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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과 독서의 문화사인가?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조금씩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론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책 그리고 독서가 갖는 힘이 매우 강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던 마르틴 루터, 책 한 권에 목숨을 잃을 뻔한 갈릴레이, 프랑스 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볼테르나 루소와 같은 계몽사상가들,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문제적 인물’들의 배후에는 항상 그들이 읽고, 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읽혔던 ‘문제적 저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책들이 왜, 어떠한 배경 속에서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또 그러한 영향력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가? 『책과 독서의 문화사』의 저자인 역사학자 육영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일이 단순히 미시사의 한 분야(문화사)로서 책과 독서라는 특정 주제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책과 독서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곧 그것을 민중 문화의 역사, 과학기술의 역사와도 겹쳐 보는 것이며, 동시에 ‘근대성’의 빛과 그림자 양쪽 모두와 관계하면서 역사를 보다 다양한 지점에서 폭넓게 사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근대, ‘활자인간’의 시대 ‘활자인간의 탄생과 근대의 재발견’이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저자는 근대의 탄생과 발전이 책 그리고 독서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인쇄문화는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래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것의 특징은 “확산, 표준화, 보존, 고정성이라는 네 단어로 요약”(27쪽)될 수 있다. 즉, 인쇄를 통한 책의 보급은 지식체계가 표준화의 과정을 거쳐 점차 단일한 형태로 확립되고, 그것이 다시 확산되고 보존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비로소 “검증된 근대 지식 체제의 등장, 문화 권력으로서의 저자와 지적 재산권의 탄생, 사색하는 이성적인 교양 독자층의 등장, 여론이 발생·주도되는 공적 영역의 성숙”(35쪽)과 같은 근대성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근대성의 출현은 곧 “이성과 자율이라는 안정된 정체성을 소유한 새로운 근대적 주체”(35쪽)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는 서구 근대 문명의 특징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근대성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저자는 근대 독서 혁명이 가진 어두운 면모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마셜 맥루한의 설명을 빌자면, “활판 인쇄술은 인간의 경험을 시각이라는 단일 감각으로 환원, 정체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어를 소리와 분리시킴으로써 마음과 머리를 격리시켰고, 그 결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중요한 ‘감성적 뉘앙스’가 상실”(36쪽)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활자인간’은 이성적이며 자율적인 능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창백하고 기계적인 공간에 갇혀 있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를 끝없이 갈구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에 울음을 삼키는 존재”(37쪽)에 불과하다. ‘근대성’에 대한 이와 같은 맥루한의 비판은 개개인이 느끼는 고립감이 점점 더 커져가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능성의 공간, 책의 역사에서 독서의 역사로 하지만 과연 근대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책과 독서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이 타당할까? 물론 맥루한의 지적대로 근대적 독서법은 많은 사람들(때때로 저자를 포함하기도 한)이 함께 어울려 듣는 ‘낭독’이라는 형태와 달리,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묵독) 그리고 자신의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은 분명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바로 개개인의 ‘고립’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불화하면서 스스로를 ‘고독한 산책자’라고 불렀던 장 자크 루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생각에 잠기거나 독서를 통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산책하기를 즐긴 근대적 사상가였지만, 산책의 결과물들을 결코 자기 안에만 고립시켜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고, 그 결과 그의 사상은 직간접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즉, 그의 사상은 독서 등을 통해 얻은 자기 내면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른 이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2장에서 소개된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시 책과 독서에 대한 역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 중에서도 4세대 연구자라 할 수 있는 샤르티에는 선배 연구자인 페브르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페브르가 책의 문화사에 집중하면서 믿었던 “인쇄출판물을 통한 문화사적 접근이 당시의 정신적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며, “책을 통한 연구가 특정 시대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인류문명의 진보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확신”(58쪽)에 동의하면서도, 페브르와는 달리 책 자체의 역사(일종의 출판의 역사)보다는 책이 독자와 만나 의미를 형성하는 지점인 ‘독서의 역사’에 주목했다. 그에게 “민중의 독서사는 경계선과 결말이 고정된 상투적인 기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끝나지 않은 스토리’”(77쪽)였다. 즉, 독자는 단순히 고정된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사회적 구조 위에서(성별, 종교, 문화적 자본 등등) 비판적 읽기를 통해 그리고 때로는 창조적 오독을 통해 텍스트를 의미 있게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4장에서 소개되는 프랑스 청색 문고의 사례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본래 청색 문고는 구술 문화에 익숙한 시골 사람과 하층 노동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제작되었는데, 이것들은 “구술 문화의 전형적인 서술 구조와 리듬에 맞추어” “글자 그대로의 정확한 읽기가 아니라 창조적 오독과 즉흥적 각색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151쪽) 즉, 독자들은 단순히 혼자 책을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열린 광장으로 나아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곧 이들을 ‘프랑스 혁명’이라는 구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변혁 의지로 이끌었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곧 책과 독서의 문화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책 그 자체라기보다는 책을 매개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저자와 독자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출판인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종이 위에 찍혀 고정된(press) 글자들(text)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여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능동적이며 현재 진행형으로 재구성되는 살아 있는 유기체”(173쪽)로서 사회적 관계들 속이라는 맥락(context) 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책과 독서의 문화사란 곧 소통과 관계망으로서의 역사, “커뮤니케이션의 역사”(220쪽)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의 미래, 책은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동안 책은 사람(독자)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러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는 데에는 많은 의문부호가 달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과 에필로그에서 저자와 단턴 교수 역시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급속히 발전한 현대 정보 기술은 정보의 양적인 면에서나 전달 속도 측면에서 책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화면 속 스크롤을 내리는 행위로 변화했고, 텍스트가 가진 영향력도 점차 축소되어 이제 웹상에서는 그림이나 동영상 등에 밀려 ‘세 줄 요약’(인터넷 상에서 글이 길 때 요청되는 것)이 필수가 된 신세로 전락했다. 평균 독서량 역시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책이 누렸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전통적인 의미의 ‘활자인간’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일까? 이제 책은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만을 하기에는 아직까지 책이 가진 가능성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현대 정보 기술의 발전은 광범위한 소비시장과 접목되어, 쉴 새 없이 개인들에게 정보들을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빠르게 전달되고 있지만, 그 정확성이나 깊이의 측면에서는 숱한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다. 또한 맥루한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통의 부재와 고립감 역시 개인 통신 매체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점차 심화되고 있다. 저자가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의 ‘책과 독서의 문화사’를 구성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필요한데, 그것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놓쳤던 혹은 잊고 살았던 중요한 가치들을 재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변화를 마주하면서 기존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가장 흔한 예로는 e-book을 들 수 있다―로 그 외양이 변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책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게 만들며,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관계망의 형성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매우 유용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책의 종말’이 이야기되는 시대에도, 우리가 결코 책의 가능성과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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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이 뒷내용을 간추린 내용이라 보면 됨.
2장은 이쪽 분야를 처음 탐구한 아날 학파에 대한 이야기. 페브르 라는 사람이 ‘책의 출현’이라는 책 출간. 책의 물리적인 구성요소, 책 상인들의 세계, 책의 사회적 영향력 등을 담았다고 함. 아날 학파는 주로 통계적으로 책의 역사를 연구했는데 샤르티에 라는 사람이 독서의 역사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 그래서 어떤 사상이 생겨났는지.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읽고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독서관행, 독서 공동체를 연구해야) 어떤 운동이 이루어졌는지. 책의 역사보다 연구하기 어려운 듯하다.
3장은 단턴이라는 사람에 대해 파고듦. 아날 학파와 샤르티에의 주장 모두 조금씩 아쉽다고 함. 그러면서 단턴 논쟁 일으킴. 단턴은 포르노그라피, 정치적 비방문, 야사 등이 독서의 역사 탐구에 가치있다고 봄.
4장은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 롤러, 연판 인쇄술, 고급종이, 활자크기체계 발명에 대해 설명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