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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맵싸한 음식 냄새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 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 김춘수, 「강우」 아내가 없다.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이 안 보인다. 밥상은 차려져 있다. 넙치를 지졌는지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게 한다. 그런데 아내는 안 보인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내를 부른다. 대답이 없다. 소리를 높여 다시 부른다. 역시 대답이 없다.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집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이 사람이 화가 났나, 남편은 생각한다. 목소리를 좀 더 부드럽게 해서 아내를 부른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남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옆구리 담괴가 도져 어디 가서 누워 있는 걸까? 아내가 상 앞에 없으니 입맛도 나지 않는다. 아내를 부르며 남편은 집안을 서성인다.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도 아내는 안 보인다. 단순히 옆구리 담괴가 도진 게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간다. 무심한 시간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빗소리에 놀라 혹시나 하고 시인은 밖을 기웃거린다. 아내는 없다.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일까? “나는 풀이 죽는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는 것이다. 느닷없이 한 치 앞을 못 볼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 누군가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시인에게 말하는 듯싶다. 이승과 저승이 이미 갈라져 있으니 아내를 더 이상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 ‘나’가 죽어야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그게 시간 속에서 태어난 자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시인은 맵싸한 냄새가 퍼지는 이승에 있다.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남편이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내는 대답할 수 없는 곳에서 애만 태우고 있다. 하긴 ‘애만 태우는 아내’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생각일 뿐이다. 아내는 더 이상 애를 태우지 않는다. 죽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남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죽은 사실을 정말로 인정하기 싫다. 넙치를 지지는 맵싸한 냄새가 아직도 방안을 감도는데 어떻게 아내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냄새의 이쪽에 있고, 아내는 냄새의 저쪽에 있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기준은 이 냄새, 즉 감각이다. 아내가 죽은 건 사실이지만 아내가 만든 음식 냄새는 시인의 마음에 감각으로 새겨져 있다. 기억에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넙치를 지지는 맵싸한 냄새만 나면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쪽에 사는 남편은 그래서 더욱 서러울 수밖에 없다. 아내와 살던 기억=감각을 한손에 쥔 채 남편은 시간 바깥에 있는 아내를 한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음은 깊어진다. 사람을 잊는 데 시간만한 약이 없지만 그것은 시간이 약효를 내는 순간부터만 맞는 말이다.
아내의 냄새를 잊지 못한 시인에게 시간은 고통만 줄 뿐이다. 냄새가 나도 아내가 생각나고, 비가 와도 아내가 생각난다. 아내와 같이 걷던 길을 혼자 걸어도 아내는 어김없이 그 자리로 들어온다. 당신의 맑은 목소리가 여전히 들리고, 당신의 젖은 눈망울이 여전히 보인다. 환히 웃던 당신의 얼굴에 생각이 미치면 이승에 남은 사람은 서러움에 목이 멜 수밖에 없다. 시간은 남편의 마음에 새겨진 이 모든 기억들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 기억이 흐릿해지는 어느 순간 남편은 아내를 잊겠지만, 그때는 이미 남편 또한 저쪽으로 넘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시인의 모습은 무엇보다 이러한 기억=감각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자꾸만 밖을 기웃거리는 시인을 앞에 두고 비가 퍼붓는다.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세찬 비가 퍼붓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산 사람이 쓸데없이 저쪽을 기웃거리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사라져버린다. 그러니까 세차게 퍼붓는 비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알려주는 신호와 다르지 않다. 아내를 애도하는 이 시로 하여 시인이 현실에 발을 딛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아내를 향한 추억-감각은 살아남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누구도 그 몫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시인이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제 몫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죽은(=떠난)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게 우리네 삶이다.
2. 하나의 몸짓에서 눈짓으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전문 김춘수의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에 주목하고 있다. 시인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그’에게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몸짓”은 의미가 부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의미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그’에게 부여된다. ‘그’라는 존재에게 내재된 의미를 시인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이끌어내려고 한다. 이름을 부르면 그가 있는 곳으로 시인은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2연에 나오는 대로,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가 ‘나’에게 오도록 만드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이름을 부르는 일과 “그가 나에게로” 오는 일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몸짓으로만 남은 그를 시인은 의미가 없는 존재로 보고 있다. 여기서 의미는 언어로 표현된 의미를 가리킨다. 그의 몸짓은 언어의 밖에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사물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곧 시인이 사물=그를 부르는 행위에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언어 주체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언어 주체가 그를 부른다. 그러면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언어로 불리는 대상은 언어 주체의 욕망을 거부할 수 없다. 꽃이라는 대상에는 언어 주체의 (지배) 욕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3연에서 시인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군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이 그를 불렀으니 그 또한 시인을 부를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소통의 과정에 어떤 한계를 두고 있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시인은 그 사람이 자신을 부르면 기꺼이 꽃이 되겠다고 이야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꽃”은 그러니까 그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존재라는 전제가 성립되었을 때 가능한 시구이다. 돌려 말하면 이런 조건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소통은 불가능하다. 소통이 시인이라는 인식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그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름이 없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는 지금 저기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는 분명히 있다. 저기에 있는 사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이 힘을 시인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것일까? 언어 주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시에 개입한다. 사물을 보는 언어 주체가 있다. 언어 주체의 입장에서 그대로 있는 사물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는 사물은 언어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언어 주체는 그래서 사물을 언어의 자장(磁場)으로 흡수하려 한다. 언어의 자장은 의미로 뒤섞인 바다와 같다. 의미의 바다에서 사물은 ‘새롭게’ 탄생한다. 언어 주체는 바로 의미의 바다에서 새로이 탄생한 그 사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이름이다.
사물이 사라진 자리를 사물의 이름이 대신한다. 이름=언어는 그 자체가 이미 의미이다. 시인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의미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조차도 이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대상은 언어=의미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언어로 모든 사물들을 표현하는 세계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에서 사물은 어떤 위상을 지니게 될까? 시인은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이라는 시어는 언어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는 무엇, 곧 사물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인은 언어 속에서 그 무엇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다.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은 언어 주체가 (사물의) 이름을 부른 결과 이루어진다. 몸짓이 눈짓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이렇듯 언어 주체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인식의 폭력은 언어가 사물에게 가하는 폭력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물의 죽음을 불러낸다. ‘표상(表象)’이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언어 주체는 사물을 자기 앞에 세운다. 마주보는 관계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언어 주체는 사물을 자기 앞에 (언어로) 세운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사물은 언어의 안쪽으로 들어오고, 그렇지 않은 사물들은 언어의 바깥으로 내몰린다. 부르는 주체의 기준에 맞는 사물들이 얼마나 될까? 김춘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물에 폭력을 가하는 언어 주체로 변신한 셈이다.
김춘수의 「꽃」은 대상을 향한 소통=사랑이 일방적인 관계로 흐를 수 있음을 에둘러 드러내고 있다. 언어 주체, 달리 말하면 사랑의 주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꾸만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기준에 얽매면 그(녀)는 그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집착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사물은 사물 자체로 있고 싶어 한다. 그 사람 또한 그 사람 자체로 있고 싶어 한다.
시인은 “하나의 몸짓”이 “하나의 눈짓”으로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고 있지만, 그 열망이 사랑을 실패하게 만드는 집착이란 걸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자기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는 자기 방식만이 사랑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랑의 방식들이 있다. 시인이 사물을 보면 사물 또한 시인을 본다. 시인이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사물이 시인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 사물을 향한 김춘수의 지극한 사랑은 어찌 보면 그가 산 시대의 한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며 사랑의 불구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는 김춘수 시인이 산 시대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추구한 사랑의 방식 저편에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이 있다. 이 시는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의 방식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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