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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기운이 있다.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나에게로 건너와 가슴까지 전해지는 강렬한 인상이 있다. 표정이라고 해둘까. 나는 그런 시인을 좋아한다. 내가 시집을 여는 까닭은 낯익은 글자들의 무리를 따라 읽으며 삶의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는 이유도 아니고, 편안한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누구 말대로 '힐링' 따위 하려는 것은 아니다.(현실의 덜그럭거리는 살림살이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구역질나는 일상의 습관들은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말랑하게 위로하는 책 몇 권, 명사의 강연 몇 개 본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가? 매운 음식 몇 접시 먹고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힐링'이라고? 그렇다면 그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나태한 것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나는 시집 속의 낯선 글씨를 좋아한다. 분명 내가 가장 잘 아는 모국어라지만, 읽혀지지 않는 글씨들. 그것은 내가 모르는 문법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등지고 있는 지역의 지형도 같은 것이라서 그럴 수 있다. 아니면 세상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거나, 원래 읽을 수 없는 그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시집을 아끼고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 하나다. 읽은 소설은 자주 내 손을 떠나 팔려가기도 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시집은 손수 사들인 시집을 읽고, 그렇게 읽고 나서도 낡은 책장 속에서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 최치언 시인의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강렬한 글씨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는 그 뜻을 일일이 알지 못해도, 아니면 아예 읽지 않고 파르르 소리를 내어가며 빠르게 넘겨도 글씨들이 강렬한 표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는 어쩌면 그렇게 읽는 것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작은 단서들을 통해 나와 시집이 교감했을 때, 그 벼락 같은 것을 맞고 한참을 바닥에 쓰러져 있기도 한다. 진짜 벼락을 맞으면 그렇게 죽고 말 텐데, 시집의 벼락은 한참 만에 나를 꼭 깨운다. 운다. 채운다. 채웠음을 안다. 바뀌게 될 것을 예감한다. 죽을 뻔하다 살게 되었음을 안다. 이제 사랑도 한다. 나도, 타인도, 진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 언젠가 무릎 꿇고 좌절하고, 지금 이 마음의 유효기한이 다 되었음을 알게 되면 나는 또 한 번의 벼락을 기대하며 한 권의 시집을 꺼내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어떤 시집을 붙잡게 될는지는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당연하다. 다 내어 줄 것이다. 선물을 고대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