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가 기억을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이 장소에 있게 하는 것일까. 발렌타인데이도 그냥 넘겼으니 밥이나 사라는 전화를 받았다. 밥 사라는 것은 내 전용 대사이며 내가 녀석에게 발렌타인데이 운운해도 좋을 역할을 맡긴 것도 아닌데, 미심쩍고 개운찮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가 고팠고 길어지는 통화가 지루했으므로 그러마 했다. 나는 대부분 상점 이름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곳의 위치만 기억하고 찾아가는 편이다. 하여 구구절절 위치를 설명한 뒤 덧붙여 “아무튼 한 글자로 된 음식점이야. 빼어날 수 아니면 향기 향 정도 되겠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국 둘 다 아니었음에도 둘 다 잘 찾아간 걸 보면 이름 따위는 우리 생에서 그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아닌가 보았다. 그곳이 그를 불렀다. 불현듯 난 그가 그리워졌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여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 그가 머물게 될 낯선 도시와 돛단배와 감빛 하늘과 나직하게 흩뿌리는 고동 소리와 진귀한 식물들과 자유를 위한 머나먼 여정,들까지도 단숨에 그리워졌다. 내 눈빛은 잠시 스산해졌을 터였고, 허나 녀석은 뜬금없이 여권 갱신해 둬라 한다. 어제 은행 직원은 주민등록증 재발급 받으라 했지 참. 나는 이러한 증서들로 구명되는 존재다. 증서 없이는, 나는 나이지만 결국 내가 아니다. 쓸쓸하고 슬픈 저녁이다.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대해 신뢰하지 않은 지 오래이므로 무슨 무슨 문학상 작품집에 무게를 실어 읽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이상을 애지중지했기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그래도 애정이 가지만 애정을 두는 만큼 씁쓸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올해 대상 수상작은 김훈의 <화장>이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 <칼의 노래>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으므로 달갑다. 하지만 읽어갈 수록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나는 이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인가 회의하며, 읽다 말고 슬쩍 뒤로 돌려 총평을 본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그려낸 대작이라고? 보기 드물게 유려한 문장이라?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기법으로 그려낸다? 잘 모르겠다. 역시 잘 모르겠다. 대상작인 <화장>외에 다른 작품들도 무릎 탁 치게 만들지는 못 한다.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세련된 문체와 상징으로 독자를 매료케 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림자 아이>를 읽으며 나를 매료한 건 ‘잠’이다. 자다 졸다 하며 읽어서 따분했는지 따분해서 자다 졸다 했는지 모르겠다. 금년 작품들의 총평을 대충 훑자니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형태, 참신한 신개념, 색다른 서사기법 등 ‘새롭다’ 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매긴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이제 나는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나도 좀 신선하네,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대체로 쓰잘데기 없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라 책 한 권을 읽으며 마음의 욱신거림을 수 십 번씩 경험하곤 하는데 수상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글쎄,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에서 한두어 번 정도? 나는 이제 정말로!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일까? 심사평을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꼼꼼히 살펴 읽어 보아야겠다. 불끈! 갑자기 으스스 춥다. 따뜻한 나라로 이사 가고 시프다. |
| 보색(補色). 이 소설 <화장>을 읽는 내내 계속 떠 오르던 말이다. 이 소설에서 김훈은, 선명하다幣?처절한 보색대비를 선보인다. '죽어가는 아내의 화장(火葬)'과 '젊고 싱싱한 여인의 화장(化裝)'이라는 선명한 보색대비만으로도 유례없이&bsp;처절했을 이 소설은, 그가 <칼의 노래>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절제되고 메마른 붓놀림 덕에 기어이 잔인해지고 만다. 아마도 김훈은 자신의 비정한 붓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상이 '보색'임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거기에 '순도 100%'의 보색을 찾아내는 매서운 안목까지 지녔다. 그리고 그 두 '보색'은 그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의 주제인 '죽음'에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진다. 이렇듯 탁월한 안목과 필치를 지닌 그가 단 두 가지의 색상만으로 그려내 보여주는 '죽음'이 과거의 그 누가 보여준 것보다도 강렬하고 잔혹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추측은 그래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김훈은 그 '안목'만으로도 이미 '대상감'이었던 것은 아닐는지. "운명하셨습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의사가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뇌종양으로 죽은 아내의 시신은 뼈와 가죽만 남아 있다.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도 까맣게 타들어 가듯 말라붙어' 있으며, '들뜬 음모가 부스러지듯 빠져나온' 채 '나'의 아내는 주검이 되어 그와 의사들 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슬프지 않다. '똥물을 흘린 아내의 항문과 허벅지 안쪽을 씻기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다. '나'가 무심하고 박정한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사실 '나'는 슬퍼하고 절망할 줄 아는 사람이다. 회사의 젊은 부하 여직원인 '추은주'를 향한 그의 절절한 독백이 그 명백한 증거다. "돌아선 당신의 몸은 블라우스와 스커트 속에서 완연했고 반팔 블라우스 소매 아래로 노출된 당신의 팔에는 푸른 정맥이 드러났습니다. 당신의 정맥은 먼 나라로 가는 도로처럼 보였습니다. 그 정맥 속으로 내가 확인할 수 없는 당신의 시간이 흐르고, 저와 사소한 관련도 없을 당신의 푸른 정맥이 저의 눈앞에 드러나서 이 세상의 공기에 스치게 되는 여름을 저는 힘들어 했습니다.(30p)" '늘어진 피부 위로 피어난 아내의 검버섯'에 대한 비정한 시선과 '투명한 흰 피부 위로 내비치는 추은주의 정맥'에 대한 동경의 시선이 계속 교차한다. 그 시선의 잔인한 교차 속에서 '나'의 아내는 똥물을 흘리고, 음모와 머리털을 잃고, 대음순까지 까맣게 태워가며 죽어간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추은주'에 대한 미칠듯한 동경의 독백을 끊임없이 주워섬긴다. 이 '잔인한 보색대비'가 이 소설 <화장>이 뿜어내는 섬뜩한 에너지의 진원이다. 이 잔인한 보색대비는 아내의 죽음과 추은주의 미국행으로 종국을 맞는다. 아내를 화장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가 키우던 개 '보리'를 안락사 시킨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이 찾아든다. 그리고 그가 잠이 들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내 모든 퓰컥?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 나는 생각해 보게 된다. 아내를 화장하고, 추은주를 떠나보내고, 보리를 안락사시키고 일상 속으로 돌아온 소설 속 '나'가 마지막에 빠져드는 '깊고 깊은 잠'이야말로, 김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궁극적 의미의 '죽음'이 혹시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김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젊은 추은주'를 보색 삼아, 아내의 죽음을 한껏 초라하게 만들고 처절하게 느껴지게 하더니, 마지막에 별안간 우리에게 이렇게 묻지 않는가 말이다. "아침에 눈은 뜨겠지. 똥물을 흘리진 않겠지. 눈을 감고 있는 당신을 누군가가 불에 태워서 그 재를 강에 흘려버리지도 않겠지. 하지만 당신 지금, 이미 죽어 있는 건 아니야?"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죽음'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셈이다. 첫머리에서는 의사가 아내의 사망선고를 내렸지만, 마지막에는 작가가 독자에게 사망여부를 묻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신이 죽어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음으로 빠져드는 우리와 꼭 닮은 꼴의 '나'를 보여주고서 우리에게 우리의 '사망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처절한 보색대비'로, 또 '절제된 붓놀림'으로 우리의 혼을 쏙 빼 놓은 것은 결국 우리를 '무방비상태'로 만들기 위한 그의 계책이였던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무방비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그의 질문에 덜컥 솔직한 대답을 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훈은 물었고 나는 대답을 했을 뿐 아닌가. 작가와 독자가 대화를 나누었을 뿐 아닌가. 오히려 '그들만의 잔치'처럼 느껴지던 '이상문학상 수상작'의 작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우 청량하고 기껍고 고마운 일이다. 서로 점점 닮아만 가는 매력 없고 특색 없는 '이상문학상 수상작'들 사이에서, 보란 듯 자기의 색깔과 목소리를 한껏 낸 김훈은, 무식한 내가 봐도 틀림없는 대상(大賞)이다.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한 가지, 부디 김훈의 독특하고 힘있는 목소리에 '이전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의 줏대 없고 매력 없는 웅얼거림이 섞여 들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처럼 무식한 독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문학상 수상작가'가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말이다. |
|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 책은 나올때마다 꾸준히 읽어가고 있지만 읽어갈수록 그 식상하고 뻔한 스토리에 실망을 하고 책을 덮게 된다. 이번에도 별 감흥은 없었다... 사실 이럴 수록 늘 실망이 되는게 사실이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접했을때의 설레임과 기쁨은 컸다.(비록 책표지가 딱딱하게 생겼지만 막상 읽어보니 너무 좋았다.) 어떨때는 년도에 맞추어서 꾸역꾸역 소설수를 맞추고..그렇게 이 소설집을 출간하는게 아닐까 생각한 정도다. 이번 책은 박민규씨의 작품에서 아주 조금은 기쁨을 느꼈지만. 처음 이 책을 접하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대부분의 소재가 남녀간의 사랑,불륜과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조금은 심오한 느낌으로 끌어올려 표현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역시 몇년간 수상작품들의 어딘지 비슷한 식상함을 어쩔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감상평을 쓰는 이유는 박민규씨의 '고마워,과연 너구리야'라는 작품때문이다. 처음 보는 형식과 생소한 느낌이 퐁퐁 솟아난,한마디로 그런 작품이었다. 나처럼 식상함에 질린 사람들이라도 이 소설만은 참신하게 볼수 있을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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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글쓰는 사람중에 가장 큰 빽을 가진 사람이다.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칼의 노래'를 언급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오래전에 나온 책을 주목했다. 아마도 대통령은 중앙정부로 부터 소외당한채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을 추진한 장군의 외로움에서 자기 모습을 보곤 했나보다.
김훈의 글을 볼때면 귀기서린 문장에 전율을 느끼곤한다. 그는 영화 '카케무샤'를 보면서 일본 무사들의 탐미적인 갑주와 그 갑주를 상대했던 이순신장군의 투박하고 단순한 갑옷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장군의 단순하고 순결한 칼로 쓴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칼의 노래'를 썼다.
짧고 절제된 문장으로 장군의 칼에 관해 노래한 소설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 무사들의 갑주처럼 탐미적이다. 흩어지는 사쿠라 꽃잎처럼 말이다.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김훈의 '화장'이 대상을 받았으니 책장을 열기전에 나는 각오를 해야 한다. 작가는 내 영혼을 롤러코스터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려댈것이다. 그의 문장은 나를 긴장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심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휴식을 원한다면 읽지 않는것이 좋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늙은 아내와 이제 갓 엄마가 된 젊은 여인의 교차는 너무 잔인하다. 아내는 병으로 몸과 영혼이 부서져 가고 있지만 마음속에 담아 두고 거기 그렇게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추은주는 풋것의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 묘사가 어찌나 적나라 한지 진저리를 치게 만든다. 나는 김훈에 문장을 감당하기 힘겹다.
엷고도 비린 아기 냄새를 피우는 추은주의 몸속에서 우린 바스러져 가는 아내를 볼 수 밖에 없다. 삶이란 그래서 슬픈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내가 죽고 아내가 키우던 개를 안락사 시키면서 남자는 깊은 잠에 빠진다.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에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휘둘리는 경험을 하기 쉽지 않은것이 내 나이다. 소설은 10대와 20대를 관통하며 더 이상 나에게 감정이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소설은 독자의 관조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슬프다. 그의 문장이 슬퍼서 먹먹해진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 꽃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웅크리고 쩔쩔 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중에서
사쿠라꽃잎에 작가는 관능이 열리고 나는 작가의 글에 관능이 열린다. [인상깊은구절]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 꽃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웅크리고 쩔쩔 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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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난 지 4년반. 그 사이에 한국 문학에서도 거의 멀어졌다. 그리고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한 회사를 창업하기 위해 서울에 와 분주히 움직이다가 습관처럼 서점에서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들었다. 그런데 밖에서 바라본 4년은 너무 많은 변화가 있는데, 사실 소설계는 오히려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떠날 당시를 문단을 달구던 수상 작가 선정의 잡음 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진짜로 소설이 사라지는 것 때문일까. 그때 주목받던 김영하 등 몇 작가들의 그간 모습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한국의 변화에서 가장 큰 것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물론이고, 생활의 방식 조차도 대부분 네트워크화됐다는 것이다. 영화 티켓 예약 조차도 이동전화로 척척 눌러서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어디를 가나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볼 수 있는 여건은 나에게 너무 생경하다. 그런데 소설이나 작가는 그 사이에 변화가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하다. 사실 이상문학상도 중간에 이인화나 권지예가 좀 의외지만 김인숙이나 신경숙은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이상문학상이 그런 특성이 있다고는 치지만 나이는 오히려 더 든 층으로 바뀌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근대이후 100년의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은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화에 의해 그 명을 다하는 것일까. (여담 :아침에 읽은 한 인터넷 작가는 인터넷 문학의 진정성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아직도 소설 문학의 도그마를 이야기하는 20살 짜리가 있다. 젠장) 소설을 들춰본다. 나는 미문의 전범이라는 김훈의 수필은 싫어하지만 그의 소설을 좋아했다. 선정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을 대비시켰다고 하지만, 그 내부에서 두 부분의 대비는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다. 차라리 카피 문구를 통해 구현되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비가 더 깊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관한 오상무의 회한은 사실 이병주의 무거운 소설에서도 익히 봐와서 익숙한 부분이다. 결혼 5년차에 접어드는 나도 그가 던지는 “아내는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20p)는 말에는 깊은 공감이 갔다. 사실 인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가벼운 존재들이니까. 두 여자에 대한 인상과 카피의 적절한 대비나 개 ‘보리’를 통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적절한 의지(혹은 좌절)은 부러운 구조다. 특별상 수상작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마치 계몽소설 보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이것이 소설이지만 이 작가군 들은 이제 독자와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고은주는 중국 미녀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증후군을 보이는 증후군과 닮았다. 소설을 통해 삶의 포장에 접근하지만 그 깊이에는 별로 관심없는 것. 그밖에 소설들도 사실 80년대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때와 다르다면 소재가 이혼을 주로 다루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처럼 바뀐 것이라고 할까. 그나마 독특한 것이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정도다. 구성이나 소재 등등에서 신선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도 책 내서 팔기를 바라는 필자지만 글들의 미래는 생각보다 암담한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다. 조창완(www.aljachina.com) [인상깊은구절] “아내는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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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극히 김훈스럽고 지극히 단조롭고 그래서인가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문장이었다.
암으로 투병하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면서 젋은 직원의 젊음을 부럽게 바라보던 남편 그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될 수 도 있다는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내가 그 소중한 존재가 아프고 암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을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내의 고통을 알 수는 없다. 내 고통만을 인지할 따름이다. 내 힘겨움만을 알 뿐이다.
발생하지 않으면 좋겠다. 백년해로하고 딱 사흘 정도 내가 먼저 가면 어떨까? 백년해로 했으니 아내도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터
물론 요즘 세태로 보면 직장에서 나온 이후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들었다 물론 그럴 것이지만 조금만 돈 벌어서 조금만 재미있게 살다가 가고 싶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다가 했다. 참 묘한 기분이다. |
| 소설의 줄거리는 처음에 주인공의 아내가 2년 동안 투병한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아내의 병간호와 직장에서의 업무로 매우 지치고 피곤해 잇다. 방광에 가득 찬 오줌을 빼내지 않고서는 아내의 시신을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아 사우나를 찾아 목욕을 하고 비뇨기과를 찾았다. 오줌에 꽉 찬 오줌을 모두 빼내고 돌아온 후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여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지금 근무하고 있는 회사 사장의 일 독려를 받으며 현재 추진 중인 화장품 개발 등으로 업무적인 의논을 하기도 하고 아내와의 그동안에 살았던 일들과 직장에서의 직원들과의 생활 등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장면을 너무나 또렷하게 표현하여 꼭 실제상황에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리얼하게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경악심이 일어나고 아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하나하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들로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도록 잘 표현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이 소설을 독서회 모임의 회장으로부터 소개받았을 때 화장이라는 제목 때문에 여인들이 얼굴에 단장을 하는 화장을 연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서 그것뿐만이 아니라 시신을 화장하는 것과도 아주 밀접한 연관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주인공이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재직하며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와 같은 일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시신을 처리하는 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업무상 일어나는 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므로 둘 다를 지혜롭게 조화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이 죽는 것과 일상의 업무를 챙기는 것은 언제나 병존하므로 주인공이 이 두 가지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내가 생각할 때에는 주변에 사람이 죽으면서 다른 일들을 모두 젖혀 놓고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경악심에 휩싸여 다른 일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슬픔에 잠겨 며칠을 보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이러한 일상을 벗어나 있어서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소설에서 여직원의 직장생활과 주인공이 여직원에게서 느낀 것들이 아내의 죽음과 상반되어 죽음과 삶의 형태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내에게 머리에 종양을 만들지 않고 살아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에 종양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마지막에는 삶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왜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머리에 잉태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지금가지 살아오면서 알게 된 이유라고 딱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이야기한다면 삶을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편하게 하지 못하고 언제나 나 위주로의 고집에 휩싸여 많은 괴로움을 만들어가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병은 편안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란이라고 결론지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모르게 습관화되어 버린 남을 무시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까탈 부리고 살아온 삶을 깊이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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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돈이 생기면 틈틈이 사서 모았던 이상문학상 작품집.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이 소설집 만큼 잘 담아내는 작품들도 없었던 것 같다. 총 8작품이 실려 있다. 대상은 김훈 작가의 '화장'. 이중적 의미이다. 생의 소멸인 화장과 여성들의 가꿈의 행동인 화장. 죽음과 삶. 작가만의 간결한 문체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외의 작품들도 모두 새로운 서사 흐름과 문체를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모순과 문제를 다루고 있다. 눈여결 볼 것은 다루고 있는 주제나 인물들이 개별화되고 구체적인, 개인적인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바람난 부부들, 교통 사고를 당하여 자식을 잃은 아버지, 낯선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유부녀 등등. 누구나 이런 상황에 닥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하고 토론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학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개별화된 이야기를 보편화된 담론으로 끌어갈 수 있는 것. 이상 문학상 모으기는 지속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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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자가 추은주를 사랑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보기에는 어쩐지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더했다. 또한 50대 중반의 화자가 사회초년병인 파릇하고 풍성한 젊은 여인에 대한 호감을 단순히 사랑이나 동경이라고 쉽사리 판단하기에는 그의 살아온 인생의 중량감을 가볍게 치부하는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오히려 화자가 갖는 지긋지긋했을, 그러나 더 없이 가련한 동정으로 보듬어 안고 씼겨주던 죽어가는 화자의 부인에 대한 사랑을 주목했다. 도망가고 싶었겠지만, 결국 회귀하게 되는 곳, 그것은 마치 죽음이란 당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 그곳으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이나 회피와 다름아닌 듯하기 때문에, 기실 김훈이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삶의 의지로서 극복해야하는 죽음 앞의 두려움'이 아니였을까 싶기만 하다.
삐적 골은 몸뚱이는 오리털 파커처럼 가볍게 들렸을 것이다. 화자는 작은 일인용 병실에서 죽어가는 앙상한 부인의 뼈에서 축늘어져 쳐지는 살거죽을 들어올려 밑이 둥그렇게 뚫린 의자에 앉혀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의 도래를 암시하는 검버섯 친 문드러진 몸뚱이를 비장한 표정도 숨긴 채(아니 이제는 지쳤겠지) 생명을 잉태했던 그 곳을 씼겼을 것이다. 더운 물이 통과한 화자 부인의 구멍에서는 구린 배설물이 흘렀을테고,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암환자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짐스런 자신의 존재,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존업성을 잃은 자신을 돌보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막연하게 습관처럼 자리하고 있었을 자존감에 창피스러움을 느껴 아무도 없을 그 곳 흰 벽의 화장실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산만하게 흔들면서 망가진 시신경으로 인해 안구 굴리기의 역할을 머리통 전체로 대신 했을 것이다.
화자는 5년전 공채로 자신이 이사로 있는 화장품 회사에 입사한 추은주에게 경어체로 보여주지도 않을 일기를 쓴다. 아니 그저 글을 끄적인다. 아니 그저 끄적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추은주.... 그것은 그와 함께 회사에서 일하는 둥근 어깨의 흰 목선, 포동한 젖가슴을 가진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인 젊은 그녀의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추은주, 그 가닿을 수 없는 존재는 그의 과거 속에 자신의 아이(이제는 두달 후 결혼을 할 딸아이)를 낳아준 자신의 젊은 애인이자 사랑스러웠던 부인의 이름으로 환치되어도 무방하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할 수 없고, 이제는 당신에게 들리지도 않을 당신의 이름,,,,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지도 모르고, 당신은 그저 이름과는 별개의 존재로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먼먼 곳으로 가버리려고만 하는 존재이다. 아니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화자의 기억 속 당신의 이름이다. 즉 화자가 자신의 풍만하고 싱싱한 부인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들 젊은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젊은 그녀는 그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해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 햇빛 속에서 흐릿하게 멀어진 과거의 따듯한 이름.... 현존하면서도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그 이름의 주인공.... 결별 앞에선 화자는 '추은주'라는 젊음을 지닌 한 여인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삶과 그 삶의 동반자인 아내를 회상한다. 고로 추은주는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싱싱한 여인이면서 동시에 현재하는 여인이 아닐 수도 있다. '추은주'라는 이름을 가진 **화장품 회사의 직원은 오히려 가상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추은주'의 이름 대신에 '성모 마리아'를 대입해보자. 성스러운 존재...그는 한 여인의 삶의 맥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한 여인을 성화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은 전립선 비대로 그의 고통의 무게를 더해준다고 글 속에서는 비유된다. 다분히 평범하고 다분히 세속적인 한 여인의 삶의 색깔은 쇼킹 핑크에서 시작해서, 까맣게 타들어 가듯 말라버린 칙칙한 닭벼슬의 색깔로 표현되어진다.
소설 속에서는 추은주의 어린 아이가 오물오물 추은주가 건네주는 밥알을 씹는 작고 촉촉한 입술과 입 속과 식도에 대한 묘사가 있고, 화자는 이 모습을 추은주가 바로 이 여자애를 낳기 위해 갖은 산고를 다 겪었을 탄력적인 산도의 꿈틀거림을 떠올리며 그렇기에 그 문장을 나란히 병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푸석한 음모가 부스러지듯 떨어져 나간 그곳을 연상토록 장치하고 어떠한 음식도 삼키지 못해 토악질을 해버리는 자신의 부인의 입술을 환기시킨다.
세계의 질감은 공전한다. 따스함과 축축함이, 이제는 등을 보이고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비쩍 마른 여자의 등짝의 마른 살비늘과 푸석한 머리칼이 모두는 윤기나는 향기로운 살내음와 매끄러운 흑단같은 머리칼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다. 여인의 생산을 통해 비로서 시작되는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여인의 숨이 멈추는 지점에서 불모의 토지가 되어버리는 삶, 김훈이 [화장]을 통해 언급하고 싶었던 것은 삶의 화장(化粧)뒤에 숨겨진 악취가 아니였을까? 그러나 그것은 늙어가면서, 비리의 순간들에 눈 찔끔감고 묵인해버리는 자신의 비겁을 확인하는 순간 쌓여가는 변에서 나오는 구린내가 아닌, '애초부터 모든 음식에 숨어 있었던 구린내'(40쪽)를 들춰내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덤덤하게 혹은 능청스럽게 그것을 화두로 삼아내는 능력.... 그리고 이내 그것을 화장(火葬)해버리고 마는 부끄러움 혹은 잔임한 능청!
[화장]은 참으로 담담하게 쓰여진 글이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그래서 더 잔인한 글이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부인은 떠나고 추은주도 떠난다. 당연한 논리이다. 삶의 무거움인 부인이 떠났으니 추은주의 소설적 역할은 더는 필요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화자가 모든 무거움에서 벗어나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게된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리는 혹은 떠나보내는 삶..... [화장]이 잔인하다는 것은 50 중반의 한 소설가가 인생의 비의를 숨김없이 은유했기 때문인 듯 하다. 차라리 직설적이였으면 그의 뻔뻔하고 노골적인 적나라함에 질려서 내 후각도 마비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고자 한 그의 고도의 글씨기 전략의 치밀한 기획은 마땅히 칭찬될 수 밖에 없다. [인상깊은구절]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본문 26쪽 중에서) |
| '이효석 문학상 작품집' 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깊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 주관적인 거다.. 김훈의 '화장' 은 '칼의 노래' 를 접한 후 김훈의 스타일을 기억하고 있던 내 기대만큼 꼭 들어맞았다. 그만의 고요하고 이성적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배애나 고독, 슬픔, 폭력 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 두편으로 우리 문학사에 우뚝 섰다고 하는 그 명성 그대로다.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한 문체와 웃을을 주는 소재와 분위기 그러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만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은주의 '칵테일 슈가'는 연애소설처럼 아름다운 문장과 짜임새있게 얽힌 구성이 돋보였고, 구효서의 '밤이 지나다'는 우주와 별,현실 등이 주는 환상적인 느낌이 좋았고, 김승희의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은 현실 세계의 부조리나 비애를 느끼게 했고, 전성태의 '존재의 숲'은 현실속에서 유령이 갑작스러운 반전을 통해 느끼게 해서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했다.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소설석 소재와 상징간의 생각으로 꽤 진지해졌으며,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에서는 허영돈 지식을 가지고 있는, 타인을 의식하는 주인공,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주인공에서 현대의 나,그리고 우리를 느꼈고, 문순태의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효를 떠올리게 했다. 이번 해도 역시 작품들 하나하나가 재미있고 의미있는 작품들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