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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
신라 활리역의 사내 지귀 감히 감히 선덕여왕을 사모하기로 밤마다 슬피 울부짖었다 소쩍새도 따라 울었다 나날이 여위어 억센 가슴 말라붙고 팔뚝이 마른 가지가 되어갔다
그럼 무엄한 사랑에도 귀는 밝아 여왕의 행차를 미리 알아 분황사탑 아래로 가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여왕이 그의 사연을 듣고 희끄무레한 웃음 지워 자신의 팔찌를 잠든 가슴 위에 얹어두고 갔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 그 팔찌 안고 탑을 마구 돌다가 온몸에 불이 났다 타죽었다 지귀 주문이 떠돌았다
여왕의 밤 이따금 지귀를 꿈꾸었다 몸 숨찼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지귀설화>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발상이 참 재미있어서 읽는 순간 이마를 탁! 쳤다. 시에도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지만 지귀설화는 이런 내용이다.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지귀라는 평민이 있었다. 가슴 속 사랑의 불길은 타오르는데 사람들은 네 까짓게 주제넘게 감히 여왕님을 사모하다니 이런 미친놈이 있냐는 비웃음만이 돌아온다. 그래서 미쳐버렸다. 생업도 버리고 걸인이 되어 오직 여왕의 행차만 쫓아다닌다.
그날도 그랬다. 분황사에 불공을 드리러 오신다는 여왕님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따라갔던 지귀는 깜빡 잠이 들고 만다. 잠이 든 지귀를 불공을 마치고 나오던 선덕여왕이 보고야 말았다. 남루한 행색에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이 남자가 가엾기도 하고 뭐라도 주고싶기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차고 있던 팔찌를 벗어 그의 가슴에 얹어두고 떠난다.
잠이 깬 지귀. 얼마나 아쉬웠을 것인가. 4년을 기다려 온 월드컵 경기를 보려고 새벽까지 버티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깨보니 후반 인저리 타임일 때 뭐 이따위 경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 가슴 속 사랑의 불이 몸 밖으로 번졌다. 이제는 불귀신이 되어 손대는 모든 것에 불길을 옮기지만 여왕님을 사모하는 마음만은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다. 지귀로 인한 피해가 막심해지자 여왕은 주문을 쓴다. 멀리 바다로 꺼지라고. 문학시간에 이 설화를 가르칠 땐 노래의 주술적 성격이라든가 하는 부분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지체 높은 여왕이 그냥 뒤에 있는 보물상자에서 뭘 꺼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차고 있던 팔찌를 빼서 한낱 걸인에게 준다? 내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을 이성에게 준다는 것은 보통 그것이 어떤 징표이며, 그런 징표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니거나 이미 정인(情人)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인의 상상력이 날개를 펼쳤다.
자신이 지은 노래의 주술적 힘 때문에 불귀신이 된 지귀가 바다로 사라져 간 후에도, 선덕여왕은 가끔 지귀를 생각한다. 길고 긴 구중궁궐의 밤, 신라와 결혼해 평생 독수공방으로 살아갔던 선덕여왕의 몸도 숨찬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히려 마음을 주고 혼자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외로운 여왕의 마음붙일 곳, 불귀신 지귀. 지귀의 애절함보다 여왕의 외로움이 확 크게 다가오게끔 설화를 변용해 쓴 이 재미있는 시. 마침 지귀설화 단원이 있으니 수업시간에 함께 읽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