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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만 519쪽 분량이다. 일단 분량도 어머어마하지만 다루고 있는 사건들이나 인물, 관점 등등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다기해서 읽기에 쉬운 작품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들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쉽겠다. 이 작품의 경우는 시기적으로는 『아리랑』, 내용적으로는 『태백산맥』을 연상시킨다. 그토록 볼륨 있는 작품이니 독자가 별 생각 없이 접근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19세기의 역사나 정치, 신앙의 세계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미’는 아직 낯선 장소이기도 하다. 인명이나 지명만 해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라고 뭉뚱그려졌던 것들이 세부적으로 분화되고 그 이름을 찾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스페인어로 쓰여져 있지만 말이다. 역사나 정치, 종교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은 주제인데 이 모두를 아우르고 가자니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 그리고 그 안을 살았던 개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신념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20대 내내 나를 괴롭혔던 문제 중 하나가 이런 거였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다. 그래, 굳이 나누자면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인이다. ‘크리스천’은 내게 있어 제1의 정체성이다. 그때도 지금도. 대개의 경우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이 둘을 내 안에서 스스로 조화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20대의 10년 동안 내가 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전략적으로 택한 방법은 ‘거리두기’였던 것 같다. 두 진영 모두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접점을 모색해보기. 그래서 궁극적으로 방법을 찾았던가? 사실 이런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일개 개인에게도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합집산’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이 작품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각 정치적으로 구세력과 신세력을 상징한다. 물론 비정치적인 인물도 있고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결국은 그 게임판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만든 판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도둑이었고 창녀였고 가난했고 노예였던 사람들(예수 당시와 마찬가지로)에게 중요했던 것은 역사도 정치도 종교도 아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게도. 개개인으로 따지자면 각자가 가진 의, 각자가 주장하는 의는 모두 옳다. 원래 ‘의’라는 게 옳다는 신념이라고 할 수 있으니깐. 문제는 그 수많은 의, 상충하고 갈등하고 충돌하고 이합집산하는 의 중 과연 어떠한 것이 ‘정의’냐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고 있고 그래서 “정의는 없어져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직도 정의를 묻고 찾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너의 의, 나의 의가 아니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의라는 것, 정의라는 것, 공의라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철학이든 역사든 역사철학이든 거슬러올라가든 모색하든 탐색하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니깐. 어쨌든 사회주의혁명으로 시작되어 반사회주의혁명으로 종식되었던 20세기도 끝난 마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때늦은’ 질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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