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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읽은 작가나 작품의 한계성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간혹 친구들의 리뷰를 보면 생전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보는 작가도 많고 유명한 작품인데도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이 많다. 김영현, 그도 그런 경우다. 중견작가이고 작품도 꽤 낸 작가인데, 이제야 그의 작품을 대했다. 김영현을 소개해준 친구는 이 작품이 좀 별로인 것처럼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전작들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김영현의 첫 작품이었던 <낯선 사람들>은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 소개에서 이 작품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비하는 것을 보면서 궁금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등에 업으려는 작전일까, 아니면 정말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일까... 다 읽고 나니 좀 이해가 되는 측면은 바로 주인공이 예비신부라는 것, 그리고 가족 간의 비밀을 알기 위해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 안기 위해 애쓰는 면이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늙은 신학생인 성연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나레이터이며 스토리를 끌고 가는 안내자 역할이라는 게 더 맞겠다.
추리물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스포일러 때문에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 나름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잘 그렸다고 보겠다. 지독한 수전노에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두 번째 부인 그리고 파산을 선고 받고 집을 찾은 첫째 아들, 그리고 그 집에 식모를 살던 어린 여자 아이... 지독한 늙은이의 둑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경찰의 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예비신부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수사물을 다룬 영화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한 면은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 않고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추악한 인간들의 심리를 엿보게 되는 성연과 함께 독자들은 잔혹함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또한 그런 드라마적인 요소들은 다소 깊이를 떨어뜨리는 역할도 하고 있어 아쉬운 면으로도 남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족의 불행의 불씨와 그 불씨의 결과가 나타나는 모습은 빠르게 전개되는 동시에 긴장감이 돈다. 진실에 가 닿겠구나 생각하면 골목이 나타나고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가면 스토리는 어느 새 담장을 넘고 있다. 새로운 비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자를 놀라게 하는 동시에 그럴싸하다고 느끼게 해준다. 추리의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이다. 스토리와 심리가 제대로 결합된 재밌는 소설이다.
진실을 말해달라는 성연에게 형은 말한다. “진실은 없어. 세상은 모두 우연으로 차 있을 뿐이야. 너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너와 내가 형제가 된 것도 모두 우연일 뿐이라구. 우연! 세상이 모두 우연으로 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안 그래, 신부님?” 하지만 진실을 알고자 했던 성연이 본 건 다름 아닌 지옥이었다. “심연 속에는 보아서는 안 되는 무서운 비밀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죄악이 죄악의 알을 잉태하고, 죄악이 죄악을 낳고 있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풍경이었다.”
과연 뒤죽박죽으로 우연히 흘러가는 세상을 사랑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이야기 끝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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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신문 사회 면을 장식하는 각종 범죄 사실 중에는, 살인강도를 비롯한 각종 범죄가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모습으로 연쇄 살인이나 존속 살해 등 부녀자들을 납치하는 파렴치한 범죄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범죄에 이르기까지,숱한 범죄의 사실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많은 범죄 사연들 중에서 사형 제도의 존폐를 논하는 작품도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중견 작가 김영현님의 신작은 추리소설을 형식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로,존속살인에 관한 사건을 모티브를 얻은 듯한 이야기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추리해 가는 기법으로 정통 문학의 큰 성과를 올리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작은 도시에서 최문술이라는 노인이 끔찍하게 난자당한 시체로 발견 되면서, 용의자로 전처 아들 최 동연이 지목되고 자포자기한 동연이 거짓 자백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는듯했으나, 수도원에서 있던 둘째 아들 성연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진범이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놀랄 만한 사실을 밝혀져 대 반전을 이루는 내용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혈연과 인연의 끈이 복잡하게 꼬인것을 풀어헤치면서, 주인공 성연이 느끼는 인간 구원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그려진 명작이다.
" 사랑이야 말로 때로는 지옥 처럼 고통스럽지만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우리의 생애 그이가 준 축복이자 선물 이었어요 " 주인공 성연이 진짜 살인자를 찾아 내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뇌와 고통이야 말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으로 피를 말리는 긴박감 가운데, 파렴치한 수전노 아버지의 야비한 욕망이 빚어낸, 배다른 아들과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돌이 킬 수 없는 사건으로 전개되어, 윤리적 존재론적 회의가 작가 만의 고유한 빛깔로 짙게 깔려져 있다. 작품 속에서, 탐묙에 사로잡힌 인간과 부패와 타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모습을 보여 줌 으로서 이 시대 사회상의 일면을 고발하는 성격도 보이고는 있지만, 그 보다 한 때 문학을 꿈꿧던 철학도로서의 작가의 마음이 담긴 작품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 하는, 인간의 본질과 구원을 탐색하는 문제의식도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시대 중견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기에 청소년들도 일독 할만 한 우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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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이라는 작가가 있는 줄 몰랐지만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소설(소설이라는 장르를 접한지 얼마되지 않아,,쿨럭)을 많이 읽어오지는 않았는데 낯선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고 적잖이 감명받았습니다.
다른 건 모르지만 멋진 추리 소설 겸 반성하게 만드는 통찰 소설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의미와 가치로 인생을 살고 있나,,,이런 맥락에서. 보통 죽음을 앞에 두고는 '나는 지금까지 어떤 가치를 바탕으로 살았나?'하고 평가하게 마련인데 이 소설도 뭔가 되돌아보게 하는 꺼리를 갖고 있네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구본형이라는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계발이라든가 처세술 등에 많이 나오는 거지만, 죽음이라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정확한 비전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죽음 앞에서 평가를 제대로 받으려면 평소에도 잘 살아야 할테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만만치 않은 일이지요.
어떤 일로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커다란 무의식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그 시간표를 짜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표면의식은 생생히 '아, 나는 이 날에 죽는구나'하고 느끼는 일은 드물지요.
죽음과 같이 가는 가치는 사랑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결국 '사랑'을 말하지요. 죽음의 양면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하신 것 같습니다. 멋진 작가분은.ㅋ 많이 들어본 말일테지만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말은 어디서든 통하는 지도 모릅니다.
천국을 가든 행복을 찾든 구원받으려면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래야겠지요? 내가 죽는 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면, 나는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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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은 사회의식과 참여라는 첨예한 무기를 소설공간에서 활용한 작가다. 그의 역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와 예의 '해남가는 길'에서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사상의 편린은 수류를 따라 유영하는 물고기의 굳센 지르러미를 닮았다. 그런 김영현이 '낯선 사람들'이라는 낯선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가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던 것들을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시류에 맞게 탈갑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분분한 가운데 책을 펼쳤다.
소설은 아버지의 살인사건을 쫓아가는 나이들어 입교한 가톨릭신학생의 시각에서 조감되고 있다. 살인사건를 다루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했는데, 소설로서의 재미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난공불락의 요새 교회를 살짝 붓터치하고 있다. 소설속에서 '모두가 예수다'라는 화두와 사람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것은 종교관념을 전복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아하, 김영현!하고 무릎을 치게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종교속으로 들어가 해부학처럼 도해한 것은 아니어도 약간 비틀기로 보여주는 그의 종교관은 최제우의 '인내천'과 상통한다. 고전소설의 전형인 계모형소설,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심리형 소설, 동학의 영향을 받은 사상소설이기는 해도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풀지 못하는 난제를 조금 해제하고 있다. 어긋나고 비틀어진 인간 군상들을 등장시켜 척추측만증에 걸린 우리 시대에 메스를 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설 말미에 신학교를 중도포기하고 인간속으로 돌아와 인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주인공의 심리속에서도 '인간만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엘리자베스 베렛 브라우닝의 사랑의 시를 인용한 것도 세속의 아름다운 사랑을 앞세웠기 때문이리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당신을 사랑합니다.' 브라우닝 부부는 온갖 장애를 이기고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랑의 시만 쓴 시인 부부이다. 낯선 사람들이란 이런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인간의 모습이다. 김영현은 교묘하게 척추장애인 이었던 E B브라우닝의 아름다운 시를 이 소설에서 활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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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존재할까? 김영현의 『낯선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끊임없이 드러나는 추악한 인간들의 모습들. 그 속에서 ‘소위’ 운동권 소설가였던 김영현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김영현이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대학 1학년 때이다. 한 선배가 내게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읽어 볼 것을 권했고, 그때 만난 김영현은 아직도 내게 강하게 남아 있다. 당시 내가 만난 김영현은 운동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였다. 그의 소설에서는 80년대 운동권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그의 소설은 ‘해방’, ‘계급’ 등의 전투적인 구호에 묻힌 상투적인 운동권의 모습이 아닌, 운동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이후 몇 권의 김영현 표 소설을 더 읽었지만 읽을수록 점점 손이 가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나는 아직 어렸고, 김영현 소설에 묻어나는 인간들의 치열한 고민을 이해하기에는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당시 나에게 운동이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해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했고, 그런 나에게 김영현의 고민은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었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얼마 전, 우연히 김영현의 새 소설을 손에 넣게 되었다. 10년 만에 다시 읽어본 김영현은 여전히 죄악 속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10년 전과는 달리 김영현의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일련이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그마한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수전노로 악명 높았던 최문술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살해 용의자로 평상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큰아들이 수감되고, 둘째 아들 성연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가족의 옛 흔적을 추적해 나간다. 성연은 진범을 찾기 위해 가족사를 파헤치다 자신의 아버지와 새어머니, 형 동연의 추악한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김영현은 최문술 가족사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측면을 드러낸다. 탐욕과 욕망, 그 속에서 꿈틀되는 이해관계, 질투와 분노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 김영현은 모든 인간이 카인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막의 먼지처럼 메마른 현재를 해명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은 낙인을 가지고 있기에 그 낙인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낙인의 의미를 인식하고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이다. 성연은 ‘나의 생은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사랑하려는 것’에서 생의 가치를 찾고자 한다. 인간이 낙인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구원받기 위한 조건을 김영현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내게 김영현을 어렵다. 나는 아직도 삶을 바로 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추악한 본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아직 나의 삶을 성찰적으로 바라 볼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실존과 부딪치는 것을 계속 피해왔었던 것 같다. 10년 전, 김영현의 소설에서 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외면해 왔던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언제쯤이면 나는 김영현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나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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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어떻게 보면 우리 문학의 주류라고 있었을 리얼리즘 문학과 민족문학은 이제 그 종말을 맞이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흔히들 주류 문학 출판사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창작과비평사,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민음사와 문학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출판사들의 출판물에서 불과 이십여년 전 우리 소설계에 드리워져 있던 분위기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그 시기 노동문학 진영을 대표하던 작가 중의 한 명인 김영현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런 면에서 설레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범죄 추리물과 종교물이 혼합되어 있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를 사로잡은 것은 난감함과 착잡함이었을 뿐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보내던 치열한 고민이 사라진 자리를 어중간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어색하고 미숙하다. 대중적인 소설 기법인 추리 소설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난무하는 대중소설들의 한 지류를 얼핏 짜깁기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소설은 소도시 마을금고의 이사장인 최문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으며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인물이며, 재혼을 하고 자기집에서 기숙하던 식모 아이를 건드리고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 인물이었고,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도 원활하지 못했던 한 인물의 죽음을 그의 처가 발견하고 곧이어 살인자로 그의 큰 아들인 최동연이 잡히게 된다.
새엄마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집을 떠나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어 살고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던 외삼촌 황규관과 함께 살며 사춘기를 보냈던 최동연은 이제 마흔 살이 넘었지만 변변한 직장도 없고 벌어놓은 돈도 없었고,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아버지에게 돈을 얻어내기 위해 도시에 내려와 있던 탓에 범인으로 몰렸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자신이 범인임을 실토한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형의 범죄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동생 최성연이 나서면서 차차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들 최씨 일가의 진흙탕 가족사가 드러난다. ‘창조주에겐 오류가 없는 법’이라는 이종사촌 요한 신부의 말을 되새기며 현재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중인 성연은 지역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결국 자신의 아비를 죽인 이 패륜 범죄의 실상을 파헤친다. 하지만...
사변적이고 궤변적인 무수한 말의 성찬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적인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하지만 그 과정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수전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최문술의 모습을 직시하자는 것일까, 아니면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는 이 자본주의 말종에 가까운 패륜 범죄들에 대한 분석일까, 이것도 아니라면 우리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종교적 시각의 필요성일까, 아니 설마 스스로의 필력을 믿고 있는 작가가 추리 소설 한 편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추가하고자 한 것은 아니겠지...
(지나간 세월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그의 소설을 읽으며 사회 변혁에 대한 꿈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던 혹은 그런 꿈과 용기에 대한 오기를 발동시킬 수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소설은 작은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고 이제는 여기게 되었지만 때때로 우리들의 가슴에 큰 이야기를 던져 주었던 그때 그 시절의 소설이 그립기도 하다. 아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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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소설미학을 체험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의 소설집 "깊은강~"을 읽으며, 갈피 갈피에 묻어나던 삶의 진정성과 문체의 수려함을 발견하며, 난 암울했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성큼 나갈 수 있었다...그러나, 그 기억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이번에 읽게 된 이 소설은 제목만큼 '낯설지 않은' 너무 익숙한 구성과 문체라 그 상투성에 정말 '김영현 맞아?'...하고 적잖이 실망했다. 마치 대중 매체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그때 그 시절 그 노래'를 문학으로 대하는 느낌이랄까..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소읍에 대한 구체성 없는 묘사, 인형처럼 뇌까리는 등장 인물의 상투적 말들, 인물의 구체성을 잃고 한 사람이 내는 것 같은 대화의 어색함..경찰이든, 범인이든, 신부이든, 여인숙 주인이든..어떻게 하나 같이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주인공 성연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할 수 있는 것인지...존속 살해에 담긴 추악한 인물들의 관계는 이미 대중 매체에서 수없이 써먹은 소재이고, 그 구원이 사랑에 있다는 식의 결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삶은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라는 본질적인 물음은 그 자체로 이미 진정성을 담은 것이라, 그 주제보다는, 낯익은 주제를 낯설게 풀어가는 데서 작가의 미학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그러나 김영현은 낡은 묘사와 어설픈 교리문답을 통해 큰 주제를 너무 쉽게 썼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박완서 선생의 발문처럼 이 소설이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일정 부분 기대고 썼다면 김영현은 정말 안일한 작가인 것이다. 존속 살해와 그에 얽힌 불온한 가정사를 들먹이면 '카라마조프가'인가? 이 소설의 결정적인 한계는 그 모든 살인에 얽힌 인간사가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욕망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이 결국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보는 '성연'의 단세포적이고 무책임한 생각이다...아직도 이 세상이 '사랑'으로 안주하면 해결되리라 보는 것인가...김영현을 탓하고 싶진 않다...그만한 작가의 글을 선택한 나의 안목을 탓해야할 일이다. 오랜만에 책리뷰를 쓴다. 그만큼 김영현은 다를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실망이 나로 하여금 뭐라도 투덜대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정말 작가는 이 세상이 이토록 혼탁한 것이 사랑을 찾으면 구원되리라 볼까...? 설령 그렇다해도 그건 이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지겹게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지독히 상투적으로 반복하면서...차라리 참신한 문체라도 볼 수 있었다면 반은 성공적이었을텐데...김영현은 가능할텐데하는 기대가 이 책을 선택한 동기였기에 아쉬움과 실망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