와 지옥 같은 오늘을 극복하기 위한 번뜩이는 통찰과 담론의 세상이 유쾌한 지적 성찰로 잘 빚어진 노작이다.

리뷰 총점 종이책
바라 마지 않는 유토피아는 있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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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어려운 말>을 쓰면 싫다. 흔히 <문자를 쓴다>는 말로 표현하며 현학적인 풀이를 즐겨쓴 책이 싫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자를 해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비유적인 표현>이 정확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명확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목부터 살펴보면, <모두스 비벤디>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뜻하는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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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어려운 말>을 쓰면 싫다. 흔히 <문자를 쓴다>는 말로 표현하며 현학적인 풀이를 즐겨쓴 책이 싫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자를 해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비유적인 표현>이 정확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명확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목부터 살펴보면, <모두스 비벤디>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뜻하는 라틴어로 영어식으로 풀어내면 <mode of life(삶의 양식)>으로 풀어낼 수 있단다. '협약', '삶의 양식'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알쏭달쏭하다. 부제인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는 이 책의 이탈리아판 제목에서 따왔다는데, 이탈리아에서도 참 어려웠던 모양이다.

 

  짧은 글보다는 긴 글이 풀어내기 더 쉬운 법이다.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이라는 말과 <유토피아>라는 말을 비교대조 해본다. 먼저 '유동하는 세계'란 세계가 움직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땅이 움직인다는 것보다는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민>과 <난민> 등은 물론 심지어 <참전한 군인들>까지 포함시켜 '유동하는 세계'라고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민자가 겪는 지옥같은 상황>이나 난민, 참전군인들이 겪는 지옥같은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게다.

 

  또 이것과 서로 대비시켜 놓은 것이 바로 <유토피아>다. 이것은 토머스 모어가 처음 쓴 말이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이란 뜻이란다. 우리말로 뒤치면(번역하면) '이상향', '안전한 세계' 정도 될 게다.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이 참 애매한데, 글쓴이는 '온 인류가 바라는 전지구적 이상사회'를 말함과 동시에 넓게 보아서 '지배자가 바라는 유토피아'와 '피지배자가 바라는 유토피아'가 존재한다고 본 것 같다.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냥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냥꾼>이 존재하는 세상 그 자체는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당신이 바로 <사냥꾼>이고, 더구나 아주 유능한 사냥꾼이라면 온누리가 사냥터가 되면 그 세계가 바로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세상인데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사냥꾼이 되는가? 글쓴이는 우리 모두가 사냥꾼이라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사냥꾼이 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하는 일도 있고, 더 나아가 아이들은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는 상황이다. 끔찍한 일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냥꾼 대열>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 (누구도 바라지 않겠지만) <사냥감>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란다.

 

  <내것>을 지키고, <내것>이 <남것>보다 더 많길 바라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은 물론 사람이 사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지켜지는 규칙>이고 지켜지길 바라 마지 않는다. 이것이 <유토피아의 본질>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모순스럽다. 왜냐면 한 번 내것이 된 것은 영원히 내것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남것>보다 더 많아지길 바란다면 자연스레 한 쪽은 <사냥꾼>과 다른 한 쪽은 <사냥감>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한정한 것이라면 다툴 일이 없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경제적 혜택을 얻어보려는 꿈을 안고 떠난 <이민자들>은 <선진국 원주민들>에겐 자신의 것을 탐내고 빼앗으려 온 <사냥꾼>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스스로 '사냥꾼'이 되려하길 망설이지 않고 <이민자>를 '사냥감'으로 삼고 만다. 이것은 난민도 마찬가지이고, 망명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참전 군인'은? 사냥꾼일 수도 있고, 사냥꾼이 되라고 강요받은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사냥꾼이 되어야만 한다고 교육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

 

  유토피아는 모든 인류의 꿈이다.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정말 피(전쟁)와 땀(경제발전 따위)을 아끼지 않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노력들이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말 꿈꾸던 일을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냥꾼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선 사냥감이 넘치는 세상이 유토피아라는 사실 말이다. 혹은 이따위 세상은 결코 유토피아라고 불릴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이던가.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z******8 2010.11.24. 신고 공감 3 댓글 5
리뷰 총점 종이책
지그문트 바우만 - 모두스 비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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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바우만


새물결에서 나온 'What's Up' 시리즈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때가 있다. 친구 J가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집을 때 옆에서 식겁했었다. 그 당시 내가 읽던 책들은 모조리 소설책이었으니까. 뭔가 트렌디해보이면서도 어려워보이는 이 책들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니 처음 수업에서 읽으라고 한 책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였다. "망했다"라고 복창하고 읽기시작했다. 물론 그 책은 어려웠다. 대충 발췌독 못하는 독서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절매면서 헤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는' 다 읽었으나 이해는 어느 정도 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수업의 쪽글 논평은 대충 얼버무렸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왜 그리 어렵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변별하는 능력이 없었다. 매번 개드립을 쳤다. "원래 자본주의가 그런거다!"

그런데 그 와중 읽었던 'What's Up' 시리즈 중 다른 책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된 삶들>이었다. 한 눈에 책의 얼개가 들어왔고 쉽게 읽혔다. 도저히 85살 먹은 노인네가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 같았다. 흡사 에릭 홉스봄을 능가하는 필력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바우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바우만은 대학을 은퇴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갑자기 스타가 되기 시작했단다.

# 근대, 탈근대, 액체근대

나 역시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탈근대'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런데 탈근대라는 말을 '신자유주의'와 붙여놓고 생각해보면 앞 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거였다. 자본의 전일적인 통제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료타르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니.... 요 근래 읽었던 데이비드 하비가 좋았던 이유는 순전히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정치경제학적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효과에 대한 '신비화'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이라고 말하는 맥락과 하비도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명들은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여전히 '신비화' 시키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우만의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는 명명은 굉장히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왜 '액체'인가에 대한 설명도 깔끔하다.

우선, 근대성이 '견고한'[고형적]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들(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p.7).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


다섯째,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동조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다(pp.7-11).


이러한 정의들은 리처드 세넷이 <뉴캐피털리즘>에서 말했던 자신에 대해 안정적인 기획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는 것과,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벌거벗겨진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만든다. 우리가 불안 한 것은 우리가 '안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지반들이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공고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모든 '굳어 있는 것들'은 녹아버린다.

아, 그리고 '모두스 비벤디'. 이건 국제 정치학에서는 장기적 협정 이전의 간이 협정을 말한다. 다른 맥락에서는 '잠정적인 계약/양식' 정도를 칭하는 말이라 말할 수 있다. 아직 유동적이고 정해지지 않은 상황의 근대를 떠올려 볼 수도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차후의 안정적인 세계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탈근대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

#불안과 공포
모든 것이 녹아버린 이 상황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불안하게 만들고 공포에 빠지도록 만든다. 거기에 '유동'이라는 액체성을 넣으면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이 된다. 모든 불안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걸맞는 대응을 할 수가 없다. 정확히는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노조에 의해 지지되던 정규직이 분해되고 있고, 포드주의/사민주의/복지국가에 의해서 유지되던 중산층이 분해되었다. 계급은 양극화되고 있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해고'의 공포에 시달리고, 그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며, 해고당한 자들은 '재취업'이 되지 않아 불안하다. 대학생들은 취직이 안 될까봐 불안하다. 만성화된 '불안'의 향연이고 이는 공포로 바로 향한다. "공포를 부화시키고 키우는 것은 바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은 무력감에서 탄생한다"(p.45).

이러한 상황에서 공포는 공포를 만들어낸 근원과 무관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세어 본 적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위험에 우리들 자신(혹은 가장 가깝거나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될 위험을 계산해서 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암의 일곱 가지 증세', '우울증의 다섯 가지 증상'을 찾아내거나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스트레스, 비만 등의 원인을 없애는 데 몰두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배출구가 없어 남아도는 실존적인 공포를 덜어 줄 대리 표적을 찾고자 한다"(p.23). 스트레스가 만병의 질병이라고 말하면서 약을 먹고, 담배를 끊자고 말하고, 암검진을 받자고 말한다. 자본은 우리의 그러한 불안들을 '의료 시장'을 통해 해결하라고 말한다. 세상엔 온통 약장사와 클리닉, 그리고 그 사이의 거간꾼인 민간 보험회사가 개입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서구에서는 '관리'되었던 기억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포드주의/사민주의/복지국가는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한국은 그러한 국가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바우만의 푸념이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바우만의 관점에서 보자면 장하준 같은 이들의 주장은 크게 보아서 성립될 수 없다. 쉽게 설명하자면 권력은 전지구적으로 집행되고, 그에 대응하는 정치는 지역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를 추동하는 힘[세력]globalizing forces의 압력에 밀려 강제로 개방된 사회로부터 흘러나온 권력과 정치는, 계속해서 서로 멀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리고 십중팔구 현 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올 엄청난 과제는) 권력과 정치를 다시 하나로 묶는 일이다. 헤어진 이 두 동반자를 국민국가라는 가정 안에서 재결합시키는 일은 아마 그런 도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대응책 중 가장 성공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p.44). "불의가 만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을 불가피하게 왜곡시킬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미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만 확보될 수 있다"(p.45).

#난민과 이주민 - 호모 사케르
책을 산뜻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점차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석훈의 '공포 경제 시리즈'(<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 국부론> 등)을 읽으면서 느꼈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다. 이건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문제이고 도망칠 구멍이 없어보이며, 그 외상이 훨씬 더 치명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장의 <이동 중인 인류>와 3장인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공포 관리>를 읽다보면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이거야 말로 정말 '공포'다! 우리는 '잉여'라는 말을 최근 들어 손쉽게 쓰지만, '잉여 인간'이라는 말의 원조인 바우만의 '잉여 인간/인간 쓰레기'에 대한 설명은 오싹하다.

마르크스의 '산업예비군'에 대한 설명처럼 '잉여 인간'들은 그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하지만 액체 근대의 시대에 더욱더 적나라해진 것은 그들이 '임시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항구화되는 것이 액체 근대의 양상이다. "이런 이중적인 과정-인간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과거의 외부 배출구들이 차단된 것과 새로운 배출구가 공급되지 않는 것-의 결과로, '과거에 이미 근대화를 이루어 놓은 국가들'이나 이제 새롭게 근대화되기 시작한 국가들 모두가 배제적인[배타적인] 관행의 칼날을 점점 더 내부로 돌리고 있다"(p.54). 제 1세계에서는 제 3세계로 그들을 배출해 왔지만, 제 3세계의 잉여인간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장기매매나 인신매매, 그보다 더 나쁠 경우도 있다. "과거에 쓰레기를 만들어 내던 자들은 자신들이 지역적으로 만들어 낸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하고 찾아냈다. 반면에 '후발' 주자들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를 지역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더구나 해결책일고 해도 기껏해야 미비할 뿐이며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p.58). 그 전형적인 사례가 난민과 이주민이다.

터키는 미국이 이라크를 2003년 침공하자 국경을 봉쇄했다. 그건 전황이 터키로 전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이라크의 난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난민에 대한 '인도적 조치'는 점차 이상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난민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국적이 없다는 말은 새로운 의미이다. 국적을 잃은 그들의 상태는 국적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던 국가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거나 단지 유령처럼 존재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 그들은 법의 바깥에 있다. (......)그들은 표류가 일시적일지, 영원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비록 그들이 어떤 곳에 잠시 머문다 해도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지가 (도착할 곳이든 되돌아가야 할 곳이든) 영원히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들이 '종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장소는 영원히 접근 불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pp.65-66). 그리고 이러한 난민들은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 푸코와 아감벤이 잘 썼던 말로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의 작용 때문이다. 그들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빼앗긴다. "미래가 없는 공허한 날들이 계속되는 수용소 담장 안에서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신은 인류 전권대사들 ㅡ 임명되었거나 스스로 일을 자청한 이들의 임무는, 난민을 수용소 안에 가두어 놓고 지옥으로부터 떨어트려 놓는 것이다 ㅡ 을 통해 생명 유지 장치가 제거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p.67). 맘대로 죽을 권리는 '국민들'의 것이다.

이와 덩달아 제1세계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러한 취급을 받는다. "명백한 '경제적 이주자들'은, 유권자들에게는 '노동 유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선전하면서, 실직한 자국민에게 '자전거라도 타고' 노동을 팔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권고하는 바로 그 정부들의 공공연한 규탄의 대상이 된다"(p.72).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은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것 같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장했던 것과 연속 선상에서 광인의 배제를 통한 근대인의 창출이 있었다면, 이제는 난민과 이주민의 배제를 통한 '액체근대인'의 출현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진정한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 또는 진정한 공동체-되기를-희망하며 모인 사람들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 상상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상상의 노동labours of imagination에 대한 신뢰성을 구축한다"(p.78).

그리고 왜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지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푸코식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경쟁이 연대를 대신하면, 개인들은 자신만이 가진 ㅡ 가련할 정도로 빈약하고 불충분한 ㅡ자원에 탐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집단적인 유대의 붕괴와 해체는 그들을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법률상의 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꾸려 나가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사실상의 개인 모델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p.111). 세넷과 비슷한 논리인데, 우리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의 의지'를 작동시키지만 그 순간마다 '현실'이 도와주질 않는다. 문제는 지금 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이다.

#공포 사회학으로 끝나나? - 희망 찾기

그렇다고 바우만이 '비관론'으로 글을 맺지는 않는다. 4장 <생활 공간의 분리>는 처음 부분에서 문지기 공동체gated community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 공간이 양극화되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들을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에서 비교적으로 자유로운 상층 계급에게 단순히 공간성이 소멸하고 있다는 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시는 매일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그 투쟁의 장의 성격 때문에 다른 방법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우만은 전망한다.

마누엘 카스텔스 등은 이렇게 말한다. "'상류층' 사람들은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아니 그보다는 떠돌고 표류하기 대문에) 거주지에 대해서는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홀로 남겨져 존재하며, 매우 자유로워서 자기만의 소일거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고, 일상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서비스는 언제든지 보장되어 있으므로, 자신들의 거처가 위치한 도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p.122). "'상류층'과 가장 확연히 대조적인 하류층의 특징은, 상류층 사람들이 연결되어 그 삶이 조율되는 전 세계적 의사소통 네트워크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데 있다. 하류층의 도시 주민은 '지역에 머물 운명이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일'에 대한 불만과 꿈, 희망에다 관심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p.123). 하지만 바우만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시 생활의 현실은 그런 산뜻한 구분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경계를 긋는 일을 놓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처에서 수많은 전선이 형성되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선을 긋는 일은, 언제나 선을 다시 긋고 지워야 할 위험을 무릅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일이다"(p.129). "간단히 말하면, 도시는 전지구적으로 잉태되고 부화된 문제들이 쌓인 야적장이 되었다. 도시의 주민과 선출된 그들의 대표들은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도 해결할 수 없는 과제, 즉 전지구적으로 잉태된 괴롭고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해 지역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p.135). 쉽게 설명하자면 이제 매일 매일의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구체적 공간에서의 대응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은 한국 상황에서도 유용해 보인다. 바로 그건 이주민들과 어떻게 지낼까의 문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우만의 '이질 공포증'과 '이질 애착증'의 개념은 굉장히 유용해 보인다. "이질 공포증과 이질 애착증은 모든 도시에 공존하지만 도시 주민들 각자의 내면에도 공존한다. 분명히 이는, 비록 유동하는 근대의 양면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불편한 공존이다"(p.144). "이방인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서로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래가 도시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면서 다양한 자극과 기회로부터 혜택을 얻어 내는 기술은, 도시 주민이 배우거나 활용할 필요가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p.145). 그리고 이러한 '이질 애착증'에 대한 설명은 지금 액체 근대의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를 다시 상상하고 '정치'를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거리를 준다. 계속 불안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상의 적'으로 불리는 이주민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들을 넘어서 그들과 '섞일 수 있음'이 주는 정치적인 힘등이 조만간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동일성' 속으로 숨는다고 해서, 그것을 유발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완화제들처럼, 그렇게 숨는 것은 기껏해야 그런 위험이 미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두려운 일부 영향을 막아 주는 피난처만을 약속해 줄 뿐이다"(p.141). 사실 이러한 쟁점들은 사스키아 사센이 만들어낸 '글로벌 도시Global City'의 기획들과 맞물린다. 어쨌거나. 이걸 쉽게 풀어 말해주는 게 어디냐?

#
바우만의 책들이 '지젝'보다 더 좋은 이유는.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모습들과 결부되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점이다. 가장 근접한 곳에서 싸울 수 있기 위한 질료들이 나온다는 것. 즉 '적용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구체적 범주에서 작동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의 강점. 그게 바로 바우만의 강점이다. 

당장 글로벌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를 한 큐에 보내겠다는 소수 좌파들의 입론과 다르다는 점, 그게 내게는 바우만이 매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섞이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이질 애착증), 마지막으로 쉽게 누구나 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분히 읽으면 잘 이해되는 문투로 쓴다는 점이 매력으로 보인다.

담배피는 게 간지나는 Zygmunt Bauman 할아버지
f***********x 2010.12.20.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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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체제에 따를 것인가, 스스로 유동할 것인가.
"유동하는 체제에 따를 것인가, 스스로 유동할 것인가." 내용보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원하는 시민상은 산업혁명 시대의 연장일 뿐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콘텐츠를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과 연결시키려는 유대만 강화되었다. 이시대의 첨단산업이란 ‘모두스 비벤디’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쓰레기만 증가되는 산업이며 이 쓰레기를 그 또한, 첨단산업을 이용하여 처리하려는 것이 이 시대의 화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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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원하는 시민상은 산업혁명 시대의 연장일 뿐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콘텐츠를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과 연결시키려는 유대만 강화되었다. 이시대의 첨단산업이란 ‘모두스 비벤디’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쓰레기만 증가되는 산업이며 이 쓰레기를 그 또한, 첨단산업을 이용하여 처리하려는 것이 이 시대의 화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는 쓰레기 재생산일 뿐이며 미봉책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며 쓰레기 생산과 동시에 이뤄지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는 대안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는 퇴화로 알려진 삶을 추구해야 할지, 자본주의의 체계를 문제삼아야 할지의 기로에 서 있는 세대이다.

‘모두스 비벤디’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 도덕,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들의 잇따른 출간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지향적 삶은 이런 질문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한계시점에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처럼 근대적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유동을 강요하는 사회와 시민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진정 유동가능한 세계인지가 의문이지만 진정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유동을 이끌어내는 시민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파도를 타며 멀미를 하느라 비판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저 정치경제의 소모품으로 시민이 전락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국가력, 특히 경제적 파워가 가장 중요시되는 현대에서 개인 혹은 자국을 위한 연합일 뿐인 지구화(유로화를 보면 특히 그렇다)는 누구를 위한 지구화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지구화라는 세계적 정책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저절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국가간의 권력의 정도를 경쟁하여 계급을 명확히 하여 특정국가의 파워를 세계에 명시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파워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이는 일부 공포정책을 가장 잘 이용한 대국의 시민력에서 나온다. 상대적으로 많은 국민은 보유한 국가가 공포정책으로 국가에 대해 의지하게 하고, 국가는 시민의 안전을 빌미로 세계를 위협하는 무기를 보유하고 국내가 아닌 타국에서의 전쟁과 복구를 반복한다. 소수의 무기판매상과 소수의 기득권자의 주머니가 채워질 동안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간인은 희생된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의 변칙만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그럴듯한 명명 아래 거꾸로,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다수의 희생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이제는 비폭력만이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폭력에 비폭력의 권력이란 너무도 초라하다. 최근 TV드라마 ‘대물’에서의 강태산(차인표 역)이 서혜림(고현정 역)이 부딪히는 부분은 체제 안에서 혹은 체제 밖에서, 다르게는 위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에 대한 대립을 여실히 보여준다. 강태산의 의견처럼 권력을 먼저 가져서 변혁을 꾀하는 것이 빠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비판대상인 흑막정치와 다를 바 없으니 누구든지 신념을 져버리느니 풀뿌리식의 느린 변혁의 방법을 택하는 서혜림의 방법이 옳다고 말할 것이다. 분명 다수가 생각하는 ‘옳은 것’은 존재하지만 실제로 세계의 경제와 정치는 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기득권의 권력은 시민에서부터 나오고 시민에 대한 통치는 이미 테크닉이 되었다. 그 일환으로 실체가 없는 정부의(혹은 누군가의) 공포정책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강화시키고 특정분야로의 자본유입을 유도한다. 이는 종종 시민을 무지한 신도로 만든다. 극도의 공포아래 정부에 대한 종교와도 같은 강한 믿음을 갖고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지도 증가에 그치지 않고 팬, 혹은 가족과 같은 맹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그 하나의 정책 뿐 아니라 다른 정책에 대해서 비판력을 무디게 만든다.

 

법이란 국민적 합의, 즉 모두스 비벤디의 대표일텐데 존 로크의 ‘통치론’, 그리고 이 책 ‘모두스 비벤디’의 저자가 말하듯 전쟁 상태에서는 법은 침묵한다. 시민 모두의 의견을 대표하는 양 정치, 군사권력이 행사되면 법의 침묵 아래 희생의 명목이 등장한다. 시민은 원치않는 희생을 강요받고, 체제에 복종하는 시민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책임감도, 난민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이는 체제와 현 정부에 대한 시민의 강한 신뢰를 강화한다. 그러나 그 시민을 대표하여, 자국민의 이름으로 생명을 앗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시민은 말할 것이다. 정부가 결정하고 행한 일, 피는 정치권력자들의 손에 묻었고 시민은 결백하다. 그러나 공포정책에 대해 비판력을 잃은 시민은 과연 자신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공포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정부에 안전을 갈구하고 정치권력은 검열없이 과잉생산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어법처럼 우리는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시민은 스스로 유토피아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여 사회의 해체가 필요한 부분에 칼을 들 권리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이 유토피아라는 용어에 대하여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근대적 세상에 냉소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순응할 것이 아니라 진정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옳은 세상 혹은 모두가 진정 공통으로 생각하는 상식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책해가야 할 것이다.

f*****5 2010.11.30.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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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 삶, 이것은 유토피아인가?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끝없이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 삶, 이것은 유토피아인가?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내용보기
얼마 전 시리아 난민 아기가 바닷가에 엎어져 죽어있는 사진으로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난민 문제가 SNS와 방송의 힘으로 별안간 내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안쓰러운 감정마저도 사실은 영화 보듯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질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를 읽고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정도와
"끝없이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 삶, 이것은 유토피아인가?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내용보기

얼마 전 시리아 난민 아기가 바닷가에 엎어져 죽어있는 사진으로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난민 문제가 SNS와 방송의 힘으로 별안간 내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안쓰러운 감정마저도 사실은 영화 보듯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질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를 읽고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정도와 상황의 차이만 있을 뿐 현대인은 이제 누구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현대인은 이전까지는 결코 마주한 적이 없는 일련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근대성이 '견고한 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 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형태들이 순식간에 해체되고 소멸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기적인 생활 전략을 세우거나 행동의 기반으로 삼을 준거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둘째, 권력과 정치가 분리되어 권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치적으로 규제 받지 않는 전지구적 공간으로 이전되고 있다. 국가가 방출한 기능들은 변덕스럽고 본래 예측할 수 없기로 악명 높은 시장 세력들의 놀이마당이 되버린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다섯째,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열린 사회' '유동하는 세계'란 표면적으로는 개방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이제 '열린 사회'란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를 일컬을 뿐이다.

이는 권력과 정치가 분리되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권력은 그저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지구인들의 안전과 자유와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한편 전지구적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는 정치는  그저 국가내에서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공포를 퍼트리는 정책으로 생존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해마다 선거철이면 북한의 도발이 만들어진다. 뉴스에서는 매일 더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이 생방송 된다. 수백명의 아이를 죽음에 몰아넣은 세월호 사건은 원인 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지금 당장 월급을 주고 있는 회사가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할런지 알 수가 없다. 개인의 삶은 위험하고 공포로 가득 찬 삶이 되었다.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의 삶을 소비하며, 개인적인 삶을 사는게 왠지 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적 유대는 소멸하고 연대는 약화된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특징들로 인해, 우리 개인들은 점점 더 우연성이 지배하게 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폐기처분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상에서 한번 쓰레기가 되면 영원한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난민이다.


'난민들은 도착해서 잠시 머무는 곳에서 담당할 쓸모 있는 기능도 없고, 새로운 사회집단에 동화되거나 통합될 현실적인 전망도 의도 없는 '인간쓰레기'의 화신 자체다.'


바우만에 의하면 유동적 근대는 사냥꾼의 세계관이 지배한다.

머릿 속에 바람직한 설계도, 즉 유토피아를 구상해 놓고 이대로 정원을 가꾸어 가던 '정원사'와 비교해, '사냥꾼'은 사물의 균형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오로지 사냥감을 죽여 자루를 채우는 데만 관심을 가지는 존재다. 이들 사냥꾼에겐 사냥의 끝이 있으면 안 된다. 그들은 사냥을 계속 해야한다. 자본주의의 속성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삶의 의미는 생각지 못한 채 끝없이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 삶,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삶, 과연 이것은 유토피아인가?


물론 사냥꾼의 삶이 무슨 문제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일 것이며 전지구적 권력에 심취에 있는 초엘리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지옥의 삶'이며 무엇인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이란 누군가가 흘린 피눈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카라치나 바그다드의 어린이들이 잠자리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미국의 어린이들도 그럴 것이다.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박탈감과 굴욕감에 젖어 있다면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유를 자랑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책속에 인용된 벤저민 바버의 지적처럼.

e******s 2015.10.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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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구적 위험사회와 실존적 불안의 만연
"전지구적 위험사회와 실존적 불안의 만연" 내용보기
책의 원제는[유동하는 시간: 불확실성의 시대의 삶](2006)이다. 국역본은 한눈에 파악되는 쉬운 원제목을 놔두고 ‘삶의 양식’이란 뜻을 가진 모두스 비벤디라는 라틴어를 제목으로 삼았다. 국역본 부제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이다. 알고 보니 국역본은 이탈리아판의 제목과 부제를 그대로 취한 것이다. 지금의 세상이 생지옥인지, 유토피아를 여전히 꿈꿀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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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유동하는 시간: 불확실성의 시대의 삶](2006)이다. 국역본은 한눈에 파악되는 쉬운 원제목을 놔두고 삶의 양식이란 뜻을 가진 모두스 비벤디라는 라틴어를 제목으로 삼았다. 국역본 부제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이다. 알고 보니 국역본은 이탈리아판의 제목과 부제를 그대로 취한 것이다. 지금의 세상이 생지옥인지, 유토피아를 여전히 꿈꿀 수 있는지를 의미하는 물음에 강조점을 둔 것 같다저자는 탈근대성의 예언자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유유자적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속지 사진의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1925년 11월 25태생이니 이미86세의 베테랑 학자다. 고령의 나이에도 지속적으로 저작을 집필하는 활력과 끈기가 부럽고도 놀랍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와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설명한다. 저자에게 유동하는 근대란 개념은 부정적인 뉘앙스의 가치적 내용을 담고 있다.

 

공포는 우리 시대의 열린 사회에 깃든 가장 사악한 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공포 가운데 가장 무섭고 참기 어려운 공포를 부화시키고 키우는 것은 바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은 무력감에서 탄생한다.”(45)

 

근대성을 논할 때 바우만이 사용하는 은유는 견고한 근대(solid modernity)와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표현이다. 견고한 근대는 말그대로 단단하고 안정적이고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며, 정치와 권력이 함께하는 고정적 모더니티를 말한다. 반면에 유동하는 근대는 가볍고 불안정하고 통제가 불가능하며 국가초월적 권력으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유동적 모더니티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견고한 근대에서 유동하는 근대로 변화하면서 세상은 전지구적인 불확실성이 야기한 갖가지 공포정치가 만연하고 있다. 또한 공포는 이미 강력한 자본이 되어 사회 각 영역에 성공적으로 침투해서 효과를 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 바로 매스미디어와 마케팅 비즈니스다.

 

대중매체는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을 시청률 전쟁의 주요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항목으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공포라는 자본을 끊임없이 공급해 공포가 마케팅과 정치 모두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만들었다.”(25)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의 만연으로 인해 공포에 대항하는 방어기제가 사회제도적 차원의 안보(security) 영역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안전(safety) 영역으로 퇴보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복지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개인안전국가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다. 이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도록이라는 생존경쟁을 부추기고 안전공황을 유발한다. 그래서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사적인 해결책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사냥꾼의 운명을 걷게 된다. 견고한 근대의 세계관은 정원사처럼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만, 유동하는 근대의 세계관은 사냥꾼의 것이다. 남들이 굶어 죽든 말든 나만 사냥감을 많이 잡으면 된다는 아비규환적인 생존시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지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z***a 2010.12.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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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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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의 문제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처음 책이 도착했을 때 책의 두께가 얇아 좀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구나 지레 짐작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책 보다도 잘 읽히지 않아 몇 번을 도돌이표처럼 읽었다. 그동안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던 근대성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믿을 수 없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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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의 문제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처음 책이 도착했을 때 책의 두께가 얇아 좀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구나 지레 짐작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책 보다도 잘 읽히지 않아 몇 번을 도돌이표처럼 읽었다.

그동안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던 근대성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믿을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불확실성이 공포를 낳고 사회는 점점 하나의 네트워크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기록되고 있다. 바우만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안전을 얻으려는 대가로 너무 많은 자유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양산한 ‘불확실성’에 연유한다고 그는 말한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순응하는 태도가 아니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며 불확실성의 원인을 탐구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의 도전에 대처할 능력을 키우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은 참기 어려운 공포를 부화시키고 거대 자본이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공포를 전략적 도구로 퍼뜨린다. 공포라는 자본은 온갖 투자처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유동자산처럼 이윤만 있으면 어디든 파고들고 있다.

미셸 아지에르는 난민 수용소에 ‘공동체 게토’의 일부 특징들과 ‘하이퍼 게토’의 속성들이 서로 뒤얽혀 있음을 발견했다. 이 결합은 수용자들을 훨씬 더 강하게 수용소에 묶어 놓고 두 힘이 외부의 들끓는 적대감과 결합되어 저항하기 힘든 구심력을 나타내며 탈출할 길도 없고 다른 형태의 삶에 접근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차단하는 ‘총체적 삶’을 제공한다.

일시성의 영구성, 일과적인 것의 지속성,행위의 주관적 결과를 반영하지 않는 객관적 결정, 영원히 규정되지 않는 사회적 역할, 더 정확히 사회적 역할이라는 닻도 없이 삶의 흐름 속에 던져지는 상황 등, 유동하는 근대적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그 특징들이 아지에르가 발견하고 기록했던 것들이다.

오늘날 사회가 길러 놓은 불안이 가장 집약적으로 분명히 드러난 지역을 ‘도회’라고 할 때 위험의 원천이 거의 도시에 옮겨와 정착되어 있다고 바우만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도시 하류층 주민의 생활은 상류층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상류층 사람들이 연결되어 그 삶이 조율되는 전 세계적 의사소통 네트워크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그는 근대성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로서, 다른 모든 특성들이 뒤따르는 핵심적 속성으로서 두드러지며 공간과 시간이 변화하는 관계라고 보았다.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근대적 삶을 특징짓는, 오직 근대적 삶에만 존재하는 요소라고 <액체근대>에서 말한다.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해 실제 존재하는 위협과 앞으로 위협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은 자기가 살게 될 공간의 장단점에 대해 심사숙고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사회적 지위, 실존적 불안등-이는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의 삶이 언제나 동반하는 요소로, 외딴 곳에 뿌리를 두며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모두스 비벤디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라틴어라고 하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삶의 양식’으로, 서로 갈등하는 이들 사이에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시적 합의를 의미한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의 양식이 바로 이런 갈등하는 이들 사이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공존과 같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 다른 유토피아이고 이것은 끝도 없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철저히 해결되고, 인간조건이 안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철저히 치료해주는 멀리 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감 있는 ‘지금 여기’로 옮겨진 유토피아, 현실이 된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불안과 공존하면서 엘리트와 지역주민, 난민과 도시민, 인간쓰레기가 엉켜 만들어 내는 삶의 양식들이 유동하는 근대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내가 지켜내야 할 몫의 역할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을 떠난 이상세계에 유토피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안은 내가 숨쉬는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하는 유토피아,

e****e 2010.11.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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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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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치고는 무게 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제목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두스 비벤디> 는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제목에서 책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제목 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문제다. 그러나 다행히 뒤에 의미가 나와 있다. <모두스 비벤디>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뜻하는 라틴어라고 한다. 영어식으로 풀어내면 <mode of life(삶의 양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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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치고는 무게 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제목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두스 비벤디는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제목에서 책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제목 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문제다. 그러나 다행히 뒤에 의미가 나와 있다. <모두스 비벤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뜻하는 라틴어라고 한다. 영어식으로 풀어내면 <mode of life(삶의 양식)>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타인으로 해석해도 될까?)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그래도 책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부제를 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부제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이다. 이 제목에서 현 시대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현 시대의 불확실한 시대이며 불안정성이 널려 있는 세상(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예전의 확실하고 안정적이며 유동하고 않고 고정된 세계, 즉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이 가능한 시대이며, 조절과 통제가 가능한 세계, 에서 이제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마구 유동적인 세계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절과 통제가 불가능하고 예측 불능의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유동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양산한 공포는 우리에게 무력감을 준다. 이러한 무력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통제력을 가지는 것 뿐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이러한 통제력이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진행되는 글 속에서 유동하는 공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2장의 이동 중인 인류에서는 잉여 인간이라 부르는 난민과 하층 빈민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이 잉여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사회가 그들은 그렇게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잉여 인간에게서 느끼는 위협을 철저한 보호막으로 일관하고 있는 기득권들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하고 경계의 밖으로 쫓겨나는 불행한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3장의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공포 관리에서는 국가나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는 잉여 인구의 양산 속에서 그들이 국가와 사회에 융합하지 못하고 사회의 악 또는 질병처럼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4장의 생활공간의 분리에서는 모든 위협에서 우리에게 안식처가 된 도시가 오늘날에서는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위험의 주요 원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잉여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기득권 사람들, 그 외 모든 사람들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왜 공포와 두려움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저자가 찾는 세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인가? 그러나 저자는 현 시대에서 유토피아는 진정으로 없다고 말한다. 그저 사람들은 도피하던지, 융화되던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유토피아로, 어떤 이에게는 지옥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정말 현 시대와 미래는 저자의 말처럼 암울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희망이 존재하는 것일 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러한 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이 현 세계에 유동하는 공포를 던져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의 책 속에는 하나의 해답이 있는 것이다. 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서 잉여 인간, 기득권층, 그 외 다른 사람이 융합된 서로간의 안식처이자 희망이 되는 그런 사회나 공동체가 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것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다면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l******l 2010.11.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